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개벽사상 -『개벽사상과 종교공부』(백낙청 외)
정신개벽 운동의 시작
허석 : 「개교의 동기」의 시작이 바로 현하(現下)라고 하는 단어인데요. 여기서부터 설명을 좀 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뜻 그대로라면 '지금 이래로'라는 것인데, 이것은 물질개벽 시대의 이전과 이후를 구별하는 말입니다. 과학의 문명이 발달됨으로 인해서 문명의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다는 것인데요. 사실 이때의 과학은 저희가 지금 생각하는 학문으로서의 과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알음알이 차원의 모든 지식과 기술이 만들어낸 문명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문명이 개벽했다고 했을 때, 인류 문명사적으로 생각해보면, 16세기 유럽에서 시작한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그 이후에 일어난 근대 과학혁명, 그 시기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본주의 근대가 문명의 대전환을 일으킨 시점이라는 인식에서 개교의 동기가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요. 이어지는 문장을 보면, 과학의 문명이 발달됨으로 인해서 인류는 물질의 노예 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될 거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 인간이 물질문명을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이 그 주인이라고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소태산은 인간이 물질의 노예로 산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원인은 물질문명의 세력이 강해진 탓도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정신이 점점 쇠약해졌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주인이 주인 노릇을 하려면 그 객을 잘 알아야 되는데, 물질개벽의 참뜻을 제대로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저 그 화려한 외면에 취해서 정신의 힘, 그리고 진리를 사유하는 힘을 잃고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는 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파란고해, 즉 고통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인데요. 그런 의미에서 정신개벽 운동의 시작은 이러한 물질개벽의 참뜻을 깨달아서 인간 정신이 물질의 주인 노릇을 해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현하 과학의 문명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그리고 그 속성을 깊이 자각해서 물질을 사용해야 할 사람의 정신을 점점 더 개벽 해나가는 것이 바로 대종사께서 정신개벽 운동을 시작한 동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방길튼 : 개교표어에 관해서는 원불교 내부에서도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과연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소태산 대종사의 이 사유가 대각 이후에 대각한 안목으로 보니까 결과적으로 나온 것이냐, 아니면 이 표어의 내용이 소태산의 구도 과정에 내재돼 있던 것이냐 하는 의견들이지요. 일단 소태산의 구도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태산의 구도 장소 중에 법성포가 있어요. 법성포라는 곳은 칠산 바다를 아우르는 곳이고 과거에는 조세 창고도 있었으며 동학농민혁명 때는 동학농민군이 주둔하기도 했고 또한 인근에서 의병운동도 일어난 소태산의 생활권이에요.
법성포는 바다를 통해 불교가 도래한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태산은 구도 과정에서 이러한 환경의 법성포 주변과 그 일대를 편력하는데, 그곳이 한국사에서는 동학 농민운동의 현장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이 새 세상을 꿈꾸던 곳이며 그 꿈을 위해 희생도 많이 한 현장이지요. 또한 일제 식민지가 되면서 새로운 물질문명들이 유입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소태산의 발심· 구도지인 길룡리는 법성포가 생활권역으로 와탄천 물줄기를 따라 물질문명이 도래하는 길목입니다. 소태산은 물질문명의 영향권 속에서 구도했던 것입니다. 즉, 소태산의 고향 길룡리는 산중 갯벌로서 산이면서 바다요 산으로 둘러싸인 안(内)이면서 와탄천 따라 바다 밖(外)으로 나아가는 이중적 환경이며, 왕조와 일제 식민지, 근대와 전근대가 중첩된 전환기의 시공간입니다. 또한 일제의 자본이 인근 칠산 어장 등을 침탈하는 식민 자본주의와 더불어 과학기술이 밀려드는 격동의 대전환기를 접하고 있었습니다. 소태산은 영광·무장 등의 장터와 칠산 바다의 탈이섬 파시에서 장사를 하는 경험 중에 물질문명의 변동을 접하고 문제의식을 품게 됩니다. 그러니까 소태산의 구사행상(求師行相)의 사회적 배경인 동학농민혁명의 봉기와 좌절이 배어 있는, 희망과 좌절이 섞여 있는 공간이면서, 또한 일제가 동학농민군을 처참하게 진압한 통한이 스며 있는 시대의 땅이며, 이와 더불어 새로운 물질문명의 도래가 겹쳐진 시공간입니다. 이러한 장소적 배경 속에서 소태산의 대각을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다 언어를 한번 조합해봤어요. '정신개벽의 대각'이라고. 아까 허석 교무님이 소태산의 구도와 대각에는 의심의 내용에 진리 인식과 함께 시대 인식이 있다고 하셨지요. 소태산의 대각 과정은 이처럼 진리 인식과 시대 인식을 통합하는 과정이죠. 일반적으로 대각에는 깨달음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소태산의 대각에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물론, 아까 말한 대로 새로운 물질문명의 유입이라는 시대적 변동, 그리고 동학혁명을 겪으면서 품게 된, 미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며 또한 어떻게 헤쳐 가야 될지에 대한 깊은 고민과 그에 대한 책임 의식, 전망 제시가 있다고 봅니다.
백낙청 : 그런데 정신개벽이라는 말은 그것만 따로 떼어 보자면,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달리 표현했다. 이렇게만 생각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개교표어에서 분명히 한 것은 현하 물질개벽에 부응하는 정신개벽 운동을 시작하셨다는 점이죠. 그게 구 불교와 확연히 구분되는 면이고요. 저는 소태산이 석가모니한테서 이 사상을 배우셨다기보다는 역시 한반도의 후천개벽운동의 흐름에서 나온 결과가 그의 정신개벽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신과 물질의 개념
방길튼 : 소태산의 법설에 따르면 '정신문명 즉 용심법(用心法)'이라고 정의합니다(「나는 용심법을 가르치노라」. 「회보」 33호, 1937년 3월호). 용심법은 마음 작용하는 법 또는 마음을 사용하는 법이라는 개념이 되겠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용심법이 정신문명이라는 것입니다. 소태산에게 용심법은 정신개벽의 방법입니다. 보통 정신이라 할 때 몸과 마음, 정신과 물질, 이렇게 이분법적 사고에서 출발하는데. 이건 그런 게 아니고 어떤 경지를 말하는 겁니다. 정신(精神)을 한자 뜻에 따라 풀어보면 맑고 고요한(精) 경지, 또는 깨어 있는 신령하고 두렷한(神) 경지예요. 이같이 맑고 신령한 마음의 경지인 정신을 차려서 물질을 사용해야 하는데, 시대가 물질문명이 발달하는 시대로 변했잖아요. 그리하여 이 물질의 세력에 끌려서 도리어 정신을 잃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질문이 들어와요. 과거에는 물질문명이 없었냐 또는 기술문명이 없었냐. 그럴 때 저는 이런 대답을 해봐요.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은 기술에 과학적 사고가 결부된 물질문명의 세상이라고요. 물론 과거에도 기술이 있었죠. 그러나 당시에는 그 기술을 다루는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부족했어요. 과거에는 뛰어난 기술은 있어도 과학은 없었습니다. 이 기술에 과학이 적용되면서 물질에 개벽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과학기술에 권력과 자본까지 들어가면서 엄청난 물질문명의 격변이 초래되었죠. 예를 들면 요즘은 첨단 과학기술을 얻기 위해 엄청난 자본과 권력이 필요하니까 국가 전체가 움직이기도 하잖아요? 미국이 반도체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으려고 악수를 쓰기도 하는 것처럼요. 소태산은 과학에 기반하는 물질문명의 발달에 따라 이 전과는 차원이 다른 시대가 펼쳐진다는 점을 통찰하신 겁니다. 과학이 적용된 물질문명의 발달 전과 후로 시대를 구분하지요. 소태산은 물질을 포괄적으로 '바깥 문명' '천만 경계'라고도 말씀하셨어요. 사농공상에 대한 학술, 기술, 생활기구, 재주, 지식, 권리 등 여러 단어를 사용해 세분화해서 물질을 부연하시지요(「대종경」 교의품 30). 물질문명과 관련해서 만들어진 것, 주어진 환경을 총체적으로 물질이라고도 하세요. 한마디로 '물질문명 즉 사농공상 법'이라 정의합니다 (「나는 용심법을 가르치노라」, 「회보」 33호, 1937년 3월호). 여기의 사농공상 법은 과거의 신분에 따른 사농공상 법이 아니라 물질문명의 발전에 따라 펼쳐진 생활강령입니다(「대종경」 교의품 30). 물질과 정신을 총괄해보면 물질이 유형·무형의 만들어진 모든 제도 및 생각되고 감각된 기억과 정보이며, 또한 주어진 환경 등이라면, 정신은 이러한 만들어지고 주어진 것에 규정되고 한정되지 않는 맑고 청정한 경지요 신령하게 깨어 있는 마음의 경지입니다. 특히 정신문명과 대응되는 물질문명은 과학이 결부 된 문명을 말합니다. 소태산은 이렇게 물질문명을 구하고 사용하는 정신의 세력 (「정산종사법어」 경의편 2)을 불교적으로 말하면 불성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리자고 하시지요. 소태산 대종사가 굉장히 욕심이 많으신 듯한 점은, 과거에는 이런 시도를 일부만 했다면 이제는 우리 모두 하자. 이왕이면 다 하자. 그걸 전문가한테만 맡기지 말고 우리도 해보자고 하시거든요. 과학의 문명이 발달하면서 물질에 개벽이 일어났듯이 정신의 힘 또는 정신문명에도 그에 상응하는 일대 개벽을 일으키자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정신을 챙겨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의 마음 수준으로. 소태산의 대각인 일원의 경지로 끌어올려 물질개벽 시대에 적합한 정신개벽의 도인으로 한번 살아보자 하시는 거죠. 도인이라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과거에 수행하는 사람을 도인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이 경우에도 그런 말을 쓸 수가 있다고 봅니다. 소태산은 도인을 공부심(工夫心)을 가진 공부인이라고 하지요. 비슷한 맥락에서 소태산 대종사는 단순히 정신승리라든지 과거의 도덕주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상당한 깨달음의 차원에서, 마음을 잘 사용하는 정신개벽의 용심법을 강조한 것입니다. 정신개벽의 정신은 일원상 성품 자리를 품부하면서 또한 그 자리를 마음과 뜻으로 사용하는 통괄의 경지입니다(「정산종사법어」 원리면 12). 예컨대 '물질을 사용하는 정신' '마음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 '바른 도로 이용하는 것' ‘그 사용하는 마음' '마음 사용하는 법의 조정' '모든 법의 주인이 되는 용심법' '자리이타(白利利他)로 모든 것을 선용하는 마음의 조종사' 등의 표현들로 정신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종사님의 말씀을 모아놓은 「대종경」이 있는데, 교의품 29, 30장에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뜻이 담겨 있으니까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뜻
대종사 선원 대중에게 물으시기를 "그대들은 여기서 무엇을 배우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하시니, 한 선원은 "삼대력 공부를 한다 하겠나 이다." 하고, 또 한 선원은 "인생의 요도를 배운다 하겠나이다.” 하며 그 밖에도 여러 사람의 대답이 한결같지 아니한 지라, 대종사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의 말이 다 그럴듯하나 나도 또한 거기에 부연하여 한 말 하여주리니 자세히 들으라. 무릇 무슨 문답이나 그 상대편의 인물과 태도에 따라 그때에 적당한 대답을 하여야 할 것이나, 대체적으로 대답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의 마음 작용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할 것이며, 거기에 다시 부분적으로 말하자면 지식 있는 사람에게는 지식 사용하는 방식을, 권리 있는 사람에게는 권리 사용하는 방식을, 물질 있는 사람에게는 물질 사용하는 방식을, 원망 생활하는 사람에게는 감사 생활하는 방식을. 복 없는 사람에게는 복 짓는 방식을. 타력 생활하는 사람에게는 자력 생활하는 방식을. 배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배우는 방식을,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방식을, 공익심 없는 사람에게는 공익심이 생겨나는 방식을 가르쳐준다고 하겠노니, 이를 몰아 말하자면 모든 재주와 모든 물질과 모든 환경을 오직 바른 도로 이용하도록 가르친다 함이니라." -「대종경」 교의품 29
또 말씀하시기를 "지금 세상은 물질문명의 발전을 따라 사농공상에 대한 학식과 기술이 많이 진보되었으며, 생활 기구도 많이 화려하여졌으므로 이 화려한 물질에 눈과 마음이 황홀하여지고 그 반면에 물질을 사용하는 정신은 극도로 쇠약하여, 주인된 정신이 도리어 물질의 노예가 되고 말았으니 이는 실로 크게 근심될 현상이라. 이 세상에 아무리 좋은 물질이라도 사용하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 물질이 도리어 악용되고 마는 것이며, 아무리 좋은 재주와 박람 박식이라도 그 사용하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 재주와 박람 박식이 도리어 공중에 해독을 주게 되는 것이며,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그 사용하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 환경이 도리어 죄업을 돕지 아니하는가. 그러므로, 천하에 벌여진 모든 바깥 문명이 비록 찬란하다 하나 오직 마음 사용하는 법의 조종 여하에 따라 이 세상을 좋게도 하고 낮게도 하나니, 마음을 바르게 사용하면 모든 문명이 다 낙원을 건설하는 데 보조하는 기관이 되는 것이요, 마음을 바르지 못하게 사용하면 모든 문명이 도리어 도둑에게 무기를 주는 것과 같이 되나니라. 그러므로, 그대들은 새로이 각성하여 이 모든 법의 주인이 되는 용심법을 부지런히 배워서 천만 경계에 항상 자리이타로 모든 것을 선용하는 마음의 조종사가 되며, 따라서 그 조종 방법을 여러 사람에게 교화하여 물심양면으로 한가지 참 문명 세계를 건설하는 데에 노력할지어다."
- 「대종경」 교의품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