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류공(文正柳公) 휘(諱) 경(璥)
고려왕조 무신정권 말기의 무관이자 문관으로 개국공신이자 문화류씨(文化柳氏) 시조(始祖) 휘(諱) 차달(車達)의 8대손이다.
1258년(고종 45년) 김준과 모의해 최의(崔竩, 무신정권 8대집권자) 암살을 주도하면서 정권을 차지했다. 최의 처단 공로로 고종(제23대)으로부터 지주사(知奏事) 좌우위 상장군(左右衛 上將軍) 직위를 받았지만 과거 최충헌 등 권신이 지주사 직위를 역임했다는 것을 의식해 사양했다. 이에 고종은 추성위사공신(推誠衛社功臣) 우부승선(右副承宣) 좌우위 상장군(左右衛 上將軍) 관작을 하사했다.
최의를 주살한 뒤, 권세를 이용해 재산을 엄청나게 모아 민간에선 삼한거부(三韓巨富)로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곧 김준에 의해 밀려나고, 1268년 임연이 정권을 잡자(무진정변) 대놓고 불만을 표시하다가 원종(제24대)에게 밉보여 흑산도(黑山島)로 1차 유배를 당했다.
류경은 정권을 잡은 기간이 짧았고(1258년 3~11월), 잘하면 이 사람대에서 무신정권이 끝나고 과거 체제로 회귀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본인부터가 김준을 비롯한 무신들과 결탁한 결정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정권을 잡은 후에는 후속처리를 미흡하게 하는 바람에 실제로는 이뤄지지 못했다.
아무튼 무신정권 후기의 느슨한 분위기 덕에 실각 후에도 살아남았다. 임연은 류경을 풀어주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다른 섬으로 2차 유배를 당했다가 강도(江都)로 귀환했다.
삼별초의 난이 터졌을 때 강도에서 개경으로 탈출하던 중 삼별초에게 붙잡혔다. 하지만 아픈 척을 해 적을 속인 뒤, 얼른 다시 탈출해 원종을 호종했다. 이후 노비 문제로 [1]다루가치와 분쟁이 생겨 애도(哀島)로 3차 유배당했다가 다시 돌아온다.
원나라 간섭기가 시작된 제25대 충렬왕 치세에선 정계에 제대로 복귀해 김방경을 귀양지에서 구출했고, 사관(史館)의 수장으로 제20대 신종, 제21대 희종, 제22대 강종, 제23대 고종의 《실록》 편찬을 담당했다. 또 다루가치와 '정화궁주 저주 사건'으로 분쟁이 생겼으나 이번엔 이겼다. 제국대장공주가 궁궐을 지으려 하자 길일을 잡아야된다며 공사를 늦추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말년엔 승려 최탄의 무고에 걸려 4차로 유배당할 뻔했지만 다행히 최탄의 무고죄가 들통나면서 유배되자 억울함을 면했다.
류경은 스승이자 후원자로서 제자를 키웠는데,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한 안향이 그의 직계 제자였으며, 류경이 후원한 문사들이 고려 말기 정부 요직을 꿰차면서 하나의 문벌(文閥)로 성장했다.
성품은 근엄해서 사람들이 우러러보았으나 한편으로는 말과 웃음에 친근함이 있고, 또한 명민하고 도량이 크고 깊으며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어 능히 큰일을 치를 능력을 갖췄다고 전한다. 생전 엄청난 부로 인해 탐욕스러웠다는 평도 받았으나 충렬왕 대에 조정 원로로서 활약을 했으며, 무엇보다 인맥이 만만치 않았기에 큰 비난은 받지 않았다.
정계 거물답게 인맥이 어마어마한데 어머니가 무신정권 제1대 집권자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의 딸로 전주 이씨였다. 외조부는 수많은 고려 문신들을 무신정변의 참화로부터 구해낸 문극겸이다. 또한 류경의 증손녀 사위는 고려 말의 대유학자 이제현이었다.
제자로는 해동 성리학의 시조 안향이 있었다.
류경은 충렬왕 치세에 [2]치사(致仕)했다. 그의 치사 관작은 다음과 같다.
문산계 품계: 광정대부(匡靖大夫)
직위: 첨의중찬(僉議中贊), 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상장군(上將軍), 판전리사사(判典理 司事), 세자사(世子師)
• 2012년 MBC 드라마 <무신>에서는 배우 김승욱이 연기했다.
[1]다루가치 : 원나라 때에 고려의 점령지에 두었던 벼슬
[2]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
[출처 :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