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Sweet Home’은 어떻게? 조경애
1절: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피고 새 우는 집 내 집 뿐이리
3절: 그 집을 떠나 멀리 방황하네 또 다시 가고파 내 정든 고향집
새소리 들리고 시냇물 흐르는 내 고향 안식처 또 다시 가고파
위 노래 가사를 지은 존 하워든 패인(J. H. Pain, 1791-1852)은 미국의 극작가요 배우였다. 그는 독신으로 한 번도 가정을 가져보지 못한 채 방랑자의 삶을 살았다. 그는 고향과 조국을 떠나 1823년 프랑스에서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울먹이며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결국 낯선 타국 알제리에서 쓸쓸하게 인생을 마쳤다. 그런데 그의 시에 영국의 비숍(Bishop, 1786~1855)이 곡을 붙여 미국인들과 세계인이 애창하는 ‘Home, Sweet Home’이란 노래가 되었다. 이 노래는 그의 이름인 페인(Pain, 고통)속에서 나와서 가정의 소중함을 상기하는 일에 기여했다.
우리는 어디서나 돌아 갈수 있는 작은 공간, 그 곳에 나를 기다려주는 따뜻한 가족을 생각할 때 안식과 평화를 누린다. 정말 ‘Sweet’함을 느낀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가정이란 행복하고 평화로운 곳이라기보다 갈등과 슬픔을 안겨주는 곳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 최초의 가정부터 시작된 비극이었다. 달콤한 맛을 꿈꾸었는데 쓰디 쓴 맛이 남았다. 하여 아예 공동체 가정을 이루지 않으려는 독신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어도 결국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해체되고 있다. 사실 참 안식과 평화를 누리는 가정을 만드는 것은 한 개인이 아닌 모두의 문제와 책임이다. 가정은 모든 인간의 원초적이고 복합적인 딜레마가 존재하는 곳이다.
가정은 사실 가정이라는 말 자체에도 복합적인 뜻을 지녔다. 성경에서는 남녀가 한 몸을 이루는 것으로 가정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즉 가정은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가족이라는 사람 공동체를 이르는 말이다. 물론 공동체로 살아가려면 함께 먹고 마시고 쉬어야 하는 독립된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족(사람)과 집(공간)을 합하여 가정이라는 통합된 용어를 사용하는 듯하다.
그렇다. 가정은 사람 공동체가 시작되는 곳이다. 해서 공동체를 잘 유지하려면 공동체를 유지할 선하고 아름다운 규범이 그들을 떠받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놀랍게도 결혼 후 바람직한 가정을 이룰 요건을 여기에서 찾는다. 결혼정보회사 노블레스 수현이 미혼남녀 874명(남 434명· 여 440명)을 대상으로 한 2014.6.17.~7.1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결혼 후 이루고 싶은 계획’에 대해 남성은 ‘내 집 마련’(228명·52.6%)을 1위로 꼽았고 이어 ‘승진 및 직장 자리잡기’(111명·25.5%), ‘저축계획 또는 대출 갚기 등’(56명·13.0%), ‘자녀계획’(39명·8.9%) 순으로 나타났다. 여성들은 ‘자녀계획’(148명·33.7%)을 1위로 꼽았고 이어 ‘내 집 마련’(133명·30.1%), 저축계획 또는 대출 갚기 등’(94명·21.4%), ‘승진 및 안정된 직장’(65명·14.8%) 순으로 조사됐다.
물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는데 경제적 요인 등 외적인 요인이 필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진정으로 꿈꾸는 참 안식과 평화가 있는 가정을 이루려면 위의 것만으론 부족하다. 더 중요한 것을 찾아야 한다. 가정은 철저히 선과 악의 양면성이 함께 작동하기 좋은 곳이다. 가정은 사랑과 안식, 돌봄과 용납, 필요충족과 기쁨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가장 선함 뒤에 반드시 가장 악한 것이 숨어 붙어 있다. 악한 것들이 작동하지 않게 하려면 선한 것들을 지켜내고 성장시켜야 한다. 값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건강한 영혼을 지닌 남녀의 결합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야 선을 지켜낼 수 있다.
그런데도 다분히 연약한 영혼들로 이뤄진 많은 가정들이 위태롭지만 보존되기도 한다. 가정을 주신 분의 은혜 때문이다. 생면부지의 남녀가 사랑하게 되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사랑을 덧입혀 주셔서 가능하다. 조건 없는 사랑, 책임지는 사랑, 용납하는 사랑, 소망을 품는 사랑, 장밋빛 사랑이 이 세상에서는 미약하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다. 가정의 핵은 사람이다. 가정은 누구도 예외 없이 모두가 존중받아야 할 가장 최초의 공동체다. 건강한 부부도 얼마든지 뒷걸음칠 수 있다. 어떤 한사람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가족 공동체는 안전하지 않다. 가족 공동체의 이타성은 가정을 지켜낼 핵융합을 가져오고 자기중심성은 가정을 해체시키는 핵분열을 가져온다. 책임을 지되 서로 짐을 나누어 져야 한다. 서로를 기쁘게 하고 배려해야 한다. 참사랑은 섬김을 ‘자기 의’로 여기지 않는다. 희생으로 여기지 않는다. 가정은 서로를 세우는 창조적 생명력을 낳는, 진정한 의미의 생육과 번성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런 가정의 창조적 에너지는 안을 넘어 밖으로 넘쳐흐른다. 이웃에게 훈련된 섬김의 사랑을 나눈다. 그것을 위해서도 온 가족이 기꺼이 짐을 나누어진다.
그렇다면 가정이라는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 짓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이처럼 자기중심적으로 멋진 가정에 대한 잘못된 환상만 품는 것이다. 가정의 주체는 공간보다 사람이다. 가정은 육체적으로만 잘 쉴 수 있는 호텔, 휴식공간이 아니다. 안락, 쾌락의 장소가 아니다. 쉼의 장소지만 누군가의 서비스를 통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섬김을 통해서 가능하다. 자기중심적인 안락을 꿈꾸는 사람은 가정의 본질을 왜곡시킨다. 스스로 속여 자신이 편하도록 가정을 소비적인 공간으로 대한다. 다른 가족도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대상으로만 여긴다.
이런 사람은 가정에서 생산적으로 가족을 섬기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마음 속 깊이 섬김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아주 제한적인 책임을 지면서도 당당하다. 대부분의 남자들과 아이들이 그렇다. 가끔 공주병 여자들도 그러하다. 아내나 엄마 없이 홀로 설 수 없는 소비의 공간, 무기력한 공간이 그들이 생각하는 가정, 집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가족구성원들은 집에만 오면 창조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집, 가정은 삶의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공간이며 자신의 인격을 연단하는 최초의 훈련장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좋은 가정을 세우려면 가족을 가장 많이 섬기는 여성부터 변화해야 한다. 여성은 마땅히 가정을 섬기되 참 안식은 주님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남편과 자녀들이 결국 주님 안에서 안식하도록 지혜롭게 섬겨야 한다. 주부에게 가장 필요한 믿음의 장소가 가정이다. 자신이 주님을 의지하고 가족들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도록 섬겨야 한다. 주부의 책임과 섬김도 철저히 양면성을 가진다. 주님을 계속 알고 닮아가야 진정으로 가족들을 사랑하되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엄마는 자녀가 주를 경외하는 삶을 살도록 참으로 지혜롭고 절제 있는 사랑을 해야 한다. 자녀가 성장하면 자기 길을 가도록 무장시켜야 한다. 부모를 사랑하되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도록 영적으로 건강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 남편에게도 아내는 주님을 섬기는 삶의 동반자이지 생존에 필요한 서비스의 공급자가 아님을 알게 해야 한다. 결국은 남편과 아내가 주님을 동시에 바라볼 때 가능하다.
결국 가정은 주님의 성품을 배워가는 장소이다. 율법의 두 정신(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시험하는 최초의 공동체이다. 온유한 사랑,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즉 절제되지 않는 분노와 무관심 사이에 존재하는 온유의 길을 찾는 곳이다. 그리고 거룩한 지혜, 즉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용서를 배우는 곳이다.
네브래스카 대학교의 스티네트 박사는 행복한 가정에서 나타나는 7가지 공통점을 찾아냈다. 가족 간 감사, 가족 간 헌신, 의사소통, 함께하는 시간, 가족 간 위로와 격려, 정신적 건강, 위기 극복 대처 등이다. (http://www.imaeil.com/sub_news).
사회학자 E. 클린턴 가드너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어도 가정이 있다면 다 잃은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다 가졌어도 가정을 잃었다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이다.” 가정을 잃으면 삶의 기반이 무너진 것이다. 가정은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곳,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반석위에 세우는 수고를 함께 해야 한다. 그런 가정은 홍수가 와도 쓸려가지 않는다. 반석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를 믿는 믿음과 말씀의 지혜위에 세우면, 그리스도의 성품위에 세우면 안전하다.
2014. 7. 8 로고스서원
첫댓글 가정이 주는 따뜻함이 느껴집니다...그러나 세상사에서의 고통과 고난을 짊어지고 집으로 올때, 집에서 느껴지는 포근함을 생각하게 하네요..또한 스티네스 박사의 행복한 가정 7가지에 내 가정을 점검해 보내요...좋은 글 감사^^
저도 글 써놓고 글처럼 계속 좋은 가정 지키도록 힘써 노력해야 함을 다시금 다짐합니다. 온 집사님 감사해요!!
집사님 글을 통해 삶을 배웁니다. 집사님이 직접 겪으신 삶의 진실성과 치열함이 글에 배여 있어서 항상 배웁니다.감사해요^^
동감백배입니다. 에너지가 느껴지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