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곳 없이 선비들이 살아온 마을에는 형제들이 거처하던 정자가 있다,
그 정자의 현판들을 보면, 체화정,체하당,사체정,등과 같이 이름 하여 정자를 지어서 현판했다,
영천 대전동에 五棣亭이라 하여 정자를 세운 것은 아마도 1976년 부터 정자를 짓기 위한 의논하여
시작한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된다, 내가 군입대 전에 공사를 마쳤으니 기억합니다,
오체정의 자손은 양계선조님의 8대손인 致자 형제분이 5형제로, 致九,致億,致文,致健,致淳,이렇게 오형제분이신데, 양계선조님이 세아들을 두셨는데, 장남 時行은 부군의 상중에 돌아가셨지만 아들 셋을 두셨다, 장남에 생원 양곡 碩胄요, 석주의 아들이 셋인데, 훈수.지수.오졸재,이시고, 둘째집이 통덕랑이신 碩耉로 아들을 7남이나 낳았으나 7남중에 4남은 일찍 요절하고 3남 만이 자손을 두시나 자손을 번창하는 사업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통덕랑 장남은 宗陽 아들 一相과 一樞로 둘을 낳았지만,둘째 일추.는 아들하나 夏綸을 두고,그 아들은 뒤를 있지 못하고 无后가 되었다,
통덕랑의 장손은 一相과 일추는 당숙인 훈지수에게 공부를하여 장남 일상.역시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夏經은 딸만 하나 생산하여, 동생 夏緯의 장남을 양자를 세운, 夏자 형제는 항상 한방에서 먹고 자며 한 책상에서 마주앉아 공부를 하여 이 분들이 거처하던 집이 상체(常棣)라 하겠다, 이 형제의 우애는 영천지에 나온다, 형제의 우애는 뛰어났다지만 형이 아들을 생산치 못하니 동생의 장남을 양자 들였고, 그 양자가 興休요, 또 이분이 아들 둘을 두셨는데, 또 작은집의 致休께서 아들을 생산하시지 못해서 형의 둘째 아들 유영(裕永).을 양자로 들어가니,이 代까지는 자손들이 번창함에 수난에 수난을 격은샘이다, 즉 4~5대가 자손이 귀하여 위태위태, 간들간들 하였답니다,
흥휴.의 장남 유범(裕範).께서 자손이 귀한 집을 구함으로 대전동에 드디어 다섯아들을 두시니 致자의 5형제분이다, 자손이 귀한 집이라 여기자손들은 夏자 형제분의 처소인 상체를 복원할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여 짓지를 못함이 자손된 자로써 아쉽기만 합니다만, 어쩔 도리가 없고요, 여튼 致자 오형제분의 아들들의 鎭짜 항열 할아버지가 9홉분을 구종반을 두시니 9종계 라는 계를 구성하여, 가을이면 곡식을 거두어 돈을 마련하기 시작하여, 淵자에 17종계요, 東자에 23분이신데 5분은 일찍 돌아 가시고 18분이 모여 드디어 소매를 걷고 東자에 최고 帳은 東必로 중심하여 致짜 5형제분의 정자를 짓기로 의논하여 지은것이 오체정(五棣亭)가 중대전 동네 앞자리에 정자 랍니다,
현판의 五棣亭이란 당호는 시경의 常棣 詩에서 그 뜻을 취함으로,체회정,체화정,사체정,오체정,중에
5형제이시니 오체정으로 당호를 취한 것입니다,
시경에 나오는 상체 시를 살펴보면, 충,의,효,우애가 더불어 이뤄진다는 뜻을 가진것으로,......
{늙을수록 나는 속세 인연 끊고 싶어
물을 끌어오고 바위에 기대어 몇기둥을 얽었네
고요한 빈터 연기나무에 갇히어 푸른빛 띠고
차가운 밤 달빛은 주렴에 들어 아름답네
동북쪽의 창가에선 산을 보고 읆조리고
일상의 배갯머리 여울소리 들으며 자네
일찌기 그간의 많은 취미 아노니
일평생 헛되이 달리려고 했네,}
이렇게 형이 읊조리니 동생이 화답하기를,....
{사람에게 좋은 땅은 인연이 있는것 같아
하늘이 아껴두어 오늘에야 새 기둥 빛나네
마을은 또렸하게 시내물 따라 들어셨고
늘어선 산들은 겹겹이 눈에 들어 아름답네
달빛이 처마 끝에 차오르니 하늘은 읊을 만 하고
바람이 못 수면에 부니 한낮에 잠자기 적당하네
늙을 수록 한가로워 일없음을 아노니
아우는 노래하고 형은 화답하여 노년을 보내리,}
동생은 이렇게 답하였다 한다,
이 詩는 이민정과 이민적의 형제들의 체화정 시의 부분이며, 이 시에서 和樂且湛은 시경에 나오는 상체시에서, 화합해야 만이 즐겁고 기쁠수 있다 에서 빌린 말이다,
상체시에 보면,.....
{정자와 누대 짓는 것도 전날을 인연하니
뉘말하랴 거친 언덕에 홀연히 지었다고
십리 자욱한 안개속에 냇물은 아득하고
집집마다 울려퍼지는 다듬이 소리에 달빛은 어여뻐라
낙시 파한 물가에서 차를 마시고
바둑마친 저녁언덕 백로와 함께 잠드네
뜨락엔 한 떨기 상체나무 있으니
동풍에 그 뜻을 알아 세월을 보네,]
상체화는 아가위나무의 꽃이 다 형제간의 우애가 깊어 집안이 번성한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대전동에 5형제는 어릴땐 한 밥상에서 먹고 한방에서 한이불로 잠자며, 혼인함에 똑 같이 살림나서 한마을 이웃에서 각자 집을 지어 살다가 둘째가 가장먼저 죽고, 그 다음이 첫째요, 그 다음이 넷째,셋째가 죽고 막내는 셋째형이 죽은 5년 뒤에 눈을 감으며,.....
[노랑나비 늙을줄 몰랐는데, 한 때는 같이 먹고 자며 (여기서 노랑나비는 노란 햇 병아리 색갈에서
동생은 노래 부르고 형은 화답하니 모두가 흥겨워 빌려 비유한 언어법,을 사용함,)
손벽치고 즐거웠네
어느듯 떠나던 형제들은 하나둘씩 뿔뿔히 헛어지고
홀로 체화정 처마 기둥에 기대어 달빛 차오르는
그늘에서 눈물만 짖누나,]
이렇게 5형제는 죽어서 단 한명도 한산에 묻힌이 없고,
모두 각각 다른 산에 장례 하였다,
이러한 사유에 상체를 사모하고 경모하여,이를 슬퍼한 東자 항렬 18분이 합심하여 정자를 지었다, 이젠 대전동의 東자 항렬 23분 중에 21분은 고인이 되셨고 둘째집의 4분만이 살아 계신다,
이리하여 대전의 통덕랑 집이 東자 23집이요, 容자가 42집 이나 되지만,대전에 있는 집은 단 8집 밖에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고 나머진 서울,부산,대전,울산,대구,등등 으로 나가서 살아서 집안에 큰일이 생기면 설렁합니다,
고손 玎容은 못 배워 기록해 둔 것이 없어 본대로 이렇게 적어두고,
오체정 건립 경영 전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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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자는 증고조 오형제분을 추모하는 곳이라, 우리집은 양계공 이후로 중세에 청한하여 외롭고 미약하였으나 증왕고 형제분께서 문호를 넓히어서 사람들이 다섯 부자(富者)라 칭하였고 모두 장수하여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고인의 풍도가 있었고 조고 제종반에 구종계를 모은 것이 지금으로부터 구십칠년이 되었고 대한고종 庚寅1890년에 하나의 작은 정자를 세우고자 하여 詩를 지어 기록하였으나 그러하지 못하였고 나의 선고 여러분께서는 수를 누리지 못하고 흉년과 난리가 겸하여 경영할 겨를이 없었고 우리 무리에 이르러서도 대란을 겪은 뒤로 세상의 도리가 점점 변하고 인심이 옛날과 같지 않아서 일찌기 저울눈만큼씩 모아 놓은 자금을 공연히 한쪽 구학에 두었다가 선조의 뜻을 계술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자나 깨나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는데 을묘년 겨울에 九宗契聚를 하던 날 저녁에 모든 의논이 진실로 합하여 즉시 일을 시작하기로 하였는데 대지를 구하지 못하여 걱정을 하였다,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선세에 잡아놓은 터가 비록 그윽하고 한가하며 고원한 경치는 없으나 풍속이 옛날과 다르고 수호하는 일도 가까운 곳이 먼 곳 보다 나으며 또한 세속이 선조의 덕을 과장하여 별도로 문호를 여는 것을 본받지 아니하고 다만 선조의 뜻을 계술하여 후예에게 전할 따름이니 추모하는 정성이 어찌 운림천석의 사이에 있겠나, 다음해 병진년 겨울에 공사를 시작하여 정사년 가을에 낙성을 고하니 방이 3칸으로 비록 높이 솟은 아름다움은 없으나 일족이 모이는 데는 여유가 있으니 이는 조상의 남은 은덕이지 어찌 우리의 정성이리요, 대한고종 경인 후 97년 병인 동지절에 증손 동렬은 삼가히 기록 합니다,
증손 東烈 記
1.청한 = 가난함,
2.이유담낙 =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모습,
3.운촌천석 = 구름이 낀 나무숲과 샘물과 반석이 좋은 곳,
*오체정 현판의 뜻을 그때에 3종숙 이신 송파.도평 아재께서 설명해 주었지만 잊어버리고 나중에 공부하여 터덕 하였 습니다, 오형제분이라 오체정 입니까, 하고 물으니 3종숙께서 시경을 이야기 하시니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팅 하여서 물었는동 만동 했던 기역이 납니다요,ㅎㅎㅎ
여튼 형제가 거처하는 집을 常棣라 한답니다,
시경(詩經)이란,
詩經은 중국 최초의 詩歌集이다, 다시말해 공자선생이 자기 제자들에게 교육을 할 때 주나라 왕조의 정치적 형태와 민중의 수용 태도를 가르치고 문학 교육에 힘쓰기 위하여 편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경은 전한시대 제시(齊詩).노시(魯詩). 한시(韓詩).모시(毛詩)라는 이 네 가지 종류의 책이 나왔지만 오늘에 남아 전해지는 것은 毛詩뿐이어서 별도로 모시라 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詩라고만 불리었으며 詩라는 말의 어원은 여기서 나왔다, 주나라 때 편찬됬다하여 주시(周詩)라고도 하다가 당나라 때 와서 오경의 하나에 포함되면서 시경이라고 불리게 된것이다,
시경의 구성으로 보면 311편의 고대 민요를 풍(風) 아(雅) 송(頌)의 3부로 나누어서 편집하였고, 그중 6편은 제명(題名)만 있을 뿐 어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사가 있는 것은 305편 이라 한다, 즉 공자가 온 나라를 다니면서 그 고을에서 아동들이 부르는 노랫말을 모아 적은 책이 시경이라 부른다, 진짜 공자가 처음 지은 책 인지는 알수가 없고요,
여튼 風이라는 것은 각국의 여러 지역에서 수집된 160개의 민요를 모은 것이요, 雅라는 것른 연석(宴席)의 노래로 구분되고, 소아 74편과 대아 31편은 조정에서 불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頌 40편은 왕조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의 노래라고 여겨지며,어느 것이든 고대의 이름없는 민중이나 지식인들의 노래 이다, 周는 제13대 평왕 때에 도읍을 호경(鎬京)으로부터 하남성(河南省)의 낙양으로 옮겼는데 기원전 770년 그때 일을 노래한 것이있다, 주실동천(周室東遷) 이전 즉 서주(西周)의 것으로는 제 11대 선왕 재위 기원전 827~기원전 782년 시대의 노래로 보인다, 그것이 시경중에 옛 부분이라 한다, 주 왕조 창업의 모습을 노래 한 것도 있고, 선왕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주왕조 초기인 문왕 무왕시절의 노래가 있다하지만 알수없고, 여튼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가요를 모은 것이 되겠다,공자는 고대의 가요를 통해서 당시 정치.사회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風에는 애정의 노래라든가 일하는 노래, 유랑의 노래 등이 많지만, 雅,頌에는 天의 사상에 근거하여 주왕조를 찬양한 것들이다,
* 시경 이야기, 요조숙녀 군자호구(窈窕淑女君子好逑), 고대 중국의 대표적인 고전이 사서삼경(四書三經)인데 사서는 대학 중용 논어 맹자이고,삼경은 시경 서경 주역을 말한다,
시경은 대략 BC12세기에서 BC7세기에 걸처 주나라와 춘추시대에 민가와 궁정에서 불려졌던 시가 305편을 공자가 정리한 유가의 경전이다,
요조숙녀군자호구,
관저(關雎)
關關雎鳩 在河之洲,관관저구재하지주,꽌꽌우는 물새는 물가에서 노는데
窈窕淑女君子好逑,요조숙녀군자호구,아리따운 아가씨는 군자의 짝이라네,
이렇게 노래했다,
시경 국풍의 첫편인 주남의 첫머리에 나오는 관저라는 시가의 첫구절이다,
주남은 주나라의 남쪽으로 주공이 다스리던 지역으로 성인의 교화를 입어 풍속이 바르게 된 곳인데 주남에 나오는 노래는 그 다음에 나오는 소남(召南)과 함께 정풍(正風)으로 분류된다, 관저는 주남의 첫머리에 나오는 만큼 시경을 대표하는 유명한 시가이기도 하다,
시경의 첫번째 기록한 분은 누구인지 기록이 없고 후에 공자께서 편집하여 기록한 책인 만큼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전해지는 시경의 일부라서 아쉽지만, 옛날에 선비집에는,제시(齊詩) 노시(魯詩) 한시(韓詩) 모시(毛詩) 4권의 책이 책꽂이에 모두 비치된 집이 있었지 않겠나 생각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