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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 마음속의 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장 28절).
유대인은 자신들의 도덕성을 자랑하고 이방인의 관능적인 행위를 가증히 여겼다. 로마 제국의 통치로 팔레스타인에 들어오게 된 로마 장교들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실족하게 하는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이방인들과 함께 이교의 습관과 음란과 방탕의 홍수가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가버나움에서, 로마 군의 장교들은 정부와 함께 유원지에 나타나 산보하였으며, 그들의 유람선들이 잔잔한 물위를 미끄러져 갈 때 자주 환락의 소리가 호수의 적막을 깨뜨렸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엄중히 책망하는 말씀을 듣기를 기대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 자신의 마음에 있는 악을 폭로하시는 말씀을 들었으니, 그 놀람이 어떠했겠는가!
예수께서는 아무리 은밀한 중에라도 즐겨 악한 생각을 품을 때는 죄가 아직도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사람의 심령은 여전히 심한 증오와 죄악의 속박 가운데 놓여 있다. 불순한 장면을 상상함으로 쾌감을 느끼는 사람, 악한 생각을 품고 호색적인 표정을 짓는 사람은 드러난 죄 속에서 그것으로 인한 수치와 마음을 찢는 슬픔의 고통을 느끼며 그가 영혼 골방에 감추어 둔 악의 참 특성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이 유혹에 빠져 가증한 죄를 짓게 되는 때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악을 새로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숨겨 놓았거나 잠재해 있는 것을 나타내거나 명백히 하는 것에 불과하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잠언 4장 23절; 23장 7절)하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태복음 19장 3절).
유대인들은 지극히 사소한 허물을 가지고도 아내를 버릴 수 있었으며, 버려진 여자는 그 때부터 재혼의 자유를 허용 받았다. 이러한 풍습은 큰 불행과 죄를 초래하였다. 예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결혼 서약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을 때를 제외하고는 혼인 관계가 깨어질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셨다. 그분께서는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에 바리새인들이 이혼의 합법성에 관하여 질문하자,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창조 시에 제정된 결혼 제도를 상기시키셨다. 그분께서는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태복음 19장 8절)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만물을 보시고 심히 좋다고 선언하신 에덴의 아름다운 날들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결혼과 안식일은 그 때에 시작되었고, 이 두 제도는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창조주께서는 거룩한 부부의 손을 혼인으로 연합시키실 때,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세기 2장 24절)는 말씀을 주심으로써, 아담의 모든 자손을 위한 결혼의 법칙이 마지막 때까지 유효함을 선언하셨다.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친히 좋다고 선포하신 것은 인류를 위한 최상의 축복과 향상의 법칙이었다.
인류에게 지키도록 위탁된 하나님의 좋은 선물들 중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결혼 제도도 죄로 말미암아 왜곡되었다. 그러나 그 제도의 순결과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복음의 목적이다. 신 구약을 막론하고, 결혼 관계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 곧 그분께서 갈바리의 희생으로 구속한 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우호적이고 거룩한 연합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그분께서는 두려워 말라 &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이사야 54장 4, 5절),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 임이니라(예레미야 3장 14절)고 말씀하신다. 아가서에서 우리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아가 2장 16절)라고 말하는 신부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신부에게 있어서 만 사람에 뛰어난(아가 5장 10절) 그분께서는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아가 4장 7절)라고 당신의 택하신 자에게 말씀하신다.
그 후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와 신령한 몸의 구주가 되시는 것같이 하나님께서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삼으심으로써 그를 아내의 보호자와 또 가족을 함께 묶는 가정의 띠가 되게 하셨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에베소서 5장 24-28절).
그리스도의 은혜, 오직 이것만이 이 제도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인류의 축복과 향상을 위한 제도가 되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가정들은 연합과 화평과 사랑을 통해 하늘의 가정을 대표할 수 있다.
그리스도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사회의 형편을 보면 이 거룩한 관계에 대한 하늘의 이상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정과 기쁨을 바라던 곳에서 고통과 실망을 발견한 자에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위로를 준다. 그분의 영께서 나누어 주실 수 있는 인내와 온유는 비참한 운명을 호전시켜 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거하는 마음은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만족을 느끼기 때문에, 남의 동정과 배려를 바라는 욕망이 사라질 것이다. 또, 하나님께 마음을 굴복시킴으로써 인간의 지혜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지혜가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통하여, 한때 냉랭하고 벌어졌던 마음들이 세상의 줄보다 더 튼튼하고 오래 견디는 줄, 곧 고난의 시험을 견디어 낼 사랑의 황금 줄로 연합될 수 있을 것이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마태복음 5장 34절).
이 명령이 주어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 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피로 사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십자가의 인이 찍힌 채,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귀한 피의 대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 피가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말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마치 무슨 권리를 가진 것처럼 맹세할 수 없다.
유대인들은 셋째 계명을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스럽게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계명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다른 맹세들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맹세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맹세로 인한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많은 계책을 고안해 냈다. 그들은 불경한 일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물론, 법률을 기술적으로 피하여 어떻게든 감출 수만 있으면 거짓 맹세 또한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행동을 정죄하시고, 맹세하는 그들의 습관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일이라고 주장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구주께서는, 말하는 것이 진실이며 오직 진실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엄숙하게 부르는 법정에서의 선서는 금하지 않으셨다. 예수님 자신이 산헤드린 회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맹세하고 증언하기를 거절하지 않으셨다. 대제사장이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는 네가 말하였느니라(마태복음 26장 63, 64절)고 대답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산상 설교에서 법정에서의 선서를 정죄하셨더라면, 재판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을 책망하시고,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분 자신의 교훈을 강조하셨을 것이다.
아무 두려움도 없이 동료 인간들을 속이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도 창조주께 거짓말 하는 것이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배우기도 하지만 또 하나님의 영을 통해 늘 깨우침을 받고 있다. 선서할 때, 그들은 단순히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한다는 것과 또 거짓 증언을 하게 되면 마음을 읽으시고 정확한 사실을 아시는 그분께 하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이 죄에 따르는 두려운 심판을 알기에, 그들은 무서워 자제한다.
맹세를 하고 일관성 있게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생활하며, 우리를 상관하시는 분의 눈 앞에 모든 생각이 공개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정한 방법으로 선서하라는 요구를 받게 될 때, 말하는 것이 진실하고 오직 진리만을 이야기 한다는 것을 증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정당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맹세하는 것이 필요치 않다는 원칙을 세우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셨다. 그분은 정확한 진실이 말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의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의미 없는 빈말과 어귀들을 정죄한다. 이것은 사교계와 사업계에서 유행하는 가식적인 인사, 진실을 떠난 속임, 아첨하는 말, 과장, 상업상의 속임수 등을 정죄한다. 이것은 또 자신의 본 모습이 아닌 것을 나타내고자 애쓰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진실하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 유의하면 악한 추측과 불친절한 비평의 말이 다 점검될 것이다. 타인의 행동과 동기를 비평할 때, 그 누가 정확한 진실만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자만과 감정과 개인적 원한 때문에 얼마나 자주 다른 인상을 받게 되는가! 한 번의 눈짓, 한 마디의 말은 물론 음성의 억양까지도 거짓의 결정적인 방조자가 될 수 있다. 사실이 잘못 진술되어 본의 아닌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참된 것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것은 햇빛과 같이 투명해야 한다. 진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나, 무수한 형태를 가진 악은 모두 사단에게 속한 것이다. 따라서, 진리의 바른 노선에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떠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악한 자의 권세 아래 내어 맡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확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쉽거나 용이한 일은 아니다. 진실을 알기 전에는 진실을 말 할 수 없다. 선입 관념과 편견, 불완전한 지식과 오판으로 얼마나 자주 우리와 상관된 문제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가! 우리의 마음이 진리이신 분의 인도를 끊임없이 받지 않는 한 진리를 말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신다. 너희 말은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골로새서 4장 6절).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에베소서 4장 29절). 이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면, 산상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농담, 실없는 소리, 상스러운 대화 등을 정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말씀은 우리의 말이 진실할 뿐만 아니라 순결하기를 요구한다.
그리스도를 배운 사람들은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에베소서 5장 11절) 것이다. 그들은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에 있어서도 단순하고 정직하고 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입에 거짓말이 없(요한계시록 14장 5절)는 거룩한 자들과의 교제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태복음 5:39).
유대인들은 로마 군인들과 접촉함으로써 수시로 울화통이 터지는 일을 경험했다. 로마 군의 부대가 유대와 갈릴리의 여러 지역에 주둔해 있었는데, 이들의 존재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한 국가로써의 자신들의 패망을 생각하게 했다. 그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나팔을 크게 부는 소리를 듣고, 군인들이 로마의 국기 주위에 도열한 채 그들 국권의 상징에 경례를 하며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보았다. 백성들과 군인들 간에 충돌이 빈번하였으며, 이 일은 일반의 증오심을 격발시켰다. 로마 관리가 호위병들과 함께 급히 이동할 일이 있을 때는 흔히, 들에서 일하는 유대의 농부들을 붙들어다가 짐을 지워 산을 넘게 하거나 필요한 다른 어떤 봉사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이것은 로마의 법률과 관습에 따라 하는 일이었으므로, 그런 요구에 반항하는 것은 모욕과 학대를 초래할 뿐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로마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자 하는 열망이 날이 갈수록 더 깊어 갔다. 대담하고 난폭한 갈릴리 사람들은 반항 정신이 특히 강했다. 국경 도시인 가버나움은 로마 수비대의 주둔지였다. 예수께서 가르치고 계시는 동안에도, 일단의 군인들을 본 청중들은 이스라엘의 굴욕을 생각하여 씁쓸해 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로마의 교만을 꺾어 주실 분이기를 바라면서 그분을 열심히 주목하였다.
예수께서는 슬픈 마음으로, 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얼굴들을 살펴보신다. 그들의 얼굴에 찍혀 있는 복수의 정신을 주목하시며, 그들이 그들을 탄압하는 자들을 타도할 능력이 나타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 알아차리신다. 그분은 슬픔에 잠긴 음성으로 그들을 향해, 악한 사람을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명령하신다.
이 말씀은 구약 성경의 교훈을 반복한 데 불과한 것이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레위기 24장 20절)는 말이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의 한 조목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국가적 법령이었다. 어떤 사람도 복수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잠언 20장 22절),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 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잠언 24장 29절).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잠언 24장 17절), 네 원수가 배고파 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잠언 25장 21절).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전부가 이 원칙을 나타내는 생애였다. 우리 구주께서 하늘의 집을 떠나신 것은 원수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가져다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분께서는 비록 요람에서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중상과 핍박을 쌓일 정도로 많이 받으셨지만 그 때마다 용서와 사랑만을 나타내셨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이사야 50장 6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장 7절). 당신을 죽게 한 자들을 위한 기도와, 죽어 가는 도둑에게 전한 소망의 기별은 갈바리의 십자가를 통해 각 시대로 전달되고 있다.
아버지의 임재가 그리스도를 두르고 있었으므로, 무한한 사랑이 세상의 축복을 위하여 허락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그분께 닥치지 않았다. 여기에 그분의 위로의 근원이 있었으며, 이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감동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다. 이 사람을 겨냥한 강타는, 그를 당신의 임재로 두르고 있는 구주께로 떨어지게 된다. 그에게 닥치는 것은 무엇이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방벽이 되시므로, 그는 악을 대항할 필요가 없다. 주께서 허락하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그를 건드릴 것이 없다. 그리고 주께서 허락하시는 것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로마서 8장 28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