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고난/사랑의 외침
Text 1Jh 4,9-10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 어느 깊은 밤, 하늘의 천사들이 한 마을에 나타나 말하기를, “기쁜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한 구주가 나셨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리니 그 아기가 바로 그분이다.” 그날 밤, 베들레헴의 작은 마구간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분은 죄에 빠진 인생을 사랑하사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그 자체가 예수님께는 고난이었고, 그 고난은 죄인인 인간을 향해 하나님께서 외치시는 사랑의 외침이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3주일입니다. 금년 사순절에 저는 예수님의 고난이 갖는 의미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며 은혜를 받고자 하는데, 오늘은 ‘고난/사랑의 외침’이라는 말씀을 성경 요일4,9-10 말씀을 본문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은혜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2. 먼저, 9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이 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지신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내지신 예수님을 ‘독생자’라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외아들, 즉 자녀라고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사람이 되게 하여서, 죄로 물들어 악하고 추악한 세상에 보내신 것이 바로 놀라운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놀라운 표현은 독생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자신을 통하여 죄인인 인간을 살리려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영광, 혹은 영광스러운 실재이신 독생자를 죄인인 인간을 위해 세상에 보내 주심은 거룩한 사랑의 신비와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도 엄청난 고난을 받음으로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3,16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놀랍고도 기이하며 엄청나게) 사랑하사”란 표현이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 세상에 계시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만남을 가지신 대상을 살펴보면,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보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멸시받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재물을 사랑하여 많이 모았지만,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고 왕따를 당하고 있는 삭개오를 찾아가셔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삭개오는 변화되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눅19,1-10)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녀를 돌로 치려 했지만, 예수님은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8,7)는 말씀으로 군중을 해산시켰고,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막2,17에서는,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린다면서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은 싫어하시고 죄인만 좋아하셨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아니지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세상에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죄인인 줄 모르는 사람에게서 비난과 핍박을 당할 줄 아시면서도 그들을 경계하여 자신이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게 하고자 그들을 책망하신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교사나 선지자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가장 귀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분의 오심 자체가 고난이며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생에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외침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고난은 단순히 십자가에서 당하신 신체적인 고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온 생애를 통하여 죄성에 갇힌 인간의 모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또 영적인 고통이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은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고난을 자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단순히 ‘불쌍히 여기다’라는 감정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 고난 속에서 우리를 향하신 뜨거운 사랑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사랑의 절정이며 인류를 향한 사랑의 호소였습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주님께서 고난받으심을 되새기는 사순절을 맞아 예수님께서 큰 사랑으로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다 와서 죄 용서함을 받고 평안과 기쁨을 누리라고 외치시는 사랑의 외침을 다시 들을 수 있기기를 축복합니다.
3. 다음, 10절을 보겠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지 못하고 죄와 비참과 고통 아래 있을 때, 또한 용납될 수 없고 부패하고 더러워서 거룩한 피로 우리의 죄 씻음 받을 자격조차 없었던 때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먼저 하신 그 사랑은 놀랍게도 우리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사랑해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에, 선을 행했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인이었을 때(롬5,8),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먼저 사랑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내가 잘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외면할 때도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원망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는 부활하셨다는 얘기를 듣고도 부끄럽고 죄송하여 갈릴리 바다의 어부로 되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먼저 찾아가셨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며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먼저 사랑하시고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제물’(atoning sacrifice)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화목제물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바쳐진 희생 제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를 통해 영원히 살고, 하늘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며 그와 함께 영원한 복과 영광 안에서 살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아들의 임무는 인간의 죄를 사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우리를 하나님의 율법과 저주 아래 죽고, 그의 몸으로 우리의 죄의 삯을 치르려 십자가에 달리고, 영혼의 상처를 입고, 옆구리에 창이 박히고, 우리를 위해 장사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요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화목제물이 되셨기에 그분을 믿고 맡기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53,11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되신 것을 만족하게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만족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충분히 모든 사람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신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종종 계산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해야 나도 좋아하지.’ ‘저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면 나도 잘해줘야지.’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을 때, 먼저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희생제물로 십자가에서 피를 철철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 인생들을 향한 절정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십자가에서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들을 향한 조용한 외침이십니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이래도 못 믿겠느냐?’
여러분, 주님의 고난은 우리가 받을 은혜의 길을 열어 주신 사랑이셨습니다. 금년 사순절에 주님께서 고난받으신 것을 되새기면서 주님께서 죄인된 저와 여러분에게 부르짖으시는 이 사랑의 외침을 꼭 들으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4. 대통령의 고집 때문에 그동안 애를 태우던 의료 대란이 진정되는 기미를 보여 너무나 다행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 제일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나라 중에 하나가 이탈리아였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코로나19가 급속히 퍼질 때, 다니엘라 트레찌(Daniela Trezzi)라는 간호사는 롬바르디아 지역의 한 병원에서 중환자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도 감염될 위험을 알면서도 끝까지 최전선에서 일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코로나19에 감염되었고, 심한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국 뉴욕에서 코로나 환자들이 급증할 때, 켈리 윌리스(Kelly Willesee) 라는 간호사는 수많은 확진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녀는 자신도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동료 간호사들이 부족한 상황에서 “내가 아니면 누가 이들을 돌보겠는가?”라며 자원해서 밤낮없이 일했습니다. 결국 그녀도 감염되었고, 중증으로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환자들을 걱정하며, 동료들에게 “끝까지 환자들을 돌봐 주세요” 라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한국에서도 코로나 환자들을 돌보다가 희생된 간호사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박선영 간호사 는 대구의 한 병원에서 일하면서 코로나 중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습니다. 그녀는 병실에서 감염 위험이 높은 상황에서도 환자들의 손을 잡아주며 끝까지 곁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녀도 결국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녀들의 희생을 기리며 많은 의료진이 “그녀의 헌신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들의 희생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슬픔을 남겼지만, 그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과 희생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라는 사랑의 외침을 들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의지하여 주님의 품에 안겨 구원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