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춘선과 이동휘의 실제 교류는?
간도국민회 회장인 구춘선에 대한 기술에도 이동휘 증후군 현상이 나타난다.
구춘선이 왕궁 수문장으로 복무를 할 때부터 이동휘를 만났으며, 그가 왕궁진위대를 사임할 때 그의 충고를 받았다고 한다. 간도로 망명한 것 또한 그의 포석에 따른 것이며, 소영자의 광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것도 그의 연결이라고 한다, 그가 가족들이 살고 있는 하마탕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독립운동기지를 창설한 것도 이동휘의 무장독립운동 전략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가 간도국민회 회장으로서 1921년 11월에 고려공산당에 가입하고 돈화에 고려공산당 중령총감부를 설치한 것, 적기단에 협력한 것 등등 모든 것을 무조건 이동휘의 영향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나이 차이와 간도 이주의 시기를 고려해보면 타당성이 전혀 없는 것과 가능성이 있는 것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구춘선은 1860년 함경북도 온성 출생이고, 이동휘는 1873년 함경남도 단천 출생이기 때문에 조선에서 조우했을 일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뿐 만 아니라 구춘선은 1897년에 연길로, 이동휘는 1913년 7월경에야 용정으로 망명을 하였기 때문에 그가 1913년에 설립된 하마탕교회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마탕에 교회와 보진학교를 설립할 때 구춘선은 이민살이 16년째의 사람이었고 이동휘는 막 두만강을 건너 온 망명 초년생이거나 아니면 망명을 준비하는 중에 있었을 것이다.
이동휘는 캐나다장로회 소속 조사로서 캐나다장로회 소속인 하마탕교회 설립자요 조사인 구춘선의 집에 어려울 때마다 와서 머물렀고 구춘선은 그런 그를 위해 그의 가족의 거처를 하마탕에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하마탕교회와 보진학교를 기초로 하여 독립운동의 기지를 만들려는 이상은 이동휘의 전략이 아니라 구춘선의 깊은 생각과 원대한 계획의 산물이었다. 그러므로 훗날에 하마탕이 간도국민회의 최초의 본부가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구춘선이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뒤에 잠시 하마탕을 떠나 있다가 1924년에 다시 돌아 온 것은 진보나 보수의 틀에 구애받지 않는 크리스천 투사로서 이상촌과 독립운동을 다시 추구하고자함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가 이동휘의 행보를 지지하며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일에 이동휘의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가 총감부를 설치하며 적기단을 지원한 행위는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는 크리스천 독립운동가로서 좌우이념과 계급차별을 떠난 그의 성숙된 자세와 사회참여 신학과 신앙의 결과물일 뿐 결코 이동휘에 맹종해서가 아니다.
하나하나 짚어 가면서 시시비비를 가리면 이동휘의 덧칠이 벗겨지고 진짜 망국의 시대를 살며 고민한 크리스천 독립투사 구춘선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조선 제 1호 공산주의자인 이동휘에게 모든 영광과 공로를 돌리고 싶어 하는 사회주의 세계는 팩트와 설화(說話)를 분별하려고 하지 않는다.⁸
구춘선을 새로운 세계로 초청한 사람은?
구춘선에게 덧칠해진 이동휘 그림자를 벗겨 내려면 그를 한학과 공맹의 사회에서 신학문과 기독교의 새로운 세계로 탈출시킨 사람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연변이나 한국에서 나온 책들이 그들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북간도에서 그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며 그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룡정교회는 이듬해⁹ 캐나다선교사 구례선이 북만과 씨비리지역에 산재한 조선족들에게 전도할 목적으로 부친과 정아력, 조사 홍순국과 함께 룡정에 왔다가 조선족유지들인 구춘선과 집사 리보건의 협조를 받아 설립 되였던 것이다. 그 후 룡정교회는 조선으로부터 선후하여 구례선, 정아력, 부두일, 매길로(매길도의 오기이고 본명은 맥레), 박걸 등 선교사들의 방문 지도하에 점차 발전하여 룡정에서 뿐 만 아니라 연변지방에서의 선교근거지로 되었다.”¹⁰
“1908년 3월 (음력 2월 9일), 함경북도 성진리에서 소집된 선교대회에서 선교사 구례선은 김계안 조사를 룡정에 파견하여 교회의 발전을 인도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 당시 룡정에 있던 장로교 신도들은 여전히 예수서사에 모여 례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신도들로는 구춘선, 박무림, 리보영, 한봉희, 최적식 등과 김계안 일가 도합 17명이였다. 이것을 연변의 첫 장로교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김계안은 1914년 룡정교회 장로로 선임되었으며 이들을 가히 연변의 첫 조사와 전도사라고 할 수 있다.”¹¹
첫 인용문에 보면 구춘선이 1906년에 용정에서 캐나다 선교사 구례선과 조사¹²홍순국을 만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연이어서 구례선, 정아력, 부두일, 매길로, 박걸 등 선교사가 계속 용정을 방문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는 1908년 구례선 선교사의 파송을 받은 김계안 조사가 용정에 와서 예수서사에서 예배드리는 구춘선 외의 성도들을 만났으며 그 후 용정에 남아서 계속 교회를 지도하였고 1914년에는 용정교회의 장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두 인용문에 근거하면 구춘선은 이동휘를 만나기 훨씬 전, 1906년 이 전에 복음을 받아들였고 최소한 1906년부터는 크리스천으로서 예배를 드린 북간도지역의 조기 크리스천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뿐 만 아니라 그는 일찍이 구례선 선교사를 비롯하여 정아력, 부두일, 매길로, 박걸 선교사를 차례로 만났으며 그들의 정신적인 지도와 안내를 받으며 홍순국 조사와 김계안 조사를 통하여 크리스천으로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와 선교사들 그리고 조사들을 살펴보기 전에 구춘선이 1906년 이전 언제 누구에게 복음을 들었을 것인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인터넷에서 로버트 그리어슨을 쳐서 나무위키에 나오는 그에 대한 소개를 읽었다.
“이후 (구례선이) 1902년에 여러 선교단체의 지원을 힘입어 제동병원을 설립했고, 간도에서 선교활동을 벌여 한인 이주민들을 장로교로 인도했다. 1903년 여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한인촌을 순회하며 성경을 나눠주고 복음을 전파했으며, 1906년에는 홍순국조사와 함께 용정에 예배 처소를 마련했다.”
서굉일은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 선생⌟에서 캐나다장로회가 북간도 선교를 시작했다고 한다.
“북간도 선교는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서 착수했다.
1902년 성진 주재 그리어슨(구례선)이 홍순국과 함께 시베리아와 동만지방 선교답사 여행을 한 뒤 안순영을 전도사로 파송해 1906년 양무정자, 광제암교회를 개척했다. (한국기독교의 역사)”¹³
서고도는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에서 구례선 선교사가 여러 번 북쪽 지역과 만주에 다녀왔음을 밝힌다.
“1909년 11월 7일 성진항에 도착했다. 맥리어드 목사는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인 목사 취임식에 참여하기 위해 그 전날 성진항으로 출발했던 로스목사와 그리어슨 박사 부부에 의해 환영을 받았다. 성진에 오자마자 그리어슨(구례선) 박사는 맥리어드를 데리고 그가 새롭게 얻은 한국의 북쪽 지역과 만주에 있는 선교현장을 소개하기 위해 지체 없이 순회 선교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12월 1일 성진을 떠나, 성탄절 직전에 돌아 왔다. 3주 동안 그들은 북쪽 지역에 있는 모든 전략적 장소와 용정을 포함하여 간도에 있는 10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중 다섯 곳을 방문했다.”¹⁴
위의 첫 인용문은 시기는 1903년에 그리어슨 선교사가 연해주 한인촌 방문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누구와 같이 동행했는지 돌아오는 길에 북간도에 들렸는지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그 뒤의 문장으로 보아서 홍순국 조사와 동행하였으며 돌아오는 길에 용정에 들렸음을 알 수 있다. 두번째의 인용문에 의하면 1902년에 그리어슨 선교사가 홍순국 조사와 함께 연해주와 북간도에 선교 여행을 다녀온 사실과 그 뒤로 안순영을 전도사로 파송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인용문의 “그가 새롭게 얻은 한국의 북쪽 지역과 만주에 있는 선교현장”이라는 표현 속에서 그리어슨이 만주 선교현장에 최소한 한 번 이상 다녀 온 사실과 그 당시 전도활동이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상규는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구춘선 편¹⁵에서 구춘선이 그리어슨(구례선)선교사를 만나서 기독교도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안순영 조사에게 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를 통해서 복음을 들었든지 간에 그리어슨이 캐나다장로회 북간도 선교의 첫 머리이기 때문에 구춘선이 그리어슨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춘선은 구례선 선교사의 북간도 첫 열매라고 해도 무방하다.
구춘선은 1903년과 1905년 사이에 복음을 받아 들였고 그리어슨과 홍순국, 김계안의 지도 속에서 자유와 사랑, 정의와 평화, 평등의 복음에 천지개벽을 체험하고 남성중심의 조선사회의 불평등과 차별을 극복하며 나라와 민족 구원에 책임감을 크게 느끼는 크리스천으로 거듭났을 것이다. 연변에서 나온 책들에 기록된 대로 그는 이동휘의 영향과 지도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물이 아니고 구례선 선교사와 홍순국 조사, 김계안 조사와 안순영 조사와의 만남 가운데 신앙과 교육을 통하여 독립운동에 눈을 뜬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뿐 만 아니라 그의 주변에는 초기 캐나다장로회 선교부를 통해서 만난 조선독립의 뜻을 품은 많은 지도자들과 학교 교사들이 있었다. 그는 이동휘와 만나기 전에 이미 정재면, 황병길, 오병묵, 남공선, 김영학, 이동춘, 박태환, 김약연, 마진, 양형섭, 양진섭 등과 만났으며 그들과의 만남은 그를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의 장으로 이끌어 갔을 것이다.
구춘선이 복음을 접한 이후, 사회참여의 신학과 신앙의 실천으로서 교육과 신앙을 통해 독립운동을 추구하는 독립투사가 된 것은 그에게 천지개벽과 같은 새 세상의 복음을 전해준 사람들과 캐나다장로교 선교부의 영향이 아주 큰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구춘선의 교육과 신앙을 통한독립구국 운동을 이해하려면 당시 캐나다선교부와 선교사를 알아야 한다.
먼저 캐나다 선교부의 간도선교 역사와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3부에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