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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중앙교회(잠두교회)
강화읍 신문리에 강화중앙감리교회가 있다. 강화에서 제일 큰 교회이다. 교인이 6천여명이나 되는 대교회이다. 교회 앞의 교육관 건물도 대단히 크다. 교인들을 수송하는 버스만해도 몇 대씩이나 있다. 강화와 같은 한정된 지역에서 이만한 규모의 교회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1900년에 설립된 교회이므로 2009년으로 창립 109주년을 기록하는 오래된 교회이다. 수많은 인재들이 이 교회를 통해 배출되었다. 독립지사들과 연예인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김활란, 황정순, 곽규석씨등이 모두 이 교회 출신이다. 나와 강화중앙교회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 강화중앙교회의 전신인 잠두(蠶頭)교회-강화읍교회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신문리의 강화중앙교회는 1900년 설립 당시 잠두교회라고 불렀으며 1914년부터는 강화읍교회라고 부르다가 1976년 강화중앙교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나와 강화중앙교회가 어떤 인연이 있는지에 대하여는 나중에 설명키로 하고 우선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들어오게 된 경위와 강화중앙교회, 즉 잠두교회가 어떻게 설립되었는지에 대하여 알아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언제부터 들어왔는지에 대하여는 몇가지 주장이 있다. 개신교가 들어온 시기는 대체로 1880년대 중반으로 보고 있으므로 이에 대하여는 특별한 이의가 없다. 그러나 어떤 교회가 가장 먼저 세워졌느냐에 대하여는 이론이 있다. 혹자는 황해도 송천(松川: 솔내: 소래)에 있던 소래교회가 한국 최초의 교회라고 주장한다. 1884년부터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만주에 갔던 사람들이 영국(스코틀랜드) 선교사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고향 황해도에 돌아와 예배처를 세우고 예배를 본 것이 소래교회의 전신이라고 한다. 소래교회는 외국 선교사의 도움 없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세운 교회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소래교회는 해방이후 공산정권에 의해 문을 닫은 것으로 전해져 한국교회사에서 더 이상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인천의 내리(內里)교회가 가장 처음 설립된 정식 교회라고 주장한다. 내리교회를 안내하는 길거리의 도로표지판에 ‘한국의 어머니 교회’라고 적혀 있다. 또 혹자는 서울의 새문안교회(장로교)가 우리나라 최초의 정식 교회이며 그 뒤를 이어 정동교회(감리교)가 세워졌다고 설명한다. 새문안교회와 정동교회는 같은 해인 1887년에 설립되었다. 다만, 새문안교회가 1887년 9월에 설립되었으나 정동교회는 10월에 설립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제 이런 주장들의 배경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잘 아는 대로 우리나라에 개신교 선교사로서 처음 들어온 사람은 미국 감리교의 아펜젤라(Henry Gerhard Appenzeller: 亞偏薛羅: 1858-1902)목사와 장로교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9-1916)목사이다. 조선 선교에 대한 꿈을 품고 미국을 출발하여 태평양을 건너 일본에 도착한 두 사람은 일본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더 이상 기다리기만 할수 없어서 이윽고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1885년 4월 5일 뜻 깊은 부활절 날 아침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외국에 문을 연 항구는 제물포였기 때문에 그곳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두 선교사가 1885년에 제물포항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여 현재 인천 올림퍼스호텔 앞 삼거리에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이 서 있다. 제물포에 도착한 이들은 조선에서 아직도 외국 선교사에 의한 기독교 선교를 공식으로 허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서울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멀리 태평양을 건너 천신만고 끝에 조선까지 온 미국의 선교사들로서 무작정 제물포에 정박한 배에서 기다리기만 할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 누가 먼저 입국하느냐를 가지고 의논하다가 언더우드목사가 먼저 들어가서 사정을 보기로 결정했다. 언더우드목사는 아편설라목사에게 ‘아편설라목사님은 신혼이시고 부인과 함께 오셨는데 만일 서울로 들어갔다가 부인께서 난처한 경우를 당하시든지 또는 병에 걸리시면 대단히 곤란하므로 이에 본인이 먼저 들어가서 사정을 살펴보고 연락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편설라목사는 ‘언더우드목사님의 말씀은 고맙지만 저로 말씀드리자면 이미 미국을 떠나올 때부터 주님의 사업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언더우드목사의 고집을 당할수 없어서 결국 아편설라목사가 나중에 상륙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나중에 사람들은 한국에 장로교가 감리교보다 먼저 상륙했다고 얘기를 했다. 언더우드목사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어릴 때에 미국 펜실바니아주로 이주하였고 청년 때에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여 먼 조선까지 오게 되었다. 당시 언더우드목사는 25세의 약관이었다. 결혼할 여자에게 함께 조선으로 가자고 하였으나 거절당하자 파혼하고 혼자 몸으로 선교의 길을 떠났다고 한다.
언더우드목사가 먼저 조선 땅에 들어가자 아편설라목사도 곧이어 상륙하여 제물포에서 하회를 보느라고 약 한 달 반 동안 머물렀다. 아편설라목사는 제물포에 머무는 동안 제물포 사람들을 대상으로 쉬지 않고 선교활동을 펼쳐 이미 여러명의 신자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아편설라목사는 5월말에 서울로 들어가서 정동에 터를 잡고 학교부터 설립하였으니 이것이 배재학당이다. 처음에는 적당한 학교명칭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886년 고종황제가 배양영재(培養英材)라는 친필 교명을 내림으로서 배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편, 인천에서는 아편설라목사가 뿌린 씨앗이 결실을 맺어 마침내 그해(1885년) 7월 19일 내리(內里)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므로 인천 내리교회는 미국 감리교의 후원으로 설립된 최초의 교회가 된다.
조선정부가 공식적으로 선교사들의 활동을 승인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후인 1898년 6월이었다. 그렇다고 그 이전에 선교사들이 가만히 있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언더우드목사는 1887년 9월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했으며 아편설라목사는 같은해 10월 감리교회인 정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두 교회는 우리나라에 설립된 최초의 공식 개신교 교회가 된다. 조선정부가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자 미국 감리교는 1892년 초에 인천지역 담당자로 존스(George Heber Jones: 1867-1919)목사를 파송하였다. 존스목사는 1892년 여름부터 인천에 머물며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조선에 오기 전에 일본에서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한국어에도 능하였다. 그는 자기의 이름도 조원시(趙元時)라고 바꾸었다. 한국인 전도자들은 조원시목사의 후원으로 인천, 강화의 섬들을 누비며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조원시목사는 강화도에 들어가 교회를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1892년 가을 강화읍에 들어가기 위해 남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당시 강화유수는 미국 선교사의 강화 유입을 거부하여 남문을 통해 들어가려던 조원시목사에게 즉시 인천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쫓아냈다. 잠시 인천으로 돌아갔던 조원시목사는 이듬해인 1893년에 다시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강화도에 대한 선교를 추진하였다. 마침 1893년에는 영국 성공회도 강화도에 대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국인 조원시목사를 중심으로한 감리교의 선교와 영국인 고요한 신부를 중심으로한 성공회의 선교 모습은 서로 달랐다. 성공회는 조선 정부를 움직여 강화읍에 ‘조선수사해방학당’의 설립을 승인받았다. 성공회는 이 학당의 설립을 위해 강화읍에 쉽게 들어갈수 있었다. 그후 성공회는 1897년 트롤로프(M. N. Trollope: 趙馬可) 신부가 강화읍의 견지산 산마루에 있는 옛 성터를 사서 정지작업을 한후 성공회 강화성당을 짓게 되었다. 역시 사족이지만, 성공회 강화성당의 목재는 백두산 원시림에서 벌채한 소나무를 조마가신부가 직접 운반해 왔으며 목수일은 대원군에 의한 경복궁 중건 작업을 책임 맡았던 도편수가 맡았다. 그리하여 3년후인 1900년 ‘성바오로-성베드로 성당’으로 봉헌되었다. 이 성당이 현재 사적424호인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그러면 감리교는 어떤 선교를 했는가? 성공회가 강화읍에서부터 시작하여 주변지역으로 선교의 범위를 넓혀간데 비하여 감리교는 주변지역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 강화읍으로 선교지를 확대하였다. 선교의 대상도 차이가 있었다. 성공회가 주로 강화의 지배계층과 식자층을 대상으로 삼았으나 감리교는 농민이나 어민등 상민 이하의 계층을 대상으로 삼았다. 성공회는 조선 정부의 후원으로 비교적 쉽게 강화읍에 들어갈수 있었으나 감리교는 처음부터 강력한 배척을 당하였다. 조원시목사가 강화유수의 거절로 강화읍에 들어가지 못하고 며칠동안 갑곶에 머물면서 전도하다가 인천으로 돌아갔던 일이 그것이다. 결국, 감리교의 강화 선교는 선교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에 의해 변두리로부터 이루어졌다.
그때 강화도의 서북 해안인 서사면(현재의 양사면) 시루뫼(甑山: 시루미) 출신인 이승환(李城完: 李聖完)이란 사람이 인천에서 주막집을 운영하면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조원시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내리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조원시목사는 이승환에게 세례를 주겠다고 하니 이승환은 ‘저는 두가지 면에서 세례를 받지 못하겠습니다. 첫째는 고향에 병환중인 노모가 계신데 어머니보다 먼저 세례를 받을수 없습니다. 둘째는 제가 술장사를 하는데 어찌 음주를 금한 교회에 반하여 세례를 받을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조원시목사는 이승환의 믿음을 기쁘게 생각하여 ‘그렇다면 내가 강화에 가서 어머니께 세례를 주겠노라’고 제안하였다. 이 기쁜 소식을 들은 이승환은 즉시 고향인 강화로 가서 어머니에게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자고 설득하였고 이에 이승환의 어머니는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이승환의 노모는 병중이어서 어서 속히 세례를 받고 구원받고자 했다. 인천으로 돌아온 이승환은 조원시목사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강화에 함께 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조원시목사는 강화라면 사연이 있는 곳이기에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강화에 가서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겠다고 다짐하고 강화방문을 급히 추진하였다. 한복으로 변장한 조원시목사와 이승환은 배를 타고 강화도의 서북쪽인 서사면(현재의 兩寺面) 해안에 도착하였다. 서사면 해안에서 이승환이 살고 있는 시루뫼로 가려면 반드시 다리목(橋項)이란 곳을 지나야 했다. 다리목 마을에는 마을 땅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김초시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김초시는 경주 김씨 양반으로 다리목 마을뿐만 아니라 서사면에서 그의 말 한마디라면 모두들 절절매는 입장이었다. 그런 김초시가 이승환이란 청년이 자기 어머니에게 예수교 세례를 주기 위해 인천으로부터 서양 선교사를 데려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초시는 펄펄 뛰며 ‘서양 귀신(洋鬼)은 단 한명도 내 땅을 밟고 지나갈수 없다’고 엄포를 놓고 이승환에게는 만일 양놈 선교사를 데리고 다리목을 지나가면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였다. 집에 불을 지른다면 거동하지 못하는 노모는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이승환은 고민에 빠졌다.
이에 조원시목사는 이승환에게 ‘그럴것 없이 밤에 어머니를 업고 해안으로 오면 내가 기다리고 있다가 세례를 주겠노라’고 제안하였다. 이승환은 그거야말로 어쩔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밤에 노모를 등에 업고 다리목 마을을 비켜서 먼 갯벌을 걸어 배에 도착하였다. 이승환의 어머니는 달빛이 휘영청 밝게 비치는 가운데 선상에서 조원시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니 그가 강화 최초의 세례교인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시루미의 이승환 집에서 이승환과 그의 어머니가 예배를 보게 되었고 며칠 후에는 친척 몇 명이 함께 예배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이루어졌다. 1893년의 일이었다. 이승환의 집에서 모였던 사람들은 얼마후 교회당을 마련했다. 처음에는 서사(西寺)교회라고 부르다가 그후 교항(橋項)교회, 교산(橋山)교회, 양사(兩寺)중앙교회라는 이름을 거처 현재는 강화교산교회라는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현재 교산교회는 새 예배당을 건축하고 ‘존스기념예배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옛 예배당은 기념박물관으로 삼기로 했다. 교산교회는 양사면 교산1리에 있으며 전화번호는 032-932-5578-9이다. 또한 덧붙여 말하자면 조원시목사의 부인은 1892년 제물포에 부임하자마자 창영동에 영화학교를 설립하였으니 오늘날 까지 인천에서 뛰어난 교육기관으로서 사명을 다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조원시목사의 강화 출입을 방해했던 김초시는 어떻게 되었는가?
김초시는 이승환이 노모를 업고 해안에 가서 선상세례를 받도록 했다는 얘기를 듣고 우선 이승환의 효심에 감동하였으며 이어 도대체 예수교가 무엇이건대 이토록 헌신적으로 열심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날이 밝자 김초시는 스스로 해안가의 조원시목사를 찾아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중에 기독교의 복음이 진정한 진리임을 깨닫게 되어 결국 기독교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당시 김초시는 자신이 무척 궁금해 하던 정감록의 십승지지라는 주요 비결이 바로 성경의 십자가지도(十字架之道)임을 깨닫고 개종을 결심했다고 한다. 김초시가 바로 강화 기독교의 선구자인 김상임(金商任)이다. 그리스도를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사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하여 이후로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바울사도로 만드셨던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강화도의 김상임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이후 김상임은 마을의 산당(山堂)을 불지르고 미신을 타파하며 성경공부에 열중하였다. 김상임은 1894년 10월 세례를 받고 다리목 마을을 복음화하고 예배처가 필요하게 되자 시루뫼의 이승환 집에 모이던 상민들과 다리목의 양반들을 한 곳에 모아 예배를 드리게 함으로서 강화의 첫 교회인 교산교회를 정식으로 탄생케 했다. 양반 앞에서는 머리도 들지 못하던 상민들이 양반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부름 받아 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이것이 기독교의 힘이었고 강화 사회에 불어 일으킨 가장 큰 변화였다. 김상임은 이후 강화 전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목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여 바야흐로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으나 병환으로 목사안수를 받기 4개월 전에 소천했다. ‘강화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회’는 1995년 교산교회 마당에 김상임을 기념하는 공덕비를 세웠다.
이리하여 강화에서의 복음은 교산교회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모두 조원시목사의 헌신적인 공로 때문이었다. 강화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교회는 홍의교회였다. 1896년의 일이었다. 홍의교회는 송해면 상도리에 사는 박능일(朴能一)에 의해서 1898년 설립되었다. 서당 훈장을 하던 한학자 박능일은 같은 한학자로서 초시까지 하고 행세께나 하던 김상임이 갑자기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소문을 듣고 충격을 받아 따지러 갔다가 오히려 김상임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교인이 되어 돌아왔다. 그가 자신의 집에서 서당 학생 20여명을 데리고 예배를 보기 시작한 것이 홍의교회의 시작이다. 강화에서 탄생한 두 번째 교회인 홍의교회는 강화의 안디옥교회라고 부를만큼 복음적이었고 또한 자립적이었다. 홍의교회 교인들은 믿음의 형제가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모두 이름에 한일자를 넣어 개명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강화의 다른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주역들이 되었다. 권신일, 권혜일 부자는 교동도로 건너가서 1899년에 읍내교회를 개척하였고 종순일은 길상면에서 교인들을 얻어 나중에 온수리교회를 세우는데 앞장서도록 했다. 가장 앞장섰던 박능일은 1900년에 강화읍에 들어가 잠두의숙(현재 강화 합일초등학교)을 설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이어 잠두교회(강화읍교회→강화중앙교회)를 세우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박능일을 비롯한 믿음의 권속들은 인천의 조원시목사와 협력하여 강화에 고부교회(1897)와 상도리교회(1899)를 세우는 역사도 이룩하였다. 그러므로 강화에는 잠두교회(강화중앙교회)가 설립되기 전에 이미 여러 감리교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1900년 가을, 상도리교회에 다니던 주선일, 허진일, 최족일, 김봉일(모두 한일자로 이름이 끝남을 기억하시라), 이살로메 등 10여명이 강화읍에도 감리교단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돈을 모아 강화읍 천교하에 6칸짜리 조그마한 집을 사서 기도처로 삼은 것이 잠두교회(강화중앙교회)의 시작이다. 그러나 집이 너무 비좁아서 날로 늘어나는 교인들을 수용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듬해인 1901년 제물포지방 감리사인 조원시목사의 도움으로 현재의 신문리 위치에 기와집 25칸과 초가집 16칸을 사서 잠두교회 예배당을 봉헌하였다. 박능일은 홍의교회에서 잠두교회로 옮겨와서 교회의 시작을 열심히 도왔다. 잠두교회는 새로 교회당을 봉헌한 것과 동시에 박능일을 전도사로 임명하여 복음전도의 사명을 마음껏 수행하도록 했다. 또한 1901년 교회부설로 교육기관인 잠두의숙(蠶頭義塾)을 설립하고 첫 숙장(塾長)으로 과거 서당의 훈장을 했던 박능일 전도사를 임명하였다.
잠두교회의 김동수(金東秀)권사 3형제가 순국 당한 얘기는 빼놓을수 없다. 1907년 일제가 구한국군대를 해산하자 해산군인들이 이에 항의하는 소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일부지역에서는 해산군인들의 무장투쟁까지 있었다. 당시 강화진위대장은 이동휘(李東輝)로서 잠두교회의 권사였다. 이동휘권사는 강화에 보창학교를 설립한 애국지사로서 나중에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내기까지 했다. 강화에서도 진위대가 해산되었다. 해산군인들과 주민들 사이에서 비판적인 소리가 거세게 나왔고 일부 군인들은 무장봉기까지 계획하였다. 일제는 강화에서 진위대 병정해산과 관련한 소동을 잠두교회의 교인들이 선동했다고 주장하고 선동자 색출에 나섰다. 강화에서 친일행동을 하던 일진회는 진위대 소동의 주동자가 잠두교회의 김동수권사와 김남수, 김영구 3형제를 비롯한 7명이라고 모함하였다. 결국 김동수 3형제를 비롯한 잠두교인 7명이 일경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가던중 더리미(加里尾) 해안에서 잔학한 근성을 들어낸 일경에 의해 칼로 무참히 살해되었다. 독실한 기독교인들이었던 이들이 무참히 살해당하자 강화에서는 민족적 의식이 한층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그후 삼일운동 때에는 어느 지역보다도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거세게 펼쳤다. 현재 강화중앙교회에는 이들 삼형제의 순국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더리미는 현재의 갑곶돈대 아래쪽에 있는 가리산돈대 부근이다.
다시 잠두교회의 연혁으로 돌아가면, 잠두교회는 일제에 의한 탄압이 강화될수록 민족의 앞날을 위한 선진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1909년 교회부설로 합일여학교를 세웠으니 먼저 세운 잠두의숙과 합일여학교를 합하여 오늘의 합일초등학교로 발전되었다. 1914년에는 교회가 비좁아 새로 강화 최초의 서양식 벽돌교회를 신축, 봉헌하고 교회 이름도 잠두교회에서 강화읍교회로 변경하였다. 1934년에는 구목사관을 준공하였다. 목사관을 준공한 것이 무슨 중요한 일이겠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사항이므로 첨언하는 바이다. 6.25사변 이후, 강화도에는 북한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내려왔다. 북한으로부터의 피난민들 때문에 강화에서의 교회활동은 더욱 강화되었다. 강화읍교회가 이들 피난민들의 안식처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 강화읍교회는 피폐한 농촌을 회복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복민의숙(福民義塾)이라는 기독교 농민교육기관을 설립하였으니 훗날 강화실업고등기술학교의 전신이다. 또한 강화읍교회는 강화에 기독병원을 설립하여 질병으로 고통 받는 교인들을 치료하며 불신자들에게는 전도의 방편으로 삼았다. 강화읍교회는 1976년 강화중앙교회로 이름을 바꾸고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2000년 말에 선교100주년 기념대성전의 입당예배를 보고 이듬해 9월에는 새로운 성전을 봉헌하는 예배를 성대하게 드렸다. 이로써 잠두교회-강화읍교회-강화중앙교회에 대한 간략한 연혁을 설명하였거니와 오늘의 강화중앙교회는 조선말기 쇄국정책에서도 꿋꿋이 발전하였고 특히 일제의 탄압 아래에서도 민족을 지키는 횃불로서 꺼지지 않고 견뎌왔으므로 ‘강화의 예루살렘교회’라는 찬사를 듣고 있다.
이상의 강화선교역사에서 볼수 있듯 강화지역에서는 선교의 초기로부터 감리교회가 단연 성장하였으니 2005년 현재 강화지역에는 119개의 감리교회와 2만6백여명의 감리교인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화지역에는 개신교회가 모두 177개 있다. 그러므로 전체 개신교회의 거의 68%가 감리교회인 것이며 교인수로 볼때에도 전체 개신교인중 약 85%가 감리교인인 것이다. 실제로 강화섬을 돌아다니다 보면 곳곳에 있는 교회들이 거의 모두 감리교회이다. 아편설라목사와 존스목사가 뿌린 겨자씨 한 알이 새들이 깃드는 큰 나무로 자란 것이다. 나와 강화중앙교회, 특히 구목사관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하여는 궁금하겠지만 잠시 참으시라! 다음번에 설명코자 한다.
강화중앙교회는 2000년으로 창립 1백주년을 맞이하였다. 교회 앞에 창립1백주년을 기념하는 커다란 비석을 세웠다. 강화중앙교회의 주인은 (담임목사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써있다. 교회 현관에는 그간의 사료들을 모아 전시해 놓았다. 만리현감리교회도 창립1백주년을 기념하여 기념 비석과 전시시설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기념비석에는 ‘1911년 5월 7일 당시 정동교회에 다니던 김덕순씨가 만리동에 있는 자기집 초가 4칸을 희사하여 기도처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 만리현감리교회의 시초이다’라고 적으면 될것 같다. 그리고 교회 1층 현관에는 작은 전시실을 만들어 귀중한 자료와 사진들을 시대적으로 정리하여 전시하면 좋을 것 같다.
강화중앙교회 창립 1백주년 기념비
강화중앙교회 모습
강화중앙교회 현관에 있는 전시장의 역대 목회자 사진 중 정등운 목사님 사진
강화중앙교회 교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