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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에서 찾은 자아: 존 킨의 《펑크족》
양 균 원(시인, 대진대 영문과 교수)
I. 나와 세상 사이에서
시가 다루는 제재는 한계가 없다. 무엇이든 시의 주제나 소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시를 읽거나 쓰려고 하면, 취향이나 시에 관한 생각에 따라, 어떤 부류의 제재가 시에 더 잘 어울린다는 선입견이 개입하게 된다. 오늘날 주변에서 발견하게 되는 시적 제재는 개인의 내면과 관계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시인의 시선이 내면에 집중되어 있다. 바깥세상을 객관적으로 향하는 듯해도 냉큼 그것을 자신의 주관으로 덧칠해버린다. 소위 “낯설게 하기” 기법은 익숙해져 자세히 보지 않게 되는 어떤 것을 신기하게 접근하도록 유도하는 장치로서 근본적으로 대상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기존의 편견을 깨는 데서 실체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반영한다. 그런데 “낯설게” 만들어진 어떤 것이 공통의 가치나 진실과 관계없이 개인의 주관적 내면을 분출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달갑게 옹호될 수 없는 노릇이다.
상상력은 개인에게 고유한 것으로서 예술 창조의 정신으로 옹호받아 왔다. 그것은 이성(理性)의 정신 능력과 달라서 보편성을 요구받지 않는다. 19세기 이후 서구 낭만주의 전통에서 독창성과 창의성을 중시하는 태도가 줄기차게 발전되어 왔다. 한국의 서정시 또한 이러한 경향에서 예외가 아니다. 시는 시인과 세상 사이의 대치에서 탄생한다. 여기서 균형점이 시인의 정신에 지나치게 기울게 되면 세상은 줄어들거나 사라지게 된다. 세상은 어떻게든 주관화의 과정을 통해 드러난다. 객체를 지향하는 시마저도 관찰자의 시야를 통해 재구성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리얼리즘의 환상을 버리고 주체의 자유를 누리는 일은 그 나름의 가치와 아름다움이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시인의 목소리가 개인의 내면에 깊이 매몰된 채 발화되는 상황은 우려스러운 측면이 있다. 특히 젊은 시의 미덕으로 포장되어 더 큰 맥락의 소통에 대한 고려 없이 유아론의 극단에서 생산되는 생각이나 감정은 시의 사회성을 크게 떨어뜨린다. 시는 기본적으로 시인의 것이고 따라서 개인적이지만 여전히 독자의 것이기도 하고 또한 사회를 향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존 킨(John Keene)의 시는 흥미롭게 읽힌다. 2022년도 시 부문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 수상 시집 《펑크족》(Punks)은 타자를 지향하는 방식에서 우선 눈길을 끈다. 킨의 시에는 주류의 관점에서 불량하게 비칠 사람들이 숱하게 등장한다. 시인이 자신의 내면에 함몰되지 않고 외부를 향해 비판적 시선과 온정을 끈기 있게 견지한다. 자아와 세상 사이에서 그가 형성하는 모종의 균형은 어쩌면 새롭다고 할 수 없고 당연하기까지 한 것인데 요즘 그런 목소리가 우리 주변에서 귀해진 탓인지 상당히 이채롭게 다가온다.
『시와 문화』 2023년 봄호에서는 킨의 여러 형식의 시들 가운데 시집 《펑크족》에 실린 세 편을 골라 읽는다. 세 편 모두가 형식과 스타일이 다르고 호흡 또한 다르다.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이고 또한 간접적으로 정치적이라는 면에서 서로 이어진다. 시인이 의도하는 시집 전체의 구도가 희미하게나마 드러날 것으로 기대한다. (지면을 아끼기 위해 영어 원문은 여기에 함께하지 않으나 제시된 영문 표현 등을 활용하여 미국 구글에서 웹검색을 하면 찾아볼 수 있다.)
II-1. 〈펑크족〉(“PUNKS”)
시집에 이름을 제공한 표제 시 〈펑크족〉에는 “마틴 웡(Martin Wong), 그를 모방하여 그에게 바치는 시”(after and for Martin Wong)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웡(1946-1999)은 중국계 미국인 화가로서 중국식 이름은 황마정(黃馬鼎)이다.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나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성장하였고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그림은 종종 다양한 인종의 정체성을 탐색하면서 다문화적 요소를 드러냈으며 동성애자의 성정을 찬양했다(Wikipedia). 표제 시 〈펑크족〉의 부제는 시인이 이러한 웡을 뒤따르는 자의 목소리를 내면서 그 결과를 그에게 헌정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시인 킨이 시를 통해 성격을 부여하고 그 가치와 의미를 살려내는 인물은 어떤 존재일까? 이 시에서 그리고 다른 시에서 다양하게 생명을 부여받게 되는 여러 존재는 어떻게 연대를 이루는 것일까?
침대 머리맡 널빤지에 붙여둔 히프노스 점검 사항 첫째 발밑에 있는 타나토스 점검 사항 둘째 쌍둥이는 알고 있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후원자에게 마무리해줄 제단이 하나 남아 있다 이스트사이드 감정사(鑑定士)에게 도시 풍경은 256가지 색 당신은 맥(脈)을 찾아 가만히 있는 누군가를 골라낼 수 있는가요 피닉스의 첫 카지노를 소유했던 상류층 자손에 관한 게임 그저 막대기 같은 사람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으로 왔다 무명에서 갑자기 입신한 것은 아닌 그냥 카키색 작업복을 걸친 사람이 아니었다 에르테 샤갈 피카소 르동 레저 로렌스 유트릴로 모딜리아니 블라맹크 르누아르 미로(Miro) 샤프 데이즈 그 장소들 그 광란 그 얼굴들 그 도시의 미로(迷路) 나를 안아주었던 어여쁜 푸에르토리코 사람들 내가 지금 그려내고 있는 내부 공간들 키스하고 있는 소방수들 스케이트보드 타고 날고 있는 사람들 거리의 보행자들 영웅들과 만화책 여-영웅들 그리고 딱딱해진 좆에 씌워진 연기 나는 갈색 고무의 향 우범 지구에 살던 그 사내의 지독한 동물 냄새 말똥 향기 산쑥과 진땀 흘리는 전쟁과 전쟁의 소문들 달콤한 망각 옥상들 다리(橋)들 폭력 경찰들 허드슨과 클린턴 스탠턴과 포사이스 아래 깊은 곳에 자리한 터널들 몸 냄새 내가 혀로 맛본다 우리가 품고 다니는 대단한 열기 청소년기의 유령의 흔적들 기다림의 조바심 우리가 무엇을 피해 달아나고 있는지 누가 아는가 아프리카의 신전들 자유의 여신상에서 어물거리는 아이들 히프노스가 외친다 내 말 들리는가 타나토스가 소리 지른다 그것을 원하는가 빠른 명성 아름다움 달콤한 입술 마약 같은 꼬리표들 노랫말들 박자들 해가 저문 후 로이사이다(Loisaida) 비닐봉지에 그려진 잠자는 마돈나와 팻시가 아니다 근무 시간을 지키듯 클럽으로 기어드는 아이들 1가와 C가 사이의 담장들 우리는 계속해서 행마다 맞닥뜨려 초안을 작성했고 내가 마주하고 있는 천사는 이소룡처럼 움직였는데 마치 지하철을 꿈꾸는 듯했다 형제들 벽돌담과 마약 밀매자들 연인들 굴뚝들 색채들 움직이고 있는 플랫폼에서 내가 천사와 요정을 사로잡는 환상들 화류계의 반신반인과 악마들 황혼에 밖을 배회하는 야생 여자들과 괴물들 악몽 전후의 정적 상태 위험하지 않은 아름다움은 가짜다 내 청춘 시절에 세상을 떠돌면서 추구했던 그것 이제껏 그 멜로디를 벗어난 적 없는 불안한 정신 그 시절 내내 그것이 잠재의식의 기준선처럼 나를 사로잡고 땀에 젖은 여름밤 이스트사이드의 중심부를 채웠다 당신 얼굴에 웃음기를 주는 데 필요했을 때 내게 후드 복장을 걸치고 와주었던 녀석들의 몰입한 눈빛들 우리가 여기 누워서 망신스러운 짓을 저지르는 일은 나를 혹은 역사를 지워주지 않는다 승자가 누구든 그는 자신이 택한 길을 잃는다 예술 세계는 가장 가까이 있는 자를 그가 누구든 단지 이용할 따름이다 그림은 부유한 자들과 과도하게 특권을 지닌 자들의 복권이다 히프노스는 내가 느껴지느냐 외치고 있고 타나토스는 너를 베를린 세인트루이스 도쿄 파리까지 데려다줄까 묻고 있다 사내들 절벽에서 느끼는 무중력은 조 시몬스 마틴과 성교를 나누고픈 오래된 희망과 같다 당신을 사랑한다 난 결국 관능적인 녀석 당신은 배반당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한 폭의 그림은 그저 아주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을 따름이고 당신은 기억한다 그 화재 이번에는 차이나타운의 길거리 장면들 고향과 이곳 탑들 수기(手旗) 신호 개업 전야 약물과 꿈들 매각된 보데가 포도주 가게들 슬픈 눈빛의 페드로는 뉴어크에서 작은 북처럼 울려대기 시작하는 그 사업에 아주 적합하지 않았다 그 시절은 특수 공격처럼 지나갔다 거리 B에 있는 성령강림 교회와 같은 심령의 힘 그것이 예술의 술집이 되었다 로봇을 구원하라 이것이 마지막 사진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흘러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라 지평선 위 모든 건물 꼭대기에 물 저장 타워가 있듯이 모든 꿈은 높이 꽃을 피워야한다 볼품없던 모든 사람이 얼음처럼 연기처럼 이슬처럼 되어갈 것이다 당신과 함께 진정으로 추억담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처럼 그렇게 되어갈 것이다 날 볼 수 있느냐 히프노스는 속삭이고 타나토스는 우리는 곧 함께하게 될 거야 소리친다 마치 이 그림들 속의 순간이 아예 존재한 적 없다는 듯이 마치 문화가 돌이킬 수 없게 바뀌어버린 듯이 마치 우리 사이가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 같지 않다는 듯이 마치 유레카가 발견과 그림자와 사슬톱의 장소가 아니라는 듯이 발렌타인 날들과 아디오스 작별을 고하는 방식들에서 내가 당신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징후가 없어 긍정적이다 당신은 뉴욕에 와서 여기 있는 나를 방문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훌륭한 식사를 하고 당근 주스를 실컷 마실 수 있겠지 화가라는 것의 기쁨과 슬픔은 연쇄 살인범이 되는 것과 거의 동일하다 고독한 탐색 사냥의 전율 상상의 세트 악과 밤의 신을 완성하고자 하는 충동 긴장 절박 그리고 최종적으로 장막과 시간이 갑자기 산산이 찢겨 나갔을 때 삶과 죽음이라는 것의 궁극의 순간에 발생하는 통제할 수 없는 발작 내 아프리카 후손의 말을 들어보라 희미한 메아리 잘 지내고 있는가 내 귀여운 천사여 얻는 자는 잃거나 푸에르토리코의 모습을 잃는다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갔다 박하 술 크렘 데 멘테보다 더 푸른 계집년을 깨물고 놀면서 성장했다 여전히 이곳 병원에 격리되어 꼼짝 못 하고 있다 내가 결핵에 걸렸을지도 모른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탓이다 어쨌거나 난 휴가가 필요했다 당신이라면 날 방문하러 와줄 수 있겠지 그들은 내가 방사성인 듯 내가 만지는 모든 것이 유해 폐기물로 바뀌는 듯 행동한다 내 마법의 저항력에도 불구하고 내 악과 인간적 욕망의 거대한 제국에도 불구하고 수탉 형상의 성채처럼 그렇게 난공불락인 내 개인적 기념비에도 불구하고 날 그렇게 취급한다 나는 내 방향성과 오리엔티즘에 대한 권리를 보존하고 있다 나는 왕족의 후손이고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내게는 일곱 살 때 보디가드가 있었다 나는 맘보 춤과 차차 춤을 출 수 있었다 나는 그래스호퍼 중독자였는데 그것은 곤충이 아니라 독주였다 그 쾌락 데이빗 보위 미술품 중개인들 헤로인 밀매자들 최후에 윌래메트 강에 떨어진 운석처럼 새벽 3시에 터치다운을 기록한 그레이스 존스 그림은 살인과 유사하다 왜냐하면 마침내 긴장감이 사라졌을 때 당신에게 남겨지는 것은 그저 지저분하고 처리해야 할 문제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히프노스는 내 사랑을 제발 공유해 달라고 말하고 타나토스는 치니토 내 귀여운 동양의 소년아 나는 네 안에 있으니 나를 기억하라 난 너와 함께 걷고 너에게 말을 건네고 있으니 오늘 밤 다시 시작하는 꿈속 비행(飛行)에서 영원히 함께 기억하자고 말한다 레쿠에르다스 기억하는가 당신은 내가 당신을 진정으로 기억하는 것을
(92-96쪽)
역자주: 기울임 체는 필자의 것으로 스페인어 혹은 그 번역을 표시함
시의 목소리가 일인칭으로 발화되고 있다. 일반적 서정시에서 일인칭 화자는 시인 자신이거나 그 목소리가 내면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 시의 목소리 또한 시인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그렇지만 시집 전체를 두고 볼 때 시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시인이 관찰하는 자이면서 몰두하게 되는 대상이다. 시의 직접적 제재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자인 셈이다. 시인이 타자와 하나가 되어 발화하는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면서 또한 타자의 것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특히 그 타자가 시인이 우연히 관찰하게 되는 아무나가 아니라 그가 심정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동질성을 공유하는 자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 시가 헌정된 화가 웡은 대학 시절과 향후 10여 년 동안 캘리포니아주 유레카(Eureka)와 샌프란시스코를 오가면서 도자기 제작 기술을 쌓았는데 베이 지역(Bay Area)의 예술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당시 등장했던 히피 운동에 관여하면서 성 해방 운동과 환각성 약물 실험에도 참여했다. 웡은 1978년에 뉴욕시 맨해튼의 동남부 지역으로 이주하여 그림에 전념하였는데 당시 작품은 동남부 지역의 퇴락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차이나타운을 유쾌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이스트사이드(East Side)와 로우어이스트사이드(Lower East Side)는 이곳을 지칭한다.
시 〈펑크족〉과 관련하여 유의할 사항은 웡이 “뉴욕 거주 푸에르토리코인”(Nuyorican) 미겔 피네로(Miguel Piñero)와 맺은 연인관계이다. 피네로(1946-1988)는 푸에르토리코에서 태어나 4세에 가족과 함께 뉴욕 동남부 지역에 이주했는데 아버지의 방기로 힘든 성장기를 거치면서 절도죄 등으로 소년원을 들락거렸다. 브루클린으로 이주한 후에는 친구 세 명과 갱단을 조직해 강도 행각을 일삼다가 붙잡혀 옥살이까지 했다. 이런 그가 25세에 싱싱 교도소 복역 중에 써낸 시 작품이 응모전에 뽑히고 했고 재소자 극 작품 쓰기 워크숍에서 써낸 작품이 뉴욕타임스 서평에 실리기도 했다. 피네로의 희곡 〈근시안〉(“Short Eyes”)은 26세에 가석방된 후 빛을 보게 되는데 여러 극장 공연을 거쳐 토니상(Tony Awards)에 지명되기까지 했다. 〈근시안〉은 흑인과 라티노 재소자가 대부분인 구치소에 아동성애 정신 이상을 앓는 백인 성인이 투옥되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다뤘다고 한다(Wikipedia).
중국계 화가 웡은 푸에르토리코인 피네로와 1년 넘게 동거하면서 라틴계 공동체에 더욱 통합되었다. 시 〈펑크족〉에서 여러 이민족 남자들 사이의 동성애는 더는 기피의 대상이 아니다. 웡과 피네로의 협업은 뉴욕 거주 푸에르토리코인의 예술 운동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Wikipedia).
시 〈펑크족〉은 필자가 위에 제시한 세부 정보들을 자세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위 정보는 시의 부제에 제시된 “마이클 웡”이라는 인물에서부터 시작해서 시의 세부와 관련이 있을 법한 사건들을 쫓아가면서 시의 텍스트 밖에서 찾아낸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이 시는 이해되기 전에 뭔가 격정적으로 다가오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시 〈펑크족〉은 보통의 서정시보다 더 넓은 역사와 문화의 맥락에서 발화되고 있다. 다민족, 다종족, 다문화, 다언어가 뒤섞이는 모종의 삶의 방식이 옹호되고 있다. 이러한 문화에서 동성애는 이성애(異性愛)에 비교되거나 맞서는 위치에 있지 않고 그냥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듯이 다뤄진다.
시 〈펑크족〉은 시인 킨이 구사하는 다양한 스타일과 형식 중에서 매우 실험적인 쪽에 속한다. 우선 모든 단어가 대문자로 표기된다. 단어와 단어 사이가 어떻게 맺어져 하나의 문장을 형성하는지 불분명한 경우가 잦다. 구두점 없이 이어지는 단어들 사이에서 문장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낱개의 단어나 구가 나열되는 듯 다가오는 부분도 있다. 이러한 흐름에서 행의 구분이란 무의미해진다. 시집의 지면에서 각 행은 허용되는 폭의 한계에서 다음 행으로 넘어간다. 산문시에서처럼 행이 구분 없이 이어져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번역에서는 행의 구분을 고려하지 않았다. 시집에서는 제목을 제외한 본문이 다섯 쪽에 걸쳐 총 129행에 달하나 번역의 결과는 좌우 여백 주기에 따라 행의 수가 달라질 수 있다. 주 언어는 영어이지만 격렬한 순간에서 스페인어가 삽입된다. 문장의 형식적 구분이 실종된 채 각종 이름과 사건이 나열되는 방식은 일반적 시 형식을 따르는 듯 보이는 그의 다른 시와 대조된다. 시인은 이러한 형식과 방식을 어떤 의도로 채택한 것일까?
시의 제목 “펑크족”은 사전적 의미에서 1970년대 런던의 킹스 로드 부근에 대두한 젊은이들을 말한다. “펑크”는 풋내기나 불량 청소년을 뜻할 수 있다. 반체제적 가사를 외치는 펑크 음악을 가리킬 수도 있다. 검정 가죽점퍼에 귀나 입에 핀을 꽂는다든지 페인트투성이의 옷을 입는 식의 도전적인 패션을 지시할 수 있다. 이러한 뉘앙스를 모두 끌어안으면서 시 〈펑크족〉은 시인이 성장기에 체득한 문화와 추구하는 가치를 대변한다. 백인 중심의 문화에 대해 저항하면서 사회와 역사의 그늘에 가려졌던 변방의 인물들에게 온기를 불어넣는다.
시 〈펑크족〉을 읽기 시작하면서 독자는 여러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히프노스(Hypnos)와 타나토스(Thanatos)는 시인에게 어떤 존재일까?
예술 감식가에게 뉴욕 이스트사이드의 도시 풍경이 256색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에르테 샤갈 피카소 르동 레저 로렌스 유트릴로 모딜리아니 블라맹크 르누아르 미로(Miro) 샤프 데이즈”는 어떤 부류의 인물들인가?
“그 장소들 그 광란 그 얼굴들 그 도시의 미로(迷路) [...] 폭력 경찰들 허드슨과 클린턴 스탠턴과 포사이스 아래 깊은 곳에 자리한 터널들”은 화자에게 각인된 심상을 표현한다. 이러한 심상은 어떤 마음의 풍경을 그려내는가?
“내가 지금 그려내고 있는 내부 공간들 키스하고 있는 소방수들 스케이트보드 타고 날고 있는 사람들 거리의 보행자들 영웅들과 만화책 여-영웅들 그리고 딱딱해진 좆에 씌워진 연기 나는 갈색 고무의 향 우범 지구에 살던 그 사내의 지독한 동물 냄새”는 화자의 심중에 어떤 욕망을 불러일으키는가?
화자의 성정(sexuality)은 어떤 특성을 띠는가?
도입부에서부터 독자가 품게 되는 의문은 시가 진행되면서 더 많은 의문에 이어지게 된다. 보통의 경우에 단어는 문장을 이루고 문장은 문단을 이루며 문단은 더 큰 전체를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펑크족〉에서 단어들은 연결의 고리가 분명하지 않은 채 그저 나란히 있다. 단어가 앞과 뒤 어디에 연계될지 애매해지는 경우가 많다.
시의 화자 웡은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였고 1994년에 에이즈 진단을 받아서 53세에 관련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파트너였던 피네로는 10년 전에 간경화로 사망하였다. 시 〈펑크족〉의 두 주인공 웡과 피네로는 70년대와 80년대에 창작의 열정을 불태웠다. 당시에 뉴욕 동남부 지역은 펑크족으로 대변되는 대항문화가 기세를 떨쳤던 곳이다.
문장의 경계가 사라지고 전통적 형식과 문법이 실종된 지면에서 대문자 단어들이 당당하게 혹은 숨 가쁘게 존재를 내뿜는다. 이러한 시의 구조와 스타일에서 불온한 욕망이 자유롭게 활개 치는 게이바의 분위기가 효과적으로 살아난다. 시의 주제와 제재가 파격의 형식과 어우러지고 있다.
II-2. 〈젊은 미군 아버지의 초상〉(“PORTRAIT OF THE FATHER AS A YOUNG GI”)
킨은 아프리카계 미국 시인으로서 피할 수 없이 동족이 겪어온 고난의 역사를 되새기는 소명을 받들고 있다. 그에게 아버지는 개인사적 기억의 대상이면서 선대 미국 사회가 통과해온 역사적 혼돈을 예증하는 존재이다. 시 〈펑크족〉에서처럼 시인의 시선은 개인의 희로애락을 고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와 종족의 고난을 향해 열려 있다.
바람둥이 응시 뒤에 숨은 오르페우스, 마음속은 분노의 가마솥 같아서,
요동치지만, 모든 렌즈를 향해 온화한 표정을 짓는
젊음. 그 시절에 어떤 형제인들 가면을 쓰지 않았겠는가?
한국에서는 “전투”가 끝났으나, 베트남전은, 국내에서,
여전히 종전이 선언되지 않은, 끝없는 전쟁. . . . 파리의 상가 아케이드들이
이내 손짓하였고, 신속히 배치되어 굴러다니다가 서서히 패전 독일 속으로,
다음엔 “네덜란드 소녀”의 차분한 감촉 속으로 내려앉았던 아버지. 그보다 앞서,
야영지, 취사병 시절, 허리가 휘도록 어깨에 짊어졌던 소총, 난생처음 탑승했던
헬리콥터, 당신이 배속된 대대(大隊)에 함께했던 형제 전사들
그리고 미시시피보다 훨씬 더 먼 곳에서 온 흰 피부의 전우들.
막사 고요한 갱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그가 들었던 전차(電車) 소리
철커덕 소리를 내면서, 스윙 음악처럼, 서서히 마지막에 도달하는 소리,
축전지에서 반복 악절(樂節)이 연주되는 동안 그의 아빠는 오르간의 음관을
조율 중이었고 그의 엄마는 마킷 가를 따라 자유가
불안하게 비틀거리는 동안, 크리스털 용기에 호밀을 식히고 있었다.
곧 그는 아빠가 될 것이다. 결코 용서될 수 없는 일. 곧 잊히고
그는 다시 사랑에 빠질 것이다. 곧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수천 번이나 통과했던 그 길들을 차를 몰고 달려서,
귀 뒷전에서 솟아올라 사내라면 목청껏 노래해야 하는
멜로디로 변하는 곡조처럼 깊고, 초대받지 않은,
다리(橋)만 남은, 그 강들을 다시 건널 것이다. 지금 곡조는
뼈에 금이 가듯, 어둠을 깨면서, 쉴 새 없이, 들려오는 “되돌아보지 마세요.”
(134쪽)
화자가 첫 줄에 아버지를 요약한다. 그는 분노를 품고 살았으나 여인들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바람둥이였다. 전쟁이 이어지는 시절이었다. 한국전은 끝났으나 베트남전은 국내에서 여전히 종전이 선언되지 않는 상태였다. “그 시절에 어떤 형제인들 가면을 쓰지 않았겠는가?” 젊은 아버지는 베트남의 “끝없는 전쟁”을 거친 후 파리의 화려한 거리를 어슬렁거렸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한 독일에 배치되었다가 “네덜란드 소녀”를 만나 아마도 오랜만에 “차분한 감촉”을 누렸다.
아버지에게 전해 들었을 젊은 시절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까지 숨 가쁘게 요약하더니 화자는 다시 그가 군 생활에서 겪었을 고난을 상기한다.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아버지 개인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했던 흑인과 백인 전우들 모두에게 향한다. 또한 그가 막사 바닥에 누워 그리워했던 고향의 풍경에 대한 향수를 상상한다. 아버지는 아마도 갱 바닥이나 마찬가지인 막사에 드러누워 고향 도시의 거리에서 전차가 철커덕 소리를 내면서 오가는 풍경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서서히 마지막에 도달하는 소리”는 다시 아버지의 아버지가 조율하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로 이어진다. 어머니는 크리스털 유리 그릇에 호밀을 식히고 있다. 아마도 빵을 굽거나 식사를 준비 중일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자유는 “마킷 가(Market Street)를 따라 불안하게 비틀거리고 있다. “비틀거리는 자유”는 아마도 아버지의 외도에 따르는 파장이거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언제든 겪을 수 있는 억압의 환경을 뜻하는 듯하다.
“곧 그는 아빠가 될 것이다.” 이것이 “결코 용서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은 어머니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인 듯하다. 어머니와 화자는 “곧 잊히고 / 그는 다시 사랑에 빠질 것이다.” 아버지는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 아니었고 “아무 생각 없이 / 수천 번이나 통과했던 그 길들을 차를 몰고 달려서” 다시 강을 건너 멀어질 것이다. “다리만 남은” 강은 “깊고, 초대받지 않은” 채로 흐르고 있다. 이 강에서 사내라면 마땅히 소리쳐 불러야 할 어느 곡조가 솟아오른다. 아마도 시인 킨의 고향에서 탄생한 스윙(Swing) 음악 가락에 실려 있을 그 곡조는 지금 “뼈에 금이 가듯, 어둠을 깨면서, 쉴 새 없이” “되돌아보지 마세요”라는 가사를 귓전에 쏟아붓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화자의 회상이 이해에서 동정으로 긍정과 부정에서 비난과 그리움으로 만감이 교차하고 있다. 시의 결이 화자의 생각과 감정이 빨라지거나 느려지면서 유려하고 힘 있게 펼쳐진다. 시의 마지막에 인용한 가사 “되돌아보지 마세요”는 젊은 군인 아버지로부터 화자에게 이어지는 인생철학일 수 있다. 화자는 아버지와 같은 아프리카계 젊은이가 힘든 전란의 시대에서 어떻게든 씩씩하게 앞으로 나가야 했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듯하다.
II-3. 〈전야의 베시〉(“VESEY ON THE EVE”)
〈전야의 베시〉는 앞선 시 〈펑크족〉과 〈젊은 미국 아버지의 초상〉보다 형식에서 더 정밀하게 다듬어져 있다. 호흡 또한 상대적으로 고르고 안정적이다. 3행 1연과 2행 1연이 교차하고 있고 각 행의 길이가 유사하다. 형식과 스타일의 정돈에 어울리게 생각의 전개 또한 논리적이다.
영혼을 두고 맹세했든 안 했든 동료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어쩌면 그들 모두의 혓바닥을 찢어 버렸어야
했다. 그럴 게 아니라면 그 일은 혼자 처리했어야 하겠지,
그가 개오지 조게 껍데기와 바퀴 모양으로 잘라낸 옥수숫대에서
읽어냈던 징조, 지혜의 부적(符籍)에 근거해, 그리했어야 하겠지.
하지만 그리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았을 테지.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변절자의 목을 잘라낼 수 있겠는가,
얼마나 많은 선박을 징발하고, 얼마나 많은 농가를
동틀녘까지 잿더미로 만들 수 있겠는가? 뼛속 깊이
그는 알고 있다, 바보든 반역자든 누군가 앞으로 나서서
백인들 사이에서 먹이를 주듯 그의 계획을 씨 뿌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의 이름이 그 순간부터 피보다
더 검어지리라는 것을. 어떤 이들은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지.
영혼의 강 저쪽에서 저울이 그에게 유리하게
기울 것이다. 사람들은 틀림없이 벌거벗은 몸으로
천국에서 잠이 든다, 페시옹의 국가에서 풀려난 혼령들이 그러하듯이.
신념만이 도약해 뚫고 나갈 그저 작은 창문을
남겨두지, 그가 지닌 것이라고는 지도, 등유
단검, 성경, 도끼뿐이지만. 비록 그의 심장은
허리케인 속의 주 돛처럼 펄럭거리지만,
남 샌티 족에서 유호 족에 이르기까지 고요한
외침이 들려오지: “베드로여, 갈러 사람 잭이여, 내 자식들을
모으거라! 우리의 전투가 시작되니.”
(149-150쪽)
갈러(Gullah)는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에 사는 흑인들을 지칭한다. 영어와 여러 서아프리카 언어가 혼합된 형태를 뜻하기도 한다. 샌티(Santee)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중부에서 동남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들어가는 강을 지칭하면서 그 주변에 거주하는 원주민을 뜻하기도 한다. 유호(Euhaw) 역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인디언 부족을 가리킨다. 페시옹(Alexandre Pétion, 1770-1818)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 맞서 독립을 쟁취한 아이티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이 시에서 주인공 베시(Denmark Vesey)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지역에서 백인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투쟁하는 모든 인종을 대변한다.
킨의 시는 시인 개인의 심중보다 타자와 사건을 다루는 경우가 잦다. 베시는 역사상 인물로서 타자이지만 킨이 소속감을 느끼는 집단의 존엄을 위해 투쟁한 인물로서 시인의 일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베시는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던 자로서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서 1822년에 노예들의 봉기를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베시는 노예 신분이었으나 복권에 당첨되어 32세 경에 자유를 구매한 후 사업을 키웠으나, 첫 아내와 아이들을 노예 상태에서 사들일 수는 없었다. 고소된 내용에 따르면 베시와 그의 추종자들은 찰스턴의 노예주들을 살해하고 노예들을 해방한 후 새롭게 독립한 흑인 아이티(Haiti) 공화국으로 망명할 계획이었다. 봉기가 실제로 이뤄졌다면 찰스턴 시내에 거주하는 수천 명의 흑인과 인근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들이 참여했을 것으로 알려졌다. 거사는 사전에 발각되어 민병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백인 희생자 없이 베시와 다섯 명의 노예가 주동자로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 졌다(Wikipedia). 이 시에서 화자는 베시의 실패에 분노를 표하면서 신의 이름으로 모든 국외자를 불러 모아 투쟁을 선포하고 있다.
III. 답은 없어도 질문은 있다
존 킨(John Keene)은 아프리카계 미국 시인이다.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태생으로서 소설과 번역 분야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고 뉴욕대에서 예술학석사를 취득했다.현재 뉴어크에 소재한 럿거스 대학(Ruthgers U)에서 아프리카-미국학, 아프리카학, 창작 프로그램 등에서 가르치고 있다.
1995년의 첫 작품 《주해(注解)》(Annotations)는 세인트루이스에서 겪었던 성장의 경험을 다뤘는데 주로 소설로 취급되나 산문시로 접근되는 때가 있다. 이 작품에 대하여 서평 주간지 『퍼브리셔스 위크리』(Publishers Weekly)는 “최상의 추천을 받아야 마땅한 작품”으로서 “21세기 소설에 새로운 방향을 지시하는 실험적 텍스트”라고 평했다. 2006년에 출판된 《지진 활동》(Seismosis)은 화가 스택하우스(Christopher Stackhouse)와 협업한 결과로서 세간의 시선을 끌었다. 두 아프리카계 미국 예술가의 공동 작업은 반복적인 대화와 상호조응을 통해 단순한 협조를 넘어서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한 작품을 두고 서로의 작업에 대해 교차적으로 반응하는 과정에서 그림(drawing)과 시는 둘 다 장르 간 경계가 허물어진 제3의 지대를 지향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한 평론가는 “스택하우스의 선화(線畫)와 킨의 에세이-시(poems-as-essays)”가 “글쓰기/문학과 그림/시각예술 사이에서 공통의 터전을 관통한다”고 평했다. 2015년에 출판된 《대항서사》(Counternarratives)는 단편 소설집으로서 킨은 이 책으로 이듬해에 래넌 문학상(Lannan Literary Award)과 미서적상(American Book Award)을 수상했다.
시집 《펑크족》(Punks)은 “신시(新詩)와 선시(選詩)”(New and Selected Poems)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 시집은 시인의 거의 30여 년에 달하는 시 창작 인생을 요약한다. 그래서인지 언어의 스타일과 주제가 다양한 특성을 드러낸다. 시인이 자신의 시를 새롭게 선별하는 기준은 그가 옹호하는 모종의 시론 혹은 가치관을 함축하게 된다. 시집에 포함된 시들은 일인칭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서정시와 다르게 고백적이지 않다는 특징을 띤다. 킨의 시에는 주변부 사람들이 자주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가 주로 관심을 두는 곳은 시인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사회의 변방으로 내몰린 사람들로서 그중에는 대표적으로 흑인과 동성애자가 포함된다. 《펑크족》은 언어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다채롭다. 평론가 우(David Woo)는 시집에 대한 서평에서 킨이 “개인적, 정치적, 실험적, 일화적, 서정적” 양식들 사이를 유려하게 움직여 다닌다고 지적한다. 시집에서 다뤄지는 낙오자들은 각자의 구체성과 온기에서 다양한 언어 양식을 통해 인간성을 획득한다.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어떻게 한 편의 시에 함께 녹아들 수 있을까? 시는 일차적으로 언어 예술이다. 예술의 재미와 기쁨이 인간, 삶, 세상에 대한 도덕적 통찰과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 단단하고 사적(私的)인 삶의 세부가 어떻게 심오하고 공적(公的)인 관념과 어울릴 수 있을까? 존 킨의 시는 우리 주변의 지나치게 유아론적인 시들을 향하여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존 킨의 시에 관해 한국의 시인-독자에게 다음 질문을 건네본다.
세 편의 시 〈펑크족〉, 〈젊은 미국 아버지의 초상〉, 〈전야의 베시〉는 언어의 형식, 스타일, 호흡 등이 다르다.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효과적인지 세 편의 시를 비교하시오.
시 〈펑크족〉에서 화자는 어떤 인물인가? 시를 전체적으로 살피면서 화자의 성격이나 가치관 등을 구체적 세부를 근거로 논증하시오.
시 〈펑크족〉에는 히프노스와 타나토스가 시작, 중간, 끝에 등장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히프노스는 잠의 신 혹은 꿈의 신이고 타나토스는 의인화(擬人化)된 죽음을 뜻한다. 정신분석에서는 죽음의 충동을 타나토스로 표현하기도 한다. 화자는 이 두 가지를 머리맡과 발밑에 따로 둔다. 시작, 중간, 끝에 이르는 과정에서 화자는 두 가지 충동 혹은 욕망 사이에서 에너지를 얻고 있다. 히프노스와 타나토스가 시의 구성 혹은 전개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분석하시오.
시 〈젊은 미국 아버지의 초상〉에서 화자가 아버지에 대해 드러내는 태도를 분석하시오. 시를 전체적으로 살피면서 구체적 세부를 근거로 논리를 구성하시오.
인용문헌
John Keene. Punks: New & Selected Poems. The Song Cave,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