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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
덧
없
음
2012- 2019
Transitoire
기획초대전
유현민 개인전
Yoo Hyeonmin Solo Exhibition
2020.6.02 – 6.14
*opening 2020.6.02(화) 오후5시
갤러리 더빔
대전시 유성구 구암동 670-7 T 042-822-8887
670-7, Guam-dong Yusung-gu Daejeon, korea
https://thebeam.modoo.at 매주월요일 휴관
Ⓒ Yoo Hyeonmin 浮-덧없음 n。8555 monotone fine art print 30×20cm 2014
사진적 경험의 토포스topos를 포월匍越하기
박영선(작가, 독립연구자)
의미를 확언할 수 없는 이미지들
유현민은 지난 20여 년간 사진장치가 생산한 사진적 경험의 구조화된 형식, 즉 사진이미지의 의미가 생산되고 교환되는 일정한 사회역사적 규범들(토포스와 스투디움)에서 이탈하는 또 다른 가능성을 탐구해온 것으로 보인다. <강경풍정(2003)>, <벽암도(2005)>, <산성무진도(2011)>, <영암도(2013)>, <소제도감(2015)> 등으로 이어지는 흑백의 사진연작들에서, 우리는 사물과 사진이미지가 맺는 의미론적 존재론적 관계에 대해 은밀하고 끈질기게 떠오르는 몇 가지 질문들과 만날 수 있다.
얼핏 사진의 즉물적 조형성에 기대는 듯해 보이는 그의 사진들에서는 촬영된 사물들의 물질성과 형상들을 타고 그것들에 얹혀서 그것들을 기어 넘어가려는 지향과 움직임을 읽을 수 있는데, 이 움직임의 강도가 <덧없음−浮(2020)> 연작에서는 이전보다 급격히 증폭되어 있다. 이전 작업들에서는 사진이미지 자체와 표제들을 통해 얼마간 유지되던 의미론적 지시성, 즉 장소성・시간성・즉물성・형상성 등 해독가능한 사진적 경험에 필요한 상식적 조건들이 <덧없음−浮> 연작에서는 급격히 흐려져 있다. 물론 춘-하-추-동이라는 자연적 리듬의 절합節合에 따라 사진들을 네 묶음으로 배열한 것은, 자연에 부과된 문화적 이해의 좌표(토포스)를 상기시키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연작에서 중요한 것은, 예를 들어 ‘여름夏’ 장에 배치된, 잎이 무성한 나무들을 촬영한 ‘듯해 보이는’ 사진들 앞에서조차도 ‘우리가 사진을 통해 바라보는 것이 바로 나무다’라고 (의미론적으로) 확언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사진들은 ‘나무다’라고 확언할 수 없는 다른 이미지들과 중첩되어 있거나, 나무가 아닌 다른 사물로부터 흘러나온 나무를 닮은 형상을 담았거나, 또는 나무를 닮은 듯이 보이기를 의도하면서 작가에 의해 포착된 이미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우리가 감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무다’라고 확언할 수도 없고 ‘이것은 나무가 아니다’라고 확언할 수도 없는 불편한 긴장이 사진들과 우리 사이에 진동하기 시작한다.
왜 이 사진들은 확언할 수 없음, 단정할 수 없음, 딱 떨어지게 해독할 수 없음이라는 이 의미론적 곤경 속으로 우리를 빠트리는 걸까?
사물과 이미지, 사진적 경험의 안팎
미셸 푸코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을 분석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두 개의 원칙이 15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그림을 지배해왔다고 말한다. 그 첫째 원칙은 시각적 유사성을 함축하는 조형적 재현과 유사성을 배제하는 언어적 지시 사이를 단호하게 분리하는 것이다. 이미지/보기와 텍스트/말하기를 분리하고, 보기는 이미지에, 말하기는 문자에 상응시키는 이 재현의 원칙에 따라 서유럽인들은 유사를 통해서 ‘보고’ 차이를 통해서 말해왔다. 둘째 원칙은, 유사하다는 사실과 재현적 관계가 있다는 확언 사이에는 등가성(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어떤 형상이 어떤 사물이나 형상과 유사하면, ‘당신이 보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라는 확언적 판단이 암묵적・관습적으로 그 보기의 경험과 의미를 결정해버린다. 이 두 원칙에 의거해서, 그림이미지 ã가 사물 a와 ‘유사’할 때 그 그림이미지 ã는 ‘그것과 닮은 바로 그 어떤 사물’ a를 곧바로 지시하는 재현원리가 15세기 이래 서유럽 지식-권력생산을 지배해왔다.
사진은 이 재현원리가 수세기에 걸쳐 화학적・광학적 실천 및 담론과 결합하면서 시각적 유사성뿐 아니라 물리적 인접성(환유)과 기계적 자동성・객관성까지 갖추고 19세기에 등장한 이미지 제작 장치다. 사물 a를 촬영한 사진이미지 á는, 사물 a에 대한, 사물 a의, 사물 a로부터 비롯되는 이미지다. 사물 a의 사진이미지 á는 사물 a와 시각적으로 ‘유사’하며, 사물이 없으면 촿영될 수 없고 촬영의 순간은 기계의 내부 작동에 인간이 개입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진 á를 보자마자 (거의 즉각적으로) ‘이 사진 á는 사물 a이다’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사진적 경험은 이 의미론적 일반 범주 또는 규범인 ‘토포스topos’의 그물망 안에 ‘애초부터’ 사로잡혀 있다.
장치로서의 사진과 푼크툼
이런 맥락에서 사진은 단순히 하나의 시각기술이나 매체라기보다는, 지식을 생산함으로써 다시 통치를 위한 권력을 생산하는 일종의 ‘장치dispositif’라고 할 수 있다. 지식과 권력은 통치 행위가 이루어지기 위해 서로를 생산하고 강화하는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본질적 요소다. 장치로서의 사진은 사물 a로부터 원초적 물성과 야생성을 박탈하고 그것을 사진적 이미지 á로 전환하는 과정을 실행한다. 사진장치는 사물을 새로운 지식 생산을 위한 온순한 대상으로 길들인다.
유사성에 근거한 근대 서유럽의 지식 생산을 위한 재현원리에서는, 파이프를 그린 그림은 이미지로서의 존재론적 독자성이 부정되고 의미론적으로 파이프라는 사물에 종속되는 위계가 생겨난다. 그러나 사진장치는 유사성・인접성・자동성・객관성이라는 근대적 지식생산의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키기 때문에, 사진이미지 á의 지위는 사물 a와 등가이거나 오히려 사물 자체를 능가한다. 이런 토대에서 ‘사진 á는 사물 a이다’라는 확언적 단정적 명제가 강고하게 정립되고, 사물 a에 관한 (통치에 필요한) 지식이 사진을 매개로 한 프로세스를 거치면서 구성된다. 이것이 확언적 단정적인 근대적 지식-권력의 실천과 담론의 그물망에 포획된 사진적 경험의 ‘구조화된 형식성’이다.
‘경험의 구조화된 형식성’은 푸코의 표현이다. 모든 개인의 경험은 역사적 경험이며 그 경험의 내용과 형식은 역사적 선험(통치를 위한 지식-권력을 생산하는 실천-담론의 체계, 즉 에피스테메?)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년작 『밝은 방』에서 ‘스투디움’이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이 용어는 우리가 사진을 볼 때 언제나 이런 사진적 경험의 구조화된 형식 즉 선결정된 범주인 토포스를 찾아내려고 노력하여 마침내 찾아내고, 그 토포스가 제공하는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감동을 향유하며 안도하는 과정을 뜻한다. 스투디움이라는 용어는 모든 사진이미지가 이미 구조화된 형식에 따라 경험되도록 하는 담론과 의미작용의 관계망 안에 우리 모두 포획되어 있다는 공공연한 비밀을 새삼 누설한다.
바르트가 스투디움을 얘기한 이유는, 그와 대조되는 혹은 그것을 깨뜨리거나 그것과 박자를 맞추기 위해 오는 사진의 푼크툼적 속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사진의 푼크툼은, 감상자를 서유럽적 재현원리의 구조화된 형식성에 포획된 사진적 주체성으로부터 우리를 이탈시키는 존재론적인 사진적 경험이다. 사물 a나 사물 b를 찍은 사진을 보고 이것은 a나 b라고 확언할 수 없는 일종의 수동적이고 애매한 사진적 경험이 (비록 토포스의 의미망 안에서는 설명될 수 없더라도) 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르트 자신의 경험에서는) 실재하며, 그것이야말로 존재와 사랑을 가능케 하는 사진만의 매혹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바르트가 사진으로부터 나에게 돌연 찾아오는 특별한 경험으로서의 푼크툼을 사랑과 구원의 강도로까지 상찬한 것은 (그것이 타당했는지 여부를 떠나) 서유럽 근대의 지식-권력의 신화를 생산하는 장치로서의 사진의 토포스를 이탈할 ‘또 다른’ 사진적 경험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적 모던
단정성과 확언성이 지배하는 사진적 토포스의 영토로부터 탈주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몇몇 성찰적이고 예외적인 한국 작가들은 사진 장치의 이 확고한 의미론적 토포스를 포월하기 위해 애써왔다. 이들의 분투는, 그들이 전통을 파괴하고 부단한 혁신을 추구해야만 예술가로서 등록될 수 있는 근대적 예술제도의 내부자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동아시아는 18-19세기를 거치면서 서유럽의 근대성에 결정적으로 포획되었다. 동아시아의 이런 사회역사적 조건을 생각할 때, 한국의 성찰적 작가들에게 서유럽 근대성을 구축해온 지식-권력 생산체계를 작동시키는 장치로서의 ‘사진을 통과하는 과정’은 복잡하고 다층적인 함의를 가질 수밖에 없다. 과연 그들이 미래의 유토피아를 향해 토포스의 혁신을 거듭하는 서유럽 모더니스트들처럼 전진前進 운동에 전적으로 순수하게 몰두할 수 있을까? 그것이 동아시아의 사회역사적・현실적 조건 속에서 가능할까? 이런 질문들이 떠오르는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그리고 앞에서 말한 유현민의 사진들이 만들어내는 확언할 수 없음의 긴장 속에서, 우리는 유현민의 그간의 작업과 <덧없음−浮> 연작에 접근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현상되는 이미지들
<덧없음−浮>의 사진들이 우리를 긴장시키는 요소들은 앞에서 예를 든 나무이미지가 담긴 사진들의 경우 외에도 더 있다. 사진은 2차원적 이미지에 3차원적 사실감을 부여하는 원근법적 공간감을 가장 강력하게 구현하는 매체다. 그런데 유현민의 사진들에서 이 원근법적 공간감은 거의 사라져 있다. 원근법은 모든 사물을 일정한 공간적 좌표(토포스) 속에 배치시키는 근대 서유럽의 시각원리로서, 사진장치가 만들어내는 사진적 경험을 위해서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조건이다. 그런데 <덧없음−浮>의 사진들에서 사물들의 이미지는 원과 근이라는 공간적 위계 없이 사진의 표면에 산포되어 있다. 이 같은 평면성을 우리는 초접사・초망원 렌즈로 촬영된 사진이미지들이나 동아시아 문인산수화에 묘사된 원경遠景들에서 경험할 수 있다.
<덧없음−浮>에서 유현민은, 시공간적 좌표의 위계에 따라 확언된 의미의 닻을 내릴 수 없도록 비시간화되고 비공간화된 기이한 사진의 평면을 우리에게 제출한다. 우리는 그 평면 위에 사물의 이미지들이 찍혀있는 것이 아니라, 얹히거나 묻어있거나 스미거나 번져있다고 감지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미지들은 ‘그 사물들’과 유사하지도 ‘않다’. 사물들 사이의 물리화학적 작용으로 인해 우연히 생성된(듯한), 한편으로는 유현민이 치밀한 사전 계획을 통해 포착(-현상)한 이미지들은 사진 찍힌 대상 사물들이 아니라 그와 닮지 않은 다른 사물과 사태의 이미지들로 ‘엇비슷’하게 ‘흐릿’하게 ‘틀리’게 우리에게 ‘현상된다’.
여기서 ‘현상된다be developed’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이 사진들의 이미지는 의미론적 주체들에 의해서 질서정연하게 독해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진과 이미지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환영처럼 흔들리며 ‘현상된다’. 그리고 사진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기억과 상상 속에서 예기치 않은 가능한 이미지들로서 발현(생성)된다. 이 이미지들은 현상과 철회를 반복하며 끈질기게 명멸한다. 그것들은 사물에서 사진이미지로 또 다른 이미지들로 뛰어넘기(초월하기)보다는, 그 모두의 언저리를 맴돌며 비뚤비뚤 아른아른 슬금슬금 기어서 또 다른 이미지들로 현상되고 발현되며 나아간다. 그러다 다시 사물들과 사진이미지들로 되돌아오고 또다시 다른 이미지들로 현상되어 나아가기를 반복하며 떠돈다. <덧없음−浮>의 사진들로부터 현상되고 발현되는 이 이미지들은 사진가에게도 감상자에게도 속하지 않고, 사물들에도 사진들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모두와 ‘연루되어’ 있다.
포월匍越, 비-시간과 비-공간에서 진동하기
‘사진이미지 á는 a이다’라는, 지식을 생산・등록・유통하는 담론체계의 지시적 어법을 훌쩍 뛰어넘어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타고 기어서 넘어보려는 듯한 사진이미지들. 이것은 a인 듯 아니고 b인 듯 아니고 c인 듯 아니고…… 우리는 이 이미지들 앞에서 사진적 경험의 구조화된 형식 주변을 꾸물거리다가 우물쭈물 다시 떠나기를 끝없이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꾸불꾸불 현상하는 이미지들의 운동. 이미지들은 자신의 의미를 정박시킬 닻, 시공간의 좌표를 찾지 못하고 사물 주변을 맴돌면서 사진적 경험의 토포스로부터 자꾸 삐져나온다.
이미지들은 시간성이 희미해지면서 벌어지기 시작하는 틈으로부터 흘러나온 듯 우발적이면서도 작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포착되기도 한 얼룩의 형상과 엇비슷해진다. 확언될 수 없고, 설명될 수 없고, 해독될 수 없고, 등록될 수 없고, 역사화될 수 없는 물질들의 운동이 사진이미지에 남긴 얼룩들을 통해 우리에게 얼핏 현상하다 스러지는 이미지들의 비-시간achronos. 그것은 ‘덧(찰나)’조차도 ‘없음’이다. 이미지들은 원근법적 공간의 현재적 좌표인 토포스를 초월하거나 미래의 좌표인 유토피아를 향해 전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이를 떠돌며 좌표 없는 비-장소atopia에서 현상되고 철회되기를 거듭하며 진동한다. 사물과 (사진)이미지와 문자가 분리되지 않던 상형문자적 시간의 기원, 혹은 사물과 (사진)이미지와 문자 사이의 존재론적 분할과 대립이 무너지는 파국이면서 동시에 미지의 문자들이 용암처럼 분출하는 생성의 시간 쪽으로, 이미지들은 명멸하며 넘어가는 듯하다.
좌표화할 수 없도록 흘러내리고 번져가는 얼룩 같은 <덧없음−浮>의 사진들은, 사진장치의 길들여진 의미의 집 속에 거주하려는 우리의 욕망을 어느덧 표류시켜버린다. 그리고 이 이미지에서 저 이미지로 생멸을 거듭하는 알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궤도를 따라 구불구불 포월해보지 않겠냐고 우리를 부추긴다.
*포월匍越, 기어서 넘어가기라는 개념은 모국어 개념을 통해 철학하기를 주창해온 철학자 김진석이 제안했다.
김진석, 『초월에서 포월로』 3부작 참조.
유현민 Yoo hyeonmin
1967 강경 출생
1988 서울예술대학교 졸업
1996 프랑스 트루와 고등응용예술대학 졸업
1998 프랑스 아를르 국립 사진학교, 연구과정 수료
개인전
2020 浮-덧없음 (갤러리더빔/대전)
2017 砧山archive project (653Gallery/세종)
2015 蘇堤圖鑑 (이공갤러리/대전)
어스름陰翳 (대전역사박물관 Space M /대전)
2014 소제동299-116 (소호헌 12Space/대전)
2013 靈岩圖 (Gallery Nuda/대전)
2011 消遙風景帖 (Gallery Nuda/대전)
山城無盡圖 (Gallery 流歌軒/서울)
2010 Gallery Photoclass (대전)
2008 통인옥션갤러리 (서울)
대안공간 반지하 (대전)
2006 殘影 (갤러리 룩스 /서울)
2005 碧巖圖 (금산갤러리 기획초대/서울)
2004 GA갤러리 (서울)
2003 江景風情 (갤러리 프리즘/대전)
2000 江景 (서남미술관 포토스페이스/서울)
1999 Young Kwang갤러리초대전 (부산)
1998 觀照 (프랑스문화원초대전/서울)
1997 존재 (BEAUX-ARTS갤러리/트루와,프랑스)
1994 표류 (파인힐갤러리/서울)
단체전
2019 GSj 同人展 (Space 田園/ 강경)
文岩아카이브 프로젝트 (에코컴플렉스/청주)
2018 프레임 이후의 프레임 /한국사진운동1988-1999 (대구미술관/대구)
조치원 도큐멘타 (조치원 수원지/세종)
2017 나라말쌈 (구석으로부터/ 대전)
예술가의 관계展 (청주시립미술관/ 오창)
萬頃전 (중앙로/익산)
평리 수원지프로젝트 (조치원/세종)
2016 홈그라운드 (청주시립미술관/ 청주)
일상DMZ드로잉백서 (어울림미술관/고양)
버스1번 (대전근현대사전시관/대전)
역사에 모이다 (조치원역사/세종)
2015 소제동, 골목길을 걷다 (철도보급창고/대전)
파리에 서는 나무 (89갤러리/파리, 프랑스)
동부창고 34展 (구, 연초제조창 /청주)
2014 만월: 하늘과 땅의 이야기 (자연사랑미술관/제주)
초록(草綠)은 동색展 (홍주문화회관/홍성)
대구사진비엔날레 滿月전 (대구문화예술회관/대구)
Artiste Relay Exhibition (변방갤러리/대전)
수평선 II 展 (Space SSEE/대전)
11 Lines of Sight (이공갤러리/대전)
덕소정담展 (이공갤러리/대전)
2013 S.E.A.P 展 (카페 원테이블/서귀포)
사진과 사회 (대전시립미술관/대전)
홍천마을엔 별도많고... (이응로생가기념관/홍성)
수평선 I 展 (이공갤러리/대전)
2012 홍성,답다 (이응로생가기념관/홍성)
프로젝트리뷰2012 (대전시립미술관 창작센터/대전))
서울사진축제“천개의마을천개의기억” (서울시립미술관/서울)
공.터展 (구.연초제조창 /청주)
建築都市紀行 (Gallery MOA /파주,헤이리)
프로젝트대전2012 에네르기/원도심프로젝트 (대전시립미술관/대전)
2011 “Thinking of SARUBIA”(가나아트센터 미루/서울)
2006 SIPA서울국제판화사진 아트페어 (예술의 전당-한가람미술관/서울)
2005 장면전 (서울시립미술관/서울)
청계천을 거닐다 (서울시립미술관/서울)
2003 보물찾기展 (롯데화랑/대전)
청계천프로젝트 “물위를 걷는사람들 ”(서울시립미술관/서울)
느러지기 II /파리탐사보고전(충남대박물관초대전/대전)
2002 풍경으로부터의사진 사진으로부터의풍경 (문예진흥원미술회관/서울)
느러지기 I /중국탐사보고전 (중구문화원초대전/대전)
다시,길위에서 (Lux갤러리/서울)
2001 앗제가바라본서울 (Lux갤러리/서울)
"섬 프로젝트 "선유도展 (O2갤러리/서울)
1999 젊은 사진가전 (대구문화예술회관/대구)
봉인展 (금호 미술관/서울)
길 위에서 (서남미술전시관/서울)
1998 FESTIVAL OFF DES RENCONTRE D'ARLES (아를르국제사진영상축제참가)
T.E.C.E전 (아를르/프랑스)
1996 사진은 사진이다. (삼성포토갤러리/서울)
PRODUIT & CREATION.... (BNP갤러리,트루와/프랑스)
1995 광복 50주년 재불한인 작가전 (나폴래옹 재단, 파리/프랑스)
1994 세계의 눈 (공평아트센타/서울)
1993 흔하지 않은 만남 (한마당 갤러리/서울)
대전 EXPO 한,일 미술 교류전 (대전시립미술관/대전)
TOKYO TEN (동경도 시립미술관,동경/일본)
1992 아시아의 눈 (서울시립미술관/서울)
의식의 통로 (경인미술관/서울)
1991 한국사진의 수평전 (토탈미술관/장흥)
의식의 통로 (예총갤러리/서울)
1990 의식의 통로 (한마당 갤러리/서울)
1987 죽은 듯 엎드려 실눈 뜨고... (한마당 갤러리/서울)
사진집/협력출판
2018 근대도시조치원사람들이야기 /세종특별자치시
2015 소제도감 蘇堤圖鑑 2008-2015
2012 소제사진관蘇堤寫眞館 /DMAF
建築都市紀行 /시공문화사
2009 벽암도 2001-2007
2004 낙골 2001-2002/한국건축사진가회
2003 유현민 사진 1995-2000
작품소장
대전시립미술관
GA 갤러리
금호미술관
교육경력
2008 세종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강사
2002-2008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사진영상전공 겸임교수
2002-2007 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강사
2002-2007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강사
2002-2004 서울예술대학 사진학과 강사
2002-2003 경희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강사
1999-2010 한남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학과 강사
1999-2010 목원대학교 언론홍보학과,건축학과 강사
1999-2006 계원조형예술대학 강사
1999-2005 한남대학교대학원 디자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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