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만나’(Manna
for five days)
(672)
러시아선교를 위해 미리 준비하신
3가지……⑤
세계선교의 주체이신 주님께서 마지막 승천하시면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28: 19-20)②
지상최대
대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명을 받은 모든 성도들은 순종하여 세계선교의
대업을 이루기 위하여 믿고 깨달은 사람은 가든지! 보내든지! 실천해야 합니다.
필자가
강권적인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러시아의 너희들에게
주리라’ 한 땅에 막내 딸을 앞세우고
우리내외 3답답(말을 못 알아 들으니 귀 답답,
말을 못하니 입 답답,
글을 읽을 수 없으니 눈 답답)이가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망막하여 주저하고 있을 때
가나안으로 향하는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을 상기했습니다.
“강하고 담대 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맹서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1:
6)
‘무식이가
용감하다.’ 이미 우리 내외는 국내에서 기도로 내공을 쌓아 뜨거운 성령의 사람이니 무엇이 두려우랴?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때에 러시아선교를 위하여 3가지를 예비하고 기다리셨다는 것을 늦게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Ⅰ.
나 같은 3답답이를 위해 고려 인들을 먼저
예비하셨습니다.
한국인이 러시아에 이주한 것이 표면적으로는 나라
잃은 독립투사들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헐벗고 가난을 위하여서
왔지만, 내적으로는
러시아선교에 준비를 위해서였습니다.
러시아에는 두 종류의 고려인이 있습니다. 먼저는
원동에 집중해 있었던 큰 땅 백이(다슈켄트, 알마타에 이주한 고려인)는 1937년 스탈린의 이주정책으로 황무지 갈밭에 쏟아 놓아 살기 위해 러시아인들 과 어울려 근면, 성실하여 농업으로 기반을
잡았고, 부모들의 뜨거운
교육열에 의해 러시아전역으로 출세의 길을 찾아 각지로 흩어져 나갔으며,
한국을 잊고 러시아 언어와 문화에 동화 되여 노어에 능통하여 행정업무에 크게
기여하게 되였고, 또
다른 한 부류는 작은 땅 백이(사할린 동포)들은 일본영토에 살다가 2차 대전 전쟁 피해로 전승국인 러시아 땅이 돼서 러시아로 편입된 동족들인데 일제치하에서와 러시아로 국적을 바꿨으나 집단
생활로 학교에서 모국어인 한국어를 배우며 일상 생활을 하게 되어 한국어는 자유로우나 노어가 부족한 두 부류의
한인들이다. 필자의
답답한 귀와 눈과 입을 두 부류의 고려인 들을 대동하고 별 어려움 없이 사역했을 뿐 아니라 초기 러시아에 들어온
한국인들(정치인, 경제인, 선교사)도 다 하나님의 예비하심에 큰 은혜를 입고 선교기반을 닦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Ⅱ.
이 때에 선교를 위해 1919년부터 한국감리교가 시베리아 선교에 장을
열었습니다.
나라를 잃고 해외에서 고생하는 동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러시아에
한국감리교회가 선교를 시작된 것은 1919년 미국 남 감리교회가 9월
제2회 매년 회 직후에 원산에서 모인 선교사회에서 램버트감독이
스록스(도마련)와 양주삼을 위원으로 임명하여 불라지보스톡과 시베리아 및 만주각지의 선교사업 할
곳을 조사케 하므로 시작 되였다. 1920년 5월에 미국 남 감리교 선교부에서 만주.
시베리아 선교 사업 안이 정식으로 가결 되여 램버튼감독은 크램을 시베리아. 만주지방 감리사로 임명하여 크램
감리사와 정재덕선교사, 양주삼목사가 1920년 9월에 선교여행을 떠나 일년
만에 돌아오면서 정재덕목사는 현지에서 계속 선교케 하여 급성장
하니 1921년에 시베리아. 만주선교연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1929년
통계를 보면 20개 교회와 973명의 성도들로 부흥했으나 1917년
볼세비키혁명으로 공산 주의자 들의 기독교 탄압이 본격화되어 핍박을 가하니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옮겨갔으나 끝까지 남아서 선교하 던 김영학감리사는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1933년 11월에 순교하므로 한국감리교회의 러시아선교는 지하 카타콤으로 숨어 선교활동이 동면에 들어
갔다.
(한국감리교회의
역사
1권
PP. 389-394)
러시아 선교초기에는 나름대로 자유로웠었으나 날이 갈수록 정 교회의 견제가 정치권에 미쳐 개신교 선교의 제동이 걸리게 돼
교단 등록이 안되면 선교가 불가한 종교법이 발효되어 부득이 교단등록을 하게 됐다.
교단등록은 러시아 내 3개 주(한국의 특별시 와
도(道)의
교회가 모여서 정관을 만들어 종교성에서 통과하여야 되는데 처음에 KMC 명의로 등록서류를 제출했다가 외국교회 명으로는
불가하다고 반송되어 러시아에는 감리교가 없어서 RMC로 서류를 접수시켜 1996년
1월 17일에 정부의 등록을 필하여 자유롭게 선교를 하였는데,
또1999년 12월 말까지 강화된 종교법에 의한 재 등록하라는 법이 발표되니
난감했다. 50년 전 러시아선교기록이 있어야 되는데 그 때에 한국감리교화사 1권에 시베리아 선교
기록을 번역해서 변호사를 찾아가 상의하니 된다고 하여 수수료 1,500달러를 들여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러시아내의
선교기록이 있어야 한다기에 우수리스크 창조교회 장명수선교사의 도움으로 불라지보스톡 시청 보관소에서 A. 4
용지 53매 분량의 기록을 지원받아 제출하여 1999년 6월
10 일 재
등록을 받아 한국의 172배나 넓은 전 러시아를 마음껏 선교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 받았다.
Ⅲ.
한국 경제 발전과 교회 부흥이 크게 작용했다.
세계선교역사상 선교 1세기 만에 피 선교국이
선교하는 나라로 급 부상한 것은 유래 없이 신 기원을 이룬 한국교회가 세계 171
국에
270,205명(한국세계선교대회 2015, 12월말 통계)의 선교사들을 파송 할 수 있어서 필자도 그 힘에
편승하여 러시아선교에 임할 수 있게 된 행운아다.
복음성가에 ‘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 한 없이 주는 사랑’이라듯 6.25 당시 21개 UN연합국의 사랑의 빚진 나라다.
그들의 참전으로 당한 희생, 재정적인 후원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제
한국이 세계의 빚진 나라, 고마운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신앙적으로 빚을 갚아야
한다
◈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우리들이 따르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만 하면(고후1: 20) 기적의 주인공이 된다. 왜 순종 못하는가? 내 생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 잡혀간 유다 인들을 살리려 에스더를
사용하셨다. 외삼촌
모르드개의 대언의 말씀,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이 말씀에 순종한 에스더의 신앙을 눈으로 보는 듯 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 시리로다” (시37: 5-6)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산에 올라가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다
했는데,(마17: 1-8) 3답답 필자는 우리 앞서 일하시는 주님의
권능을 믿고 예비하신 3가지를 활용하여 오후에 포도원 일꾼의 자세로 열심히 일해 전 러시아를 주름잡아 마음껏 ‘여호와 닛시’의 개가를 높이 불러 선교하리로다.
할렐루야!
◈ 한국의 러시아 선교는
정재덕감리사의 거룩한 순교의 피 위에 맺혀진 열매다.
2016, 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