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탄(松炭) 지명 유래
옛날 구한말에 송장면(松長面)과 탄현면(炭峴面)이 이웃하고 있었으니 송장면엔 숯가마가 여기 저기 탄현면엔
숯가마가 여기 저기 숯이 넘나드는 구릉이라 자연스레 불려진 숯고개,
송장면에는 장안동, 동령, 이충, 서정과 같은 마을이 있었고, 탄현면에는 좌동, 제역동, 나무내, 구장터, 남월, 오
좌울, 건지미, 지산리, 소골, 동막 등이 있었다. 탄현(炭峴)은 우리말로 숯 고개이다.
옛날에는 숯 고개에서 장등리로 이어진 산등성이에 참나무가 많아서 능선을 따라 숯가마가 여러 개 있었는데
숯을 한 짐씩 짊어진 짐꾼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기 때문에 숯 고개라 불렸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자연지명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숯 고개"라는 지명이 마을의 이미지를 흐
리고 촌스럽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바꿔 부른 것이 "쑥 고개"다.
사실 숯 고개나 쑥 고개 모두 세련된 근대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지만, "숯"이 갖는 시커멓고 촌스런 이미지보
다는 쑥에서 풍기는 향기롭고 풋풋한 느낌이 마을 이미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소하지만 중요했던 논쟁에서 재판관 역할을 한 것은 행정관서였다.
평택시는 쑥 고개보다 숯 고개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그 상징적인 노력이 흰치고개 중턱에 재현한 숯가마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송장면과 탄현면을 합하여 송탄면이 되었으며 여기서 처음으로 송탄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되었다.
1963년 10월 송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 7월 1월에는 시로 승격되었다. 1986년 11월 시 청사를 중앙
동에서 시정동으로 이전하였고, 1987년 1월 평택군 서탄면 적봉리(赤峰里) 일부를 서정동에 편입하였다.
1988년 당시 송탄시의 면적은 41.13㎢, 인구는 7만 1965명, 12개 동이 있었으며, 시청 소재지는 서정동이었다.
송탄시는 1995년 5월 10일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당시 평택시·평택군과 통합되어 새로운 평택시가 되었다
[송탄역사]
고구려 때의 부산현(釜山縣:古淵達部曲·金山·松村活達縣이라고도 불렀다)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 진위현으로 고쳤고,
진위현(振威縣) 현재의 경기도 평택시에서 진위면, 고덕면, 서탄면, 평택시 시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1398년 (태조 7)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되었다.
1895년 (고종 32) 진위군으로 승격되었는데,
1938년 진위군을 평택군으로 개칭하였다. 그 일부는 진위면으로 남아 있다.
1914년 4월 1일 : 경기도 진위군 송장면, 탄현면, 일탄면 등이 합면(合面)하여
경기도 진위군 송탄면이 되었다.
1938년 10월 1일 :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개칭되었다.
1963년 1월 1일 : 송탄면이 송탄읍으로 승격하였다.
1981년 7월 1일 : 송탄읍이 송탄시로 승격하여 평택군에서 분리되었다.
1986년 평택읍이 평택시로 승격하여 평택군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5월 10일 : 송탄시, 평택시, 평택군이 도농복합시인 평택시로 통합되었다.
1996년 4월 19일 : 평택시 동부동이 송탄동으로 개칭되었다.
■ 사당패의 흔적이 남아있는 좌울
우리고장의 옛 지명에는 "예좌울", "가재울", "장좌울"처럼 "울"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울"은"울 안", "울 밖"과 같이 공간의 안쪽을 의미하는데, 국가나 마을, 집안을 상징하는 말이다.
주변에서 많이 쓰는 "우리"라는 말도 본래 "울(월)"에서 나온 말이고, 수도(首都)의 순수 우리말인 "서울"도 같은
의미였다.
송탄지역에는 '울"과 관련된 오좌울, 남월과 같은 지명이 있고 좌울(월)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러면 왜 "우(右)울"이라는 지명은 없고 "좌(佐)울"만 있을까?.
지명에서 "좌"라는 명칭은 "오좌울(동)"이나 "가좌울(가재동)", "예좌울(도일동)"처럼 지형이 삼태기처럼 둘러쳐
진 지형에서 나타난다.
"좌울"도 야트막한 구릉이 삼태기형으로 둘러 처져 있기 때문에 "지형이 삼태기처럼 둘러쳐진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좌울은 안성의 청룡마을처럼 옛 걸립패의 근거지였다.
걸립패는 전문연희패이지만 때때로 마을 두레패가 겨울을 이용하여 걸립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단체의 성격
을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풍물치는 실력만큼은 근동에 최고여서 자부심이 대단했고 혹자는 동령마을 두례패와 견주기도 했다.
[평택시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