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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가는 곳에는 늘 사람들이 붐비었습니다.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들 중에는 몸이 아파서 예수님을 찾았던 사람들도 있었고, 배고프고 가난해서 예수님을 찾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주님의 말씀이 마냥 좋아서 따랐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굳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부담을 갖지 않아도 천국에 대한 말씀이 좋아서 주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이렇듯 이들은 예수님을 따랐던 목적은 각자 달랐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마치 전체가 한 마음인 것처럼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삶은 오늘날 못지않게 어려웠습니다. 그들의 삶이 그렇게 힘들었던 이유는 자신을 아프게 했던 삶의 고리들을 끊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병든 사람들은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어제보다 더 고통스럽게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배가 고픈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어제보다 더 굶주리면서 비참하게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 한 주간을 지나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새로운 무슬림 두 가정을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토르발르 지역 재활센터를 통해서 소개를 받은 두 가정인데, 한 가정은 이제 다섯 살 된 자녀가 다운 증후군을 앓고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자녀는 스스로 두 발로 거동도 할 수가 없어서 집안 여기저기를 기고 몸으로 굴러다녀야 하는 지체장애까지 앓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보면서 그 아이의 부모의 심정이 느껴져서 마음으로 얼마나 슬펐는지 모릅니다. 날마다 아픈 채로 살아가야만 하는 아들을 날마다 마냥 지켜봐야 하는 그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같은 부모의 심정으로 마음이 참 많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더 놀랬던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곳은 집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냥 맨 바닥에 허름해진 카펫을 깔고 사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집 밖과 안을 구분하는 벽조차 없어서 그냥 나무판자를 세워서 사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배고픔과 질병은 우리가 가히 상상도 못하는 정도였습니다.
오후가 되어서 두 번째로 만났던 무슬림 장애우 가정은 그나마 사는 형편은 나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가정에는 23살된 딸이 15,000명 당 한 명꼴 발병하는 Rett Sendrom이라는 다소 생소한 희귀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X염색체 유전자 이상으로 발생하는 병이기 때문에 대부분 여자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데, 1세 이전에는 비교적 정상발달을 보이다가 이후에 점진적으로 언어와 운동 발달이 멈추거나 퇴행을 보이는 것이 특징인 병입니다. Rett Sendrom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과거에 습득한 손의 기능을 잃어버려서 손을 자주 입에 넣거나 박수를 치는 행동을 보이고, 손을 펴지 못하고 오므린 채로 계속 쥐어짜는 모양을 반복적으로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 무슬림 자매도 이와 똑같은 증상을 보였는데, 거기에다가 등을 곧게 세우지를 못해서 점점 더 굽어져 가는 것 때문에 현재는 호흡하는 것도 힘든 상태였습니다. 등이 계속 굽어 가면서 몸 안에 있는 장 기관들까지 많이 눌린 상태였습니다. 이 자매 역시 걷지 못해서 다리 뼈는 심하게 왜곡된 채로 굳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으로 보였던 것은 자신의 가족들로부터 지극정성으로 돌봄을 받고 있는 모습에서였습니다. 그리고 집안의 모든 가구부터 텔레비전, 침실, 욕실까지 그 자매가 앉았을 때 눈높이에 맞춰서 새롭게 제작을 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많은 경우에는 17세 정도로 단명을 한다는 겁니다.
대화가 익었을 때 자매의 어머니는 우리에게 가족의 깊은 이야기도 해 주었습니다. 자신의 딸은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자신보다 먼저 태어났던 언니는 정상으로 잘 성장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동생과 같은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으로 특수학교 교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자매의 어머니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서 이내 먼저 방문했었던 그 가정을 봤을 때처럼 방문하는 내내,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그들의 상한 마음과 육체를 고쳐달라고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도가 시작됐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전하기 앞서서 이 땅에서 질병과 배고픔 때문에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무슬림들에 대해서 전해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보내신 이 터키 땅에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만나게 하시는 그 영혼들의 배고픔과 아픔을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다 함께 읽고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4절과 5절입니다.
v.4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여러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자,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v.5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렸는데, 어떤 씨들은 길가에 떨어져 발에 밟히기도 했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리기도 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이 몰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삶의 고통의 고리를 끊지 못해서 늘 고통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네 가지 밭으로 비유하셨는데, 첫 번째 종류의 사람들을 이렇게 비유하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그가 씨를 뿌렸는데, 어떤 씨들은 길가에 떨어져서 밟히기도 했고,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리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많이 익숙한 말씀인데, 저는 본문을 읽을 때마다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무엇 때문에 길가에 뿌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씨앗은 원래 밭에 뿌려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농부가 씨앗을 길가에 뿌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근동 지방의 농사법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통은 밭을 먼저 갈고서 그 위에 씨를 뿌립니다. 하지만 근동지방에서는 이와는 정반대로 먼저 씨를 뿌리고 밭을 갈았다고 합니다. 그 장면이 참 이상해 보이지만 거기에는 웃지 못 할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행인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행인들은 말 그대로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최대한 빠른 길로 가로질러 가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행인들은 길만 최대한 빨리 가로질러 갈 수만 있다면, 농부가 정성껏 씨를 뿌려놓은 밭에까지도 마구 밟고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결국 밭은 무책임하게 마구 밟고 지나간 행인들 때문에 농부가 뿌린 씨앗들이 모두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농부는 밭의 경계를 정해 놓지 않고 먼저 길 아무 곳에 먼저 씨앗을 뿌리고, 그 후에 밭을 갈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농부는 밭의 경계를 정해놓고 씨앗을 뿌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길가에 씨앗을 뿌릴 수도 있고, 돌밭이나 가시덤불 사이에도 뿌릴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농부가 씨앗을 뿌린 그 땅을 잘 보호하고 가꾸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앗이 길가에 뿌려졌어도 괜찮은 것입니다. 농부가 그곳을 날마다 관심을 가지고 지키고 귀경해 나간다면 결국에는 좋은 밭이 되고 풍성한 열매와 곡식을 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누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리를 지어 따라오는 그들의 마음까지도 다 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씨앗이 길가에 뿌리어진 사람들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는데,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마귀가 와서 그 마음에 있던 말씀을 빼앗아 간 사람들이다. 이들은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첫 번째 비유를 묵상하면서 농부와 밭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밭의 상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금도 농부의 돌봄을 받고 있느냐 하는 것을 새롭게 배웠습니다. 만약에 농부가 뿌린 씨가 길가에 뿌려졌다고 하더라도 농부가 지속적으로 길가 밭을 가꾸고 새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한다고 하면 결국 그 밭은 좋은 밭이 되고 풍성한 열매까지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믿음생활에도 적용을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말씀의 씨앗이 잘 심겨질 수 있는 좋은 땅이라고 할지라도 더 중요한 것은 지금도 농부의 돌봄을 계속해서 받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정반대로 말씀의 씨앗이 전혀 심겨질 수 없는 길가 밭과 같은 사람이 혹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농부의 돌봄을 받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길가 밭이라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농부가 지키고 가꾸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 밭도 좋은 밭이 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앗을 뿌리는 사람에게는 길가 밭에 뿌린 것도 실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씨앗을 좋은 밭에만 뿌린다면 열매를 더 풍성하게 거둘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에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길가 밭에도 뿌렸다고 했습니다. 이는 씨앗을 뿌린 사람은 길가 밭에 뿌려진 씨앗도 버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지키고 돌보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네 가지 밭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오늘날 교회 안의 성도들로도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때마다 달라지고 변하는 내 자신의 마음으로 적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 하셨던 네 가지 밭이 사람들에 따라서가 아니라, 모두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자신이 생각해도 기특하고 자신의 믿음이 훌륭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또 어떤 때는 세상 일로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 때문에 말씀을 들어도 전혀 들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 사람 안에 이 네 가지 마음이 모두 있다는 것입니다. 네 가지 밭 중에서 우리는 당연히 좋은 밭으로만 살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내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밭은 자기 스스로는 절대로 달라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좋은 밭의 상태에서 말씀의 씨앗이 심겨진 상태라고 하더라도 좋은 밭의 상태가 영원할 수는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밭도 언제라도 길가에 뿌려진 밭처럼 행인들이 지나가며 다시 짓밟고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더 중요한 것은 절대로 밭의 상태가 아닙니다. 씨를 뿌린 사람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보호와 돌봄을 받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좋아서 말씀이 잘 심겨지는 좋은 땅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농부의 돌봄을 계속 받을 수 있는 밭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전에 좋은 밭이었습니까? 그러나 좋은 밭 자체가 열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가 맺어지기까지는 앞으로 더 큰 변화를 밭 스스로가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기뻐할 것도 아니고, 실망할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말씀을 잘 듣는 사람에게도 신앙의 고비가 올 수도 있고, 때로는 신앙을 쉬고 싶을 정도로 주변에 모든 것이 다 싫어질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영적인 상태가 길가 밭이 힘든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농부이신 우리 주님이 직접 나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무슬림 국가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말씀을 듣는 것 자체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의 영적인 공격도 그만큼 더 심합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될 일도 안 되게 하고, 아무리 일도 없는데 영적으로 막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가 오더라도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인 여러분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결국에는 좋은 열매가 맺어지도록 말씀으로 계속해서 그 밭을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 가지 밭 중에서 오늘은 길가 밭만을 보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길가 밭도 행복한 이유’라고 정해 봤습니다. 보여지는 모습만으로 길가처럼 버려진 땅과 같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농부의 돌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럼, 길가 밭도 건강한 밭으로 변합니다.
말씀을 시작하면서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하나님이 새롭게 만나게 하신 무슬림 장애우 두 가정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처음 그들의 모습을 봤을 때는 나의 마음이 마냥 슬펐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이 진짜로 참 행복해 보였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난 두 딸 중에 하나는 장애인이지만, 또 한 딸은 동생을 생각하면서 특수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곳은 엄마 아빠 모두 터키어도 읽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는 문맹자들임에도 지속적으로 재활 복지원을 통해서 돌봄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그렇게 어렵게 살아가는 무슬림 장애우 가정을 보게 하신 이유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보여지는 모습만으로는 그들은 길가 밭보다 훨씬 더 심한 사람들이지만, 우리보다 더 어려운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지키고 돌보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저는 이번 만남이 더 없이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베풀었던 그 예물은 다름아닌 여러분들이 사순절 동안 금식하면서 감사예물로 드렸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8장 6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내가 바라는 금식은 너희가 부당하게 가두어 놓은 사람을 풀어 주고, 그들의 사슬을 끊어 주며, 억눌림 당하는 사람들을 풀어 주고, 그들이 하는 고된 일을 쉽게 해 주는 것이다. 너희 음식을 굶주린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하고 집 없는 사람을 너희 집에 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보면 그에게 너희 옷을 주고, 기꺼이 너희 친척을 돕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을 도와 주어라.
그러면 너희 빛이 어둠 가운데서 빛나며, 대낮같이 밝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늘 너희를 인도하실 것이다. 메마른 땅에서 너희를 만족시키시고, 너희 뼈에 힘을 주실 것이다. 너희는 마치 물이 넉넉한 동산처럼 되고, 마르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 너희가 폐허로 변한 옛 성을 다시 건설하며, 오래된 성의 기초를 다시 놓을 것이다. 너희는 무너진 곳을 고친 사람, 길과 집을 다시 지은 사람으로 알려질 것이다.”
저는 터키 이 땅에서 여러분 모두가 무슬림들에게 이처럼 아름다운 소문이 날마다 더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들의 마음이 위로를 받고, 회복되고 강건해 지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2018.04.08, <터키 이즈미르 한인교회 주일강단>, 설교: 임병인 목사
※ 본 교회는 터키 한인교회로서 터키인들을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매주 한인예배로 모입니다.
첫댓글 이즈미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이루어 드리는 귀한 사역의 현장이 되어지길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이 행하고자 하시는 귀한 일들이 이곳 주님의 교회를 통해서 날마다 일어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