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等 / 장이엽
비주류에 대한 가장 함축적인 이름이다
열거된 각각의 명사 뒤에서 때로는 ‘들’로
때로는 ‘따위’로 바뀌어 불리기도 하는
확인할 필요가 없는 초대 손님
솜털로 채워진 낙타의 귓속에 관심이 있는 당신이라면
‘등’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다
바위 그늘에 주저앉아 종일토록
바람을 기다리는 노루귀가 되어 본 당신이라면
‘등’의 구별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여!
행여나 부피를 재려고 실린더 눈금을 읽게 될 때는
위에서 내려다보지도 말고
밑에서 올려다보지도 말고
눈높이를 액체 표면과 수평이 되도록 맞추어야 한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당신 옆에서 간간이 물잔 비우는 나 등을 만나거든
혼자서 술을 따라 마시는 나 등을 만나거든
당신의 이름을 받쳐주는 기타 등등을 만났다고 기뻐해 주시라
당신의 얼굴을 밝혀주는 기타 등등을 만났다고 반가워해 주시라
삐뚤어질 테다
나는 늘 한쪽으로 기울여져 있었다
한때는 오줌싸개여서
한때는 아버지가 목수여서
한때는 키가 작아서 자만할 수 없었다
한때는 초라한 내 행색에 주눅이 들고
한때는 마른 얼굴의 광대뼈 때문에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돌리기도 했었다
좋은 것 아홉 가지를 합해도
모자라는 하나를 당할 재간이 없었던 그때
넘어지지 않으려고 힘을 주기 시작한 그때부터
나는 기울어졌을 것이다
기울어진 내가 비탈에 선 나무가 되려 한다
비대칭의 균형을 선택하기로 한 나무
삐뚤어지게 앉아 바람길 열어주고
삐뚤어지게 엎드려 진달래 뿌리와 손가락 걸고
삐뚤어지게 누워 잎사귀 흔들면
구석구석 골고루 햇빛 비쳐들 터이다
잔가지 사이사이로 주먹별이 내려올 터이다
모난 돌이 돌탑을 받쳐주듯
나를 고여 주는 삐뚤어진 생각의 작대기 두드리며
삐뚤어지게 뛰어가 시를 부르고
삐뚤어지게 서서 밀어줄 테다
나는
나는 은하수를 건너온 처녀좌의 원숭이
나는 꼬투리 속에 갇힌 콩알
나는 가로등 밑 거미줄에 걸린 나방
나는 깊은 밤에 혼자 우는 귀뚜라미
나는 뿌리 없이 꺾어 심은 마른 개나리
나는 과자 부스러기를 물고 가는 배고픈 개미
나는 바비 인형의 벗겨진 신발 한 짝
나는 고흐의 파란 방에 놓인 귀 떨어진 컵
나는 억새풀의 반짝이는 은비늘
나는 사하라 사막에 숨어 있는 모래늪
나는 빙하 속에 정박당한 낡은 어선
나는 황태덕장에 걸려 있는 눈 뜬 명태
나는 사라진 명왕성의 먼지 입자
나는 탱탱하게 몸을 조여 울리는 소가죽
나는 투망에 잡힌 물뱀
나는 앙코르와트의 오래 된 사원
나는 악보 안의 4분 쉼표
나는 티베트 고지에서 펄럭이는 오색 깃발
나는 어항 속 수초 사이를 누비는 체리새우
나는 세렝게티 초원의 치타와 달리기를 하던 톰슨가젤
나는 개망초 얼굴 위로 예고 없이 쏟아지던 소낙비
나는 징검다리 사이의 물보라
나는 이솝 동화 세상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
나는 한 발 한 발 으름넝쿨을 재며 걷는 어린 자벌레
나는 천축국을 찾아가는 근두운 탄 손오공
조사 ‘과’에 대한 오해
말과 말 사이에는 ‘과’가 있었다
그 ‘과’를 이어가기 위해 입속에 조각칼을 종류별로 숨겨 놓고
비누에 나무에 꽃잎에
심지어 하얀 종이의 심장까지 말의 문양을 새겨가는 것이다
계획적이고 반듯한 삶을 살고 있노라는 당신의 말에
나는 건강한 삶을 살고 있군요 라고 답했다
계획적이고 반듯한 삶이 건강한 삶이라고 표현한
나의 감정이 참 평화로워 보인다면서
당신은 기다란 여백에 화살표를 올려놓고 음 음…하며 배회하고 있었다
말줄임표 사이로 감추어진 거리는 얼만큼인가
‘과’가 징검다리로 놓여 있을 때
나는 다리가 짧아 건너뛸 수가 없으면서
생각은 이미 넘겨짚음으로 저편까지 건너가
당신의 마음을 알겠다고 경솔하게 내뱉어버림으로
‘과’ 뒤에 이어질 진실에 대한 오해는 깊어진다
그럼 바람 한 자락 주머니에 담아 다른 하늘 아래로 잘 가라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끼리 건네는 작별인사도
현실은 외면당한 채 말과 글의 오해와 이해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는데
사실을 더 이상 다른 이면으로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
말과 말 사이에는
마주보는 창문처럼 맞바람이 쳐야만 한다는 걸
고무줄놀이
편 나누기가 늘 공정한 것은 아니므로
장난감 기차는 칙칙 떠나갈 수 있다
기둥 발목에 걸린 검정 고무줄이 무릎 위로 올라가도
기차는 칙칙 떠나갈 수 있다
고무줄을 밟고 월화수목금토일
고무줄을 뛰어넘고 월화수목금토일
칙칙 떠나갈 수 있다
번개같이 달려와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는
방해꾼만 없다면
장난감 기차는 칙칙 떠나갈 수 있다
씨 房
아주 작은 방에서
가장 귀한 손님이 주무신다
모서리
모서리라는 말은
보이는 것에 대한 한계점이다
벽과 벽이 만나는 경계여서
내 눈이 다른 곳의 사물과 소통하지 못할 때
기어이 돌아가서야 만날 수 있는 미래다
다면체의 전개도를 펼치자
나는 종선從船을 탄 어부가 되어
어스름한 저녁바다로 밀려간다
출렁이는 잔물결 너머
아득한 수평선이 어둠에 묻혀 가는데
날렵한 각도 앞에서 머뭇거릴 때보다
숨겨진 비밀에 콩닥이던 가슴보다
좀 더 낯선 두려움과 통증이 정수리로 쏠리면서
왜 자꾸 눈물이 나려 하는가
정면은 시선이 닿는 곳에서 시작한다
수없이 많은 모서리 속에서
물고기처럼 유영하기
뒤돌아보기 없기
헛걸음에 상심하지 않기
단념을 깨우는 채찍에 두려워하지 않기
나는 지금 투명한 기둥에 문을 만들고
모서리 하나를 통과하고 있다
지렁이의 꿈틀처럼
혼자 우는 게 어때서?
혼자 울다 코 막히면 코 풀고
혼자 울다 지치면 잠자고
혼자 울다 배고프면 밥 먹으면 되지
혼자 울다 울다가 오줌보 가득 눈물 고이거든
혼자서 시를 써야지
혼자서 산에 갈 테야!
혼자 울며 참았던 오줌발을 날려줘야지
지렁이를 봐!
귀도 없고 눈도 없이
뭉툭한 몸매로 꿈틀꿈틀
꿈의 틀을 짜는 걸
흙 한 입 삼키고 땅속에 바람길을 열고
흙 한 입 삼켰다 밀어내는 뱃심으로
단단한 지구를 흔들고 있는데,
애찌러루르르 애찌르르르루
풀벌레들 카랑카랑한 목청에 화음도 넣어가며
그렇게 맑디맑은 소리로 노래 부르고 있는데
눈부신 산란
닭장 실은 차가 지나간다
깃털이 날리고
냄새가 고약했다
털 빠진 모가지 위로
희번덕대는 붉은 눈알들이
허공으로 끌려가는데
층층층 높이도 쌓아올린
쇠창살 사이
구석 군데군데에
가만히 모셔 놓은 하얀 알들
눈부신 산란이다
죽음보다 무서운 속삭임이다
애틋하기도 하여라
웅크려 앉아
기어이 알을 품고 있는
엄마 닭도 보였다
담장 밑에서 읽은 국화 소설
갓 스물에 시집와 오십 년 넘게 함께 살았어도 늘 학 같은 사람이었어야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하고 정갈해서 노인병원에서 간병인들한테 아랫도리 뵈 주기 싫다고 볼일도 시원하게 못 봤던 게 늬 아버지였니라 우수 경칩 다 지났는데 그날 아침 웬 눈이 그리 많이 왔던고 그 전날 볕이 따숩고 맑았는데 바람 끝이 보드라워서 인자 겨울 다 지났으니 꽃구경 실컷 하겠다 했더만 저녁나절에 한나 둘 떨어지던 진눈깨비가 함박눈이 되어서 그렇게 온 천지를 덮었어야 아버지 화초 가꾸는 정성이야 오죽 했간디 재 만들어 오줌 섞고 묵혀서 한두 번 뿌려준 게 아니여 지난해에 죄다 피었다 지고 난 다음 잘 뵈지도 않는 눈으로 한해살이 씨받아 두더니 땅 뒤집고 붙박이 나무들 밑둥치마다 한 삽씩 푸짐하게 뿌려 줬니라 앞다투어 피었다 다 지고 밭 색깔이 수척해졌는데 가을걷이 끝나고 한참 지난 후에 이장네 이사 가면서 퍼다 심은 저것이 늦게 사 몽실몽실 몽우리가 오르더니 늬 아버지 병원 가려고 가방 챙기던 섣달까지 활짝 웃고 대문 나가는 걸 전송했니라 겨울 지내고 얼른 와서 저거 거름 맹글어 준다 하고선……. 나는 그런다 새벽이면 늙은 수탉 맹키로 잠 깨서 푸드득 홰도 쳐보고 늦게 지는 새벽 별똥 한 바가지씩 퍼다가 해뜨기 전에 술술 여기저기 뿌려준다 그러면 내가 저 꽃밭 가득 화초도 피워 보고 그 꽃 보러 늬 아버지 오거들랑 냉장고에 사다 놓은 홍어 살이라도 몇 점 저며 저물어가는 가심 속에 뒹구는 이야기나 나눠 볼란다 사는 게 별거 있가니 나오는 순서가 있다 해도 가는 순서는 없니라 서릿발 머리에 이고 뜨건 가심 식히는 가실 국화가 그래서 이렇게 이쁜 거 아니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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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전북 익산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2009년《애지》로 등단
시집 『삐뚤어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