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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문으로 올렸다가 신청자가 적어 취소했던 예산 지역 여행을 신청하셨던 분들과 함께 답사여행으로 다녀왔습니다. 모두 5명이 함께 하며 높아진 기온에 싸늘한 기운이 싹 가신 부드러운 봄바람을 맞으며 좋은 곳에서 노그적노그적 봄을 즐겼습니다^^
3월말 날씨가 며칠째 25~26도를 오르내릴 정도로 올라간 이상기온에 여기저기서 순서없이 봄꽃이 일제히 피어납니다. 날이 더워지니 핀 꽃들도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바삐 꽃잎을 떨어뜨리는게 안타까웠습니다.
오늘 밤부터 내일까지 바람을 동반한 비바람이 분다합니다. 피어있는 꽃은 떨어지고 새순을 올리던 꽃과 나무는 흠씬 비를 맞고 쑥 올라오겠네요. 앞으로 남은 봄날이 어떻게 변하며 계절이 바뀌어갈지 궁금해 집니다. 봄날 행복하세요~~^^
그럼, 시간순대로 사진을 올립니다~~
아침에 9시에 만나 예산에 도착하니 12시가 넘어 갑니다.
점심을 먼저 먹고 일정을 시작하기로 하고, 예정했던 식당을 찾아가니 월요일 휴무는 쉰다네요. 대체 식당으로 찾은 바로 옆에 위치한 홍성 '그때그집' 식당에서 먹습니다.
돌솥밥정식입니다.
반찬 숫자도 많고 나물 종류도 여럿 있어 대체로 무난한 편입니다.
밥을 먹고 나오면서 마당에서 막 꽃잎을 연 할미꽃도 구경하고, 주인장에게 부탁해 매발톱 모종도 얻어왔습니다.
▼ 홍성 이흥노의집 / 이응노 기념관
먼저 도착한 곳은 홍성과 예산 경계선에 위치한 고암 이응노의집과 이응노기념관입니다.
화가 이응노의 꿈이 시작된 곳입니다.
실개천 돌다리를 건너면 잔디마당이 넓게 펼쳐집니다.
개천을 건너 잔디밭에 들어서며 우선 파노라마 사진으로 주변 위치를 익혀 봅니다.
사진 상 왼쪽 공사장 칸막이 쳐진 곳이 연지 ~ 잔디마당과 카페 ~ 이응노기념관~이응노의집 순입니다.
고암 이응노생가 기념관은 대지 면적 2만596㎡, 건축 면적 1,002㎡로 전시 홀, 북 카페, 다목적실 등 전시 시설을 중심으로 하는 기념 공간과 초가로 지은 생가, 야외 전시장, 연밭, 산책로 등을 갖추어 2011년 11월에 개관했습니다.
먼저 북카페와 기념관 사이 짙은 두 건물 사이에서 꽃을 피운 벚꽃이 화사하게 시선을 사로 잡습니다.
이곳은 마당 안으로 나무를 많이 심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학예사님 설명을 들으니 마당의 흙을 돋은거나 나무 배치 등도 자료를 토대로 했다합니다.
아이고야, 첫머리의 기념관부터 들어가려했더니 이곳도 월요일이라 휴관이라네요. 원래 진행하려던 날은 화요일이라 문제가 없었는데 오늘 월요일로 요일을 바꾸어 오며 미처 휴관 체크를 못했네요^^;;
아쉬운 마음 안고 기념관 건물 외관을 둘러 봅니다.
이 기념관은 고암 이응노 선생이 태어난 홍천마을에 조성된 문화공간으로 이응노 화백의 초가집 생가와 함께 이응노의 작품을 전시하는 현대적 양식의 건물로, 이 기념관 건물은 2013년 한국건축문화대상 ‘대상’ 수상작으로 멋진 건물 자체가 작품입니다.
이 풍경은 기념관에서 앞산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입니다.
외관을 살피고 있는데 점심을 먹고 들어오던 직원들이 마침 기념관으로 들어가길래 건물 안만 살짝 들여다보기를 부탁해 현관 입구에서라도 기념관을 볼수 있었습니다.
기념관은 주변의 지형들과도 어울리게 설계되었다 하는군요. 앞산인 월산과 용봉산의 높고 낮은 산세와 건물의 스카이라인이 일치한다거나, 마당의 평평하지 않고 낮은 굴곡이 있는 것은 기존의 논두렁 등의 형태를 그대로 살린거라합니다.
시선을 건물 안으로 두면, 검은색으로 노출된 낮은 천장, 시멘트 느낌의 벽면, 안쪽 바닥의 높낮이 등은 마치 형무소를 연상케 하는데 이응노 화백의 걸어온 질곡진 삶을 담은 거라 합니다.
창이 난 곳을 벽으로 가린 것도 빛이 들어오며 만들어내는 공간의 의미를 담고 있으먀, 나누어진 창틀 안팎은 어울림의 의미가 있다합니다 .
고암 이응노 (1904~1989) 화백은 충북 홍성 출신의 화가입니다.
동양화의 전통적 필묵을 활용해 현대적 추상화를 창작한 한국 현대미술사의 거장으로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동서양 예술을 넘나들며 ‘문자추상’, ‘군상’ 시리즈 등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이며 유럽 화단의 주목을 받았고,유럽과 미국에서 수많은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이응노가 살았던 시대는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의 치욕, 해방의 기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던 격동기였습니다.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향한 고통도 있었습니다. 이응노는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을 삶 속에서 고스란히 겪었습니다.
1960년대에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러야했고 다시는 그리던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열일곱 나이에 상경해서 도쿄로, 다시 서울로, 또 파리로, 쉼없이 이어지는 긴 동선 속에서 예술 세계와 함께 한 인간의 의식 세계가 확장해 가는 여정 또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념관 입구에 있는 암각화 탁본. 수덕여관 바위에 새긴 문자적 추상화 중 하나입니다.
이 탁본도 수덕여관 바위에 새긴 문자적 추상화 중 하나.
기념관 관람은 이 탁본으로 만족하고, 다음에 기회되면 또 들려 관람할 기회가 있겠지요 ^^
이 기념관에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동양적인 화풍 위주로 전시되어 있으며, 많은 작품들이 대전이응노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기념관 관람은 세세히 못했지만, 학예사님의 짧은 설명도 좋았고, 기념관 주변과 날씨가 좋아 여기 머물러 있는 것 자체가 좋았습니다. 이번 여행 컨셉도 봄나들이 그 자체가 컨셉이였으니 만족스럽고, 기념관에는 연중 언제 방문해도 늘 이응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합니다.^^
주변 도로에는 꽃이 만발했는데 기념관에 식수된 꽃나무들은 거의 낙화한 상태. 그래도 한 그루 한 그루가 도드라지는 멋진 수형이 보기 좋습니다. 우리도 바닥에 그림자로, 유리창에 반사되는 사진으로 작품(?)을 만들어 봅니다.^^
▼이응노의 집(생가)
기념관에서 생가터로 이동합니다. 주변에 무슨 연구관이 들어오기 위해 공사중~
"이응노라는 한 예술가를 기리는 기념관이자 미술관으로 시작해, 차츰 예술 문화 자료실과 입주 작가 스튜디오, 한옥 스튜디오 등 시설과 프로그램을 꾸준히 확장하며 새로운 예술을 품은 마을, 마을과 소통하는 예술 공간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홈피 퍼옴)
이응노 생가지입니다.
고암이 열아홉 살 때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그림에 뜻을 품었던 이 땅은 수려한 용봉산과 월산, 옛 마을과 논 사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응노는 1940년대에 고향집 스케치를 여러 장 남겼습니다. 그가 그린 고향집 그림들과, 자신의 옛집에 대해 “수양버들이 늘어진 사이로 옛집의 기역자 모습이 보이고” 라고 서술한 글, 지역인들의 증언 등을 참고하여 이곳을 생가지로 추정하여 2010년에 현재의 안채와 헛간채를 새로 지었다합니다.
학예사님 설명 덕분에 초가집이 더 의미있어 보였습니다.
다른 곳의 초가집들은 간혹 가짜 짚을 쓰기도 한다는데 이 초가집은 마을 사람들이 매년 11월이며 진짜 짚으로 이엉을 엮어 헌 것은 걷어내고 새 이엉을 얹는다 합니다.
그래서인지 지붕 두께가 상당히 두꺼웠습니다. 지붕을 얹을 때면 굼벵이도 나온다네요.
우리 눈에는 안보였는데 지붕 짚 속에는 새들이 엄청 많이 집을 짓고 살고 있다합니다. 사진은 마침 둥지를 지을 자재(?)를 물고 처마밑으로 날아드는 참새입니다.
원래 있던 생가터가 아니랍니다. 생가지로 추정해 새로 지은지 얼마되지 않아서 이기도 하고, 마을 주민들이 돌아가며 일주일에 한번씩 집을 쓸고 닦는다합니다.
그래서인지 주변도 깔끔하고 마루에 번지도 없이 윤이 반지르하게 흘러 준비해 간 깔판이 소용없었습니다. 불어오는 봄바람이 어찌나 부드럽고 시원하던지 여기 마루에 한참을 머물다 갑니다 (사진: 깜지곰님)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여유있게 쉬는 시간을 갖고 싶었는데 오늘 그 소원을 이룬 날입니다. 조금 더 욕심을 내어 마루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이고도 싶더군요. 다른 관람객 두 명 외에는 우리 밖에 없어 참 한적하고 좋았습니다.^^
저만 연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봅니다. 여름이면 연꽃이 피어 아주 아름답다고 그때 또 오라하시네요~
요즘 차박 많이 하던데 딱 좋을거 같습니다.^^
오늘은 일정표에 매이지 않고 좋다 느끼는 곳에서 한참을 머물며 여유있게 즐깁니다.
소풍 나온 젊은 언니들 같으시네요.ㅎ~
기념관 앞에 북카페도 분위기가 좋다하는데 오늘은 마당의 부드러운 봄바람이 더 매력적입니다.
지금 있는 곳이 내포문화숲길의 한 구간에 속하네요. 역사,문화적으로 익숙한 곳이 많은 곳이라 언제 기회되면 이 장거리도보트레일도 한번 걸어보고 싶네요.^^
오늘 하루 종일 여기에 있으라해도 있을 거 같은 좋은 곳이였어요. 다음 관람을 기약하며 수덕사로 향합니다.
▼ 예산 수덕사 수덕여관
예산 수덕사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오늘 방문 목적지는 수덕여관이라 수덕사는 입구에서 목만 쭉빼 바라보고 수덕여관으로 갑니다.
수덕여관은 방금 다녀온 이응노 화백이 머물던 고택으로 기념관,생가지와 함께 이응노를 엮는 한 묶음인 곳이지요.
수덕사 경내에는 시선을 끄는 초가집 한 채가 있습니다. 일주문에서 선미술관을 지나 좌측에 있는 수덕여관입니다.
고암 이응노 화백이 한국전쟁 때 피난처로 사용한 집으로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고암이 머물기 전 그에 앞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이 불교에 심취해 묵었던 집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왔을 때는 한글로 '수덕여관'이라 쓴 간판이 걸려있었는데 지금은 안보이네요.
아, 여기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외부 공사중이라는 안내문이 붙고 문이 잠겨 있습니다.
이응노가 새긴 암각화가 있는 바위 두 개는 대문 밖에 있어 돌아봅니다.
기념관에서 우리가 사진을 찍은 탁본을 뜬 바위입니다.
'이응노는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에서 귀국해 옥고를 치렀고, 1969년 사면된 뒤 다시 프랑스로 떠나기 전 이곳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바위에 2점의 문자적 추상화로 암각화를 남겼습니다. 왼쪽은 높이 17m, 높이 85cm이고,
또 하나는 둘레 7.6m, 높이 75cm의 바위에 문자체로 그림을 조각하였는데, 글자 같기도 하고 사람 모양 같기도 한 것이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무엇을 그린 것이냐고 묻는 이들에게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영고성쇠(榮枯盛衰)의 표현했다. 여기에 네 모습도 있고, 내 모습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안내서에서 발췌)
암각화를 둘러보며 오른쪽 측면을 살피니 마당으로 연결되는 길이 열려 있어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익숙한 거목 소나무가 여전히 시원스레 키 자랑을 하며 안마당을 지키고 있습니다.
마당 끝트머리 바위에 걸터 앉아 구름꽃님 소풍 가방을 열어 차와 간식도 즐겼습니다~
수덕역관은 고암 이응노 화백의 고택으로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이 3년간 머문 적도 있었고, 이응노 화백이 1988년에 작고 하실 때까지 머물렀던 곳입니다. 지금은 원형을 복원하여 각종 문화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안내 펌)
"고암 선생이 쓰시던 방" 이라고 적힌 마루턱에도 걸터 앉았다갑니다.
고암은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이 공간에서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수덕사 주변은 지금 벚꽃이 만발입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꽃비가 내리기도 합니다. 신발에 먼지가 뽀얗게 얹혔네요~^^
벌써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습니다. 서둘러 추사고택으로 향합니다.
▼ 예산 추사 김정희 고택
예산 추사 김정희 고택 도착.
오늘은 작정하고 추사고택과 추사기념관, 그리고 주변까지 둘러볼 요량으로 나선 길인데 앞전에 다녀온 곳들도 좋아 늘어지는 바람에 오늘도 추사고택은 시간이 모자르네요.
추사고택은 고택 자체도 단아하고 품격이 있어 둘러볼 곳이지만, 봄이면 예산 추사고택 일원은 꽃동산을 이룹니다.
특히 노란 수선화꽃이 유명하지요.
단정하고 당당한 담장 주변에 백목련, 자목련, 매화, 벚꽃이 어우러지는 봄 풍경이 너무 고급져 서둘러 왔음에도 이상기온으로 자목련 빼고 다른 꽃들은 벌써 다 시들었네요. 4일 전 올라온 사진에는 꽃이 쌩쌩하던데 어찌 이리 급히 졌다지요~아쉽~안타까움~
사랑채로 들어섭니다. 여전히 단아하고 위엄이 어리었네요.
모란 한 그루가 금방이라도 꽃봉오리가 맺힐 듯 잎새가 벌써 푸르러졌습니다.
올해는 어느 꽃이든 개화시기 마추기가 정말 더 힘들거 같습니다~
포실포실한 마당도 여전합니다. 잡초 하나 없이 말끔합니다.
오늘은 기여히 맨발로 마당을 걸어보리라 작정했음에도 에고 이런 평소 안신던 롱스타킹을 신고 오다니~
또 다음을 기약해야 겠습니다.
추사고택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가 여덟 살 무렵까지 머물던 곳입니다. 추사 집안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당대의 세도가로,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추사의 11촌 대고모였다고 하니 그 위세를 짐작할 만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행복이 집안의 영광과 늘 같은 것은 아니어서 <세한도>에는 그의 쓸쓸한 삶이 오롯이 그려져 있습다. 추운 겨울, 한기 서린 한 그루 소나무로 그려진 그의 고독한 삶이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은 예술이 가지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하는군요.
벌써 5시가 넘어갑니다. 그림자도 길어 늘어지고 햇볕이 점점 약해지네요.
에효 오늘 또 서두르는 발걸음이 되어 버렸어요~~^^;;
남쪽을 보고 앉은 사랑채 모란꽃 앞에는 지나치기 쉬운 볼거리가 하나 있으니 '石年(석년)'이라고 쓰여 있는 돌기둥입니다. 해시계를 받치던 돌이라합니다.
마당 밟기는 포기하고 또 하나의 눈을 동그랗게 만든 자목련 앞으로 일제히 달려갑니다.
이상하게도 고택 밖의 꽃나무들은 아직 꽃이 싱싱한데 고택 담장 주변 꽃들만 떨어졌네요.
다행히 꽃이 좀 늦게 피는 자목련이 우아한 자태로 꽃을 소담스레 피웠습니다.
와!!! ~~
이렇게 크고 꽃이 많이 달린 자목련은 처음 봅니다.
어디선가 꽃 향기가 난다했더니 자목련 꽃향기였네요.
향기에, 탱탱하고 실한 꽃잎까지~
담장 쪽문과 어우러져 한창 절정인 꽃이 어찌나 고급지고 품격있어 보이는지 감동~감탄~감격~~~~^^
꽃송이가 많기도 많습니다~
한 송이 한 송이가 어쩜 그리 크고 소담스러운지요. 꽃잎이 여러 겹이에요
색감은 뭐라해야 할까요~~??
밝은 자주빛??
대비되는 흰색은 흰색이라기 보다....음....밝은 우유빛??
아무튼 두 색이 어우러져 너~무 너~무 환상적입니다.ㅎㅎ~
찍고, 또 찍고~~
아무리 찍어도 그 실력은 그 실력일 뿐~~
아름다움을 그대로 옮기지는 못하네요 ^^;;
참 많은 사진을 찍고, 또 삭제하고~~
많이 남지 않은 해가 있는 시간을 이 나무 아래서 거의 소진했어요.
빛의 방향 따라 색감이 달라보이기도 하니 어쩔~~~ㅎ
그나마 다행인건 관람자가 우리 밖에 없었다는 거~~~넘 좋았어요 ^^
빛이 약해진게 좀 흠이였지만 워낙 자태가 고와 그럼에도 아름다움은 치명적(^^) 이였어요. 어느 분이 너무 좋다고 소리를 지르셨으니까요~~ㅎㅎ
오늘 소녀같은 구름꽃님도 고택 답사에 걸음이 바쁘셨네요.
아무래도 다음에 한번 더 추사고택만 원포인트로 날을 잡아 여유있게 돌아보고 싶어요 ^^
오늘 두 분의 다정함은 더 빛나시네요 ^^
잠만보님이 드라이버로 수고를 만땅 해 주셨답니다. 다시 감사드립니다.^^
잠만보님은 특히 자목련을 좋아하신다니 금상첨화였어요~
두 분 함께 좋아하시고 즐기시는 모습을 뒤에서 사진에 담으며 저도 흐뭇한 미소가 흐르더군요 ^^
근엄하고 위엄이 서린 고택과 위풍이라는 단어가 생각날 만큼 대단한 자목련이 참 잘 어울리는 지금입니다.
해가 뒷산으로 떨어지네요. 빛이 더 무더지기 전에 냉큼 수선화가 있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수선화도 일찍 피어 지금이 절정입니다. 오늘 우리 방문은 일찍 핀 덕을 보네요^^
금잔옥대(金盞玉臺) '수선화'는 추사 김정희선생이 아끼고 사랑한 꽃입니다.
추사가 제주 유배시절(1840∼1848) 겨울을 이겨내고 자라는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에 반해 '칠언시(七言詩)'를 비롯해 수선화를 노래한 여러 수의 시도 지었을 정도입니다.
추사고택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지난해 수선화를 추사고택 주변의 산책로와 화순옹주 홍문에 많은 양의 수선화를 심어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하는데 오늘은 늦어서 인지 우리 팀이 이 고택의 주인장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근자에 깜지곰님 뵐 기회가 잦은 편인데 아주 명랑하고 유쾌하게 여행을 즐기시네요.
두 분 다정함도 더하시는거 같고~~^^
수선화 담장을 지나 쪽문을 하나 더 넘으니 추사 김정희의 영정을 모시는 추사영당이 나옵니다.
영정 액자의 유리가 반사되어 영정 모습이 명확하지 않네요.
사랑채에서 사당으로 가는 길을 내려옵니다.
담장을 따라 언덕이 완만하게 올라가네요.
안채로 들어섭니다.
반듯한 댓돌이 마음에 듭니다.
추사의 글과 서체를 볼 수 있으며, 오른쪽 방이 화순옹주가 지내던 방입니다.
추사고택이 현재 자리에 있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추사의 증조부로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이 주변 신료의 질시를 받아 서울에 있던 집을 옮겨 올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고, 두 번째는 영조가 직접 용궁리 일대의 땅을 하사하고 충청도의 53개 군현에서 한 칸씩의 건립 비용을 염출해 53칸의 집을 지어 주었다는 주장으로 뒤의 의견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합니다.
쪽문? 중문을 통해 기념관-사랑채-안채-사당이 지어지는데 문틀이 프레임처럼 멋진 풍경을 담네요.
문을 닫을 시간이라 나가라 하는데 한복을 차려입은 일행 몇 분이 이제사 도착을 해 조금만 있게 해 달라 사정사정이네요~
덕분에 이런 풍광도 하나 담기네요~
지도 상에는 이쯤에 화순옹주홍문이 있던데 ....??
고택을 나와 화순옹주 정려문과 백송공원 쪽으로 이동합니다.
벚꽃이 조금만 남아있어도 울긋불긋 꽃대궐 같았을텐데요. 조금 아쉬움~~^^
고택 뒤로 낮은 야산이 있는데 이름이 용산이래요.
용산에 난 오솔길로 올라서 내려다 본 고택이 단아하게 자리잡고 있네요. 집 주변 벚꽃은 아직 꽃들이 피어있어 고택이 훨씬 화사해 보입니다.
오솔길로 올라섰습니다. 추사기념관 앞 추사 묘까지 내려다 보입니다.
화순옹주의 남편인 월성위 김한신묘역 부근과 화순옹주정려문이 있는 곳인데 시간이 없어 담장 옆길로 지나만 갑니다.
백송공원입니다. 여러 그루의 백송이 자라고 있지만 이곳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은 없고, 여기서 도로로 내려서 버스정류장이 있는 곳까지 더 내려가야 합니다.
백송은 중국이 원산지입니다.
잎은 3개, 얼룩얼룩한 수피가 마치 예비군복 모양 같아 구분하기 쉽습니다.
천연긴뎜물 백송이 없는 곳에 백송 안내판이 붙어 있고, 해당 백송을 가리키는 안내판도 없어 이곳에서 한참을 찾았습니다.
도로를 따라 더 내려오니 길가에서 바로 보이는 낮은 언덕배기에 있네요.
뒤는 김정희의 고조부 김흥경의 묘입니다.
천연기념물 제106호 예산 용궁리 백송입니다.
수령은 약200살로 추정되며,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입니다. 줄기가 밑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두 가지는 죽고 한 가지만 남아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나무껍질은 거칠고 흰색이 뚜렷하며, 주변의 어린 백송들과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추사가 조선 순조 9년(1809) 10월에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서 중국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필통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옆에 심었던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이제 막 언덕 너머로 떨어지는 석양이 백송의 흰색 수피를 더 밝게 합니다.
오래오래 장수했으면 좋겠네요~
오늘 예정했던 곳을 다 들리지는 못했어도 방문한 곳마다 특징이 있고 분위기가 좋아 만족스런 하루였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예산지역을 1박2일로 엮어 다시 방문하고픈 곳입니다.
어느덧 해넘이 까지 보고 말았네요~~
서울로 향하는 길이 노곤합니다.
수고해 주신 잠만보님과 함께 동행한 회원님들 고맙습니다.
다른 봄길에서 또 반갑게 뵙겠습니다.^^
첫댓글 이응노 기념관 그냥 봤으면 모를 학예사님 직원 설명 듣고 건물을 보니 한국건축문화대상 수상작 건물이 대단 합니다 .
추사 김정희에서 백송'소나무도 40년 지나면서 흰색 줄기로 변하는 소나무 보면서 기을 받고 왔습니다 .
저는 항상 이리 좋은데 왜 신청을 안해서 취소가 된나 아쉼움이 남는 하루 였습니다 .
저만 멋진 길을 걷고온 하루 였습니다 .
후기를 천천히 읽어보니 어제의 하루가 몸은 힘들었지만 많이 많이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함께한 길벗님들 덧분 입니다.
감사합니다.
토로님 후기에는
여행이 실감 나고 맛깔스럽고 감성이 살아 있어요
사진도 파노라마로 잘 찍으셔서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네요
좋은 곳 ~ 토로님 덕분에 잘 다녀왔어요
감사드립니다 💓
자세한 후기덕에 가본것처럼 느낌이 오네요~~
감사하고 수고하셨습니다.
멋지네요 포토에세이,
수일내에 따라 해 보고 싶습니다.
잘 읽고 봤습니다. ^^
햇살 따스한 봄날 아침
포토에세이 한편 잘 감상하고 갑니다.
홀로인 듯, 함께 걷는 여행길
오늘도 좋은길 따라 잘 걸은 기분입니다.
항상 좋은길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