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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전하는 제 마음이 좀 편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은 왠지 설교를 좀 못해도 여러분이 좀 이해해 주실 것 같아서 마음이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실제로도 못할 수 있으니까 잘 들으셔야 돼요.
지난 주간 저는 좀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두 여자가 한 사람은 아프고 또 한 사람은 또 하늘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가 장례를 한 200번 정도 치른 것 같아요. 목사를 일찍 안수를 받아서 스물여덟에 안수 받았으니까 거의 30년 다 돼가죠. 벌써 그러니까 한 200번 정도 장례예식을 참석한 것 같습니다.
우리 그게 우리 가족이든 성도든 간에 슬프지 않은 이별은 하나도 없었어요. 그럼 저는 어떻게 슬픔을 이겼을까요? 다 이긴 건 아니지만 제가 슬픔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저에게 말씀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떠올라서 지난 한 주간 저의 마음을 위로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어요. 목양 일기에도 제가 잠깐 적어놨는데 하나님의 시간은 언제나 옳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지난 주간 동안 전도서 1장을 이렇게 펴놓고 있었습니다. 1장 1절을 한번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전도서 1장 1절 시작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이렇게 하고, 2절부터는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이렇게 쭉 7절까지 이어집니다. 우리는 항상 내 시간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인간의 시간이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시간 속을 살아야 평안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하나님의 시간이 옳다는 말씀이 저를 엄청 평안하게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 사람은 자기의 방법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방법이 정확하고 그 자신의 방법 속에 자기가 살아야 편안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사기 21장 25절입니다.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그때에 이스라엘의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는 가나안 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예요. 약속의 땅, 축복의 땅에 들어갔는데 그 땅에 영적인 혼란이 왔어요. 왜 그랬을까요? 가난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길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지 않자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은 백성을 삼키는 땅이 되었고, 황량한 열매를 맺어도 다 빼앗기는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냐 하면 하나님의 길을 하나님의 방법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각이 가르치는 길은 대부분 분쟁이나 멸망의 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의 권면을 들어야 돼요. 근데 그 길에는 생명이 있어요. 그러나 사람의 생각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권면을 들으면 조금 지나면 혼란이 오고 조금 지나면 분열이 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7장 23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오직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우리가 그렇게 갈망하는 복도 하나님의 길을 걸을 때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성도들이 내색을 안 해서 그렇지 예수 믿는 주된 이유는 축복이에요. 겉보기에는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해서 예배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봉사합니다라고 말하지만 그 중심에 보면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많아요. 굳이 나쁘다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복도 언제 우리에게 임하느냐? 그 백성이 하나님의 길을 걸을 때 임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길과 관계없이 오는 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더라고요. 하나님의 길을 걸을 때 오는 복이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잘 되는 비결이 뭘까요? 교회가 하나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성도가 잘 되는 비결이 뭘까요? 성도가 하나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저는 개척자 정신이 좀 강한 편 같아요. 그래서 어려울수록 좀 더 도전 의식이 더 많이 생기고 문제가 힘들면 저는 정신이 더 쌩쌩하게 들어요. 사람들이 물론 저에 대해서 잘 알 수도 있겠지만 모르는 것 중에 하나는 저는 생각보다 이렇게 약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어려우면 더 힘이 나서 그 문제를 돌파해 내려는 성향이 저한테 있어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 약간 개척자인 거죠. 개척자의 삶을 사는 성도들의 문제가 하나 있어요. 그것은 자기가 자기의 길을 개척한다는 거예요. 내가 개척자여도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을 걸어야 진정한 개척자의 삶이 되는 것이지, 내 스스로 내 길을 타면 내 길을 만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개척자의 삶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나 성도들 중에 개척자의 삶을 사는 분들의 말로가 좋지 않은 것은 자기가 자기의 길을 개척했기 때문인 거예요. 성경에 등장하는 참 개척자는 하나님의 길을 개척한 거예요. 자기의 길이 아니라
근데 이 땅에 사는 많은 성도들이 개척자의 삶을 살고 있는데 그 중심을 보면 결국 자기의 길을 자기가 만들고 있는 거예요. 정말 진정한 개척자란 하나님의 길을 순종하는 자가 진정한 개척자인 거예요. 하나님이 인도하신 길을 내가 따르고 그 길을 따를 때 하나님의 길들이 내 인생 가운데 만들어지고 그래야 그 길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참된 축복은 하나님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길로 들어가야 돼요. 우리가 길을 잘못 가면 아무리 가도 목표를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잘못된 길을 하나님의 길이 아닌 내가 개척한 길을 걸으면 열심히 살아도 결국 그 수고가 헛된 것이 됩니다. 좀 부지런히 살지 않고 약간 겨르게 산 것 같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신 길을 충성스럽게 따른 사람들은 결국 그 노년이나 그 말년이 되어서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그 기쁨의 길들을 결국 걷게 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시간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따라야 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면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일하심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 드리시는 것입니다.
지난주는 오늘 본문의 신명기 32장과 그리고 잠언 장 말씀을 새벽에도 묵상을 하고 수요 예배도 말씀을 전했어요. 그런데 두 본문의 공통점은 모두 말씀에 대한 본문이었어요. 제가 두 본문을 따지고 한 이틀을 묵상한 거죠. 이틀 동안 묵상하면서 깨닫은 단어가 오늘 말씀의 주제인 위대함이에요.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고,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인도하고,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의 세계로 인도하는 그래서 말씀의 인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길은 우리가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거예요.
여러분과 제가 말씀의 지도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길을 걷지 못하고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해요. 교회의 영광은 교회가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갈 때 교회가 영광스럽게 되는 겁니다. 성도의 영광도 성도가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돼요.
근데 어떤 것이 나를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인도하냐 면 말씀이 나를 하나님의 시간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받은 말씀이 없는 사람 깨닫고 묵상해서 내 삶의 정황과 딱 맞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방법 안으로 우리가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의 노래가 43절에서 끝이 납니다. 43절의 노래가 끝이 난 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교훈, 마지막 전할 말을 남기기 시작합니다. 46절과 47절인데 좀 길지만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어떠한 일을 하리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유다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의 날이 장구하리라.
이 두 구절을 통해서 죽기 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 백성에게 남긴 메시지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메시지는 모세가 전한 말을 반드시 지켜내라는 거예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한 말 광대하게는 율법이 될 것이고, 이 율법의 말씀들을 마음에 담고 자녀들에게 명령해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더 축약하면 마음에도 담고 삶에서도 행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으려면 말씀이 우리 마음에 담겨져야 돼요. 예배를 통해서도 우리가 은혜를 누리려면 말씀이 그날 이 강단을 통해 선포된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담겨져야 되는 거예요. 마음에 담겨지지 않고 머리에 지식으로 들어왔다가 그냥 지식으로 나가버리거나 아니면 소리로 들어왔다가 소리로 나가버리면 우리가 말씀의 역사를 말씀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놓치는 일이 없어야 돼요. 여러분 인생의 여정들이 다 힘들죠.
힘들지 않는 순간이 여러분 있던가요? 여러분 결혼의 긴 여정들이 다 평안만 하셨습니까? 연세가 70~80대 되신 어르신 분들은 지금까지 좋고 행복한 일들만 있으셨습니까? 인생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아요. 이런 인생을 우리가 힘있게 살아가는 비결은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돼요. 말씀을 담으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의 역사 세계 속으로 내가 들어가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시간 안에 있는 풍요와 풍성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방법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오묘함들을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놓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 또한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말씀을 잘 보호하고 보존한다는 의미도 있어요.
여러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모시고도 슬픈 역사를 살았어요. 이게 참 아이러니해요.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슬픈 역사를 살아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을 열고 그 말씀을 듣지 않고 마음에 담지 않고 자녀를 가르치고 자녀들을 말씀에 보호함에 그리고 말씀 안에 있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슬픈 역사가 수없이 반복됐던 거예요.
인생의 슬픈 역사들도 가만 돌아보면 말씀을 못 담아서 그렇습니다. 말씀을 담으면 슬픔은 생각보다 쉽게 위로가 되고요. 말씀을 담으면 생각보다 슬픔은 쉽게 이겨내기도 하고요. 말씀을 마음에 담으면 인생의 어려움들 가운데서 쉽게 그 길들이 발견이 돼요.
근데 우리는 말씀을 듣지만 이 말씀을 마음에 담는 훈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마음에 담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마음에 담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2장 16절 17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통상 각종 나무의 열매는 내가 임의대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을 알게 한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마음에 담지 못하는 거예요. 인생은 말씀을 마음에 담을 때부터 해결점이 시작이 되고요. 인생은 마음을 말씀에 담을 때부터 평안이 깃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는 말씀을 마음에 담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을 마음에 담지 못했던 거예요. 그래서 인생의 죽음이 왔고 인생의 고통이 온 거예요.
여러분과 제가 고통스럽게 인생을 사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말씀을 마음에 못 담았기 때문인 거죠. 마음에 담아야 될 말씀을 담고 교훈으로 삼아야 될 말씀을 담고 길로 걸어야 될 말씀을 그렇게 걷고 본받고 행하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사망이 온 인류 가운데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겪고 있는 인생의 고통은 아담과 하와가 말씀을 그 마음에 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담지 못하면 고통이 와요. 고통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어른인 여러분과 저는 말씀을 마음에 담는 훈련을 해야 돼요. 그럼 말씀이 담겼을 때 어떤 일이 있을까 멈춤이 돼요. 말씀이 담긴 사람은 멈춤이 돼요. 화를 내려고 하다가 화가 멈춰지고요. 다투려고 하다가 다툼이 멈춰지고요. 악한 행동을 하려고 하다가 악한 행동이 멈춰지고요. 악한 말을 하려고 하다가 그 말이 멈춰져요. 말씀이 담겨 있으면 멈춤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말씀을 그 마음에 담지 못했어요. 그래서 멈춰지지 않았던 거예요. 멈춰지지 않아서 결국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게 되고 인류 가운데 죽음과 고통이 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온 절망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신 말씀을 마음에 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절정은 언제 올까요? 우리 신앙의 절정은 우리가 막 성령을 받고 뭐 방언을 할 때 외형적인 절정은 그때인 것처럼 보여요. 진짜 인생의 절정은 말씀의 위대함을 깨달을 때입니다. 저는 그게 큰 위로가 됐어요. 하나님이 나에게 계속 말씀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시는 것은 어떻든 그냥 제 소망입니다. 내 장래의 길을 열어주셔서 하나님이 말씀의 위대함들을 내 목회 가운데 나타내려고 하시느냐는 마음을 내가 한 구석에 지금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의 절정 여러분 성령을 받을 때가 아니라 말씀의 위대함을 깨달을 때입니다. 자녀가 말씀을 그 마음에 담고 살면 그 아이에겐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인생의 절정이 와요. 내가 개척한 삶의 절정이 아니라 말씀이 가르치는 말씀이 인도하는 인생의 절정이 꼭 오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우리 자녀들에게 열심히 말씀을 그 마음에 담겨야 되는 겁니다.
말씀을 암송하는 것과 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에요. 암송을 많이 해야 하지만 말을 마음에 담는 훈련을 하고 담았을 때는 어떤 변화야 담는 걸 잘 분간하기가 어려워요.
근데 담았을 때 명확한 표정은 멈춰진다는 거예요. 말씀을 담은 백성은 악이 멈춰지고 말씀을 담은 백성은 잘못된 행위가 멈춰져요. 그러니까 말씀을 담았다는 건 멈춤이 있다는 겁니다.
말씀을 깨달으려면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하고요. 마음에 말씀을 담으면 말씀이 역사하기 시작하고 우리 삶의 곳곳에 그 위대함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지난주 무슨 말씀을 마음에 담으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지신 마음으로 지금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마음이 담겨진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의 말이 담겨진 마음은 되게 힘든 마음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진 마음은 영광스러운 마음이기도 하고 위대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말씀을 마음에 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 오늘 말씀은 말씀을 지켜가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거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생명이라는 거예요. 47절 전반절에 보면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는 것 말씀을 마음에 담아 말씀을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의 생명이라는 거예요. 헛된 일이 아니고 헛된 투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못된 투자로 말미암아 손실이 얼마나 많이 있었어요? 주변에 어떻든 우리 성도들도 꽤 많은 손실이 있었더라. 잘못 투자해서 근데 말씀의 투자는 여러분 잘못될 일이 없다는 거예요. 세상의 투자들은 잘못될 가능성이 어마어마하지만 말씀의 투자는 잘못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말씀을 지키는 건 결코 헛된 투자가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생명, 우리의 영생과 관련된 투자료인가요? 이런 그래서 말씀을 마음에 담고 지켜야 하는 겁니다. 이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말씀이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말씀을 좀 더 철저하게 지키라는 거예요. 말씀을 굳이 생명 장수와 연관시키는 것은 말씀을 철저하게 지금보다 더 열심히 더 부지런히 말씀을 마음에 담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저는 매일 아침 혈압약을 먹습니다. 먹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저도 먹고 아내도 저를 강제적으로 먹입니다. 제가 안 먹는 날은 약봉지를 가지고 와서 먹이기도 하고요. 어떻든 먹어야 됩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도 그렇게 대하라는 거예요. 먹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대하라는 거예요. 마음에 담지 않으면 내 생명이 끝날 것처럼 말씀을 마음에 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하나님의 방법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시간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풍요가 있고요. 하나님의 방법 안에는 말로 형용할 수 있는 길들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 길들과 이 시간들을 누리려면 우리가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인생의 아쉬움이 뭘까요? 이제 저는 조금 깨닫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담지 못합니다. 자녀를 잘못 키운 것도 아니고 어차피 저 혼자 하나님 앞에 서야 되잖아요. 그죠? 여러분 여러분 혼자 하나님 앞에 서야 돼요. 하나님이 우리를 뭘로 보실까요?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마음을 마음에 말씀을 담고 살았느냐를 보시겠죠.
그게 저 한 주간 동안 저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말씀이 생명이라는 것은 말씀을 생명처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생명처럼 여길 때 말씀의 위대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가족을 생명처럼 여기고 돈을 생명처럼 아낍니다. 그러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긴 적은 거의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말씀이 생명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라면 말씀을 생명처럼 여겨야 돼요. 말씀이 능력으로 내 안에 역사하길 바란다면 말씀을 생명처럼 여겨야 하고, 말씀의 영광이 우리 교회 가운데 임하길 바란다면 말씀을 생명처럼 여겨야 그 말씀의 영광이 이 재단 가운데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생명처럼 여길 때 우리는 그 가운데서 말씀의 위대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읽는 거 중요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교회가 위대해지려면 말씀을 생명처럼 여겨야 됩니다. 성도의 삶이 위대해지려면 말씀을 생명처럼 여겨야 됩니다. 그런 말씀의 위대함이 교회 가운데 나타나게 되고 말씀의 위대함이 성도들의 삶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목장 교회가 언젠가는 이 말씀의 위대함이 임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남의 말이라고 확신도 안 하시고 아멘도 안 하시고 할렐루야 말씀의 유대함을 우리 성도들이 깨달을 날이 올 것이라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어요.
이런 거죠.
남 목사 너의 성도가 언젠가는 말씀의 위대함을 깨달은 날이 올 거야.
그게 나의 영광이야 그게 교회의 영광이야
이런 마음을 마음에 주셨어요. 교회가 커지는 것 진짜 영광일까요? 커지면 좋겠지만 진짜 영광은 말씀의 위대함이 나타나는 교회예요. 여기서 말씀을 선포하면 성도들은 말씀의 능력으로 치료를 받고 돌아가고 말씀을 함께 나누면 그 말씀이 공동체를 회복을 시키고, 성도들의 입에서 말씀의 권면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세상의 잔소리나 세상의 엉뚱한 소리들이 아닌 말씀의 이호가 그 입에서 계속 나오는 역사가 이 재단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1장 4절 5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봅니다. 읽습니다. 시작
어수룩한 사람을 슬기롭게 하여 주며, 젊은이들에게 지식과 분별력을 갖게 하여 주는 것이니, 지혜에 있는 사람은 이 가르침을 듣고 학식을 더할 것이오, 명철한 사람은 지혜를 더욱 얻게 될 것이라
새벽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어숙한 사람의 히브리어는 풋타임이라는 단어예요. 도덕적으로 방향 감각이 없어서 악으로 기울어진 단순한 사람을 의미해요. 부탐이라는 말은 미련한 사람, 유혹에 빠지기 쉬운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은 방향 감각이 없는 사람을 방향을 잡아주는 게 말씀이라는 거예요. 이게 말씀의 위대함이에요. 방향 감각이 없는 교회의 방향을 말씀이 잡는다는 거죠. 방향 감각이 없이 어리석게 사는 성도들을 말씀이 잡는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들은 이런 역사가 일어나려면 말씀을 우리 마음에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방향 감각을 놓치셨죠? 놓친 분들이 꽤 보입니다. 교육자들을 봐도 좀 방향 감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성도들도 보면 방향 감각이 없어 보일 때도 있고, 때론 저조차도 내가 이렇게 방향감을 잃어버렸을까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냐 하면 우리가 말씀을 마음에 담지 못했기 때문인 겁니다. 마치 배에 키가 없으면 배가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것처럼 인생도 말씀이 없으면 방향을 잡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이 땅의 교회들이 혼란스러워요. 말씀이 없어서 방향 감각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혼란스러워요. 돈이 없어서일까요? 아니요. 말씀이 없어서 방향 감각을 잃어버려서 성도들의 삶이 혼란한 거예요. 자녀가 잘못돼서 그럴까요? 아니요. 말씀을 잃어서 방향 감각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잘 사는 비결은 말씀을 마음에 품고 인생의 방향 감각을 다시 잡는 것입니다. 말씀을 담아보십시오. 잘못된 방향도 잡히게 될 것입니다. 본성대로 사는 삶은 어리석은 자의 삶의 표정입니다. 어수룩한 사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본성으로 사는 게 본능으로 사는 겁니다.
근데 우리의 본능은 기본적으로 악과 어둠과 절망으로 기울어져 있어요. 그래서 그대로 방치해 두면 말씀이 방향 감각을 회복시켜주지 않으면 우리의 본성은 여러분과 저를 악으로 어두운 대로 오늘도 이끌어 갈 것이고, 내일도 이끌어가실 것이고, 계속 이끌어 갈 것입니다.
본성을 따르는 삶을 경계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청년의 양생한 청년들도 본성의 땅을 살아가요. 말씀이 없으면 오래 살아 지혜가 많은 어른들도 결과적으로는 본성을 살더라고요.
여러분 대화 끝에 본능이 나오지 않던가요?
여러분 대화의 끝에 본성이 나오지 않던가요? 여러분의 교재의 끝에 본성이 나오지 않던가요?
말씀이 없다는 거예요. 말씀의 가르침이 없다는 거예요. 말씀의 위대함이 나타나는 교회는 그 말씀의 위대함이 우리의 본성을 우리의 본능을 죽이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오묘한 세계가 우리의 본성이 아니라 우리를 영성의 삶을 살게 합니다. 말씀의 위대함이 우리가 세상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고요. 말씀의 능력이 본성을 거느려 살게 하고, 말씀이 위대함이 거꾸로 흘러가는 물줄기를 바꾸어서 바로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위대함을 경험하는 순간 여러분과 저희는 저에게 잘못된 본성은 깨어질 것입니다.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말씀 앞에서 나의 본성은 깨어질지어다.
말씀 앞에서 나의 본성은 깨어질지어다.
본성이 말씀 앞에서 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세상과 저와 여러분의 본성 말씀 앞에서 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권사님들 그 마음에 말씀을 담으십시오. 원사님들 할렐루야 우리 장로님, 안수 집사님들 그 마음에 말씀을 담으십시오. 여러분 앞에 마음에 보여야 할 것은 말씀이지 세상이 아니에요. 세상이 저도 완벽한 잘하는 목회자는 아니지만 어쨌든 제 안에 말씀이 보이게 하려고 좀 부지런히 살려고 마음의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게 아마 목회의 가장 큰 영광이게 말씀을 따라 충성되게 말씀으로 살다가 말씀으로 주께 돌아가는 것 이게 목회자의 가장 큰 영광이 아닐까요?
오늘 한 주간도 여러분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기를 축복합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시간을 열 것이고 할렐루야 하나님의 방법을 열 것이고 할렐루야 하나님의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