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1-3 심령이 가난한 자
1. 1-2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아온 무리들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심(cf. 출19:3 율법을 받기 위해 산 꼭대기에 오른 모세). 이때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분이 예수님이었음(요1:1). 율법을 계시 받고 이스라엘에게 전했던 모세였지만 모세 본인에게도 율법의 의도는 감추어져 있었음(갈3:23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율법 아래 매여 있음). 1,500년 전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던 예수께서 산에 올라 성경의 의도를 드러내심으로 성경을 오해하고 있던 유대인들과의 전면전(해석 논쟁)이 시작됨.
▶ 산상수훈(마5-7장)은 율법의 재해석임. 당시 유대인들의 성경 해석은 철저히 인간 중심이었음(마15:9). 그들에게 성경은 인간 행복과 구원을 위한 책이었음(신10:13, 레18:5 문자적 해석). 성경은 인간이 마음 먹기에 따라 능히 지킬 수 있는 책이었음(출19:7-8). 산상수훈은 이들의 이러한 생각을 뒤집어 놓는 도전장이었음(마5:20, cf. 갈3:10).
▶ 1-2절/ 산상수훈의 대상은 무리들이 아닌 제자들이었음. 사복음서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두 부류로 구별함. 무리와 제자들임. 본문에서도 이 둘이 명확히 구별됨.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오르심. 곧바로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나아올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제자들이 나아오자 입을 열어 가르치심. 즉 마5-7장의 산상수훈의 말씀은 무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닌 제자들을 향한 것이었음을 암시해주고 있음. 무리와 제자의 차이는 주님의 부르심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임. 주님은 자신이 부른 제자들에게 ‘들을 귀’를 주심. 주님은 들을 귀가 없는 자들을 향해 시간 낭비하지 않으심. 주님의 말씀이 들린다는 것은 내게 들을 귀가 주어졌기 때문임(마13:11). 이같이 천국은 법(행함)이 아닌 은혜(믿음)로 되는 나라임(롬6:14).
2. 3절/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신자(천국 백성, @의 언약 백성, 약속의 자녀들, 롬9:6-8)란 누구인가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존재함. 주님은 팔복(마5:3-12)으로 누가 천국 백성인지를 설명하심. 즉 팔복은 천국 백성은 누구인가에 대한 @의 기준임. 첫 번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임.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나라라고 선언하심. 이는 당시 유대들의 통념을 무너뜨리는 충격적 선언이었음.
- 당시 유대인들은 영적인 부요함(성경 지식과 경건함)을 지닌 자가 천국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음. 그래서 경건함을 포기하며 살았던 세리들은 천국과 상관 없는 자들로 취급 받았음. 그러나 주님은 의가 없는 그러한 자들이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임을 선언하심(눅18:14). 주님의 설교를 환영했던 자들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었음. 경건함을 자신의 자산으로 여기고 있던 사람들(바리새인)에게 이러한 설교를 하는 예수는 귀신들린 자로 보일 수 밖에 없었음(막3:22).
- 법 아래 신앙생활 하고 있던 유대인에게 천국은 @의 말씀대로 행한 경건한 자들에게 허락되는 나라였음.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는 일(요5:39)과 성경 말씀을 따라 사는 경건 생활에 힘썼던 것임(빌3:5-6). 그런데 주님은 천국을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나라라고 선언하심. 무엇을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주어진다고 하신 것임.
▶ 심령이 가난한 자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걸까? 심령이 가난한 자란 의가 없는 자신의 실상에 눈이 열린 자를 말함. 이것은 오직 성령의 일하심으로 되어지는 일임.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자신의 악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함. 선과 악의 기준이 된 인간은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위가 선임. 이러한 인간이 @과 동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창6:5, 롬8:7-8). 이러한 가운데 자신에게 선이 없음을 보는 자들이 등장함. 이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임. 이는 @의 은혜로 되어지는 일임.
- 복음과 종교는 전혀 다른 세계임. 종교의 세계는 인간이 무엇을 해서 복을 쟁취하는 구도임(cf. 불교, 이슬람: 공덕 쌓기, ‘자기 의’). 그러나 복음의 세계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이 하나도 없음. 모두 @이 하심. @이 일방적으로 계획하시고 이를 이루시고 끝을 내심. 복음의 세계에선 우리는 관망자일뿐임. 인간의 행위가 아닌 @의 행위만 드러날 뿐임. 종교(법)에는 인간의 의만 언급됨(무수한 영웅들). 그러나 복음에는 @의 의만이 언급됨. 이것이 믿음의 세계임(롬1:17).
-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음(요16:7). 그 이유는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자신이 @의 진노 아래 놓인 자라는 사실을 알 수 없기 때문임. 성령을 받으면 @이 보시는 관점으로 자신을 보게 됨(요16:8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됨). 세상이 알고 있는 선악 개념은 인간 중심의 윤리 도덕의 틀 안에 갇혀 있음.
- 사람들은 자신이 복 받을 만한 선한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음. @의 진노의 자식이라는 영적 진리에 맹인들임. @은 이 세상을 미워하는 것이 아닌 육신이 된 인간(엡2:2-3)을 미워하심. 어느 누구와 원수가 되면 그가 하는 모든 것이 우리 눈에 밉상이듯, 마음이 부패한 인간 즉 육신이 된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에겐 악임(창6:5-7). 이러한 인간의 영적 실상에 눈이 열리고 자신이 @의 진노의 자식임을 보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임. 이들이 성경에서 @의 음성을 듣는 자들임.
-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음(롬3:10). 이러한 세상에 의인이 등장하심. 그가 바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의 아들 예수임. 성경은 죄와 상관 없는 유일한 의인 예수 한 분을 증거함. 예수님에겐 자아(self)가 없었음. 즉 자기 기쁨을 위한 삶을 사신 적이 없음. 태어난 후 한평생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자기 행복을 꿈꾸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러한 예수의 삶은 너무나 이질적임(히5:7). 예수님의 삶은 죄를 이기신 삶이었음. 이는 우리가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님. 어느 인간도 죄를 이길 수 없음. 죄를 이기는 유일한 길은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길 하나뿐임. 신앙생활이란 말씀을 배워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아는 지식 안에서 예수의 옷을 입는 것을 말함. 신앙생활이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를 알아가며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을 말함.
- 사도 바울은 교회를 향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함(빌2:5-8). 심령이 가난한 자의 표본이 예수이기 때문임. 우리 안에 거하시고 계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 안에 이러한 예수의 마음을 품게 하는 일임. 모두 높아진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라고 하심.
▶ 주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 앉으심. 자기에게 나아오는 제자들을 보시고 영의 말씀을 선포하심. 이때 그 누구도 주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함. 심령이 가난한 자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천국이 그들의 것인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함.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 속에 뿌려진 말씀이 알아서 생명의 일을 이루어감. 때가 되어 성령이 임하자 마음에 기록되어 있는 영의 말씀이 열매를 맺히게 됨(마13:8 좋은 땅).
- 심령이 가난한 자란 @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열린 자를 말함(사6:5, 눅5:8, 행9:17-18). 이는 성령으로만 되어지는 일임. 이들이 예수를 주로 영접하게 되는 자들임(고전12:3). 자신이 @의 진노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성경이 보이기 시작함. 수수께끼로 가득한 성경에 흐르는 한 줄기의 빛을 보게 됨. 그 전까지는 자기 자신을 언제나 남보다 더 나은 자라고 생각하며 살아감.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순간 내게 남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보게 됨. 삶의 어떤 처지에서도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지지? 라는 원망이나 분노가 그치게 됨. 왜냐하면 그러한 삶이 내게 마땅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임.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이 세상 모든 일은 @의 은혜의 작품이고 모든 것이 @의 은혜의 선물임. 이 복이 우리에게 허락되었음. 그래서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