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산을 품다
권정숙
짭쪼름한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담도 없이 어깨 결은 집들이 마주 보며 길을 만들었다. 찻집 후루사또야 앞, 청춘 한 쌍이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는다. 유카타에 게다를 신은 일본인이다. 조상의 흔적을 찾아온 모양이다. 저들은 어제의 영광을 필름에 담고 나는 가슴 아린 그날의 역사 속을 걷는다.
구룡포 적산가옥거리에 들자 작은 내 키가 한 뼘 더 커 보인다. 단층과 이층이 키를 재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나지막하긴 마찬가지다. 목 좋은 곳은 상점을 내고 조망 좋은 곳은 살림집을 지었다. 기울기가 심한 양철지붕, 네모반듯한 유리 창틀, 오막조막한 건물들. 시간이 흘러도 포구를 떠나지 못하고 남은 풍경들이 여기가 한때 조선 속의 일본이었음을 전한다.
과거는 땜질해도 아픈 흔적까지 다 가리진 못하나 보다. 건물 측면은 색이 바래고 담장은 시멘트가 떨어져 나가 얼룩덜룩하다. 우리 역사에도 저리 남루한 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휘어진 골목 어귀, 검은 집 가슴팍에 액자가 가득 매달렸다. 오래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의 사진들이다. 정신대로 차출된 여옥, 조선인 학도병 최대치, 반전운동가 장하림이 ‘여명의 눈동자’를 굴리고 있다. 우리는 그 시대의 아픔을 잊지 못해 드라마로 되살렸다.
묵직한 시간들을 가누지 못했을까. 누워있는 향나무가 마당 가운데 있는 이층집이다. 잔디와 정원수, 석등과 석탑, 언뜻 보아도 돈 많은 선주집이다. 집주인 하시모토가 풍어를 기원하며 두 손 모았을 정원의 석탑이 어쩐지 낯설다. 네모난 접시를 크기순으로 포개 놓은 듯한 기단마다 묵은 기원의 말들이 히라가나로 꼬물꼬물 기어 나올 것만 같다.
일본에서 실어온 목재로 집을 지었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조심스레 오른 이층 창가, 새벽이면 닻을 올리고 저녁이면 만선들로 흥청대는 포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자리에서 선주는 하루 수익을 셈 했을 게다. 두 눈엔 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입가엔 느긋한 미소를 흘리며. 뒷짐 진 하시모토가 서 있는 듯하다.
씁쓸한 마음으로 등을 돌린다. 널찍한 다다미방에 사무라이들이 휘둘렀을 법한 장검이 칼끝을 숨긴 채 칼집에 꽂혀 있다. 그들을 지키던 신들도 그들을 따라 떠났을까. 신위를 모신 벽 안의 감실이 썰렁하다. 텅 빈 오시이레 앞, 장대에 두 팔 벌린 기모노의 색은 바랬다.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동해바다는 물 반 고기 반이었다. 가난한 일본의 어부들이 고등어나 청어 등속의 고기떼를 쫓아 목숨 걸고 건너왔다. 그들에게 구룡포는 엘도라도였다. 그들의 원대로 엄청난 부를 이룬 흔적이 거리 곳곳에 남아있다.
계단마다 줄 선 120개의 석주 사이로 오르니 내용을 알 수 없는 야스브로의 송덕비가 바다를 향해 서 있다.
모두 백지였다. 석주에 새긴 일본인 이름도 야스브로의 비문도 성난 구룡포 주민들이 뭉개버렸다. 더러는 시멘트를 벗겨내고 복원하는 것이 진정한 포용이 아니냐고 한다. 구룡포에서 태어나고 자란 분이 목소리를 높인다. 내 할아버지 할머니의 맺힌 한에 비하면 천만분의 일도 안 되는 분노의 표출은 마땅히 남겨져야 한다고. 저들이 생색내는 도로와 방파제는 그들을 위한 것임을 모르는 구룡포인은 없다고.
외세로부터 침략만 받아오던 민족에게 억압과 수탈은 익숙했는지도 모른다. 일부는 저항하고 대다수는 순응하며 살았다. 마지못해 부역을 나갔고, 내 어장의 고기를 잡아다 바쳤다. 수많은 ‘여옥’이 여자인 것이 한으로 남을 일을 스스럼없이 해치운 그들에게. 항변조차 할 수 없는 민초들은 고기의 배를 가르며 분을 삭였으리라.
백여 년 전 번화했을 거리를 되짚어 나온다. 점방과 찻집과 식당을 기웃거린다. 유카타 차림의 한 무리가 셀카봉을 치켜들고 걸어온다. 제2의 고향이라며 일본인들이 찾기도 하고 한국인들이 관광차 들리기도 한다. 과거를 돌아보고 가는 저 카메라엔 무엇이 클로즈업되었을까.
구룡포는 아픈 과거사일지언정 드러내어 품었다. 침략자들이 살다 간 집도, 정원수도, 다다미방도, 우리의 목을 겨눈 칼마저도. 하물며 추억을 찾아 바다를 건너온 그때 그 시절의 사람들도 반겨 맞는다. 적국이 남긴 재산, 적산이 문화의 거리로 자리매김 한 이유는 다름 아닌 포용에 있다.
유난히 빨간 우편함이 많은 길에 섰다. 어쩌면 서로가 불행한 역사는 밥그릇 싸움에서 시작됐는지 모른다. 소리 없는 전장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기록하게 될까. 아프지 않은 당당한 역사가 서술되기를. 파란색 엽서를 느린 우체통에 넣는다.
석양을 안고 배들이 돌아온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어부들이 고단한 하루를 누인다. 항해에 지친 배들을 품는 곳, 포구에서 나도 아픈 역사를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