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독위약(變毒爲藥). 독을 약으로 바꾼다는 말이다.
니치렌(日蓮) 대성인 불법(佛法)에서는 강한 신심(信心)과 창제만 있다면 독을 재료로 삼아 능히 약으로 바꿔 더욱 청정한 생명으로 승화할 수 있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2동에 사는 이영자(61)씨.
올해로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만난 지 35년째 되는 그는 오로지 순수하게 신심을 실천하며 변독위약의 법리를 자신의 몸으로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병고를 계기로 입회
1970년, 불법과 만난 것도 병이 계기가 됐다.
당시 안양에 살던 그는 결혼 후 계속된 홀시어머니의 시집살이, 경제적인 어려움 등으로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몸은 눈에 띌 정도로 말라갔다.
더욱이 목에는 갓난아이 주먹 크기만한 것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병원을 찾았더니 갑상선 질환으로 밝혀졌고, 수술을 해도 재발한다고 했다.
그때 한집에 세 들어 사는 아주머니에게서 불법을 권유 받았다.
“건강도, 재산도, 사람의 복운으로 결정되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부르면 원하는 소원은 모두 이뤄지고 복이 쌓인다는 말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입회했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여. 개구리 눈처럼 튀어나왔던 눈도 들어가고 목에 생긴 커다란 혹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번도 갑상선 질환이 재발한 적이 없다.
“정말 불가사의했어요. 수술할 돈도 없고 수술해도 재발한다니 속으로 여간 걱정한 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약 하나도 안 먹고 오직 창제하고 지도대로 실천했을 뿐이거든요.”
신심 확신으로 숙명전환에 도전
초신(初信)의 공덕을 체험한 그는 더욱 강해졌다.
더 큰 어려움도 맞설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반드시 숙명을 바꿔 행복한 가정을 만들겠다’고 기원하던 그는 결국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남편이 직장생활을 접고 환경기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를 시작하자 그는 용인 한국민속촌 장터에서 전을 부치는 일을 시작했다.
고단한 직장생활과 살림을 돌보는 힘든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 속에서 그는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창제로 하루를 시작했고, 시간을 쪼개 좌담회에 가고 최선을 다해 신심에 힘썼다.
그러자 생활이 순조롭게 풀려갔다.
알뜰히 생활한 덕분에 저축도 차곡차곡 하게 돼 사글세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자가 빌라로, 빌라에서 3층짜리 단독주택으로 옮겨갈 만큼 살림은 점점 늘었다.
남편도 환경기사 자격증을 취득해 직장을 갖게 됐고, 자녀들도 건강하게 자라 누구도 부럽지 않은 가정을 일궜다.
청천벽력 같은 유방암 진단
그런데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숙명이었다.
입회 후 그때까지 겪은 어려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를 생사의 갈림길에 세운, 암이라는 무시무시한 병마가 닥친 것이다.
1998년 늦여름 무렵이었다.
우연히 텔레비전 공개 건강강좌에서 유방암 자가진단법을 지켜보며 왼쪽 가슴을 만지던 중 콩알 만한 것이 잡히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곧바로 인하대병원 진단검사의학과에 근무하던 큰딸 민수에게 전화를 걸어 검사 예약을 부탁했다.
“혹시 유방암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직장 일이 힘들어서 몸이 나른하고 피곤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되돌아 보니 그게 병의 징조였던 것 같아요.”
그는 1998년 9월30일 인하대병원 외과 김세중 유방암 전문의에게 외래 진료를 받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며칠이 지났다.
그런데 기다리던 딸의 전화가 오지 않았다.
마냥 기다리기도 갑갑했다.
그래서 딸에게 전화를 걸어 대뜸 “유방암이냐”라고 캐물었다.
그러자 한참 아무 대답을 하지 않던 딸은 “엄마, 걱정 하지마. 다 잘 될 거야”라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딸의 말을 듣자 그는 좀처럼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다.
‘이제 살만한데. 왜 내게 이런 병이 왔을까’라는 의문을 가지며, 또 한편으로는 ‘그래, 창제를 많이 할 때가 온 모양이다.
반드시 극복해 본존님의 공덕을 당당히 알리자’며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남편 천수진(64)씨는
“아내에게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지만 불법을 믿으니까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해결 될 것이라고 확신했어요.
본존님이 계시다는 생각을 하니까 오히려 편안한 마음이 들더군요”라고 그때의 심정을 밝혔다.
당시 천씨는 입회만 하지 않았을 뿐 불법의 공덕을 실감하면서 누구보다도 신심의 위대함을 확신하고 있었다고.
“이제 완전히 다 나았습니다”
수술 날짜는 10월9일로 잡혔다.
전날 입원한 그는 수술을 앞두고 심부전증으로 거동도 제대로 못하고 투석 치료를 받으며 고생하던 시어머니를 떠올리니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도 막상 수술실에 들어갈 때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것은 평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신심을 근본으로 생활했던 만큼 불법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실에서 눈을 떠보니 큰 딸 민수와 사위가 있었어요.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기쁨은 말할 수 없었어요.
정말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어요.”
당시 주치의 말로는,
그의 병상은 유방암 2기말이었으며, 림프절 중 6개까지 암이 전이 돼 한달에 한번씩 6개월 동안 약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수술 후 회복이 빨라 일주일 만에 병원에서 퇴원했지만, 수술보다 훨씬 힘든 항암치료가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가 하나 둘 빠지더니 어느새 다 빠졌어요.
자꾸만 구역질이 나고 속이 뒤집혀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도 없어 많이 울었어요.
병원에서 지켜보니까 항암치료가 너무 힘들어 포기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하지만 저는 기필코 승리해서 건강한 몸으로 다시 일어서겠다고 결심하고 필사적으로 창제를 했어요.”
이처럼 결코 지지 않고 창제를 근본으로 병마와 싸운 덕분에 1998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이어진 6차례의 항암치료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수술 후에는 없었던 당뇨까지 겹쳐 더욱 힘들게 했지만 그것도 거뜬히 신심으로 극복했다.
그리고 2003년 10월에는 만 5년 동안 복용하던 약도 끊었고, 지난해 2월에는 의사에게 “이제 완전히 다 나았습니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날 병원문을 나서면서 뛸 듯이 기뻤고 발걸음도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암을 이겨낸 뒤 광포의 사명도 마음껏 하고 더욱 행복한 가정을 만든 이영자(뒷줄 왼쪽 세번째)씨와 가족들.

행복 메시지를 담은 ‘화광신문’을 이웃들에게 전하며 건강하게 활동하는 이영자(오른쪽 가운데)씨.
광포의 무대에서 마음껏 사명
1999년 4월 항암치료를 마친 그는 드디어 마음껏 광선유포의 사명을 하기 시작했다.
본존님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과 불법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가지고 용기 있게 일어선 것이다.
그는 허약한 몸을 생각하지 않고 부인부 ‘화광회’ 사명을 자원했고, 2001년 5월부터는 칸나활동도 시작했다.
이웃과 동네 상가, 초등학교, 중학교 등을 가리지 않고 1백부에 이르는 ‘화광신문’을 돌렸으며, 이해 9월부터는 자신의 집을 반, 지구좌담회 장소로 제공하고 있다.
“창제회든 회합이든 빠지지 않고 다녔어요.
또 누가 아프다는 소문만 들어도 찾아가 제 체험담을 들려주고 불법의 위대함을 알려줬어요.”
그는 밥을 굶을 정도로 가난했고 죽을 고비를 만났지만, 일체를 이겨내고 마음껏 광선유포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 지금의 행복은 모두 본존님 덕분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래서 앞으로 불행에 우는 사람들에게 행복의 씨앗을 뿌리고, 이케다(池田) 문하생으로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 가족의 말(큰 딸 천민수씨, 인하대병원 임상병리사)
지금은 가뿐한 마음으로 이야기하지만 그때는 눈앞이 캄캄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여성의 경우 간혹 가슴에 양성 종양이라 불리는, 이른바 지방 덩어리가 뭉치는 경우가 있어 처음에 엄마의 전화를 받고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다행히 내가 인하대병원 진단검사의학과에 근무하고 있어 외과 유방암 전문의 김세중 선생님께 외래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문진을 하시고 조직검사를 받아봐야 정확한 결과를 알 수 있다는 말씀에, 혹시 ‘암’인가 하고 불안했다.
검사 후 나는 ‘엄마는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직장을 다니시면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일만 하셨습니다.
그런 엄마에게 암이라니요, 안 됩니다’라고 기원하며 본존님께 매달렸다.
수술 후에는 엄마가 약물 치료를 잘 견뎌 누구보다도 건강해지기를 기원했다.
다행히 엄마는 그 힘든 항암 치료를 무사히 마쳤고, 유방암이 재발할 수 있는 고비인 만 5년을 무사히 넘겼다.
이 모든 것이 본존님 덕분이라 여기며 항상 감사할 따름이다.
이영자 장안권 婦회원
장호정(hjjang@hknews.co.kr) | 화광신문 : 05/03/11 62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