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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대부 형조 참의 매산 정공 행장
通政大夫刑曹參議梅山鄭公行狀
公의 휘는 중기(重器)요, 자는 도옹(道翁)이며 성은 정씨 이다, 간소(艮巢)라고 자호 하였으며 또 다른 호는 매산(梅山)이라 하였다,
연일현(延日縣)사람인데, 上世에 휘가 습명(襲明)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벼슬이 추밀원 지주사를 지내셨고, 죽음으로 올바른 道를 지켜 고려 말에 크게 이름이 났던 圃隱先生이 계셨던 집안이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현달한 관리와 훌률한 인물이 많이 나왔다,
中世에 와서 휘가 從韶인 분은 重詩에 급제하여 이조 낭관을 지냈는데, 문장과 뛰어난 행실로서 여러 代에 걸쳐 이름이 났다,
그 뒤에 휘가 允良이라는 분은 참봉으로 도산(陶山) 이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낙선(樂善)하고 호고(好古)하는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이분이 휘가 世雅인 분을 낳았는데,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이 되었고,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므로 거듭 추증되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이분이 휘가 宜藩인 분을 낳았는데 동도(東都)에서 목숨을 바쳐 효도를 다하였고 거듭 추증되어 승정원 좌승지에 이르렀다,
이분이 公의 고조부이다, 증조부는 휘가 호례로 현감이었고 조부는 휘가 時諶으로 충무위 대호군 이었다, 부친은 휘가 碩達인데 通德郞으로 은거하여 德을 기르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호는 함계처사(涵溪處士)이다,
모친은 안동권씨로 급제(及第) 권숙(權塾)의 따님이요,병조정랑 구봉(龜峯) 권덕린의 후손이다, 明陵 을축(1685.숙종11)2月22日에 공을 낳았다,공은 천성이 대범하고 중후하였으며 용모가 준수하였다,어려서부터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않고, 앉고 서는 행동과 먹고 마시는 예의도 오직 어른이 명하는 대로 따랐다,겨우 열 살이 되었을 때 [효경]과 사서(四書)에 통달하였고,때때로 주석을 다 넣어서 암송하였다,뜻이 어려워 잘 알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반드시 거듭 질문하였으며 완전히 이해하고서야 그쳤다,
부친 함계공이 집에서 가르친 뒤에 지수선생(정규양)에게 가서 배우도록 명하였다,그때 훈수(정만양)와 지수선생 형제가 횡계에서 가르쳤는데,공이 어린 나이에도 곁에서 모시면서 가르침을 받으니,지수선생께서 공의 재주와 뜻을 남다르게 여겨,차근차근 학문에 나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함계공은 공을 학문 공부에만 전념하게 하고자 하였으나,지수선생은 "나라에서는 과거로 선비를 뽑고 많은 선배들이 이를 통하여 벼슬에 나아갔으니,만약 내외와 경중의 구분을 잘 살핀다면 널리 공부하는 것 또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여러 방면의 학업을 익혀 걸출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병와(甁窩) 이공 형상(李衡祥)이 공을 만나 경전의 깊은 뜻을 물으니, 공이 응대하는 것이 올바르고 자세하였다, 또 공이 지은 [태극부(太極賦)]를 구하여 보고서 크게 감탄하기를"내가 경향(京鄕)의 재주 있는 젊은이들을 많이 만났지만 이 아이처럼 일찍 성취한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하였다,
처사공(함계공)이 일찍이 남악(南岳)에서 이 선생(갈암 이현일)을 스승으로 모신 적이 있어 그에게 호군공(정수번)의 묘갈명을 청하였는데, 신사(1701,숙종27)에 공에게 명하여 가서 뵙도록 하였는다,이에 묘갈명을 받아 돌아가려고 하니,선생이 공을 머무르게 하면서 함께 경전의 깊은 뜻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공의 설명과 대답에 막힘이 없었다,뒤이어 묘갈명에서 의문 나는 곳에 대해 질문하니, 선생이 더욱 칭찬하면서,"너는 아직 어린아이 인데도 노성한 학자 같은 식견을 가졌구나,훗날 얼마나 높이 성취할지를 짐작하기 어렵다,"라고 하고,격물치지(格物致知)와 중화(中和)의 설을 거론하여 학문의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관례를 올리고 나서는,원근의 선생들과 덕망 있는 어른들을 두루 찾아뵙고,도산서원과 삼계서원에 가서 선현들의 옛 자취를 탐방하여 견문을 넓혔다,
을미(1715,숙종41)년에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정유(1717)년에 어머니가 병환이 나자 공이 낮밤으로 간호하였으며 약은 반드시 직접 맛을 보고서는 올렸다,
기해(1719)년 5월에 어머니가 돌아 가시자 척이(戚易)를 모두 지극히 하였다, 경자(1720)년 겨울에 처사공이 두증(痘症)을 앓아 몹시 위독하니,공은 자기가 대신 앓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처사공의 喪을 당하자 공은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고,둘째 동생과 두 사촌 동생은 차례로 병에 전염되어 죽었다, 염빈(斂殯)할 때에 곡읍(哭泣)을 모두 정(情)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하였다가,가슴이 막히는 병을 얻어 거의 목숨을 잃을 뻔 허였다,
계묘(1723,경종3)에 喪期를 마첬으나 벼슬에 나아갈 뜻을 끊었다,정주학(程朱學)의 여러 책들을 취하여 거듭 깊이 연구하면서,자주 횡계의 양수선생님에게 가서 자세한 뜻을 강론하고 질의하였다, 매곡(梅谷)의 시골 농막에 작은 집을 지어,좌우에 책들을 쌓아 놓고 단정히 앉아 독송하며,와서 배우는 자가 있으면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미(1727,영조3)봄에 나라에서 경시(慶詩)를 보였는데,여러 부형들이 권하므로 마지 못해 나아가 향거(鄕擧)에 높은 점수로 뽑혔다, 성시(省詩)에 들어가서는,유사(有司)가 [근사록(近思錄)]으로 시험하니 많은 선비들이 모두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뜨고서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공이 붓을 잡고 쓰기 시작하니 글이 활달하고 뜻이 분명하였다,
여러 응시생들이 담처럼 둘러서자, 뜻을 설명하고 좌우 사람들과 응대하면서 조금도 권태로운 기색이 없었다,
답안지를 내니 시험관이 감탄하기를,"이것은 틀에 박힌 솜씨가 아니다,"하였고 마침내 제일 높은 성적으로 뽑혔다,
공은 이 경사스러운 날을 부모와 함께 하지 못함을 통탄하고,시를 지어 이 감회를 부쳤다,창방(唱榜)하면서 거리를 행진할 때,초라한 동자(童子)와 허약한 말로 행색이 간소하여,시정(市井)의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비웃었으나 흔들림 없이 못들은 척 하였다,
친구 중에 옛날 유자의(劉子儀)가 왕기공(王沂公)을 놀린 이야기를 가지고 공을 축하한 사람이 있었는데,공이 말하기를,"마음으로 다투고 이익을 도모하는 일은 나의 본마음이 아니오,급제하여 사적(仕籍)에 들어 분수에 따라 직책을 수행하는 것이 마땅한데, 무엇 때문에 반드시 세상에 이름을 날리려고 애쓰겠는가,"라고 하였다,
무신(1728,영조4)에 호서 지방에 반역자들이 일어나 강우(江右)의 몇몇 고을로 세력을 넓히니,공이 서쪽을 거쳐 궐하(闕下)에 나아가고자 하였다, 지수(정규양)선생께 들러 하직하니,선생이 말하기를,"자네가 이번에 가는 것은 진실로 의로운 일이지만,영서(嶺西)의 역적은 세력을 불린다고 들었으니,자네가 반드시 이기지 못할 것이네,우리 형제(훈,지수)가 곧 永川城에 들어가 온 고을 사람을 불러 모아 창의병을 일으키려 하네,자네가 길에서 쓸데없이 죽기보다는 차라리 우리와 함께하여 의병의 공을 이루는 것 또한 하나의 방도일 것이네,"하였다,
공이 그 말을 좇아 참모장이 되었고 거병의 계획이 대충 완성되었으나,반역자들이 이미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중지하였다,이해 겨울에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보임되었다,
신해(1731)에 가주서(假注書)에 충원되었는데,이때 장릉(長陵)을 천장(遷葬)하게 되었다,산릉도감(山陵都監)의 윤순(尹淳)이 의주(儀注)를 가지고 임금께 아뢰니,上께서 어람하고서 하교하기를,"백관이 모두 시마복(시麻服)을 입고 띠를 매는데,서리(胥吏)들은 평상시의 길복(吉服)을 입어서야 되겠는가,"하니,윤순이 말하기를,"각 司의 서리는 그 관원을 따르는 자들일 뿐이니, 변복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하였다,이에 공이 아뢰기를,"신이 생각하는 바가 있으나 직분에 넘치는 일이 아닐까 두렵습니다,하니,上이,"상관없으니 말하라,"라고 하여,공이 아뢰기를,"구준(丘濬)의 [가례의절(家禮儀節)]에 삼년복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시마복을 입고,다른 복에는 모두 소복(素服)을 입는다,라고 하였습니다,이것이 비록 사대부의 禮이기는 하지만 제왕가(帝王家)의 禮도 이와 다를 것이 없을 듯합니다,"하였다,上이 말하기를"주서의 말이 옳으니 나의 뜻과 같다,"하고,이어서 공으로 하여금 대신과 儒臣들에게 물어 보도록 명하였다,
공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차례로 자문하였고,전 찬성(贊成) 정재두(鄭齋斗)의 의견을 채용하여 서리들이 소복을 입도록 의주(儀注)를 바꾸었다,
공이 또 정공에게 "의주가 단지 영릉(寧陵)의 고주(古注)에만 근거하였는데,지금은 두 능을 함께 천장하는 경우입니다,禮記에 喪을 겹쳐서 당했을 때,장사(葬事)는 가벼운 쪽을 먼저하고 무거운 쪽을 뒤에 하며,우제(虞祭)는 무거운 쪽을 먼저 지내고 가벼운 쪽을 뒤에 지낸다,
개장(改葬)하는 禮도 처음 장사하는 禮와 같다,:라고 하니,정공이 공의 의견을 따랐다,이 일을 들은 사람들이 禮에 맞는다고 하였다,
이해 가을,부정자(副正字)에 올랐다,공의 선조인 호수(정세아)와 백암(정의번) 양대의 충의와 효열에 대해서,임금께서 능으로 행차하였을 때 상언(上言)으로 억울함을 변론하여,특별히 벼슬을 추증하라는 명을 받았다, 또 사관(史官)의 직분으로 능을 옮기는 일을 끝마치는 데 참여하였다 하여 아마(兒馬) 1필을 상으로 받았다,잇달아 정자(正字),저작(著作),박사(博士)로 승진되었다,
지수선생의 부음이 이르자,신위를 만들어 곡하고 가마(加麻)의 복제(服制)를 행하였으며,겨울에는 휴가를 청하여 달려가 곡하고 글을 지어 제사를 올렸다,얼마 안 있어 봉상시 직장에 올랐다,
계축(1733,영조9)에 성균관 전직에 오르고 예조의 좌랑과 정랑으로 옮겼다가,곧 전라도사 겸 해운판관에 제수되었다,
당시 풍원군(豊原君) 조공 현명(趙顯命)이 방백이었는데,함께 경서(經書)의 뜻을 강론하고 의심나는 옥사(獄事)를 의논 하였다, 집안 동생 되는 명고공 간(鳴皐公 幹)이 이때 제원 찰방(濟原察訪)으로 있어서,산사(山寺)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는데,정자(程子)의 '차마 사람으로 짐승을 대신하지 못하는[不忍以人代畜]'뜻을 생각하여 어깨에 메는 가마를 타지 않았다,
이해 겨울,휴가를 얻어 돌아와 정사(呈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갑인년(1734)에는 춘추관 기주관을 겸 하였는데,조운(漕運)의 일이 급하여 독촉하는 관문을 받고서 바로 부임하였다,조운을 영솔(領率)하여 함열군(咸悅君)을 지날 때, 길가에 의물(儀物)을 모두 갖춘 무덤이 있어서,누구의 무덤인지를 물었더니 바로 관노(官奴)가 분수를 넘어 쓴 무덤이었다,공이 곧바로 철거하라고 명하니 듣는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다,조운의 일을 끝내고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직하여 물러났다,
신유(1741,영조17)에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임금이 능으로 행차하시어 공이 금훤낭청을 맡게 되었을 때,금훤낭청이 되면 죄입는 일이 많았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공이 위태롭다고 생각하였다,공은 이속들에게 매질하지 말도록 거듭 당부하고 몸소 모범을 보이니,임금의 행차에 사방이 조용하여 소란이 없었다,임금께서 환궁하여 특별히 공을 불러 허교하기를 "오늘 행차에서 떠드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니,네가 직책을 수행한 것이 매우 훌륭하였다,"하였다,
하절사(賀節使)가 떠나면서 임금에게 하직할 때,공이 기사관(記事官)으로서 함께 입시(入侍)하였는데,임금께서 각자에게 술을 세 잔씩 내리라고 명하니,신하들 중에 많은 사람이 입만 대고 말았으나,공은 임금이 내린 술을 그냥 둘 수 없다며 두 잔을 다 마시고,세 잔째는 입만 대고 그릇에 따랐다,임금께서 말하기를"기사관은 틀림없이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로다,임금이 주는 것을 공경하여 잔을 다 비우고,예의를 잃을까 하여 마시는 것을 절제하니,뜻이 훌륭하다,"하고 한 잔을 더 내리도록 명하였다,공이 자리에서 일어나 엎드려 말하기를"신이 비록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하나 특별히 명하신 것에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하고 끝내 모두 마셨다,나중에 입시했을 때,임금께서 여러 번 연신(筵臣)들에게 "이 사람은 질박하고 착실하니,영남 사람의 본색을 잃지 않은 것이 다,"라고 하였다,
다시 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여 예문관에서 숙직할 때,항상 책을 읽어 때로는 한밤중에 이를 때도 있었는데,동료들이 놀리기를"예문관이 어찌하다 보니 자네의 독서실이 되었네,"라고 하니,공이 웃으며"따뜻한 방과 훈훈한 난로가 있는 곳에서 책을 볼 수 있으니,이 또한 성은(聖恩)일세,"하였다,그곳의 한 늙은 서리(胥吏)가 혼잣말로"예문관에 숙직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책읽기를 좋아하는 관원은 처음 보았다,"라고 하였다,
임술(1742.영조18)봄에 기사관으로서 입시하였는데,임금께서 이조판서 정석오(鄭錫五)를 접견하여 정사를 물을 때,당론의 폐단에 대해 말이 이르자 곧 공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저 겸춘추(兼春秋)는 영남(嶺南)사람이다,경은 반드시 공도(公道)를 넓혀 나의 뜻을 실행하라,"하였다,
다음날 정사(政事)에서 결성현감에 제수되었다, 고을에 부임해서는 청렴과 검소로 자신을 지키면서 피폐하고 허물어진 기풍을 다시 일으키고 소생시켰으며 선비를 격려하고 노인을 봉양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떠,글을 지어 고을 사람들을 깨우쳤으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예절을 높이고 풍속을 바로잡는 길은 오르지 향리에서 단속하고 살피는 데 있으니,향약이 무너지고 나면 예의와 풍속을 진작시킬 방법이 없다,고관 세족(高官世族) 집안의 사람이라도 탁월한 자질이 있거나 넓은 학식이 있는 이가 아니면 법도를 준수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문데,하물며 비천한 백성과 어리석은 지아비들이 할 만한 좋은 일과 해서는 안 될 악한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 고을은 비록 궁벽한 바닷가에 있지만,명문거족(名門巨族)이 밀집하여 서로 바라보고 있는 곳이다,중간에 뜻밖에도 고을이 혁파되는 변고가 있었지만,이것은 봉새 무리 가운데 올빼미 한 마리가 있었던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고을을 복구하는 이즈음에 관직을 맡아 외람되이 지방관의 책임을 맡았으니,교화(敎化)를 펴고 풍속을 후하게 하는 것을 다스림으로 삼으려 한다,그런데 지금 이임(里任)들은 지위가 낮고 식견이 어두워 이 일을 함께 의논하기 어려워,여러 어른들에게 물어서 만들었으니,이것은 자잘한 일을 가지고 번거롭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이것은 실로 주자(朱子)께서 <여씨향약>을 증손(增損)한 여의(餘意)에서 나온 것이니,이에 따라 열 가지 절목으로 고을의 선비들을 권면하고,또 여섯 조목으로 서민들을 격려하고자 한다,"
고을에 의심스러운 송사(訟事)가 있어 공이 자세하게 조사하여 보고하였으나,방백이 한쪽 편의 말을 먼저 받아들여 엄중한 관문을 보내고 담당한 아전을 형신(刑訊)하였다,
공이 공무 때문에 마침 방백의 관저에 갔다가 곧바로 글을 올려 옥사(獄事)의 내용을 충분히 설명하였다,방백이 직접 대면하여 의논하기를 청하였으나 공은 사직서를 내고 그를 만나지 않고 돌아오니,방백이 공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급히 장계하였고 논핵하여 파직되었다, 고을의 백성들은 공이 더 있어 주기를 바랐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돌아오는 짐은 간소하여 아무것도 딸린 물건이 없었고,오직 몇 상자의 책이 있을 뿐이였다,행차가 공산(公山 공주公州) 동천(銅川)에 다다르자,공이 시 한 수를 읊었는데,
[서쪽 고을 인끈 풀고 필마로 돌아오니
가을바람 소솔히 옷자락 펄럭이네
석양은 우연히 강 옆길에 걸렸는데
흰 새는 무심히 나를 향해 날아오네] 하였다,
고향에 돌아오자 짐 보따리를 털어서 이졸(吏卒)들에게 도로 주니,모두 감읍하고 돌아갔다,
이때부터 궁벽한 산골에서 나오지 않고 학문에 힘쓰고 연구하였으며,오록서당(梧麓書堂)을 열어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맞았다,또 산수정(山水亭)을 지어 만년을 보낼 장소로 마련하였고,모든 것을 詩로 기록하여 마음을 편안히 하고 본성을 기르는 즐거움을 표하였다,
신미(1751.영조27)에 함경도사에 제수되고,임신(1752)에 병조정랑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나아가지 않았고,이해 겨울에 또 사간원 정언에 배수되었다, 이때 양사(兩司)가 서로 승강이한 일이 있어서 의금부에 내려 추고(推考)해야 할 대상에 공도 포함되어,의금부로 오라는 명을 듣고 서울로 갔다,계유년 정초(1753)에 의금부에 나가 심리를 받았으나,심문에 답변하고 나와서 곧바로 돌아왔다,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통지가 오는 도중에 체자(遞자)되었고,얼마 안 되어서 또 지평에 배수되어 上의 부름을 받았다,
공이 세자에게 글을 올리려고 하였으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임금님의 보산(寶算)이 점점 높아지시니,성체가 강녕한데도 오히려 나랏일에 게으를까 염려하여 저하(邸下)께 명해 국정을 대리 하도록 하셨습니다,저하의 나이 비록 어리시다고 하지만,받으신 것은 국가의 대사요 이으신 것은 제왕의 기업입니다,그러니 조심하고 부지런히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무거운 부탁을 저버리지 아니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신이 듣건대 선유들이"천하만사의 근본은 군주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다,"라고 하였으니,참으로 임금의 마음이 바르게 된 다음에야 조정이 바르게 되고,사방이 바르게 되며 만사 만민이 바르지 않은 것이 없게 됩니다,요 임금,순 임금,우 임금이 제위를 주고받을 때 간곡하게 일러 준 말이 열다섯 글자를 넘지 않았지만,이것이 모든 성군이 서로 전한 심법이니 여기에 더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중(中)이라는 것은 치우치지 않고 기울지 않으며 지나침과 못 미침(過不及)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인심과 도심은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정일(精一)한 공부가 없으면 인심이 강해지고 도심이 사라져,일에 드러나는 것에 반드시 과불급의 근심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반드시 정밀하게 택한 다음에야 날뛰는 인심을 단속하여 잡스럽지 않을 수 있고,한결같이 지킨 다음에야 올바른 도심을 붙잡아 떠나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면 도심이 주인이 되고 인심이 명을 듣게 되어,행동과 말씀에 있어서나 정사와 호령(號令)에 있어서나 저절로 과불급의 잘못이 없어질 것입니다,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른바 中이란 본래 일정한 체(體)가 없어서 때에 따라 타당한 것이 같지 않으니,한 당(堂)에서 中을 말하면 자연히 中은 그 堂 안에 있고,한 배에서 中을 말하면 자연히 中은 그 배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堂에 올라 中에 처한 다음에야 네 문을 활짝 열어 깊고 은미한 것을 모두 살펴서 눈이 밝아지고 귀가 열리게 되며,배에 올라 中에 처한 다음에야 네 모퉁이에 고르게 짐을 싣고 경중을 짐작하여 강을 건너고 험한 물결을 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물며 수많은 백성에 군림하고 모든 번거로운 일을 총괄하는 분이면서 중에 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신은 어리석지만 저하께서 마음을 바로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가 여기에서 벗어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능히 음식을 절제하여 기혈을 조화롭게 하고 성색(聲色)을 멀리하여 정신을 수양하며,우 임금이 광음(光陰)을 아낀 일을 따르고 탕 임금이 학문에 힘쓴 일을 생각하시어,매일 서연(書筵)을 여시고 강관(講官)을 자주 접하시며,궁리격물(窮理格物)의 공부를 부지런히 하시고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방도를 끊임없이 추구 하신다면,학문이 날로 진보하고 덕이 날로 높아질 것입니다,"
옛날 성왕들이 중용(中庸)의 도를 견지한 대법은 분명하게 자신에게 있으며,바람이 불면 풀이 눕는 교화는 본래 그 빠르기가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더한 것입니다,"글의 말미에는 조신(朝臣)들이 사사로이 편당 짓는 일과 정관들이 치우치게 사람을 등용하는 일과 수령들이 권세를 믿고 방자하게 구는 폐단에 대해 수천 자의 말을 덧붙였다,
비안현(比安縣)에 당도하여,이미 체차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결국 글을 올리지 않았다,그렇지만 공이 평소에 힘쓰는 학문의 내용과 군주를 이끌어 道에 나아가게 하고 여러 정사를 처리하는 방도가 대략 여기에 모두 드러난다,
가을에 또 정언에 배수되었으나 곧 체차되었고,또 이조좌랑과 정언에 배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병자(1756,영조32)에 나라에 큰 경사가 있어 문신으로 나이 70이 넘은 사람들에게 모두 자급을 올리도록 허락하였는데,공에게 통정대부의 품계를 주었으며,장례원 판결사에 배수되었다가 형조 참의로 옮겨졌다,
공은 사직소를 올려 나이를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고 얼마 안 있어 일로 인하여 체차되었다,
정축(1757)에 가슴이 결리고 氣가 오르는 증세가 생겼다,2월에 왕비가 승하하니 郡으로 달려가 곡림하고 성복하였다,3월에는 김 대비가 예척(禮陟)하였는데 이때는 병이 심하여 곡림에 나가지 못하고 부축을 받아 개울가의 집으로 나와 망곡(望哭)하고 성복하였다,
6월에 증세가 더욱 심해졌으나 정신은 아직 또렷하여 향리에서 문병 오는 사람들을 응접하기를 개을리하지 않았다,
7월8일 미시(未時)에 부녀들을 불러 부축받고 일어나서,집안을 화목하게 하는 도리와 제사를 받들고 빈객을 대접하는 예절을 일러 주었다, 신시(申時)에 자리를 바르게 하고 베개를 편안히 하도록 명하고서 화락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니,향년이 73세였다,
부고가 나가자 원근의 사람들이 놀라고 슬퍼하였으며,조정에서도 의례에 따라 부의를 보냈고 감사와 군수도 모두 넉넉하게 부의를 보냈다,
무인(1758,영조34)1월19일에 운주산 신방동 오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아버지 처사공의 묘에서 겨우 수십 발짝 떨어진 곳이다,
공은 문소김씨를 아내로 맞았는데,통덕랑 김방겸(金邦謙)의 따님이요,집의에 추증된 숭정처사 김시온(是온)의 손녀이다,부인으로서의 착한 행실이 있고 집안을 다스리는데 법도가 있었으며,공보다 몇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공에게 2남1녀가 있는데,장남은 일감(一鑑)으로 재행(才行)이 있었으나 공에 앞서 요절하였고,차남에 일찬(一鑽)이며,딸은 사인 신황(申황)에게 출가했다, 일감은 아들하나를 두었으니 하윤(夏潤)이고,일찬은 2남1녀를 두었으니,하란(夏爛)과 하간(夏澗)이고,딸은 아직 어리다,
신황은 2남으로 신창교(申昌敎)와 신홍교(弘敎)이다, 하윤은 2남2녀로 동인(東仁)과 큰딸은 이정래(李鼎來)에게 출가하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공은 어려서는 부친의 가르침을 받았고 나가서는 어진 스승 훈,지수(정만양,정규양) 양수에게 가르침을 받아 훈도(薰陶)가 점차로 스며들어,덕스러운 인품이 성취된 것이 원래 힘쓰지 않아도 이루어진 바가 있었다,
공의 학문을 개관하면,경전을 중심으로 하면서 정주학의 글로 보충하였고,성의와 독실을 공부로 삼으면서 끊임없는 노력으로 지켰다,차근차근 공부에 힘쓰고 싫증내거나 게을리하지 않으며,세상을 속이거나 시속(時俗)을 벗어난 행동을 하지 않으니,자연 남이 따를 수 없었다,용모는 편안하고 언동은 단정하며,말에 성내는 기색이 나타나지 않았고 비복(婢僕)들에게 욕설로 꾸짖지 않았다,평상시에는 믿음직하고 꾸밈이 없어 남과 크게 다르다고 여길 것이 없었지만,일에 임하여 의리로 결단할 때면 확연히 자신의 절개를 지켜 남이 빼앗지 못하는 바가 있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선조를 받들고 친족을 가까이하는 도리에 더욱 마음을 다하였다,의창(義倉)의 고사(故事)를 본떠서 이름을 의계(義계)라 하고,조약을 만들어 그 일을 적었다,
그 조약은 "매년 종가에서 제사 지내는데 보조하고,모든 선조에 대한 일은 여러 형제들이 같이 참여하도록 한다.길흉사에 쓸 비용이 있거나 혹시라도 흉년이 들면 모두 이것을 가지고 보태어 준다, 대대의 분묘에 대하여는 제전(祭田)을 넉넉히 마련하고 묘표와 비갈을 세우는데 힘을 쓴다, 하였고, 후손이 없는 외선조(外先祖:사성공 배위와,최덕금) 의 경우에도 분묘를 보호하여 성묘의 절도(節度)를 없애지 않도록 하다,先瑩에 여러 代의 친족을 장사함에,후세에 소목(昭穆)을 분간하지 못할까 염려되니 측량하여 그림으로 그려 먼 자손까지 알게 한다,"라는 내용이다,
명고공(鳴皐公:鄭幹)과는 한 스승에게 함께 배워 서로 매우 친하였다,매번 시골의 별장이나 산사에 함께 들어가 <포은속집>과 <훈지록>을 편차(編次)하고,<개장비요>와 <의례통고>를 수정하였다, 선친 함계 처사공이 일찍이 우리나라 선유들의 예설을 모아서 <가례혹문>을 썼으나 완성하지는 못하였데 공이 분류하고 편차를 나누어 완전한 책으로 만들었다,또 김사계(金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상례비요>에는 내용이 틀리거나 흩어진 폐단이 꽤 많고 더구나 관례와 혼례가 빠졌으므로,공이 마침내<가례집요>를 지었다,
퇴도(退陶)선생이 <주자서절요>를 지어 간추려 후학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나,당시의 일을 말한 곳과 고금의 일을 인용한 글에 어렵고 애매하여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곳이 많았다,
공이 근세의 여러 학자들의 기록을 취하여 이리저리 숙고하여 취사(取捨)하고 그 사이에 자신의 뜻을 보충하여,책을 지어<주서절요집해>라고 이름 지었다, 그 밖에 詩文과 잡저(雜著) 몇 권이 있다,
아, 공은 타고난 자질이 순미(洵美)하였고 그 위에 학문을 갖추었으며,또한 나아가 조정에서 벼슬하기도 하였다,그러나 만일 경연(經筵)에서 논사(論思)하는 직책을 맡게 하였다면,군덕(君德)을 이끌어 기르고 치도(治道)를 도와서 보태는 것이 반드시 지금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찮은 자리와 할 일 없는 직책이나 대신의 막료와 고을의 수령으로 아래에서 빙빙 돌며 지냈고,늦게야 언사(言司)에 들어가 이윽고 현직(顯職)에 올랐으나,공은 이미 나이 많음을 이유로 은퇴하기를 청하였다,
명고공이 사람들에게 항상 말하기를"梅翁은 학문이 순수하면서 바르고,덕스러운 인품이 온전히 이루어진 사람이다, 그를 세자 시강원이나 홍문관에 두어 경연석의 자문에 응하도록 하였다면 반드시 나라에 크게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세도(世道)가 협착(狹窄)하여 공이 가진 뜻을 펼 수가 없었으니,어찌 우리들이 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아,명고공의 이 한 마디는 공의 깊은 뜻을 알고 공의 평생을 다 말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 세상에서 쓰였다 하더라도,공이 간절한 바를 펼칠 수 있었을지는 기필하지 못하겠다,곧바로 시골로 들어가서 경적에 몰두하여 중년과 만년의 공력을 쏟아 책을 짓고 의논하여 후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하늘이 공을 이처럼 훌륭하게 성취시킨 뜻이 여기에 있지 않다고 어찌 알겠는가, 내가 서울의 집에서 처음으로 공을 뵈었을 때,보잘걱없는 나를 크게 칭찬해 주셨다,
공의 덕을 그리워하면서도 정성이 부족하여 한 번도 문하에 가서 명리(名理)를 물어보지 못하여 늘 마음에 한스러움이 있었는데,공이 갑자기 조금도 기다려 주지 않고 세상을 떠나셨다, 얼마 전 후사(後嗣) 一鑽군이 공의 유집(遺集)을 가지고 와 감교(勘校)를 청하면서 아울러 덕을 기록한 행장을 부탁하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리석고 고루하니 어찌 이 일에 강여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평소에 마음으로 사모한 터라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으므로,삼가 가첩에 따르면서 내용을 조금 바로잡아,글 쓰는 군자의 채택에 대비하노라,,,
한산후생 이상정
*한산 이상정(1710~1781)년 본관은 한산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이다,
주)*동도(東都)에서....다하였고=임진왜란 때 경주성 탈환 전투에서 아버지 호수공 정세아(鄭世雅)가
포위되니 아들 백암 정의번(鄭宜藩)이 수 차에 걸쳐서 여러 겹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서 아버지를 구출하고 자신은 마침내 왜놈들에게 잡혀서 적에게 굴하지않고 죽음을 선택한 것을 말함,,,나중에 충신효자 정려문이 내려졌다,
*훈,지수(양수선생)=훈수는 정만양(鄭萬陽1664~1731)년 의 호, 지수는 정규양(鄭葵陽1664~1732)년 의 호로 양수(형제) 본관은 영일정씨로 숙조이신 학암 정시연(鄭時衍)과 갈암이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영천 횡계리에서 훌륭한 후학들을 길러냈던 당대의 영남의 대학자,
*삼계서원=충재(沖齋) 권벌(權벌.1478~1548)년 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한 서원,(경북 봉화 삼계리)에 있다,
*요 임금......= 요 임금이 순 임금에게 제위를 물려 줄 때는 윤집기중(允執其中)'4자로 일러 줬고,순 임금이 우 임금께 물려 줄 때는 '인심유의,도심유미,유정유일,윤집궐중(人心惟危.道心惟미.惟精惟一.允執厥中) 16자로 일러 주었다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