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 : 曉行 / 새벽 길
旅 店 凌 晨 發 (여점능신발) 주막 집에서 새벽 길을 나서며
參 旗 當 馬 頭 (참기당마두) 말머리에 깃발 세 개 나란하네
泉 流 虗 響 駛 (천류허향사) 샘물은 잔잔히 소리 내 흐르고
蕎 麥 暗 香 稠 (교맥암향조) 메밀꽃 향기 그윽히 전해 오네
露 冷 踈 螢 曉 (노랭소형효) 찬 이슬에 반딧불이 나는 새벽
風 高 亂 葉 秋 (풍고난엽추) 거센 바람에 나뭇 잎 어지러워
抱 鞍 殘 夢 罷 (포안잔몽파) 안장에 올라 새벽꿈에서 깨어
前 路 曙 光 浮 (전로서광부) 달려가는 앞길에 동이 터 온다
<어 휘>
蕎 麥 : 메밀(꽃)
虗 : 虛와 동
踈 : 疎와 동, 성글다
殘 夢 : 아직 다 꾸지 않은 꿈
曙 光 : 동틀 때 비추는 빛
<지은 이>
박태보 (朴泰輔 1654 ∼1689).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시호는 문열(文烈)
이다.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생원으로 1677년 알성문과에 장원해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예조 좌랑이 되었다. 1680년, 홍문관의 부수찬(副修撰)·수찬·부교리(副校理)·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교리(校理)가 되었다.
1682년 홍문관의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일정 기간
휴가를 주던 제도)에 선발되었다. 사가독서를 마친 후 이천현감(伊川縣監)과 부수찬· 교리· 이조 좌랑, 호남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호남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뒤에 중앙에 보고한 과감한 비리 지적에 조정의
대신들이 감탄했으며, 호남 지역의 주민들로부터도 진정한 어사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당시 서인 중에서 송시열(宋時烈)과 윤선거(尹宣擧)가 서로 정적(政敵)으로 있을 때, 윤선거의 외손자
임에도 불구하고, 친족 관계라는 사심을 떠나 공정하게 의리에 기준을 두고 시비를 가려 논조를 전개한 일도
있었다. 그 후,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파주목사로 나갔을 때, 조정에서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위패를 문묘에서 빼어버렸다. 그런데 그가 부임해 재직하는 파주에서는 조정의 정책에 따르지 않고 그대로
이를 존속시켜 나가서 인책, 면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해 주동적으로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도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에서 죽었다. 재주가 뛰어나 젊은 나이에 장원급제를 한 경력이
있으며, 학문도 깊고 높아 당대의 명망있는 선비들과도 깊은 교유를 맺었다. 특히, 그가 교유한 친구들은 주로
서인의 소론파(少論派)들로 최석정(崔錫鼎)· 조지겸(趙持謙) ·임영(林泳)· 오도일(吳道一)·한태동(韓泰東) 등이
었다.
공은 타고난 성품도 뛰어나 지기(志氣)가 고상하고 견식이 투철해 여러 차례 상소에서 보여준 것처럼 시비를
가리는 데는 조리가 정연하고 조금이라도 비리를 보면 과감히 나섰고 의리를 위해서는 죽음도 서슴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 왕은 곧 후회했고, 충절을 기리는 정려문을 세웠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풍계사(豐溪祠)에 제향
되었다.
공의 저서로는 ≪정재집≫ 14권, 편서로는 ≪주서국편 周書國編≫, 글씨로는 박임종비(朴林宗碑)·예조참판
박규표비(禮曹參判朴葵表碑)·박상충비(朴尙衷碑) 등이 있다.
위에 소개한 선생의 한시는 새벽에 길을 떠나며 느끼는 감회를 주제로하여 5언 율시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