<대전문학 111호 권두 수필> - 원준연 회장 청탁
성황당을 추억하다
문학평론가 리 헌 석
(본회 7~9대 회장, 현재 고문)
1.
금강의 지류인 유구천이 마을 앞을 지나는 고향 마을은 언제나 그리움의 등대이다. 마을 앞에는 대성들이 펼쳐져 풍요를 기약했고, 뒤로는 산봉우리들이 올망졸망 늘어서 꿈을 키웠다.
충남 공주시 우성면 대성리 우리 마을에는 성황당이 세 곳이나 있었다. 마을의 경계인 고개가 넷이었는데 그중 세 곳에 성황당이 있었고, 모두 수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1960년대 말이었던가, 아니면 1970년대였던가 분명하진 않지만, 새마을 운동이 불같이 일어날 즈음, 미신을 타파한다는 취지로 성황당의 돌무덤은 파헤쳐지고, 나무는 베어졌다.
놓친 고기가 더 커보이고, 떠난 님이 더 그립다는 말처럼, 사라진 성황당이기에 더 그리운지 모르지만, 추억 속에서 어제 일처럼 떠오르는 성황당 그 모습이 그립다.
성황당 돌무덤을 지나며
부서질 듯 애절한 울음소리를 들었다.
굴참나무 옹이 속에서 터지는
휘파람 소리를 들었다.
우우우 우우우우
밤하늘의 달을 따리라 목놓아 울었다.
우우우우 우우우
대밭을 지나며
울먹이는 눈물빛보다 시린 새벽
밤새도록 이슬로 달아놓았던
어머니, 빈 가슴의 등불을 보았다.
성황당은 어머니 품과 같은 존재였다.
우리 마을에서 소재지로 넘어가는 ‘장고개’에 있는 성황당은 어렸을 때부터 지나며 보았기 때문에 더욱 가깝고 정겨운 곳이었다. 앞의 시도 이 성황당의 모습을 표현한 것인데, 이 성황당에는 굴참나무 고목이 덩그렇게 서 있었고, 그 아래 크고 작은 돌로 돌무덤이 쌓여 있었다. 특이한 것은 돌무덤 옆에 서 있는 돌장승이었다. 머리가 없는 사람 모양의 물체에 붙은 이름도 가지가지였다. ‘돌장승’ ‘머리 떨어진 부처님’ ‘법구’ 등이었는데, 그 고개 이름이 ‘장고개’였던 점으로 미루어 돌장승으로 보인다. 또한 그 고개 근처에는 옛날 시장이 섰던 기록이나 구전 설화도 없었기에 거의 정설인 듯하다.
2.
어릴 때는 성황당에서 대추·밤·명태포·떡 등을 얻어먹느라 밤에도 어른들을 따라갔었다. 좀 커서야 알았지만, 초하루와 보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와서 치성을 드리느라 준비한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마을 여인네들 대다수가 치성을 드리기 때문에 어린애들도 따라와서 같이 절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그 재미로 성황당은 어머니만큼이나 정겨웠는지 모른다.
성황당 굴참나무, 당시 부르던 이름은 ‘당나무’였던 그 굴참나무에는 오색 천으로 치장이 되어서 낮에 보면 아름다웠다. 어떤 애들은 무섭다고도 했고 어떤 애들은 그 천을 잡고 놀이하다가 꾸중을 들은 일도 있었다.
나는 좀 겁이 많았는지 그 굴참나무 곁에 가기를 꺼려했다. 어쩐지 좀 무섭고 가까이하기에는 위엄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이 절하는 그 나무에 올라간다거나, 그 천을 끌러오는 것은 어쩐지 해서는 안 될 일 같았다.
또 하나 성황당에 가까이하지 않은 것은 봄철에 본 ‘뱀’의 기억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건대, 겨울잠에서 깨어난 뱀들이 돌틈을 비집고 기어 나왔던 것 같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여러 마리가 며칠을 두고 꾸무럭거리며 기어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오싹함을 느꼈다.
내가 성황당에 대해 갖고 있는 양면성은 바로 이로 인해 형성된 듯하다. 여인네들의 간절한 기도, 그 경건한 모습과 어울린 먹을거리 때문에 가깝고 친근한 느낌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한편 해묵은 굴참나무의 위용, 오색천으로 단장되어 일상과의 낯설음, 봄철에 본 뱀의 기억 등이 성황당을 외경의 대상으로 인식시킨 것 같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없어진 성황당의 추억을 안고 ‘장고개’를 넘어본다. 옆으로 새로이 길이 나서 잡초만 우거진 길을 걸어본다.
그 다음이 우리 고향 대성리와 보흥리의 경계인 ‘나뭇골고개’의 성황당이다.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성황당이었는데, 여기는 더욱 무서운 대상이었다. 나뭇골에 작은할아버지(종조부)댁이 있어 일년에 몇 번씩 오가야 하는 그 고갯길이 마냥 무서웠다. 고개도 높고, 인가와 멀리 떨어져 외진 고개라서 혼자서는 넘기 싫었다.
그 성황당에는 커다란 참나무와 소나무가 함께 있었고, 나무마다 오색천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 고개의 특징은 고갯마루에 ‘장군바위’ ‘장사바위’ ‘홍길동바위’ ‘치마바위’ ‘문바위’라고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둥글넓적한 바위가 하나 누워있었다. 그 바위에는 전설이 있어서 어릴 때는 그 바위에 앉아 웅대한 꿈을 키우기도 했다. 우리나라 여기저기 산재한 전설이 여기에도 있을 뿐이라는 것을 성장해서야 알았다. 그 얘기인즉슨 이렇다.
아주 오래 전 호랑이 담배피기 훨씬 오래 전에 그곳 마을에 남매 장사가 있었다. 한 가정에 장사가 둘이면 안된다는 속설 때문에 남매는 목숨을 건 시합을 했다. 오라비는 무쇠신을 신고 서울에 가서 황금 송아지를 끌고 오는 것이고, 여동생을 돌을 날라 성을 쌓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보니 아들이 올 시간은 아닌데, 딸의 성 쌓기가 거의 끝나고 문만 세우면 되었다. 아들을 더 사랑한 어머니는 콩을 볶아 딸에게 주며, 체한다면서 하나씩 먹으라고 했다. 어머니의 자상함에 감동한 딸이 콩을 하나씩 먹는데 오라비가 당도했다. 딸은 울면서 가까운 금강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이 서로 싸우던 기억이 새롭다. 그 이야기의 공과야 어떻든 간에 남자 아이들은 그 바위에 올라 오줌을 갈기며 호연지기(?)를 가꾸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남아선호사상에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 다른 남자 친구들이 손뼉을 치며 신이 날 때도 나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이유는 아마 두 가지였을 것이다. 하나는 공정하지 못한 게임이 싫었고, 그렇게 해서 이긴 게임은 이긴 것이 아니라는 당돌한 생각 때문이었다. 또 하나는 불공정한 게임에 져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동생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다. 불공정한 게임이었지만, 승복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면서 처형당한 것과 같지 않은가?
그래서 후일 이를 시로 빚었는데, 여장사의 입장에서였다. 첫시집 갈채의 숲에 실린 「女壯士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무도 오지 않아요
당신을 보낸 후
바람처럼 보낸 후에는
나뭇골 고갯마루
애끓는 가슴앓이
천 년 총총 까치풀로 자라요
믿을 수가 없어요
딸도 자식인데
아들과 같은 자식인데
가마솥 탁탁 튀어 고소한
어머니 정성 한 줌 콩이
죽어라 죽어라 덫이었다니요
4연 중의 1연은 현실에서 서정적 자아가 추억하는 내용이고, 2연은 여자 장사의 입장에서 하는 하소연을 상상해서 재구성한 것이다. 어떻든 이 ‘오뉘힘내기’ 전설을 간직한 넓은 바위가 나뭇골 고개에는 지금도 누워 있다. 그래서 없어진 성황당의 추억을 이 바위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 바위가 있어 추억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음이 다행 아니겠는가?
다음 성황당은 고향 마을 대성리에서 옥성리의 성머리로 가는 용못고개에 있었다. 유구천 옆으로 오솔길이 있었고, 고개 바로 아래는 깊은 소용돌이가 있는 연못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용못’이었다. 전설로는 용으로 승천하다 떨어진 ‘이무기’가 살고 있다고 했다. 그 용못을 지나 가파른 고개를 올라가면 조그만 성황당이 있었다. 그곳은 큰 나무도 없었고, 돌무덤만 덩그렇게 있었다. 그래도 그 성황당에는 많은 여인네들이 치성을 드렸다.
그래서 이 성황당이 제일 고마운 곳이었다. 이 고개로는 6년이나 통학을 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6년을 한결같이 아침 저녁 이 성황당에 문안 인사를 했다. 아침에 10㎞(이십오 리)를 걸어서 공주시까지 등교했고, 저녁에도 10㎞를 걸어서 집에 왔다. 피곤하고 배고픈 때에 어머니들의 치성이 있는 초하루나 보름이면 기다렸다가라도 꼭 얻어먹어야 했다.
초하루나 보름이 지난 그 다음날 새벽이면 성황당의 음식과 거리제의 음식으로 주전부리를 할 수 있어 발걸음이 가볍던 것을 생각하면 사람이 참 별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3.
지금은 자취를 감추어버린 성황당의 의미를 되새겨볼 때가 있다.
첫째, 길을 청소하는 방편이 아니었을까? 길에 있는 돌이나 자갈을 사람들보고 치우라고 해보라, 누가 거들떠나 보겠는가? 돌을 주워 성황당에 갖다 놓으면 복을 받는다고 하니까, 누구라 할 것도 없이 길의 걸리적거리는 돌들을 주워 성황당 돌무덤을 쌓지 않았을까?
둘째, 이정표 역할과 경계표지 역할도 하였을 터이다. 대개 마을과 마을 사이의 고갯마루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경계를 지음에 있어 성황당을 통해 공공성과 신성성을 획득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네것 내것 다툴 필요가 없다. 당시에는 경외해야 할 존재였으니까.
셋째, 토속신앙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종교거나 미신이거나 상관없이 마을 사람들이 가까운 곳에서 경외의 대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을 터이다. 멀리 있는 절(사찰)에 가기도 힘들 뿐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대상을 통하여, 토속신앙이라는 신토불이 의식의 저변을 채웠을 것 같다.
나름대로 정리해보았지만, 궤변이거나 비약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남아 있는 따스한 빛살, 시 한 편 써놓고 때로 후련한 느낌이 드는 훈김과도 같다. 작지만 다이아몬드보다 더 찬란한 심리적 빛살들, 성황당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가득 충만해지는 그리움은 나만의 것일까?
오늘 밤도 성황당 어귀에는 달빛이 밝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