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그림자
제15회 대상
최재학
한국 방송 사상 최장수라는 가요무대 시청을 거르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은 코로나 질병으로 재탕 삼탕이다. 그래도 가요무대를 시청하노라면 마음은 어느새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특히 어머님께서 좋아하셨던 해방과 6·25 전후의 옛 가요는 고향과 어머님을 떠올리며 잠시라도 불효자를 반성하게 하는 촉매제가 된다. 역시 최장수 사회자 김동건의 부드러운 그러면서 호소력 짙은 음성이 오늘은 남인수의 특집으로 그를 조명한다며 가수 현철이 ‘고향의 그림자’로 막을 열었다. 애조 띈 그의 음색이 나를 매료시키며 먼 옛날 학창시절로 끌어당겼다.
살아가기 어려웠던 1950-60년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무작정 서울로 가출을 결심한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쓴 가출이니 차비만 마련되면 먼저 상경한 친구의 단간 방에 끼어들어 염치불구하고 신세를 진다.
그러면서 다시는 고향을 찾지 않겠다고, 결심이 대단하다. 그렇게 무작정 가출한 친구가 돈을 모았든지 취직이라도 제대로 됐다면 고향을 찾지만, 부모님께서 운명하셨다는 소식 이외는 고향과 영원히 등지는 친구도 적지 않았다.
빈농인 그들은 고향에 눌러앉아 몇 두락 논밭을 뒤져봐야 고생만 할 뿐 희망이 없으니 하루라도 늦기 전에, 하면서 무작정 상경한 것이다. 하지만 서울이라고 누가 기다리는 것도 의지할 곳도 없다. 덩치가 큰 친구들은 지게 품이라도 팔아볼 요량으로 서울역이나 버스터미널을 기웃거렸고, 체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아이들은 중국집 보이나 공돌이로 떠돌았다. 더구나 친구를 잘 못 만나 구두 닦기나 소매치기 골로 빠져들어 인생을 망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도 의지가 굳은 친구들은 새벽같이 신문이나 우유를 배달하면서 야간 학교 문을 두드려 성공하기도 했다.
그 시절은 서울 구경도 쉽지 않았다. 혼자 서울을 간다는 것조차 불안하고 겁이 나는 길이다. 어른도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 기차를 구경했을 뿐이나 나는 다행히 작은 도시에서 중학교에 다니면서 친구들과 서울 구경을 했었다.
당시 태안이나 서산에서 서울을 가려면 대부분 홍성까지는 버스로, 그리고 기차로 상경하였으나 배편으로 인천을 경유하기도 하였다.
고3 여름방학 때였다. 문득 배를 타고 서울을 가고 싶은 생각에 대산의 독곶항에서 인천행 배를 탔다. 팔봉의 구도항에서 출발한 목선 칠복호七福号가 독곶항을 경유하는 것이다.
배 안에는 3~40명쯤의 승객이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하였다. 대부분 상인으로 보였다. 그들의 짐은 주로 농산물이나 건조한 수산물 보따리다. 아마도 그들이 돌아올 때는 생필품과 바꾸어 오는 보따리 상인이리라.
출항하자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3~4명이 이물에서 떠들썩 노래를 부르며 신이 났다. 내 또래 아이도 네댓 명이 갑판에 앉아있었으나 그들은 인천에 입항할 때까지 장장 6시간의 뱃길에서도 아무 말 없이, 약간은 쓸쓸한 모습이었다.
나는 이야기할 대상이 없어 무료하기는 했으나 배가 지나가면서 펼쳐지는 각기 다른 풍광을 감상하였다. 우측으로 육지의 산들이 가깝고 멀게 그러나 언제나 육지가 시야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왼편으로는 멀리 흐릿한 섬들이 떠 있다가는 서서히 사라지곤 하였다. 그러다가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도 하였으나 통통거리며 흔들거리는 뱃소리에 잠이 들지는 못하였다.
배는 잠시 뒤에 난지도와 풍도라는 섬에서 승객을 싣고 또 한참을 계속해서 항해하였다.
칠복호는 30톤이 됨직한 목선 중유기관으로 느릿느릿 그러면서 퉁퉁할 때마다 몹시 흔들렸으며, 목선에서 나는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역겨웠으나 그래도 5~6십 년대 서산지방에서 경인 지방으로 문물을 실어 나르던 유일한 연객선이었다.
그때 이물에 있던 학생들이 합창하듯 노랫소리가 들렸다. 내가 좋아하던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였다. 그들과 따라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때 겨우 배워 부르던 노래였으나 뱃전에서 듣는, 그리고 고향을 떠나면서 듣는 노래는 가슴을 후벼 파고드는 마법의 노래였다.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 이길래
수박 등 늘어진 선창가 전봇대에 기대서서 울적에
똑딱선 마도로스 담뱃불, 연기가 내 가슴에 어린다.
연분홍 비단 실 그림자같이 내 고향이 꿈에 어린다.
왜 찾아갈 곳이 못 되는 고향이라 했을까? 무슨 사연이, 아니면 지독한 가난과 고생에 아픔만 남았던가?
아름답기만 해야 할 유년의 추억, 어머니의 품속같이 포근한, 잠시 만나지 않아도 좀이 쑤시던 그 친구들을 어찌하고 돌아가서는 안 되는 고향이 되었던가? 참으로 가슴 저미는 애처로운 노래였다. 그리고 그때처럼 그 노래가 절절하게 가슴을 울려 준 적은 없었다.
노랫말대로라면 농촌에 희망이 없으니 돌아갈 곳은 못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노래까지 부르며 고향을 외면하지만 사실은 그 고향을 떠날 수 없다는 애절함이 내포된 것이다.
두 번의 전쟁으로 희망 없는 고향을 무작정 등지게 했던 암울한 시대에 만들어진 노래였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끝 소절에 ‘물 위에 복사꽃 그림자같이 내 고향이 꿈만 어린다’ 라 한 것은 아무래도 영원히 찾지 않을 고향이 아니라는 역설적인 표현일 것이다.
이 노래는 작사가와 작곡가가 모두 월북하여 발표를 미루다가 어쩔 수 없이 반야월 작사라는 기구한 운명으로 세상에 다시 나왔다 한다.
우리 사회는 2천 년 대를 거치면서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가속도로 진입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반듯이 이농과 상관관계가 있었던가?
농촌은 분명 우리 인간의 본향이고 생명의 원형질이다. 그 본향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외면하면서 멋대로 변한 것은 사실이다. 비록 그 고향농촌이 우리를 외면한다 해도, 그래도 우리가 떠나서는, 더구나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고 노래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만들어준 고향농촌에 대한, 보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아름답기만 해야 할 유년의 추억, 어머니의 품속같이 포근한, 잠시 만나지 않아도 좀이 쑤시던 그 친구들을 어찌하고 돌아가서는 안 되는 고향이 되었던가? ... 농촌은 분명 우리 인간의 본향이고 생명의 원형질이다. 그 본향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외면하면서 멋대로 변한 것은 사실이다. 비록 그 고향농촌이 우리를 외면한다 해도, 그래도 우리가 떠나서는, 더구나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고 노래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만들어준 고향농촌에 대한, 보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부분 발췌)
고향... 루쉰의 <고향>이란 작품이 떠오르네요.
변해버린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 되던...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