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옥 시 두 편 <아삭!> <아내>
배재경(시인)
시를 읽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처음 보는 시인의 시이냐? 아니면 종종 지면으로, 또는 얼굴이라도 아는 사람의 시이냐?에 따라 읽는 맛이 조금은 다르다. 얼굴이나 성품을 잘 아는 사람의 시는 읽는 맛이 떨어지거나 아니면 “그래, 역시 이 양반 시야!” 하고 감탄을 자아내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나 얼굴도 모르고 간혹 지면으로 봐 오던 사람의 시, 그것도 ‘괜찮은 시를 쓰는 분이다’라는 그다지 그 시인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 분의 시이거나 아예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생소한 시인의 시를 보는 맛은 남다르다. 거기에는 무엇보다 기존의 선입견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래서 객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만큼 문학을 하는 우리도 관습과 기존질서에 함몰되어 객관적인 사유를 잃고 있는 셈이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런 셈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랜만에 읽는 오봉옥 시인의 최근 시 두 편은 모처럼 시 읽는 맛을 던져 주었다. 처음 내가 좋아하는 동료 시인 한 분이 오봉옥 시를 추천해줄 때만 해도 오봉옥 하면 『지리산 갈대꽃』과 『검은 산 붉은 피』 등으로 익히 알려진 ‘리얼리즘 시인’으로 각인되어 있었기에 시어가 강렬하거나 혹은 구호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다. 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오봉옥 시인은 나와는 서로 교류를 가지진 못했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작품 활동을 한, 나와 활동 시기가 비슷하여 종종 지면으로 봐온 터였다. 이번에 본 오봉옥 시인의 시(2018년 《시산맥》 여름호) 4편이 모두 뛰어났지만 특히 내 눈을 사로잡은 시는 「사과」와 「아내」라는 두 편의 시이다. 오봉옥의 시를 눈여겨보면서 젊은 날 가졌던 설익은 내 감상들이 얼마나 나약하고 얕은 도랑이었는지 갑자기 오봉옥 시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젊은 날 설익게 가진 선입관이 무참히 무너졌다. 내가 기억하는 오봉옥 시인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작품에 절로 눈을 깊게 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난 오봉옥 시인을 리얼리즘 시인으로 고착화시켰거나 아니면 오봉옥 시인의 맛깔스런 진면목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내가 게으른 시 읽기를 해온 탓이다.
이번 《시산맥》의 발표된 오봉옥의 시편들에서 나는 무엇보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깊은 사유의 철학이 담긴 알찬 서정시를 본 것이다. 사람은 시인이 아니더라도 세월의 무게만큼 자신만의 내면을 다진다. 그러나 시인이라면 그 내면의 풍경들이 더욱 살뜰하고 도드라진 성찰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오봉옥 시인의 시가 바로 그러한 모범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은 자궁을 나오는 순간 울음을 터트리며 生을 시작하지만 사과는
탯줄이 잘리기도 전에 벌레들에게 방을 내주며 고단한 生을 시작한다.
사과는 허공이 고향이다. 바람이 탯줄을 자르면 사과는 그만 집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럴 때면 산다는 것도 저렇게 막막한 허공 속에서 흔들리다가 떨어지
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연둣빛 사과는 부끄러움도 없이 내보인 어린 소녀의 젖망울을 떠올리게
하고 붉은 사과는 사내 맛을 알아버린 젊은 새댁의 달아오른 입술을 떠올
리게 한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사과 한 개 그냥 붉어진 게 아니라는 것.
쇠가 물과 불 속을 오가며 망치질로 단단해지듯 사과는 새벽 찬 공기와
대낮 뜨거운 햇탕을 오가며 바람의 망치질을 견디는 것으로 살을 채운다.
자, 이제 한입 깨물어 봐라, 이것이 사과다!
-「와삭!」 전문
사람과 사과의 삶, 어쩌면 태생부터가 다르다. 자기를 봐 달라며 울음을 터트리는 인간과 가지 끝에 열리면서 온갖 벌레와 비바람의 풍파를 겪는 사과의 삶. “사과는 허공이 고향이다.” 라는, 사람(시인)의 시각으로 봤을 때 사과의 태생은 매우 불안한 출발이다. 그래서 애처롭다. 사과가 가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렸을 때 사람들은 예쁘게 보거나 싱그럽게 본다. 그러나 실상 사과는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지반이 없는 불안한 허공이 집이다. 그 불안한 흔들림 속에서도 꿈을 키우고 가을날의 먹음직스런 한 알의 사과로 자신을 키워간다. “바람이 탯줄을 자르면 사과는 그만 집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삶의 연속성이 절연되는 사과 한 알. 결국 사과 한 알의 운명은 출발은 달라도 인간 세상의 삶도 사과의 불안한 출발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산다는 것도 저렇게 막막한 허공 속에서 흔들리다가 떨어지”는 것임을 시인은 사과 한 알의 낙화를 통해 우리 인간에게 삶의 힘겨움을 에둘러 보여준다.
그리고 사과의 인생을 정의하면서
연둣빛 사과 = 부끄러움도 없이 내보인 어린 소녀의 젖 망울
붉은 사과 = 사내 맛을 알아버린 젊은 새댁의 달아오른 입술
이라고 성장과 연륜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붉은 사과의 달아오른 입술은 부끄러운 연둣빛 시절을 거쳐 사내 맛을 알 듯, 깊은 인생의 맛을 알아가는 연대기적 삶의 깊이를 보여준다. “쇠가 불 속을 오가며 망치질로 단단”해지고 “새벽 찬 공기와 대낮 뜨거운 햇탕을 오가며 바람의 망치질을 견”뎌온 고통만이 붉은 사과의 단맛을 내는 것이다. 이처럼 오봉옥 시인은 사람과 사과의 대비를 통해 종국에는 이 세상 무엇 하나도 그저 얻어지는 것이 없음을,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없음을 「와삭!」 이라는 시를 통해 사람들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봉옥의 사과와는 대비되는 나의 시를 한번 보자.
붉은 젖무덤이 태양을 적신다
저 출렁이는 갈증
새들이 부끄러워 후두둑 몸을 숨기는 아침
아, 저 뜨거운
잘 익은 젖가슴을 덥썩,
낭창낭창 그녀의 허리가
하염없이 출렁인다
-「만추-사과」 전문
몇 해 전에 발표된 사과를 주제로 한 시이다. 그러나 나의 시 「만추」는 잘 익은 사과의 붉은 이미지만을 드러냈는데, 오봉옥 시인은 사과의 붉은 이미지를 통해 인생의 깊이를 일깨워주고 있다. 분명히 나와는 다른 인생의 깊이를 던져주는 세계를 보여준다. 이처럼 동일한 주제를 두고도 시인이 지닌 내면의 깊이에 따라 이미지 전달이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오봉옥의 또 한 편의 시 「아내」 역시 연륜의 깊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철학적인 시다.
우리 집 처마 끝에 매달려
집을 지키는 물고기
바다를 품어본 적이 없고
바다로 나아갈 생각도 없는
가엾은 저 양철 물고기
문지기 수행자로 살기 위해
얼마나 허공을 쳐댔던 것일까
가만히 다가가 보니
비늘이 없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이의 어깨에 달라붙은
그렁그렁한 비늘
나 죽은 뒤에도
관 속까지 따라와
가슴에 곱다시 쌓일 것 같다
-「아내」 전문
“우리 집 처마 끝에 매달려” “집을 지키는 문지기”가 아내다. 뿐인가 아내는 자신의 꿈(바다)도 하고 싶은 모든 것(바다)도 품지도 나아갈 생각도 하지 못하는 “가엾은 저 양철 물고기”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 헌신한, “문지기의 수행자”로 살아온 여자가 아이의 엄마이자 자신의 아내이다. 이러한 아내의 숭고함을 가만히 살펴보니 젊고 예뻤던 아내, 아내가 가진 모든 품성과 영양분들로 형성된 사람의 외형적 가치들을 지닌, 이 시에서는 그 가치를 ‘비늘’로 표현하는데, 아내에겐 그 “비늘이 없다” 물고기는 비늘이 곧 생명에 다름 아니다. 사람으로 치면 피부인데, 그러한 소중한 비늘들이, 아내에게 있어야 할 비늘들이 “아이의 어깨에 붙어”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자식에게 내어준 그 가정적이고 모성에 강한 어미의 모습이다. 더구나 그 여자는 “나 죽은 뒤에도/ 관속까지 따라” 올 여자, 나의 아내이다.
오봉옥의 시 「아내」를 보면 부부가 얼마나 서로를 신뢰하고 이해하고 존경하여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하나로 산다는 것은 어느 한쪽이 배타적이거나 이기적이라면 절대 이룰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삶 속에서만이 진정한 헌신과 사랑이 나온다. 그래야 아내는 가정을 위해 더 헌신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 내 몸의 비늘들을 아낌없이 다 내어주어도 추호도 아깝지 않다. 그러한 모습을 오봉옥 시인이 살아가고 있다니 적이 부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내」란 시가 더 뜨겁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