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사랑하자 카페에서 퍼온 글입니다.
기억하고싶어서 가져왔습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던 재일동포 투수 장명부는 당시 꼴찌팀이던 삼미슈퍼스타즈에 1983년 입단한다.
입단 계약을 맺고 며칠 뒤 삼미의 구단주였던 김현철 당시 삼미그룹 회장과 술자리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오고 간 대화를 간략히 정리하자면
장명부 : 저한테 1억원만 준다면 진짜 30승을 할 수 있습니다.
김현철 : 허허 그래요. 30승이 과연 그렇게 당신 말대로 쉽게 달성될까요?
장명부 : 예 제가 꼭 30승하고 말께요. 그러면 우리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도 충분할테니까요
김현철 : 말만 들어도 시원시원하네요 허허 그럼 한 번 해보시오.
30승을 달성하면 1억원을 주지요 ㅋㅋㅋ
그렇게 대화가 오고 갔는데 그 때 김현철 구단주의 생각은 설마 '30승을 할 수 있으랴' 라고 생각하여
그냥 농담으로 1억원을 주겠다. 라고 한 것이었다.
당시에 1억원이면 지금의 10억원 이상의 가치를 가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장명부는 이를 명백한 진담으로 받아들였다.
원래 장명부는 내기나 도박을 상당히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이 내기에서 이기면 1억원을 거머쥔다는 생각에 장명부는
시즌 개막 이 후 30승을 달성하기 위해 이틀에 한 번씩 선발로 등판하는 무리수를 감행했고
서서히 승수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명부는 등판하지 않는 경기에서도 수첩을 들고 다니면서 상대팀 타자들의 특성이나 장단점을 꼼꼼하게 메모한 후
집에서 그것을 철저하게 암기 및 분석하여 실전에 계속 활용하였다.
드디어 장명부는 그 해 427과 1/3 이라는 어마어마한 투구 횟수를 기록하며 대망의 30승(16패)를 달성해내고야 말았다.
이제 난처해진 사람은 김현철 구단주였다.
그냥 한 잔 술에 농담으로 했던 얘기였는데 설마 30승을 달성하랴 고 쉽게 생각했지만
드디어 장명부가 일을 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장명부는 드디어 김현철 구단주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대로 1억원을 자신의 계좌로 입금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김현철 구단주는 그냥 농담으로 한 얘기니까 1억원을 주지 않겠다고 발뺌을 했다.
내기에 죽고 내기에 사는 성격인 장명부는 이런 구단주의 행위에 그냥 물러설 인물이 아니었다.
계속 전화를 걸어
"야 남자가 X알 차고 왜 한 입으로 두 말하는데!!!!!!!!!!!
그리구 내가 왜 어깨 박살내 가면서 무리하게 경기에 출전했는데 이제 와서 발뺌이야
만약 1억원 안 주면 언론에다 너 거짓말 했다고 다 폭로할거야
그러니 당장 1억원 내놔!!!!!!!!!!!!!!!!!!!!!"
장명부의 계속되는 협박 공세에 김현철 구단주는 어쩔 수 없이 1억원을 장명부의 통장에 입금시켰다.
이제 장명부는 부자가 된 셈이다.
그러나 장명부의 신화는 여기서 끝이었다.
투구횟수 427과 1/3은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지나치게 무리를 한 것이었고
(참고로 작년에 제일 많이 던졌던 투수가 롯데의 조정훈으로 182회를 던졌다)
이 후 장명부의 볼 스피드는 계속 떨어져 등판하는 경기마다 패전투수가 되기 일쑤였고
심각한 어깨통증으로 여러 차례 수술까지 받아야 되는 악순환이 계속 이어졌다.
더더구나 1억원 가지고 여러 차례 큰 도박을 하다가 상당액수를 탕진하는 등 불행은 계속 이어졌다.
1985년 시즌에는 11승 25패를 기록했는데 이 때의 25패는 개인의 한 시즌 최다패 기록이기도 하다.
결국 장명부는 프로야구 역사에서 한 시즌 최다승(30승)과 최다패(25패) 기록을 모두 보유하게 된 셈이다.
1986년 시즌 이후 공식 은퇴한 후 롯데 코치로 일했는데 1991년 마약을 복용하다 적발되어
프로야구계에서 영구 제명을 당하고 말았다.
이 후 카지노를 경영하며 조용히 살다가 1995년 4월 13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만약 장명부가 그 당시 그런 무모한 내기를 하지 않고 그냥 적당하게 몸 관리 잘하면서 선수 생활을 했더라면
꾸준히 좋은 모습으로 열심히 하는 선수로 기억됐을텐데...
결국 그는 가늘고 긴 거보다 굶고 짧은 것을 선택한 셈이고 그에 따른 결과 역시
본인이 스스로 치르고 간 인물이었다.
두번째 다큐멘터리의 사람들이라는 카페에서 또다른 진실
장명부 30승에 얽힌 사연
프로야구 투수 개인 최다승은 30승이다.
지난 83년 재일동포 장명부(당시 삼미)가 세웠다.투수 분업화가 정착된 현대 야구에서 30승은 거의 불가능하다.어떻게 가능했을까.
물론 실력에 운까지 따른 덕이다.그러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82년 말 삼미는 히로시마 카프에서 활약하던 장명부를 영입하기로 했다.
당시 장명부는 한물 간 선수.그러나 삼미 허형 사장은 그가 한국에서는 통할 것이라 확신했다.
허사장은 83년 1월 우연히 한국야구위원회(KBO) 이호헌 사무차장과 자리를 함께 했다.공통 화제는 장명부의 시즌 승수였다.갑론을박 끝에 ‘20승은 몰라도 30승은 불가능하다’는 데 의견일치를 봤다.
장명부는 나중에 그 얘기를 전해들었다.그는 허사장에게 대뜸 “만약 내가 30승을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허사장은 “그럼 1억원의 보너스를 주겠다”고 약속했다.30승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농담삼아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장명부는 보너스 1억원을 가슴깊이 새겼다.페넌트레이스가 100경기라 정상적인 선발 로테이션으로는 도저히 30승을 채울 수 없었다.감독을 졸라 선발 중간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등판했다.무려 60경기에 출전해 ‘30승16패 6세이브’라는 불가사의한 기록을 세웠다.
장명부는 허사장에게 “약속대로 1억원을 달라”고 요구했다.하지만 허사장으로서는 선뜻 줄 수가 없었다.농담삼아 한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1억원의 보너스는 정식문서에 의한 옵션계약이 아니어서 구단 운영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하지만 장명부는 집요했다.결국 허사장은 장명부의 협박성(?) 요구에 두 손을 들어야 했다.약속한 금액(1억원) 중 일부를 주고 간신히 장명부를 달랬다.
물론 그 돈은 허사장 개인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떨어지는 낙엽은 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기적을 선물하고 떠난 '슈퍼스타' 장명부
30승 신화를 만든 장명부의 치열했던 삶과 죽음
2005년 4월 13일 일본 와카야마현 미나베초의 한 마작점에서 전 요미우리 자이언츠 투수였던 후쿠시 히로아키(54세)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일본 프로야구 14년 동안 통산 91승 84패 9세이브, 방어율 3.69라는 기록을 남긴 후쿠시 히로아키가 자신이 운영하는 조그마한 마작점에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한 것이다.
후쿠시 히로아키의 비극적인 소식은 현해탄을 넘어 한국까지 알려졌다. 그가 바로 프로야구 초창기였던 1983년, 한국을 들었다 놓았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투수 '너구리' 장명부였기 때문이다.
일본 프로야구 91승 투수 장명부 한국으로 오다
1950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장명부는 야구 명문 돗토리이시고를 졸업하던 1969년,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을 하면서 프로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러나 요미우리에서 보낸 4년 동안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73년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을 하게 된다.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한 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한 장명부는 77년 히로시마로 다시 한 번 팀을 옮기면서 80년 센트럴리그 승률왕에 오르는 등 73년부터 82년까지 91승을 거두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82년 3승만을 거두는 데 그치는 부진에 빠지자 장명부는 불과 32살의 나이에 은퇴를 해버린다.
꾸준히 잘 던져주던 투수가 한창 나이에 단 한 시즌 부진했다고 은퇴를 한다는 사실에 주위에서는 당연히 만류를 했지만 이미 장명부의 머릿속에는 한국 프로야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른바 장명부식 전략적 은퇴였던 셈이다.
1983년 한국땅을 밟은 장명부는 당시 최약체 팀이었던 삼미 슈퍼스타즈와 계약금 1억(추정), 연봉 4~5천만원(추정)이라는 당시로는 엄청난 금액에 입단 계약을 맺는다.(당시 언론 발표) 계약금과 연봉이 여전히 추정치로 남은 것은 당시 자세한 계약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명부는 여기에 훗날 문제가 되었던 추가 옵션으로 30승을 달성하면 1억원을 보너스로 지급한다는 구두 계약까지 맺는다.
30승은 불가능 하다는 생각에 당시 삼미의 사장이었던 허형씨가 농담처럼 뱉은 이 한 마디가 한국 프로야구를 뒤흔들게 된 것이다.
30승 신화를 만든 '너구리' 장명부
지금부터 써 내려가는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다. 실제로 한국 프로야구에서 일어났던 일을 서술하는 것이다.
1983년 장명부는 무려 60게임에 등판을 해서 36경기 완투(완봉승 5번)를 해냈다. 한 시즌 팀당 900이닝을 소화했던 당시 장명부는 427 1/3이닝을 던졌다.
팀 전체 투구이닝의 절반 가까이를 혼자 책임졌던 것이다.
83년 장명부 다음으로 많은 이닝을 소화했던 투수가 같은 팀 삼미의 임호균이 던진 234 2/3이닝 이었으니 아무리 투수 혹사에 대한 개념이 정착이 안 된 시기라도 장명부가 던진 427 1/3이닝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탈삼진도 220개로 1위였으나 워낙 많은 이닝을 던진 탓에 이닝 당 탈삼진률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장명부는 388개의 안타와 106개의 볼넷을 허용해 이 부문에서도 1위를 기록했다.
이렇게 무모하다시피 던지고도 방어율이 1위 하기룡(당시 MBC)에 단 0.01차이 나는 2.34(당시 2위)를 기록했을 정도였으니 도대체 한국 프로야구 수준이 형편없이 낮았던 것인지 장명부가 엄청난 괴력을 발휘한 것인지에 대해 논란을 낳기도 했다.
그리고 문제는 바로 장명부가 거둔 다승이다.
장명부는 1983년 30승 16패 6세이브를 기록했다.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30승을 기어코 달성 한 것이다.
다승 1위는 물론이거니와 세이브 부문에서도 3위에 올랐으며 패전은 2위를 기록했다.
당시 최다패를 기록한 투수는 17패를 기록한 장호연(당시 OB)이었다.
1983년 장명부는 투수 기록 가운데 거의 모든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최다패(2위)와 세이브(3위) 방어율(2위) 단 세 부문을 제외한 경기수·이닝·다승·탈삼진·안타·홈런·완투·완봉·볼넷·몸에맞는볼 모두 1위를 기록했다.
지배했다는 표현을 써도 모자라는 성적을 거둔 것이다.
이처럼 무모한 등판이 가능했던 이유는 장명부의 피칭 스타일도 큰 몫을 했다.
장명부는 전력 투구 할 때와 아닐 때를 철저하게 구분을 했다. 쉽게 쉽게 맞춰 잡는 피칭으로 체력소모를 극소화 했다.
또한 당시 타자들의 수준이 일본 프로야구에서 91승을 거둔 장명부의 변화구를 공략할 만큼 뛰어나지 못했던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무엇보다 허형 사장이 약속한 30승-1억원이라는 보너스가 가장 큰 동기유발을 가져왔다.(결국 5천만원을 받는 선에서 마무리 됐다고 알려졌다.)
비록 삼미는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장명부는 그 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다.
장명부의 83년은 그렇게 눈이 부실만큼 화려하게 저물어갔다.
시련과 좌절... 그리고 쓸쓸한 죽음
그러나 이미 이룰 것을 다 이룬 장명부에게는 더 이상 잘 던져야 한다는 동기가 생기지 않았다.
여기에 약속받은 1억원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분함도 한 몫을 했다.
결국 84년 장명부는 13승 20패(방어율 3.30)를 기록하는 데 그쳤으며, 85년에는 무려 25패(11승 방어율 5.30)를 기록하며 완전히 무너졌다. 장명부는 당시 카지노를 들락거리며 모든 재산을 탕진하는 등 사생활까지 허물어진 상태였다.
결국 86년 빙그레 이글스로 팀을 옮긴 장명부는 그 해 1승 18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거두며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이번에는 스스로 결정한 전략적 은퇴가 아닌 외부에 의한 강제적인 은퇴였다.
이후 삼성과 롯데에서 코치 등을 하며 한국에 남아 있었지만 장명부는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그리고 가끔씩 들려오는 이 영웅에 대한 소식은 암담한 그 자체였다.
한때 모든 어린이들의 우상이었던 장명부는 1991년 동료 야구인과 히로뽕 투약을 한 사실이 발각되어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미 4년 전인 1987년부터 투약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장명부의 이름 앞에는 '히로뽕 투수'라는 낙인이 찍혔다.
91년 장명부는 야구계에서 영구 제명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간 장명부는 택시운전을 하다 친구의 건설회사에 영업직으로 일을 한다는 소식이 가끔 들려왔을 뿐 그의 거취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명부가 일본 와카야마현 미나베초의 자신이
운영하는 마작점에서 지병으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비보를 접한 사람들은 기억 속 어딘가에 아련하게 남아있던 1983년 그 뜨거웠던 여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해 장명부는 얼마나 눈이 부셨던가. 그가 던지는 공 하나 하나에 우리는 얼마나 열광을 했던가. 83년은 온전히 장명부의 시즌이었다. 우리는 그런 전설 같은 투수를 다시 또 만날 수 있을까.
' 落ち葉は秋風を恨まない ' -떨어지는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장명부의 마작점 벽에 쓰여 있는 문구였다.
누구보다 열정적인 투수였던 장명부는 쓸쓸한 말년을 저 문구와 함께 보냈다.
저 문구를 보며 장명부는 자신의 가슴속에서 활활 타오르던 뜨거운 불을 삭였을 것이다.
어쩌면 기억 속에서 너무나 찬란했기에 자신의 말년을 초라하게 만들어버린 1983년을 애써 지우려 했을 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우리에게 기적 같은 한 해를 선물하고 또 그렇게 홀연히 떠나버린 장명부,
비록 쓸쓸하고 외롭게 떠나갔지만 당신은 한국 프로야구의 가슴속에 영원토록 살아 있을 겁니다.
1983년 그 해 그 뜨거웠던 모습으로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