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몇 해 전에 캐나다 서부지역을 여행하였다. 「샌프랜시스코」에서 출발하는 한인 여행팀에 합류하여 캐나다의 로키산맥을 구경한 것이다. 광활한 북미대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로키산맥의 장엄한 풍광 속에서 만사를 잊고 천혜의 자연환경에 몰입할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국립공원의 중심지인 「벤프(Banff)」까지 왕복하면서 원시림과 호수 그리고 하늘에 닿을 듯 솟아오른 영봉에 가득한 빙하를 구경하였다. 중간에 덤으로 「밴쿠버」와 「시애틀」을 경유하면서 항만과 연계된 아름다운 도시의 풍광도 즐겼다.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따금 TV에 나오는 프로에 낯익은 모습을 보면 옛 추억을 돌이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수목과 어울린 「페이토 호수」는 로키에서 최고로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 가장 푸른색을 띤 아름다운 호수이다. 무엇보다 「루이스 호수」와 「벤프 스프링스 호텔」, 그리고 「설퍼산 전망대」에서 조망하는 웅대한 로키의 멋진 풍경, 「콜럼비아 대빙하」의 설경과 녹아내린 빙하수의 청정한 물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뚜렷하게 다가온다.
특히, 「루이스 호수」는 로키의 수많은 호수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인기 있는 호수다. 「빅토리아 빙하」의 침식으로 생긴 웅덩이에 빙하가 흘러내려 고인 빙하호수이다. 호수가의 「샤토 레이크 루이스호텔」에서 호수를 바라보면 저 멀리 빙하를 안고 있는 「빅토리아 산」이 호수 안에도 똑같은 모습으로 반사되어 빛나고 있다. 이 호수는 여름인데도 상당 기간 사계절의 모습을 구비한 자연의 조화가 절정을 이루는 명소이다.
「벤프」 인근의 「스프링스 호텔」은 웅장한 스코틀랜드 풍의 건물로 그림 같은 숲과 강이 어울려진 곳에 있어 한 번쯤 묵고 싶은 곳이다. 호텔의 뒤쪽에는 낙차는 크지 않으나 좌우 폭이 넓은 「보우강」의 웅장한 폭포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부근에서 청춘 시절의 「마를린 몬로」가 주연한 『돌아오지 않는 강(River of No Return)』은 물론이고, 「브레드 피트」 주연의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의 낚시하는 장면도 이 강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1992년에 개봉한 이 영화(흐르는 강물처럼)는 아름다운 몬테나주의 자연풍경을 배경으로 하여 어느 작가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한 가정에서 벌어진 가정사(家庭事)로 부자와 형제 사이의 사랑과 아픔 그리고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잔잔하게 그려낸 명화이다. 특히, 플라이낚시로 송어를 잡는 매우 환상적인 장면은 누구에게나 절로 낚시를 하고 싶은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낚시를 좋아하는 목사인 아버지는 어린 두 아들에게도 낚시를 가르친다. 비교적 완고하여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아버지는 반항적이던 둘째 아들인 「폴」이 죽고 난 한참 후에야 죽은 아들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아름다웠다"라고. "사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무엇을 베풀 것인지, 얼마나 자주 베풀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설사 그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완벽한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 낚시라는 상징과 은유를 통해 부자간의 사랑과 긴장이 전편에 흐른다. 어느 시대나 누구의 부모 형제간에도 긴장관계는 흐르기 마련이다. 다만 어떻게 해소하는가의 문제다.
사랑하는 사람이 모두 죽고 이제 혼자 낚시를 하며 가족과 인생 그리고 자기 가족의 일생을 지배한 낚시에 대한 회상을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 항상 변함없이 흐르는 강을 바라본다.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닥칠 황혼의 풍경을 담담하게 가르쳐 주는 여운이 오래 남는다.
이 영화를 통해 누구나 성장 과정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될 것이다. 필자 역시 무엇보다도 형제자매 간의 사랑과 우정에 대한 깊은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집을 떠나 살다보니 남들처럼 아기자기하고 화기애애한 시간을 함께하며 교감을 나누지 못한 아쉬움이 뼈를 때린다. 여러 동생들의 침묵 속에 숨겨진 어려움과 힘든 감정을 전혀 무관심하게 지냈고, 그 어떤 심리적 안정이나 진솔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생활이었는지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의 신세가 되었다. 종종 스치는 고인이 된 아우의 모습이 안쓰럽다.
여하튼 여행 중 막바지에 「밴쿠버」에 들려 아내의 사촌 언니 부부를 만나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해물 요리로 식사를 하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던 일도 새롭다.
「시애틀」에서는 ‘스타벅스 1호점’과 ‘보잉사’의 대규모의 광대한 생산시설에 입을 다물지 못하던 경험도 생생하다. 특히, 귀향하는 「오뒷세우스」를 유혹하던 「세이렌」 자매가 커피점의 상징 로고로 등장하여 선박이 정박하는 항구의 해변에서 수많은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어 누구나 호기심에서 둘러보는 명소가 되어 있었다.
산과 바다와 항구를 배경으로 하는 멋진 시내의 스카이 라인이 빚어내는 풍경도 다시 찾고 싶은 명소였다.
당시 다섯 살로 유치원에 다니던 외손은 이제 7학년(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한 살이던 둘째도 이미 4학년에 재학 중이다. 머지않아 대학생이 되고, 군대에 입대를 하고, 그리고 결혼을 하면서 인생의 변화과정을 거칠 것이다. 그들과의 사이에 과연 어떤 추억과 애틋한 사랑이 남게 될지는 전적으로 나 자신의 몫이다. 그러나 컨디션도 예전만 못하니 점점 의욕도 줄면서 과거의 추억만을 되새기는 것을 보면 더욱 건강에 유의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이 인생은 흔적이나 소리조차 없이 언제나 변함없는 강물처럼 흘러간다. 비록 하루하루는 지겹고 힘들지라도 몇 개월 혹은 일 년은 화살처럼 지나간다. 이를 후회 없이 보낼 수 있는 지름길은 무엇인가. 곰곰 생각해도 마땅한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그날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면서 두루두루 가까운 사람들과 아련한 추억을 공유하는 일이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줄 것이다.
(2024.8.15.작성/10.10.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