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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제(漢宣帝)는 왜 황후의 구족을 멸하였는가?
곽부인은 이 여인의 실제 성명이 아니다. 알려진 것은 이 여인의 이름이 "현(顯)"이라는 것뿐이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그녀가 한선제때의 권신(權臣) 곽광(霍光)의 부인이었으므로 "곽부인"이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곽부인은 원래 신분이 미천했고, 곽광의 정실부인이 시집올 때 따라온 시녀였다. 곽광을 모시면서 같이 잠자리를 하게 되고, 정실부인이 죽게 되자, 곽광은 그녀를 정실로 삼아서 곽부인이 된 것이다.
곽부인은 야심이 컸다. 항상 그녀와 곽광의 사이에 낳은 딸인 곽성군(霍成君)을 황후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황후 허평군(許平君)은 한선제의 조강지처였고, 한선제와 허평군은 아주 사랑이 깊었으며, 한선제가 황후를 폐위시킬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한선제와 허평군의 혼인에 대하여 얘기하자면, 한무제 말년의 "무고안(巫蠱案, 무고사건)"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무고안"은 아주 유명하면서도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한무제때의 정치국면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사건이다. "무고안"의 발단은 경성의 대협인 주안세(朱安世)가 실명으로 승상인 공손하(公孫河)의 아들이자 관직이 태복(太僕)에 이르렀던 공손경성(公孫敬聲)이 양석공주(陽石公主)와 사통하였고, 사람을 시켜 무술(巫術)로 한무제를 저주하였으며, 한무제가 자주 지나다니는 감천궁의 길아래 허수아비를 묻어놓았으며, 저주하는 말이 아주 악독했다고 고발한데서부터 시작한다. 양석공주는 한무제의 황후인 위자부(衛子夫)이 딸이다.
사건 발생후, 공손하 부자는 멸족되었고, 양석공주와 동모자매간인 제읍공주(諸邑公主)는 모두 처형되었다. 한무제는 간사한 소인 강충(江充)을 보내어 이 사건을 처리하게 하였다. 강충은 원래 태자인 유거(劉據)와 알력이 있었으며, 이 기회를 틈타 태자를 모함하고자 했다 강충은 궁중에 고(蠱)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하면서 오랑캐무당을 시켜 땅을 파보게 했고, 태자의 동궁까지 파보게 되었다. 강충과 오랑캐무당은 태자궁에 우인(偶人)을 묻어놓은 다음, 오랑캐무당은 술을 땅에 뿌려 범죄현장을 날조했다. 태자궁에서 우인을 파내게 되자, 태자는 무척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선발제인(先發制人, 먼저 손을 써서 상대방을 제압한다)하여, 가짜조서를 만들어 강충이 모반했다고 하면서 강충을 죽여버리고, 오랑캐무당은 상림원에서 불태워죽여버린다. 승상인 유굴모는 병사를 이끌고 태자의 군대와 장안성에서 전투를 벌인다. 번화한 도성은 피로 물들었다.
태자 유거는 패배하고, 도망하던 도중에 피살된다. 황후인 위자부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태자비, 유거의 아들, 며느리도 모두 피살된다. 이때, 미래의 한선제인 유거의 손자 유병기(劉病己)는 아직 강보에 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보에 쌓인 유병기도 감옥에 들어간다. 감옥관리를 맡았던 정위감 병길(邴吉)은 그를 가련하게 여겨서 아이를 낳은 여자죄수들로 하여금 그에게 돌아가며 젖을 먹여주게 하여, 목숨을 겨우 건질 수 있었다.
4년후, 한무제의 병이 깊어졌다. 한무제는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하여 신선을 찾아다녔는데, 한 자칭 신선은 장안성의 감옥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하여 한무제는 장안성의 감옥에 있는 사람을 죄의 경중을 불문하고 모두 죽여버리라고 명령한다. 소위 천자의 기운이라는 것은 유병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명령에 대하여 병길은 명령에 따르지 않아, 막 5살이 된 유병기는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된다. 한무제가 임종시에, 강충이 태자를 모함한 음모가 드러났다. 한무제는 후화막급이었고, 태자 유거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었으며, 태자가 피살된 곳에 "사자궁(思子宮, 아들을 그리워하는 궁)"과 "귀래망사지대(歸來望思之臺, 돌아오기를 바라보며 기다리는 대)"를 만들어, 억울하게 죽은 태자를 기렸고, 생전에 태자의 각종 행적을 높이 평가했으며, 죄기조(罪己詔, 황제가 스스로에게 죄가 있음을 밝히는 조서)를 남겨, 자신이 늙어서 멍청했으며, 간사한 자에 속았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유병기는 이때 비로소 감옥에서 나오게 된다.
출옥한 후, 병길은 어린 유병기를 자신의 외할머니 집에 보내어 기르게 한다. 오래지 않아, 조정에서는 조서가 내려왔고, 유병기의 황실신분이 회복시켜주고, 후궁비빈들이 거주하는 액정(掖庭)에서 거두어 기르도록 하였다. 마침 액정령인 장하(張賀)는 원래 태자 유거의 부하였다. 옛날의 은혜를 생각하고, 유거의 유일하게 남겨진 손자인 유병기를 잘 보살펴 주었다. 심지어 자신의 주머닛돈을 털어서 그에게 책을 사주어 읽게 하였다. 유병기가 18세가 되었을 때, 강하는 그의 혼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장하의 원래 뜻은 자신의 손녀를 유병기에게 시집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하의 동생인 장안세(張安世)가 극력 반대했다. 장안세는 당시 우장군으로 곽광과 함께 보정대신을 맡고 있었는데, 불길한 황가후손을 자기의 가족으로 맞이하였다가 쓸데없는 일에 연루될까봐 걱정한 것이다. 장하는 어쩔 수 없이 손녀를 시집보내려는 생각을 포기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시의 부하인 허광한(許廣漢)에게 딸이 있는데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허광한을 불러 술을 먹으면서, 허광한의 딸을 유병기에게 시집보내달라고 청하게 된다.
허광한은 아주 고생운을 타고난 사람이다. 젊었을 때는 창읍왕 유하(劉賀)의 낭관(郎官)을 지냈는데, 한번은 한무제를 모시고 사냥을 나갔을 때, 다른 낭관의 안장을 잘못 집어서 자기의 말에 얹은 적이 있었다.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어 도둑으로 체포되었다. 황제를 따라나간 길에서 도둑질을 하는 것은 적은 죄가 아니고 아주 중대한 범죄였다. 그리하여 사형을 받게 된다. 다행히 한무제의 마음이 너그러워 사형을 궁형(宮刑)으로 감해주었다. 궁형을 받고는 환관이 되었다. 한무제가 죽은 후에, 한소제(漢昭帝) 유불릉(劉弗陵)이 즉위하였는데, 보정대신 상관걸(上官傑)이 황제를 폐위시키려는 음모가 발각되었고, 그는 피살된다. 허광한은 이때도 재수가 없었다. 상관걸이 모반할때, 허광한은 범인을 포박하는 밧줄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그 밧줄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다른 사람이 찾아내게 된다. 상사는 허광한이 그런 업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의 관직을 파면시키고, 그를 액정의 하급관리로 보내게 된다. 마침 그는 유병기와 같은 관사에 거주하게 된다.
허광한의 딸은 허평군이었는데, 당시 14,5살이었다. 원래 이미 내자령(內者令, 환관)인 구후(歐侯)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침 혼인을 하려는데, 구후의 아들이 급사를 하고 만 것이다. 허평군의 모친은 그녀의 명이 질겨 남편을 죽인 것으로 생각하고, 관상을 보는 사람에게 딸의 관상을 보게 했다. 관상쟁이는 그녀를 차근차근 살펴보더니, 허평군이 나중에 아주 귀하게 될 것이라고 축하를 해주었다. 구후의 아들은 자신이 죽음으로써 허광평에게 무궁한 앞날이 열리게 해준 것이다.
장하는 허광한의 직접 상사였고, 그가 혼인 얘기를 꺼내자, 허광한으로서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유병기는 어째되었던 황실후손이 아닌가. 속담에 말라죽은 낙타도 말보다 크다는 말이 있는데...허광한은 그 자리에서 응락한다. 집에 돌아온 후, 부인은 딸을 몰락한 황손에게 시집보내겠다는 말을 듣고는 매우 화를 낸다. 그녀는 딸이 부귀를 누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허광한과 한바탕 싸우게 된다. 장하가 다시 집을 찾아와서 혼인을 요청하자, 어쩔 수 없이, 딸을 유병기에게 시집보내게 된다.
한소제 유불릉이 죽은 후에 자식을 두지 못했다. 곽광의 주재하에, 창읍왕 유하를 황제로 올렸다. 그런데, 유하는 황음무도하여, 즉위한지 27일만에 곽광은 상관태후에게 그를 폐위시키고, 한무제의 적증손인 유병기를 황제로 올리자고 건의한다. 상관태후는 곽광의 외손녀인데, 어찌 외할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겠는가? 유병기는 이렇게 하여 하늘에서 떨어진 떡을 받아먹게 된다. 이름도 유순(劉詢)으로 개명하고, 등극하니 그가 바로 한선제(漢宣帝)이다.
바로 이런 배경하에서, 곽부인은 딸인 곽성군을 황후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이다.
한선제가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아, 황후를 책봉하고자 준비했다. 여러 신하들은 곽광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곽성군을 황후로 추천했다. 곽광은 한선제를 등극시키는데 최대공신이며, 권력이 조야에 따를 자가 없었다. 한선제는 그 자리에서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한선제는 조서를 내려, 옛날에 썼던 검을 찾아오게 한다. 여러 신하들은 이 조서를 보고는 즉시 한선제의 뜻을 알아차린다. 옛물건을 아끼는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하여 말을 바꾸어 허평군을 황후로 삼아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그리하여, 허평군은 황후가 된 것이다. 허평군의 모친은 옛날 자신이 눈은 있어도 눈알이 없어 귀인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탓했을 것이다.
한선제와 허평군은 이전에 이미 아들 하나를 낳았었고, 이름은 유석(劉奭)이라고 했다. 이 아들이 나중의 한원제(漢元帝)이다. "석"은 그 의미가 무성하다는 의미이다. 황후로 책봉된 다음 해에 허평군은 다시 회임을 하였다. 회임기간중에 부인병을 얻었는데, 여태의(女太醫)인 순우연(淳于衍)이 명을 받아 입궁하여 병을 치료했다. 순우연은 곽부인과 교분이 깊었고, 순우연의 남편은 이때 액정호위였으며, 매일 야근을 섰고, 하루빨리 승진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부인을 곽부인에게 보내어 관직을 부탁하도록 하였었다.
순우연으로부터 이런 소식을 들은 곽부인은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녀는 주위사람을 모두 물리친 후에 순우연에게, "네가 한 가지만 나를 도와주면, 네 남편에게 반드시 보답해주겠다"고 한다.
순우연: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곽부인: "나의 남편이 가장 예뻐하는 딸이 있는데, 그녀를 고귀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이 일은 네 도움이 필요하다"
순우연: "저는 겨우 태의에 불과한데,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겠습니까?"
곽부인: "여자들이 자식을 낳다보면, 죽는 경우가 많다. 만일 허황후에게 독약을 먹여서 죽여준다면, 황후는 내 딸이 될 것이다. 내 남편이 있는 한 아무도 너를 귀찮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순우연: "매번 약을 올릴 때마다 미리 맛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독약을 넣기는 어렵습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곽부인: "독을 넣을지 말지는 모두 네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니냐.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네가 독을 넣기를 원한다면, 언제든지 기회는 있을 것이다. 내 남편이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으니, 일을 이루게 되면, 누가 그의 칼날을 피할 수 있겠는가? 경중과 완급이 있느니, 잘 생각해보아라."
순우연은 곽부인의 위협에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오래 생각한 후에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어, 순우연이 허황후에게 약을 내릴 때, 부자(附子)를 갈아넣었따. 부자는 독이 있다. 고대에 중증을 치료할 때 쓰는 구명약이었다. 허황후는 이 약을 마신 후, 바로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온몸이 마비되고, 호흡곤란이 왔으며, 손발이 쪼그라들었으며, 얼마못가 죽고 말았다.
황후가 기이하게 죽자, 대신들이 상소를 올려 탄핵했다. 황후를 치료하던 모든 태의는 수감되었다. 곽부인인 조급해 졌다. 순우연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실토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곽광에게 털어놓게 된다. 곽광은 그녀의 말을 듣고 대노했고, 곽부인의 간큰 행동을 질책했으며, 곽부인을 고발해서 수감시킬까도 생각했지만, 어쨌든 자기의 처리므로 할 수 없이 순우연이 풀려나게 해준다.
곽성군은 순조롭게 황후가 되었다.
3년후, 곽광이 사망한다. 황제보다 권력이 컸던 권신을 한선제는 아주 두려워했었다. 곽광과 함께 나들이를 나갈 때면, 한선제는 항상 등에 칼날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곽광이 죽었으므로, 한선제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 것이다. 이어 그는 허황후의 아들인 유석을 태자로 올린다. 이 소식을 듣자, 곽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밥도 먹을 수 없고, 피를 토할 정도였다. 그녀는 딸인 곽황후에게 "유석은 유순이 아직 황제가 되지도 않았을 때 낳은 아들이지 않느냐. 민간의 자식이고, 신분이 천한데, 어찌 태자가 될 수 있겠는가? 네가 아들을 낳더라도 겨우 일개 왕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아니냐?" 딸에게 순우연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서, 기회를 보아 태자에게 독을 쓰라고 얘기한다. 곽성군은 원래 자기주장이 없던 여인이다. 모든 것은 어미의 말에 따랐다. 여러번 태자를 식사에 청했다. 그러나, 태자의 보모는 경계심이 아주 강해서, 식사전에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다. 그리하여, 독약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서도 손을 쓸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곽광은 죽었지만, 조정의 모든 주요부문은 곽씨가족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곽광의 아들인 곽우(霍禹)와 조카손자인 곽산(霍山), 곽운(霍雲)은 모두 요직에 있었다. 이들은 조금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했고, 매일 먹고 마시고 놀면서, 조회를 열 때도 셋은 자주 산에서 사냥을 하면서, 조회에는 가노(家奴)를 보내어 대신 참가시켰다. 이처럼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했지만, 다른 신하들이 그들을 질책하지 못했따.
곽부인은 더욱 도를 넘었다. 원래 남편이 죽었으면 조금은 조심해야 할텐데, 그녀는 딸이 황후라는 것을 빌미로 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궁중에 출입했고, 궁중을 자기집의 정원처럼 행동했다. 이뿐아니라, 곽부인은 과부의 적막을 견디지 못하고, 가노인 풍자도와 놀아나게 된다.
한선제는 점차 곽씨가족의 권력을 약화시킨다. 마침 이때 곽부인이 순우연을 매수하여 허황후를 죽인 일이 소문나게 되었다. 곽부인은 여인의 몸으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곽우, 곽산, 곽운과 밀모하여 황제를 폐하고 곽우를 새황제를 옹립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밀모는 누설되고, 한선제는 곽씨가족의 세력을 배제시킬 구실을 찾지 못했었는데, 마침 이것은 좋은 구실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망타진하게 된다. 곽산, 곽운은 자살하고, 곽우튼 참형에 처해진다. 곽부인과 딸들은 시장에서 사형에 처해진다. 연좌되어 주살된 자가 수천집에 이르렀다. 곽성군은 황후가 된지 5년만에 폐위되고, 12년후에 자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