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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홀로, 더불어, 가는 인생
1. 평생 잊지 못할 고마운 인연들
인생에서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혼자란 생각을 많이 했었다.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는데도 말이다. 사람들이 도와줘도 결국 나와 딸린 식구들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나 혼자 져야 한다고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역시 혼자 힘으론 안 되는 것 같다. 힘들 때마다 많은 도움을 받았었지만 특히 화재로 다 날리고 어려웠을 때,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성공까지 오진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혼자서 죽자살자 매달렸어도 말이다.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살았는데도, 역시 난 인복이 정말 많은 사람이다.
무엇보다 우리 종업원들. 나와 함께 똘똘 뭉쳐서 오늘날까지 오게 해준 가족들이 내 옆엔 있다. 특히 신정에서 처음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 그리고 위너스에서 만나 지금까지 같이 온 찬모와 카운터, 또 주신정 초기부터 함께 해온 고정멤버들, 그리고 이런저런 인연으로 지금 함께 있는 직원들. 모두 고마운 인연들이다. 잠시 인연을 맺었다가 스쳐간 사람들도 그렇고.
나 역시 종업원들을 가족처럼 대했지만, 그들도 내 힘든 스타일을 따라와 주느라 고생하면서도 잘 따라와 주었다. 내가 ‘고난’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종업원들 중엔 젊어서 우리 집에 들어와서 장가간 친구들도 서너 명되는데 다들 잘 산다. 결혼 할 때 난 월급 조금 더 주는 것뿐이고 특별히 신경 쓴 건 없는 거 같은데도.
김길영도 그런 친구들 중의 한 명인데, 지금 주신정 지배인으로 내 옆에서 수족처럼 도와주고 있다. 운전수 겸 비서 역할까지 해주고 있으니까. 나름대로는 길영이한테는 조금 더 신경을 썼는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신정에 들어와서 난 지금도 ‘꼬마’처럼 생각한다. 길영이 같은 친구들은 자기의 큰 고민 얘기도 내게 한다. 큰 고민이란 게 인생사, 집안일, 주신정 일 등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되도록 들어주는 편이다. 어디로 간다고 하면 말리는 편이고.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해서이다.
그런데 나 혼자서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어서 고맙다. 신정 시절에 만나 위너스에서도 주방을 맡아주었던 친구, 정유환. 주신정을 준비하면서 시설비가 자꾸 더 들어가서 돈은 더 필요한데 달리 ‘급전’해올 데가 없었다. 마침 주방장이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런데 교통사고 보상금으로 나온 2천만 원을 날 쓰라고 하는 게 아닌가? 눈물이 핑 돌았다. 너무 요긴한 돈이어서도 그렇지만, 그 마음이 고마워서였다. 그 친구는 지금은 우리 집 최초의 분점이라 할 수 있는 ‘아리랑’에서 일한다.
그동안 나랑 맺어온 끈끈한 인연들은 많지만, 지면상 주신정 개업 과정에서 내가 큰 도움을 받았던 이들 몇몇만 짚고 넘어가겠다. 친구들 도움도 많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힘이 되어준 친구들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근처 건물에서 고향 식당을 하던 권태범. 사회에서 만난 후배인데, 그 친구를 비롯해 장사하는 친구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내가 고깃집을 해야지 하고 마음먹었을 때, 그릇 사는 루트도 알려주고 “메뉴에 뭐를 넣으면 잘 된다, 그건 우리가 안 할 테니 네가 해라...” 하면서 챙겨줬다.
그리고 아리랑 식당 주인 권병오.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또 내가 처음에 아리랑을 할 때까지, 내가 힘들 때마다 내 옆에서 철저히 비서처럼 도와준 친구다. 모든 것을 그 친구한테 의지했었다. 또 걔가 무너지면 내가 도와주면서.
방송국 사람들도 빼놓을 수 없다. 주신정을 준비하는 동안에 “당신 힘들 거다” 하면서 일일 연속극 <서른살의 반란>의 배역을 준 김연진 PD, 그리고 김 PD한테 ‘빽’을 써서 나한테 배역을 주라고 한 김재형 PD.
그리고 동료 탤런트들. 노주현, , 서인석, 박용식 등등 신경을 많이 써줬다. 노주현 같은 친구들은 일산에서 녹화하다가도 뛰어와서 우리 집에서 회식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 집에 가면 탤런트 있다’는 광고 덕을 보게 해준 것이다.
손님들도 고맙다. 오랫동안 우리 집 고객이 되어주신 분들은 물론이고, 한 번이라도 와주신 분들이 모두 고맙다. 이 모든 인연들에 그저 감사한 마음 뿐이다.
2. 밖에선 착한 남자, 집에선 독불장군
우리 집 손님들은, 또 방송국 사람들도 그렇고, 대부분 나에 대해 “착하다, 겸손하다”고 한다. 솔직히 잘난 척 하는 마음이야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런 마음이 나오려 할 때마다 마음을 다져왔다. ‘겸손해야지, 성경의 반은 겸손하라는 얘기 아닌가...’
살면서 보니까 잘난 척 해서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암만 해봐도, 가게에서 손님을 상대해도 내 주장보단 상대방 주장을 받아들여야 편했다. 그래서 사실, 젊었을 땐 겸손한 척을 하면서 살았던 거다.
그런데 주변에서 “김종결이는 겸손하다”는 말이 나오는 거 보면, 이젠 내가 억지로 참고 겸손하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도 내가 잘 하긴 하나 보다. 내가 좀 손해보더라도 넘어가는 스타일이 몸에 배겼는지, 착하다는 말을 엄청 듣는다.
다들 날 보고 착하다고 하는데, 요즘도 난 가족하고 종업원들한테는 가끔 ‘지랄(?)’을 부린다. 가까운 사람한테만 화도 내고 까다롭게 군다. 그거 보면 내 성질이 편한 편은 아닌 거 같다. 탤런트들한테도 아주 친하면 성질 내고 한다. 그래서 남한텐 다 잘한다는 소리 듣는데, 가까운 사람들은 “너 성질 더럽다”고 한다.
그나마 나이 들면서 성질이 더해지는 건 없는데, 몸이 잘 받쳐주지 않고 피곤해서 그런지 짜증이 많이 난다. 푹 자고 나면 기분이 달라지는데, 잠이 좀 모자라다 싶으면 혹은 다른 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때가 있다. 그런 상태에서 집에 들어가면, 난 내가 그런지도 모르는데, 아내가 먼저 알아차리고는 한 마디 던진다.
“왜 성질 그렇게 내고 있어!”
난 어이가 없고 약간 억울(?)하기도 해서 반격을 한다. 말투가 벌써 곱지가 않다.
“뭐? 내가 무슨 성질 냈냐!”
아내는 이럴 땐 꼬리를 내리는 게 상책인 듯 싶은지 나긋나긋하게 나온다.
“들어오는 눈빛이 벌써 다른데? 왜? 가게 장사 잘 안 돼?”
가게가 잘 안 돼서 성질 부리는 적은 없다. 물론 많이 안 되면 좀 기분이 안 좋지만. 어쨌거나 가끔 가까운 사람들한테 성질을 부린다. 다들 날 보고 “사람 좋다”고 하는데, 내가 이중성격인지도 모르겠다.
난 울기도 잘한다. 원래 눈물이 많다. 원체 마음이 여려서도 그렇겠지만 탤런트 하면서 감수성이 예민해진 탓도 있다. 남들은 울지 않는 일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도 괜히 혼자 잘 운다. 같이 TV를 보다가도 어떻게 하다 보면 울컥해서 나 혼자 울고 있다. 다들 멀쩡한 표정인데도.
“성실하다”는 소리도 합창으로 듣는다. 아마도 성실한 사람들이 자기한테 철저하고, 또 남들한테도 그 철저함을 요구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아닌지, 겸손하고 하는 건 터득해서 하는 거지만, 속마음으론 ‘나 혼자 잘났다’는 생각이 아직도 내겐 많은 거 같다. 모두 내가 옳다고 생각하나 보다. 딴 데 가서 남들이 하는 거 봐도 내 판단이나 방식이 더 정확한 거 같고. 이게 다 착각인데...
근데, 80퍼센트는 내가 맞는 거 같다. 가게에서도 카운터 맡는 거 하나만 봐도 그렇다. 종업원들이 처음에는 내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중엔 그대로 따라오는 걸 보면. 이러니 가게를 내 식으로 끌고 가려는 게 강한데, 그래도 좀 덜 독단적으로 하게 된다. 가게 식구들한테는 기본적으로 잘해줘야 한다는 마인드가 있어서다.
그런데, 그게 집에선 잘 안 된다. 집에만 가면 독선적인 게 ‘딱’ 나온다. 내 말이, 내 생각이 제일 옳다는 거!
예를 들면, 아끼는 부분이다. 절약하는 게 진짜로 옳은 거지만 집에서는 아내가 살림하다 보면 오버되는 것도 있다. 그런데 그런 쪽은 이해를 안 해주고 내 생각대로 아내를 끌고 왔다.
“맞춰 살아!”
인테리어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해야만 속이 시원했다. 난 가구는 웬만한 건 다 치워버리고 있을 자리에 하나씩만 딱딱 있으면 좋겠는데, 아내는 어지러 놓고 살아가는 게 편한 한 사람이다. 지금은 아내 스타일을 많이 수용하고 참아버리지만, 전에는 대충 넘어가 주질 못했다.
30년을 아내랑 살면서 터득한 게 하나 있다. 아내한테 더 져 줘야 내가 편하다는 거. 그걸 좀더 일찍 터득했다면 나도, 아내도 참 편했을 게다. 아내가 내 말에 ‘대들고(?)’ 하는 게 한 5,6년 됐나? 그 전에는 내가 어지간히 내 성질로 눌러놔서 아내는 대놓고는 내 말에 시비를 걸지 못했다.
결혼 초기엔 아내하고 서로 성질을 맞추려고 많이도 싸웠다. 그런 점에서 아내한테 정말 미안하다. 내가 잘난 척을 좀 안 했어야 했다. 아내의 영역은 놔뒀어야 하는데, 내가 다 알아서 했기 때문에 오히려 여자의 역할을 많이 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작년 일인데, TV에서 전화 인터뷰로 아내가 웃으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딸한테 그래요, 아빠 닮은 남자랑 결혼하지 말라고. 신경질 나면 하는 소리예요. 야단치고, 다투고 속상할 때. 내가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할 때는 도덕 선생님이거든요. 항상 물건은 제자리에 있어야 하고 틀에 벗어나는 행동은 못하고 여자가 말 많은 거, 애교 떠는 거 싫어하고 조선시대라니까요. 부부싸움 할 땐 학교 훈육선생한테 내가 야단맞는 거 같아.”
딸하고 같이 카메라 앞에 나와 앉아서, 공개적으로 내 흉을 보는 아내 말을 듣고 있자니 어이도 없고 또 재미있기도 해서 나도 따라 웃었다. 아내도 나만큼이나 솔직한 사람인데, 어쨌거나 공개적으로 ‘터트린’ 게 좀 미안한지 말미에선 슬쩍 얘기를 틀었다.
“남편이 생활력 강하고 자기 식구 끔찍이 챙기고, 결론은 다 고맙지요. 성실하고 다 좋은데, 요새 굉장히 피곤해 해요.”
아내 불만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래도 아내가 원하는 건 내가 안 하는 게 없는데... 내가 독선적으로 하는 것 같아도 아내 눈치 보면서 다 결정했다. 큰 결정은 다 아내 뜻에 따라서 했던 것 같은데도, 결정하는 과정에서 내가 너무 까불고 독선적으로 했던 것 같다. 아이들한테도 그런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가족한테 너무 독선적으로 하다 보니까 필요한 거 다해주고도 좋은 소리를 못 듣고 있다.
그래서 가끔 서운한 마음이 들긴 해도, 아내한테는 기본적으로 고마운 마음이 있다. 옆으로 내 눈치만 슬슬 보면서 나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을 많이 한 걸 아니까.
이런 일이 있었다. 연출자 집에 아내를 데리고 인사를 갔는데 연출자 부인이 좀 거드름을 피웠다. 아내가 그런 거 잘 받아주는 성격이 아닌데 그 날은 오버하면서 잘 받아줬다. 그땐 ‘희한하다, 잘하네’ 하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까 그게 아니었다. 저도 부잣집 딸인데 나 위해서 자존심 굽히면서 거들어준 걸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그래서 결심을 했다. ‘때려죽여도 다음부턴 그런 자리에 와이프 안 데려가야지.’
이제부터라도 아내한테 정말 잘해주고 싶은데도, 가끔 또 아내한테 성질을 부린다. 그럼 아내는 아내대로 받아치고. 그래서 우리 부부는 늘 ‘신혼부부’처럼 티격태격하면서 살고 있다.
3. 배부른 데 또 뭐가 먹고 싶어?
토요일 저녁 타임, 단골 손님들 자리로 가서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옆 테이블 손님들의 대화가 들렸다.
“조 원장, 아파트 80평으로 옮긴다며? 강남 의사들이 돈은 다 쓸어모은다니까, 참.”
목소리의 주인공을 힐끗 보니 50대 중반의 남자였는데 얼굴엔 부럽다는 표정이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었다. 드문드문 흰머리에 양복을 점잖게 빼 입은 폼으로 봐서 대기업 간부쯤은 돼 보였다.
“와이프 성화 때문에 버틸 재간이 있어야지? 조금 무리 좀 했지. 허허...”
강남에서 꽤 큰 개인병원을 운영한다는 조 원장이란 사람은 너스레를 떨면서 맞은편 남자한테 술을 따랐다.
“넌 벤츠 샀다며?”
“우리 나이면 그 정도는 타야지. 자, 마시자고.”
벤츠를 샀다는 남자는 별 것도 아닌 걸 갖고 뭘 그러냐는 투였는데 다른 사람들도 다 들으라는 식으로 목소리가 컸다.
토요일 저녁 타임이나 일요일에 가게를 지키다보면 이런 식의 얘기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친목회나 중년들 모임이 많아서다.
오픈 초기에는 이런 얘기를 들으면 솔직히 부러웠다. 야! 아파트 80평? 대단하다! 난 언제나 그런 데서 살아보나 하는 마음이었다. 벤츠를 사고 싶었을 땐 누가 벤츠 탄다 하면 많이 부러웠다. 그러다 한 4,5년 지나면서 그런 마음이 줄어들었고 지금은 부러운 게 없다.
어디 다른 자리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난 65평 아파트에 살아도, 80평 아파트에 산다고 은근히 과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 그래요?” 하고 만다. 난 고급 시계 하나 없어도, 뭐 대단한 척 하면서 누가 금딱지 시계를 보아란 듯이 내밀면 “네, 좋군요” 하고 말 뿐이다.
옛날 같으면 부러움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태연한 척을 해야 했다. 아주 오래된 얘기인데, 명동에 있는 옷가게 ‘칸추리’에서 알록달록한 티셔츠를 팔았었는데 탤런트들 사이에서 대인기였다. 단역만 하던 시절이라 그 티셔츠 하나 쉽게 살 형편이 안 됐었다. 그래서 생각만 했었다. 개런티 제대로 받게 되면 저걸 열 개만 사야지 하고.
그 땐 갖고 싶은 게 그렇게도 많았다. 갖고 싶은 걸 못 가지니 뭐 좀 가진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워낙 없던 시절이라 별 거 아닌 것까지도 부러웠다. 누구네 신혼집에 갔을 때다. 집은 작았지만 욕실에 예쁜 스티커를 붙여 놨는데 그게 그렇게 갖고 싶었다. 스티커는 지금은 흔하디 흔하지만 당시엔 좀 희귀한 축에 끼였다. 그렇다고 해서 고급품이나 사치품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당시의 내 형편에선 쉽게 엄두를 낼 처지가 아니었다. 그 집을 나오고 나서도 한참 동안 스티커 생각을 했다. 난 언제나 저런 걸 가지게 되나, 씁쓸해 하면서. 그리고 아마도 다짐을 했을 것이다.
‘꼭 연기자로 떠서 돈 좀 펑펑 써보자!!’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던가? 엑스트라로 설움도 받으면서 추운 겨울에 야외 촬영에 불려 다니면서 급기야 차도 갖게 되었다. 연기자로도 떴고 결혼해서는 그 때의 그 신혼집보다 큰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스티커는 당연히 붙여 놨고 엑스트라 시절엔 전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던 것들을 하나둘씩 가지게 되었다. 그래도 원하는 걸 모두 가질 수 있게 된 건 아니었다. 부업을 하면서 여유가 좀 생기긴 했어도 돈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마음껏 돈을 쓸 형편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은 여전했다.
그러다 지금 가게를 하면서 수입이 커지고 저축한 돈도 꽤 모이게 되니까 ‘이젠 살았다’ 하는 안심이 들면서 남들이 뭘 가져도, 뭘 사도 별로 부럽지가 않아졌다. 그 사람들하고 나하고 누가 돈이 더 많으냐를 재는 건 아니다. 남들이 돈 쓰는 거에 대해 마음이 너그러워졌다고나 할까.
그러다 주머니가 어느 정도 차고 웬만한 건 다 갖게 되니까 특별히 뭐가 또 갖고 싶다, 이런 마음 자체도 없어졌다. 주변에서는 폼 나게 왕창왕창 돈 쓰면서 재미나게 살라고들 하지만 난 이렇게 받아친다.
“배부른데 또 뭐 다른 게 먹고 싶어지냐? 그리고 돈 쓰는 게 뭐 재미있냐? 재미로 치자면 돈 벌고 모으는 재미가 훨씬 좋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솔직히 힘들 때도 많다. 가게 때문에 엄청 좋아하는 여행을 자주 못하는 것도 무척 아쉽다. 여행은 일년 내내 일하다가 한번씩, 또는 추석이나 설 연휴 때를 이용해서 며칠 갔다 오는 걸로 만족해야 한다. 종업원들한테는 “너희들은 한 달에 세 번 놀지만 난 못 노니까” 하고 가게를 비우는데, 최근에는 일본에 유학 가 있는 딸 얼굴 보러 몇 번 간 거 외엔 없다. 한 1년 외국에서 살아보고도 싶은데...
4. ‘짠돌이’ 남편, ‘구두쇠’ 아빠
지난 6월 SBS 아침프로 <한선교의 좋은 아침>에 출연했었다. 방송국에선 아내랑 같이 나오라고 했는데, 아내를 방송에 한 번 데리고 나가려면 내가 피가 마른다. 젊었을 때부터 그랬다. 신혼 부부 시절에 몇 번 같이 나갔는데, 탤런트 부인이랍시고 그래도 방송 나가는데 옷 사줘야지..., 고생 꽤나 했다. 방송 출연료로 받는 것보다 돈도 더 나간다.
또 아내가 떨려서 못 나가는 것도 있지만 고집이 세서 “안 하겠다”고 버티면 난 며칠을 ‘꼬셔야’ 한다. 이번에도 아내는 이러면서 버텼다.
“당신이 나 고생시켰는데 내가 왜 나가서 해롱대?? 진짜 사랑하는데 어떻게 밤낮 행복하다는 소리를 나가서 해? 나 나가면 반대로 얘기할 까봐 못 나가!“
아내는 계속 고집을 부렸고 나도 은근히 화가 났다.
“야, 남편 체면 좀 세워주면 안 되니?”
아내는 듣는 척도 안 했다. 그래서 결국은 한바탕 싸웠다. 그래도 아쉬운 건 나였다. 그래서 다시 아내를 ‘얼렀다’.
“야, 경희야, 그럼 전화 인터뷰만 해. 얼굴 안 나오면 되잖아?”
내가 사정하는 투로 나오니까 아내도 좀 양보를 해야겠다 싶었나 보다.
“돈 안 주면 전화통화 안 해. 7백만 원만 줘.”
“그래, 줄게, 줄게.... 내가 돈 많은 데 그거 못 주겠냐?”
그렇게 해서 아내가 전화 통화만 하기로 ‘타협’을 했다. TV 출연은 아내 대신 일본 유학 가 있던 딸을 오라고 해서 같이 나갔다. 그런데 방송에 나가서 아내가 전화하는 걸 들어보니 배우 뺨치게 잘했다. 그래서 집에 와서 아내를 추켜세웠다.
“와! 전화통화 잘했더라.”
아내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난 이때다 싶어서 좀 치사하게 나갔다.
“근데 돈은 깎아서 3백만 원만 줄게.”
아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좀 씩씩거렸다.
“역시, 역시 짠돌이야, 사기 당했어...”
그 말을 들으니까 내가 좀 심하다 싶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5백만 원 줄게~.”
아내는 붕붕 뜨더니 동생들한테 전화를 걸어서 자랑을 했다.
“나 이제 5백만 원 받았다!”
나중에 아내한테 동생들이 뭐냐고 하냐고 물으니까 이랬단다.
“언니, 돈 손에 쥐기 전에는 너무 좋아하지 마라...”
아내가 날 ‘짠돌이’로 만들어서 친척들 사이에선 내가 ‘짠돌이’다. 주변에선 다들 날 검소하다고 하는데!
솔직히 아내한테 생활비는 넉넉하게 주는데도 아내는 그걸 다 애들한테 퍼준다. 굳이 안 보태줘도 되는데도 더 못 갖다줘서 난리다. 그러는 바람에 밤낮 모자란다. 생활비를 펑크내는 아내를 보면 화가 나면서도 내심 미안하기도 하다. 남편이란 작자가 밖에서 바쁘니까 온 신경을 아이들한테 쏟는 거 아닌가? 그래서 돈 부분은 내가 포기를 했다.
“그래, 니 마음대로 써라!”
나 역시 애들한테는 아까운 게 없는 사람이다. 아빠처럼 ‘돈, 돈, 돈!’ 하지 않도록, 애들을 돈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싶어서 나름대로 여유 있게 해준다고 했다. 그런데도 애들도 아빠는 무조건 ‘구두쇠’라고 박혀 있다.
지금은 여유가 생겨서 안 그렇지만, 전에는 아내가 애들한테 나이키 운동화를 사준다거나 하면 못 사주게 했다. 내가 가족이라면 무진장 아끼고 생각하니까 아까워서는 물론 아니다. 나이키 사줄 여유가 없어서도 아니다. 돈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 때문이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애들을 왜 그렇게 키우냐? 애들은 금방 크는데! 꼭 나이키니 하는 거, 명품을 걸쳐야 좋다는 건 본인이 자신이 없어서다!”
아내는 부잣집 딸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나하고는 돈 쓰는 스타일이 달랐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서 병원 신세를 자주 졌었다. 서너 살 때인가? 애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해서 달려갔는데, 아내는 화장실에 응접실까지 달린 특실에다 입원을 시켜놓고 있었다.
“애가 중병 걸린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여기 있어? 우리가 무슨 재벌이야?”
내가 화난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니까 아내는 볼멘소리로 대꾸를 했다.
“애 불쌍한데 그럼 어떡해!”
무슨 일이 터지면 아내는 이렇게 자기 식대로 했다. 그 뒤처리는 몽땅 내 몫이었다. 물론 자존심 때문인지, 바깥일이건 집안 일이건 가장인 내가 다 알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내 책임을 미룬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내가 우리 집 처지에는 가당치 않게 하는 걸 보면 화가 났다. ‘돈에 늘 쪼들리면서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추고 하는 건 난데!’
그렇다고 아내가 자기 옷 사 입고하는 사람은 아니다. 자기 사치는 전혀 안 한다. “자기는 필요 없다”면서 아이들한테만 해준다. 애들도 돈 문제에 있어서는 아빠 앞에서 주눅이 들어서 나한테는 뭐 사달라는 얘긴 안 했다. 어렸을 때는 가끔 조르긴 했다.
“아빠, 나 좋은 구두 사줘요. 내 친구들은 다 좋은 거 신는데...”
“아빠도 운동화 신고 다녔어!”
내가 그렇게 나가니까 차츰 애들은 엄마랑 ‘꿍짝’이 돼서 셋이서 똘똘 뭉쳤다. 엄마가 좋은 옷 사주면 내 앞에서는 안 입고, 신발도 사오면 감춰놓고 나 몰래 신고 다니고 했다.
아내는 부잣집 딸로 살다가 내 수입에 맞춰서 살려니까 나름대로 갈등이 컸을 것이다. 내 사정을 아니까 따라주긴 했지만 살아가는 게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묘한 게, 내가 우리 집 생활하는 데는 ‘짜게’ 굴었는데도, 엄마나 형제들한테 갖다 주는 거는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런 나한테 맞춰 사느라고 아내 마음 고생이 심했다. 그래서 요즘은 ‘마누라 불쌍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사실, 아내가 얼마를 어떻게 쓰던, 내 마음을 확 풀어놓은 건 몇 년 안 된다. 주신정에서 돈이 어느 정도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니까.
‘야, 내가 과연 누굴 위해서 이렇게 살았는가, 가족 아닌가! 내가 죽을 때까지 써도 못쓰고 갈 돈인데, 솔직히 돈 걱정은 없는데, 우리 식구가 그거만 써도 충분히 남는데...’
그런데도 난 집에선 아직도 ‘짠돌이 남편’, ‘구두쇠 아빠’다.
5. 아비 닮아 샛길로 빠진 아들 or 장사꾼 체질을 물려받은 아들
한참 ‘인기 강사’로 뜨면서 여기저기로 불려 다녔을 때, 대학생들을 대상으로도 두 번인가 강연을 했었다. 연세대 수학과 동기 중에 교수가 된 친구들이 이 대학 저 대학으로 흩어져 있는 이유에서였다.
“야, 너 그래도 우리 수학과 나온 애 치고는 길은 빗나갔지만 지금 잘 나가고 있지 않냐? 우리 학교 애들한테 와서 용기 좀 줘라. 수학과 나와 봤자 선생 하는 거 아니면 다른 데 취직하기도 힘들어서 무조건 전공만 잘하라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대학생들 앞에서 떠들고 오면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래도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 아닌가? 열심히 공부했으니 졸업한 뒤에 전공 살려서 일한다면 배운 거 써먹으니 좋고, 또 부모들은 그러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싼 돈 들여서 자식 대학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우리 아들애도 아비를 닮았는지 전공하고는 다른 샛길로 빠졌다. 군대 갔다 와서 학교 졸업하고 직장을 잡았는데 3개월쯤 되니까 못 다니겠다고 했다. 남들은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는 직장인데, 일은 힘들고 월급은 적다는 이유로 때려치우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하지만 자기 적성하고 맞지 않는다는 데야 어쩌겠는가? 1,2년 하다가 그만둘 일도 아니고 평생을 매달려야 할 일이라면 일찌감치 자기 길로 가게 도와줄 수밖에.
그래도 6개월은 직장엘 다니게 했다. 사회생활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걸 체득하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일이 힘들다, 상사가 짜증난다..., 더 이상 못 다니겠다고 투덜거리는 아들애를 호되게 몰아쳤다.
“정한아, 6개월만 버텨라, 그 다음엔 네 마음대로 해라. 거기서 못 버티고 나오면 밖에서 아무 것도 못한다!”
아비의 성깔을 알고 있는 아들애는 꾹 참고 6개월을 버티고는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는 장사가 자기 길이라고 생각했는지 지 엄마랑 가게 터를 알아보고 다니기 시작했다. 저 나름대로 이것저것 알아보고 해도, 난 걔가 장사할 게 마땅치가 않아서 놔두고 있었다.
내가 마침 작게 건물을 짓고 있었는데 아들애는 거기 아래층에 들어가서 뭘 해보겠다고 ‘주접’을 떨었다. 건물 이름을 죄다 적어가면서 ‘24시 편의점’을 하겠다느니 하면서 혼자 들떠서.
“야, 벌써 거긴 계약을 했는데 네가 어떻게 하니? 잔금을 못 받거나 잘못되면 그때나 너 해라...”
그러면서도 내심 아들 뜻대로 해주려고, 좀 밀어줄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데, 야외 녹화하러 가 있는데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주 희망찬 목소리였다.
“아빠, 여기 여의도에 좋은 자리가 났는데 나 계약하러 나왔어.”
어디냐고 물으니까 문방구 하던 자리라고 했다. 그래?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허락을 해줬다.
“나한테 삼백만 원 있으니까 갖다가 계약해라.”
그까짓 거 몇 천 만원 손해본다고 해도 아들 자립심을 키워주는 게 중요하다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고 집에 가보니 아들은 엄마랑 같이 가서 계약을 하고 왔다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몇 천 만원 바가지를 썼다.
내가 주위 부동산들도 다 알고 여의도는 꿰차고 있는데도 아들애가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뒀다. 맨 처음엔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겠다고 해서 “네가 알아서 해라”고만 했다. 그런데 자기가 생각해보니까 아이스크림 가게는 힘들 것 같았는지 기존의 문방구로 그냥 가되, 팬시점으로 꾸미겠다고 했다.
아들이 장사한 지 1년 반쯤 됐는데 주위 문방구들 다 재치고 잘 하고 있다. 아마 장사 감각이 있는 거 같다. 아직 젊으니까 애들이 뭘 원하는지도 잘 알 테고. 또한 돈 벌려고 기를 쓴다. 물론 처자가 있어서이지만 내가 볼 땐 희한하다. 지갑도 아무 데나 던지고 하는 성격인데도 장사하는 덴 아주 야무지다.
아들은 아무래도 무뚝뚝하다. 그런데도 지 새끼한텐 끔찍하다. 자기 애 깬다고 아기 잘 땐 지네 집에 안 가고 맞은 편 아파트에 있는 우리 집(아내랑 나랑 사는!)에 온다. 점심도 우리 집에서 먹고, 내가 점심 타임 끝나고 집에 가면 저도 한가한 시간이니까 결혼하기 전에 쓰던 자기 방에서 자고 있다. 그래서 아들하고는 딸처럼 아기자기한 대화는 없다.
주신정을 아들애한테 가업으로 물려줄 생각은 아직은 없다. 자기가 맡는다고 하면 자연스레 물려주긴 하겠지만, 내가 원하는 건 걔가 스스로 개척하는 거다. 지금 서른도 안 됐는데 그 나이에 여기 들어오는 것도 무리인 듯 싶다. 전에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종업원들하곤 잘 알긴 해도, 종업원들의 조직력을 파괴하면서까지 아들을 여기에 넣고 싶은 생각은 없다.
자식한테 물려주는 것도 난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식이 그냥 지 힘으로 하게 놔두고 어려울 때만 도와주는 게 부모라고 난 생각한다.
아들이 팬시점 낼 때도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저 혼자 하게끔 엄청 참으면서 내버려뒀었다. 사업자금은 대줬지만 그 외에는 참견하지 않았다. 어드바이스 해주고 참견하려면 할 말은 많았다. 간판은 무슨 색으로 해라, 실내는 어떤 식으로 꾸며라, 어떤 건 어떻게 해라..., 이런 말은 일체 안 하고 통장에 돈만 넣어준 셈이다. 그렇게 참고 있기가 정말 힘들었다. 난 가게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데! 가게 내부를 보면 업종에 따라서 벽은 터서 어떻게 하고 식으로 인테리어 컨셉이 금방 나오는데도 어드바이스는 전혀 안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들이 장사하는 데 내 의견을 말하지 않으려고 참고 있었다. 혼자 헤쳐나가길 바라면서 두고 보자는 마음에서다. 또 내가 얘길 하면 아들애는 나한테 뭘 보여주려고 해서인지 반대로 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장사는 잘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돼서 초기엔 몇 번 가봤는데 “아빠, 왜 왔어?” 했다. 자기 딴에는 별 느낌 없이 하는 말일 터인데도 난 그 소리가 서운해서 그 후부턴 근처에도 안 갔다. ‘어려운 일 닥치면 나한테 달려오겠지’ 하면서. 그래도 장사 꽤 하는 거 보니까 마음이 많이 놓였다. ‘저거 놔 눠도 잘 살겠구나...’
6. 부녀간의 ‘살벌한’ 대화 or 아빠한테 믿음을 준 딸
난 애들을 ‘물고 빨고’ 하면서 키웠다. 내가 어머님한테서 받았던 걸 생각해서 애들을 믿고 모든 걸 해줬기 때문에 주위에선 과보호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어찌 보면 애들이 나한테 많이 의지하려고 하는 부분도 있다.
그래도 나한테 자신 있는 부분은 아이들에 대한 믿음이다. 주위에서 보면 아이들을 사자처럼 무섭게 키운 사람들이 있는데 그 집 애들 중엔 말썽을 많이 부린 경우가 꽤 있었다. 그런데 우리 새끼들은 큰 말썽은 별로 없었다.
부모 마음이라는 게 다 똑같겠지만, 한편으론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다. 내가 너무 과보호를 하면서 키워서 ‘쟤들이 세파를 어떻게 해쳐 나갈 것인가’ 하는 거였다. 그런데 이젠 좀 안심을 해도 좋을 것 같다. 아들애는 장가가고 장사하면서 자기 앞길을 잘 헤쳐나가고 있다. 딸애도 떨어트려 놓으니까 외국에 나가서 잘하고 있다. 앞으로 애들한테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나처럼 한번 실패를 겪으면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가리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강인함이란 건 자기 내부에서 생기는 거니까,
남들은 부모가 자식을 뭘 어떻게 만들어보려고 하는데, 내 교육 철학은 다르다. 철저히 아이들을 믿고 ‘물고 빨고’만 해줘도 애들이 똑바로 간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애들 엄마는 나보다 한술 더 뜬다. 애들한테 손 한 번 안 대고 키웠다.
그러다 혹시 애들이 삐뚤어지려고 한다거나 아플 때, 부모는 옆에서 인생 경험으로 툭툭 쳐주면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가 애들이 열쯤 있으면 통제 불능이지만 둘밖에 없으니까 그 정도는 충분히 컨트롤해줄 수 있지 않은가? 우리 애들이 심성이 착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지금까지는 내 생각대로 잘 자라 주었다.
내가 특히 하나 강조한 건 이거였다. 남 탓하는 꼴은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거 하나는 내 머리에 넣고 있어서 애들이 싸우면서 서로 “누구 탓”이라고 하면 난 가만히 안 뒀다. 핑계를 대지 못하게끔. 그런 식으로 남 탓을 하다 보면 자꾸 의타심이 생기니까.
딸은 지금 스물다섯인데 아주 철저하고 잔정도 많다. 얼굴도, 성격도 엄마를 닮았다. 어릴 때는 오빠처럼 잔병치레도 하지 않고 잘 자라서 성격도 좋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3살 때인가? 장모님이 오셔서 “일어나!” 하니까, 자는 데 깨웠다며 한참을 삐쳐 있었다. 그걸 보면서 “아이쿠 큰일났다. 지 엄마 똥고집 닮았네‘ 했는데, 역시나, 자라면서 보니까 묘한 고집이 있었다.
지금 딸애하고는 이메일로 얘길 하는데, 평상시처럼 “이년아, 저년아” 한다. 아니면 얼굴이 떡판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인 별명으로 부른다. “보떡아!” 그러면 걔는 “종결아, 종결아~” 하고 나오고, 그럼 난 “이씨, 너 죽여버려” 한다. 남들이 들으면 부녀의 대화치고는 너무 ‘살벌’하다고 하겠지만, 우린 워낙에 그렇게 살아서 그런지 정겹기만 하다.
아무래도 타지에 있으니까 딸애한테는 자꾸 신경이 쓰인다. 동경간 지 2년 반 됐는데도 마음이 연신 그리로 간다. 딸애는 전문대 사진과를 졸업하고 취직해서 6개월을 일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거 가지곤 자기 앞길이 막막하니까 유학을 가겠다고 결정을 했다. 난 딸애는 절대 타지로 안 보내는데, 내 스타일을 아는지 딸애는 나하고는 상의도 안 했다. 지 엄마하고 ‘꿍짝’을 맞춰서 다 준비해놓고 나서는 “나, 가요!” 하고 통보를 했다.
딸애는 서울을 떠나기 전날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집에 친구들을 불러서 밤새워 새벽까지 놀았다. 다음 날 비행장엔 내가 딸 친구들도 함께 데리고 갔는데, 나도 딸애가 떠난다는 실감이 나질 않아서 평상시처럼 농담도 하고 그랬다. 그런데 막상 공항 출국 게이트를 나가는 딸애 뒷모습을 보니까 속에서 왈칵 하고 솟구쳤다. 눈물을 애써 참고 딸애를 보내고 나서 얼른 흡연실로 들어가서 한참을 울고 나왔다.
그날 경복궁에서 야외 촬영이 있었다. 공항 가느라 촬영을 미루고 간 거여서 공항에서 곧장 기사랑 경복궁으로 갔다. 중간에 딸한테 전화를 받았다. 우는 목소리로 “아빠, 나 잘 갔다올게” 하는데, 울컥 하고 또 치솟았다. 그래서 팔로 눈을 가리고 계속 울먹이면서 바깥만 보고 갔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길영이가 경복궁으로 곧장 안 들어가고 차를 삼청동으로 몰았다. 거기 한적한 데로 날 데리고 가더니 자기는 내렸다. 실컷 울라는 거였다. 그래서 거기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서 녹화를 했다.
촬영 끝나고 아내한테 전화했더니 아내는 나보다 더 울었는지 목이 다 잠겨 있었다. 그런 아내가 안쓰러우면서도 좀 원망스럽기도 했다. ‘지가 보내 놓고는...’
딸애를 동경 보내놓고 걱정이 돼서 이메일에다 계속 이렇게 써 보냈다. “뭐든지 아끼지 말고 사라. 밥 대충 먹지말고...” 그랬는데, 여기선 편하게 달라던 돈도 거기 가 있으면서는 돈 달라는 얘길 어려워했다.
딸애는 일본에 가더니 돈에 대한 관념이 굉장히 철저해졌다. 요즘도 내가 더 주고 싶어서 난리를 쳐도 필요 없다고 한다.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성격도 있어서인 듯 한데, 내가 일본 가서 보니까 유학생들이 그렇게 건실할 수가 없었다. 택시비가 어마어마하게 비싸긴 하지만, 유학생들은 ‘전철표 얼마, 밥값 얼마, 차비 얼마‘ 하는 식으로 마치 여행가서 하듯이 알뜰하게들 살았다. 딸애도 그걸 보면서 그런지, 용돈을 10만엔 주는데 오버하는 경우가 없다.
딸은 자기가 다 알아서 했다. 1년 어학 코스를 하고, ‘비주얼 아트 스쿨’에 들어갔는데 좀 대단한 학교인가 보다. 거길 장학생으로 갔다. 부모 마음 다 똑같겠지만, 자식이 믿음을 줄 때 부모는 가장 뿌듯한 것 같다.
7. 어머님이 베풀어주신 사랑
나 어릴 때 우리 집에는 형들이 많았다. 친형들이 아니라, 이북에서 내려온 사촌형들 또 형들의 친구들이다. 당시 우리 집은 부자여서, 어머니가 그 형들을 우리 집에서 와서 살게 해주고 품어주었다. 형들도 크면서 어머니를 잘 보살펴주고 힘이 되어 주었다.
나랑 동생 종혁이는 어릴 때부터 사촌형들, 형 친구들하고 한솥밥을 먹으며 자라서인지 별로 외로움을 몰랐다. 아마도 어머니는 아버지 없이 자라는 우리를 외롭지 않게, 모나지 않게 키우고 싶어서 형들을 데리고 왔는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형들 덕분에라도 동생하고 난 집안이 적적하다는 건 모르고 살았다.
어머니는 신여성이기도 하고 여걸이라면 여걸인데, 천성이 남한테 베푸는 걸 잘하시는 분이었다. 내가 남 어려운 거 못 보면 조금이라도 도와주려고 하는 것도 내가 어려운 생활을 해봐서도 그렇지만,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베푸는 걸 보면서 자라서 그런 것 같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끔찍했다. 내 위에 형이 하나 있었는데 잃고 나서, 서른이 훨씬 넘어서 늦게 아들을 얻어서 그런지 나를 아주 애지중지하셨다. 엄마가 날 너무 ‘물고 빨아서’ 어머니 친구들이 엄마만 없으면 날 꼬집고 했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날 정도다.
나도 꽤 효자아들이었다. 그런데 재수하면서 그동안 안 썩혔던 속을 한꺼번에 썩혔다. 여자도 처음 알게되고, 정신 못 차리고 놀았던 시절이다. 엄마가 나랑 여자친구를 자꾸 떼어놓으려고 해서, 난 대전으로 도망도 가고 죽겠다고 ‘지랄’도 했다. 중고등학교 땐 모범생이었는데 그동안 안 하던 짓을 왕창 해댔다. 술 먹고, 막걸리집에서 ‘산’ 노래 부르고 하는 게 좋았다. 한 6,7개월 타락하다시피 했던 것 같다.
이런 날 보면서 엄마는 걱정도 하고 “하지 말라”고 말리기도 했는데, 내가 너무 그러니까 내 앞에서 대굴대굴 굴면서 운 적도 있다. 그런데 그때 난 막 미쳐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가슴을 쥐어뜯는 엄마를 보면서 기껏 한다는 생각이 ‘야, 쇼 잘한다’ 였으니. 나중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어머니한테 정말 미안했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내가 완전 ‘또라이’였으니까.
계속 내가 ‘막나가니까’ 어머니는 2개월인가 나를 절에다 끌어다 놨다. 마음은 콩밭에 가 있으니 공부가 될 턱이 없었다. 그러다 찬바람 날 때쯤 정신이 조금 들었는지, 어머니가 여자친구랑 너무 떼어놓아서 별수가 없었는지, 공부를 좀 하기 시작했고 두 번째 대학 시험에선 붙을 수가 있었다.
난 어머니한테만 모든 걸 의지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속으론 그렇게도 많이 생각하면서도 어머니를 달달 볶아야지 속이 시원하던 시절이 있었다. 효자고 착하고 하면서도, 무슨 일이든지 성질은 엄마한테 해야 속이 풀리던 시절이.
어머니는 내가 하는 일에는 크게 반대하시는 분이 아니었다. 내가 탤런트 되는 것도 처음엔 반대하셨지만 나중엔 좋아하셨다. 내가 며느리감을 데리고 갔을 때도 좋아하셨고.
어머니와 아내는 그렇게 크게 갈등한 적은 없었는데, 고부간의 갈등이 있을 경우 난 철저히 어머니 편에 설려고 했었다. 고부간의 문제는 사랑을 누가 차지하려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내 경우는 어느 쪽이 약자인가에 따라 마음이 더 가는 거 같다.
결혼하면서는 어머니랑 따로 살다가 1년쯤 후부터 모시고 살았다. 한 3년 같이 살았는데, 어머니가 힘들어하신다는 건 그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는 결단을 내렸는지 따로 사시겠다고 했다. 어머니한테는 후암동 집을 판 돈이 있었다. 그 돈으로 안산에 아파트를 몇 채 사놓으셨는데, 그리로 가시겠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친구들을 그렇게 좋아하셔서 옆에는 항상 후배 분들이 ‘붙어’ 다녔는데, 혼자 되신 분들이 어머니가 사는 임대 아파트로 모여서들 같이 사셨다.
어머니가 사시던 아파트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돈 걱정은 끊임없이 하면서 살면서도, 난 나와 동생한테 모든 걸 다 해주신 희생자의 입장에서 어머니한테 드리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었다. 그래서 어머니 용돈은 풍족하게 드린다고 드렸었다.
그런데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알고 보니, 어머니는 본인이 사시던 아파트 외에 다른 아파트들에는 부금을 계속 내고 계셨다. 어머니는 나한테는 그 말을 안하고 내가 드린 용돈을 아껴서 부금을 내고 했던 것 같다. 오래 된 일이고 또 쪼끄만 임대 아파트라서 부금 액수는 얼마 안 됐다. 하지만 아들한테 받는 용돈에서 그 돈을 빼서 혼자 갚고 계셨다는 게 그렇게 죄송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어머니 장례를 끝내고 나서 어머니 친구분들이 말씀하셔서 알았으니까.
어머니는 내가 마흔 줄에 들어선 83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 나이 73세 때. 유방암으로 항암치료를 받다가 돌아가셨다. 그때만 해도 난 음식점이다, 오락실이다, 점포를 다섯 개 하면서 엄청 바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어머니 옆에는 같이 못 있어드렸다. 그래서 또 어머니한테 죄송스런 마음이 있는데, 그나마 어머니가 행복해 하시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위안이라면 위안을 삼는다. 열흘 정도 내가 사업을 전폐하고 어머니 옆에 있었을 때, 어머니가 나하고 같이 있어서 행복하시던 모습에서.
8. 40세에 접은 톱스타의 꿈, 그러나...
주신정에만 전념할 땐, 대충 낮 1시 반쯤에 손님이 거의 빠지면 난 가게에서 점심 먹고 헬스 센터에 간다. 거기서 운동 좀 하고 사우나도 하고 나서 집에 가서 한참 쉬었다가 저녁에 다시 가게에 가는데, 시간을 지키려고 더 애를 쓴다. 저녁 타임이 손님이 더 많아서 가게는 더 난리법석이니까. 다음날에 촬영이 있으면 점심 때 헬스는 생략하고 사우나만 하고 곧장 집에 간다. 대사를 외우다가도 저녁 타임이 되면 대본을 갖고 다시 가게에 나간다. 손님들 서빙하는 짬짬이 대본을 외우는데, 그렇게 하는 게 집에서 외우는 것보단 더 효과적이기도 하다.
이렇듯 지금은 내겐 음식점이 주업이 되어 버렸지만 아직도 정신적인 주업은 탤런트다. 지금까지 연기 생활 36년째인데, 그동안 드라마는 200편 가량 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역할을 꼽자면 우선 떠오르는 게 20대 후반에 TBC <특별수사본부>에 게스트로 나갔을 때다. 방송국에 들어가서 맨 처음 했던 연기는 장난이라 치고, 한 3년쯤 지나서 맡아서 나름대로 ‘제법’ 연기를 한 역할이다. 선배님들이 주인공인 수사관들로 나오는 단막극에 난 서 살인범 역할로 나갔다.
난 사창가에 들어갔다가 김창숙이 연기한 창녀를 칼로 찔러 죽이고 형사들한테 체포되는 살인범이 됐다. 경찰들이 재차 묻는다. “왜 죽였냐?” 난 울면서 시종일관 이 말만 한다. “화가 나서 죽였습니다.” 난 어린 시절에 부모한테서 받았던 학대에서부터 시작해서 범인의 심리를 파악해서 감정을 제대로 살린 것 같다. 그걸 찍고 나서 PD들한테서 “어? 저 새끼 제법 한다!”는 소리도 들었고, “쟤도 되겠다”는 인정도 받았다.
그래도 난 여전히 뜨질 못했는데, 고맙게도 선배 형들이 날 예쁘게 봐서 계속 끌어줬다. 작고한 김호정 씨도 그 중 한 분이다. 그 분이 MBC로 옮겨가실 때, TBC에는 또 외부에서 연출가들이 많이 새로 영입됐는데 서로들 잘 아는 사이니까 “종결이 하나만 부탁하자”고 하고 가셨다. <지금 평양에선>의 연출자인 하강일 씨도 날 친동생보다도 더 아꼈다.
오래 전 예긴데, 강일이 형이 <거북이>에서 조연출을 맡았었다. 주인공은 안은숙 씨였는데, 그 프로에 날 출연시키려고 형이 밀었다. “김종결로 하자, 아들은 엄마 닮은 예쁜 아들이 해야 한다”면서. 그러나 PD는 다른 탤런트를 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강일 형이 대본을 집어던지면서 “김종결 아니면 안 된다!”고 강짜(?)를 부렸다. 그 덕분에 내가 들어가긴 했는데 미움을 많이 받았다. ‘어거지’로 들어온 배역이니까. 그래도 연기는 그런 대로 잘했다. 지금은 작고하신 작가 김영수 선생님이 “쟤가 도대체 누구냐?”고 했을 정도로. 그런 식으로 조금씩 인정을 받다가 사극 <연화>로 왕창 알려지게 됐다.
<연화>를 스타트로 70년대 초에는 <마부>, <아씨> 등, 배역이 끊이질 않고 했다. 제법 주인공 비슷한 걸 해왔는데 히트까지는 못 갔다. 그래도 <연화>로 얻은 인기가 4,5년, 아니 7,8년은 간 거 같다.
80년대 작품 중에서 점을 찍는다면 89년에 했던 MBC 미니시리즈 <황제를 위하여>가 기억에 남는다. 연출가 김종학 씨가 갑자기 날 불렀는데, 내가 알지도 못하는 외부 MBC 연출자가 날 시킨다니까 좀 의외였다. 거기다 김종학 씨 하면 유명한 사람이지 않은가? 그래서 기를 쓰고 연기를 했는데 결과가 좋았던 거 같다. 그 프로가 계기가 되어 김종학 씨가 연출한 MBC 드라마 <제 5열>에도 수사관 역으로 출연했다.
그리고 한참 후인 95년에는 또 김종학 씨하고 SBS에서 작품을 같이 했다. 김종학 PD의 전화를 받았는데, “영화 <대부>의 첫째 아들 역할을 보라”고 했었다. 그래서 출연한 게 <모래시계>인데, 그렇게 히트할지는 몰랐다. 거기서 변호사 역을 맡으면서 나름대로 그 배역의 컨셉을 잡았다. 연기를 절제하자고. 연출가도 그렇게 하자고 해서 했는데, 작품도 잘 써졌지만 내가 컨셉을 제대로 잡았던 것 같다.
<모래시계> 전에, 90년대에 했던 작품들 중에서 기억에 제일 만이 남는 건 92년에 했던 MBC 수목드라마 <일출봉>이다. 나이 오십 넘어서 주신정 하던 시절에 MBC로 불려가서 출연한 사극이다. 서민인지 양반인지 모르면서도 서민 측에 서는 의리의 사나이 역을 맡았다.
<모래시계> 이후부터 작년 5월에 끝난 <여인천하>까지, 그렇게 한 8년간 배역이 계속 끊이지 않고 이어왔다. 97년 KBS 수목드라마 <욕망의 바다>, 99년 KBS 대하사극 <왕과비>, 2000년 KBS 아침드라마 <송화> 등등.
연기 생활 35년 동안 스케줄을 ‘빵구’낸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하강일 씨가 연출한 <지금 평양에선>에 출연했을 때다. 15년 전 얘기다. 친구하고 장난치고 울릉도엘 들어갔는데 갑자기 태풍이 쳐서 배가 뜨질 못했다. 연출자하곤 계속 연락을 했었는데 결국은 못나와서 촬영 스케줄을 펑크냈다. 그 외에는 펑크낸 적이 없다. TBC에서 <양반전> 할 때는 맹장으로 쓰려졌는데도 연기했고, 촬영하다가 다리가 부러진 일이 있었는데도 다리 위에다 천 같은 걸 가리고 끝까지 촬영을 했다.
내가 독종이어서가 아니라, 배우들은 대부분이 그렇다. 또 방송의 위력이 대단해서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배우라는 건 정말 좋은 직업이다. 대사 외우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긴 해도. 연기자들하고 모여 있는데 내가 이런 말을 했었다. “야, 이거 대사만 안 외우면 정말 좋은 직업인데!” 내 말에 다들 고개를 끄떡이면서 웃었다. 대본만 나오면 밤낮으로 그거 외우느라 바쁘니, 딴 사람들은 좋게 보이는지 몰라도, 우리는 말하자면 매주 한 번씩 시험을 보는 셈이다.
얘기가 좀 옆길로 샜지만, 드라마를 쭉 하나씩 하다보니까 어떡하든 한 프로씩은 내가 ‘기어들어’ 갔다. 전에 <왕과 비> 끝나고 나서 다음 배역이 없어서 공백기간인가 하고 있는데, 묘하게도 옛날에 연출하신 분이 와서 <송화>라는 아침 드라마에서 아버지 역을 시켜줬다. 그거 끝나고 <여인천하> 한다는 얘길 들어서 한 두세 달은 블랭크(공백)가 있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또 누가 유성룡 배역을 줘서 했다. 그런 식으로 계속 이어왔는데, 사실 공백 기간에는 다음 배역이 들어오길 기다리면서 엄청난 부담감이 있다.
그래도 난 “내 배역이 뭐예요? 나좀 시켜주세요” 한 적은 없었다. 묘한 자존심인데, 그렇게 해도 띄엄띄엄 하나씩 역이 들어왔다. 하느님 덕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모래시계> 이후에는 한 달 이상 쉰 적이 없었다. 작년에 <여인천하> 끝나고 나서 몇 달 쉰 게 처음인 거 같다.
우리 또래 배우들 중에 “아, 제법 나오는구나” 하고 있는데 안 나오면 쉬고 있는 거다. 중견 연기자들 중에선 그런 식으로 해서 사라진 사람이 엄청 많다. 안 보인다 싶으면 사라진다. 그렇게 슬그머니 사라지지 않으려면 배역이 주어줬을 때 최선을 다해서 연기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연기를 잘 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성실성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내게도 배역이 끈기지 않을까 하는 부담감은 있다. 돈 때문은 아니다. 내 본래 직업이 배우이기 때문에. 배우로서의 욕망은 한이 없다. 포기한 부분도 있지만, 사십 까지도 난 톱스타를 포기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안 되는 건 안 되는구나’ 하고 주인공은 포기하면서 지금까지 온 거다. 어머님이 물려주신 도덕성을 머리에 지니고 있는 나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면서 살아왔기에 나의 인간됨됨이를 보고 배역을 시켜준 사람들이 많아서 이렇게 여기까지 왔다.
물론 톱스타를 포기하기 전까지는 속상할 때도 많았다. 나보다 새카만 후배랑 같이 가서 난 작은 역을 하게 되면 자존심도 많이 상했다. 그래도 TBC에선 그런 대로 잘나갔는데, 방송국이 통합되면서 역이 작아지니까 좌절도 많았다. 그럴 땐 이런 생각까지 했었다. ‘야, 내가 새끼 낳으면 도덕성 같은 건 강조하지 말아야겠다, 뒷거래를 하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가르쳐야겠다’고.
지금 와서 그때 일을 생각해보면 내가 참 한심했었다. 자기가 모자란 부분에 불만을 많이 갖다 보니까 뒷거래니 뭐니 하면서 불평을 많이 하는 건데... 쉽게 말하면, 내가 또 잘난 척을 하는 줄은 몰라도, 나처럼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비리로 되는 사람이 솔직히 몇이나 있겠는가? 인기도 여러 가지 상황이 맞아떨어져야 얻는 거고 또 배우는 연기를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노력해 가면 연륜이 지나면서, 경험이 익으면서 되는 거다.
지금은 TV에서 사라진 동료들도 많은데, 난 이렇게 한 삼십오 년을 버티고 있으니 일찍이 활짝 피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다행인 듯도 싶다. 연기 쪽으로 정상을 차지하겠다는 생각은 한참 전에 포기하면서 마음을 비웠다. 그래서 작은 역할이나마 감사하면서, 시청자들한테 내 냄새를 풍겨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연기를 해왔다.
배우는 정말 늦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리고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뭐든지 쉽게 포기하지 않고 오래 참으면서 자기 길을 가다 보면 결국에는 웃을 수 있다. 배우뿐만이 아니라 모든 직업이 다 그렇다! = 4장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