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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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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ktusjye/221323645167
이번 여정은 경기도 광주, 3박 4일 이다.
서울에서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만
내게는 낯선 곳과 다르지않다.
마침 인근에 사는 동료가 있어
도움을 받아 산행코스 몇 개를 잡아본다.
2호선, 3호선, 신분당선, 경강선,
네 번 전철을 갈아타고 '경기광주역'에 도착,
버스로 환승하여 숙소에 짐을 풀고 길을 나선다.
버스 차창으로 지나는 경치를 보며
서울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산이 첩첩 둘러쌓여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다.
하차하는 곳은 성남시 상대원동과 광주시 목현동을 연결하는
해발 300미터 상 위치하는 '이배재고개' 정상이다.
지방도 338호선을 개통하며 단절된 산길을
2015년 등산육교를 설치하여 망덕산과 영장산을 연결하였다.
예전 경상도와 충청도 선비들이 과거보러 가는 길,
도성이 보이는 이 고개에서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임금이 있는 한양을 향해 한 번 절하고,
부모님 계신 고향을 향해 다시 한 번 절하였다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내린 곳에서 등산육교가 보인다.
맞은 편이 영장산으로 가는 길,
이번 여정에서 다른 날 오를 계획을 해두었다.
내린 곳에서 마주하는 계단으로 올라서면
육교를 건너지 않고 망덕산으로 오르는 들머리가 된다.
하지만 계획이란, 예정이란 어긋날 수도 있는 법,
혹시나 못 올지 모른다는 마음에 길을 건넌다.
'남한산성 등산 안내도'다.
영장산 방향 계단을 올라
등산육교를 건너기 전, 망덕산 들머리를 담는다.
들머리가 해발 삼백미터에서 시작되지만
가파른 길을 올라야한다.
하지만 곧 길은 능선에 닿으며 완만한 오르내림을 보인다.
30도가 넘는 무더위 속이지만
숲그늘에 들어서면 늘 쾌적하다는 느낌이다.
물론 가만히 앉아 쉰다면 모르겠지만
오르막과 재게 걷는 발놀림은 뇌로 상황을 전달하고
체온유지를 위해 바로 땀을 배출시킨다.
이내 초파리가 따라와 눈주위 얼굴을 맴돈다.
이번 산행에 새로운 장비를 하나 준비했다.
바로 부채다.
점심시간에 사무실을 나서면 식당홍보를 위해
공짜로 나눠주는 부채를 챙겨왔다.
최소한의 손놀림으로 시원한 바람이 일고
초파리는 달려들 틈새도 찾을수 없다.
처음 들어서는 길은 설렘과 함께
걱정거리를 하나 안긴다.
길 상태다,
수풀을 헤치고 나가는 길이라면
반바지 차림에 다리가 쓸릴까, 해충이나 뱀도 걱정이다.
걷는 내내 '성남누리길' 이정표가 함께하는 이 길은
숲이 짙고 길은 대체적으로 넓고 편안하다.
짙은 숲 사이로 도심이 언뜻 모습을 드러낸다.
오가는 사람들이 던져놓은 듯,
돌무지의 마무리는 뾰족한 돌 하나 세워 돌탑을 이루었다.
등산로를 정비할 때 쓰려는 듯
목자재가 보인다.
이름없는 봉우리 한 곳에 쉼터가 있다.
태양에 고스란히 노출된 한낮이라 쓸모없다.
대개 참나무 종류가 성긴 숲을 이루었다.
가을이면 도토리를 줍는 사람들이 많겠다.
목계단과 목책작업, 등산로를 정비하고있다.
뜨거운 날, 한낮이지만 숲그늘이라
작업하는 손길이 분주하다.
지난 가을, 혹은 더 예전 떨군 잎들이
발길에, 비바람에 스러져 흙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흙과 갈잎이 닮았다.
등산로 가운데 참나무가 용케도 살아남았다.
더 낮은 곳에 가지를 드리웠다면,
어쩌면 잘려나가지 않았었을까?
경사진 곳에 목책 버팀목을 박으려고
군데군데 구덩이를 파 놓았다.
해발 500.3미터 망덕산 정상이다.
해발 534.7미터 검단산 가는 길은
대부분 능선으로 이어져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다.
대개 완만한 경사를 보인다.
성남시 경계 주요 명산을 둘러볼 수 있는 숲길,
'성남누비길'은 7개 구간 총 길이 62.1㎞ 에 이른다..
남한산성의 방어를 위해 설치한
봉암성, 한봉성과 함께 3개의 외성 중 하나인 신남성,
동, 서 두 돈대의 하나인 동돈대가 있던 곳이다.
돈대란 성을 쌓을 여건은 안되지만
전략적 요충지에 설치하여 적진의 동태를 파악하고
적의 침입시 1차 방어역할을 하는 소규모 군사시설이다.
하지만 자세한 설명은 없어
유적이 어디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없다.
마주오는 등산객이 편안한 차림에 맨발이다.
맨발걷기가 건강에 좋다는 것을 알고 있고,
예전에는 가끔 걷기도 했지만
아마도 당분간은 여건 때문에 힘들지 않을까 싶다.
등산을 시작하는 초입부터 툭툭 튀는 소리가 난데없다.
마치 전쟁통에 떨어지는 포탄처럼
가늠할수 없는 곳에 작은 소리와 함께
까만 물체가 이리저리 럭비공처럼 잽싸게 튄다.
조그마한 귀뚜라미 같은 곤충이 어찌나 빠른지
사진에 담고 싶어도 겨를을 주지 않는다.
길가 한쪽에 엎드린 녀석이 있어
도망가도 할수없지, 생각하며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다행히 웅크리고 있어 사진에 담았다.
우리나라 고유종은 아닌듯 한데 정체를 알수 없다.
바닥에 깔린 야자매트가
얼마전 작업을 끝낸듯 보풀이 무성하다.
멀리 어설프게 가림막을 얹은 가건물이 보인다.
'만수천약수터'다.
500미리리터 생수 한 병을 준비했지만
아껴먹을 요량으로 아직 뚜껑도 따지 않았다.
돌틈에 박힌 호스로 물이 흘러내리고
위에 플라스틱 바가지가 걸려있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수질검사표가 없다.
물어볼 사람도 보이지않아
바가지를 빼내 물을 받아 두 바가지 양껏 들이킨다.
물이 시원하니 갈증이 단번에 가신다.
약수터를 돌아 '검단산'을 찾아간다.
이정표목 하얀 바탕에
'우리 민족의 상징 소나무살리기'라는 문구가 와닿는다.
갈림길이 나온다.
하지만 곧 다시 만난다.
제법 넓은 길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뒷쪽으로 기계음이 들린다.
산책로 정비작업에 소요되는 자재를 나르던
사륜바이크를 보았는데 그 소리로 짐작된다.
제 순서를 기다리는 등받이 있는 벤취가
등산로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자대배치에 대한 궁금증에 웅성거리는 신병같은 모습이다.
검단산 방면으로 왼쪽 방향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올라온 거리로는 더 가야할듯 한데 갈림길이 나온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오르막을 택하는지라
계단을 올라간다.
헬기장이 있는 넓은 개활지에 정상석이 서있다.
검단산은 태백산맥 철령 부근에서 분기하여
서울 부근에 이르는 광주산맥의 지맥이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해발 534.7미터 높이 산이다.
예로부터 신성한 산이라 여겨 그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현재 정상부에는 통신사 중계시설이 자리잡고 있으며,
군 통신부대가 중계소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정상표지석이 있는 이곳은 최정상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정상석에 높이가 없다.
봉고트럭이 주차되어있고
등산로 정비에 사용되는 야자매트가 야적되어있다.
정상석이 있는 곳을 나서니
공군부대 들어가는 입구가 바로 앞이다.
승용차 한 대가 서있는데
녹음된 경고방송이 흘러 나온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운전자는 우왕좌왕이고
방송은 계속된다.
그 왼쪽 오르막으로 포장도로가 보인다.
통신사 중계탑이 있는 정상부 가는 길이다.
별다른 통제가 없어 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이중철책 뒤로 통신 중계탑이
철망을 감고 자란 덩쿨식물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 오른쪽으로는
사람이 상주하는 것으로 짐작되는 건물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는 길이 있지만
가보지 않아도 알 듯 한 광경,
굳게 잠긴 철문과 경비실이 있을 것이다.
그냥 돌아나온다.
같은 조건이라면 흙길, 산길을 걷겠지만
주위 이정표도, 스마트폰 지도에도 선택의 여지가 없어
포장도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 내려간다.
'한양 삼십리 누리길' 이정표가 눈길을 끈다.
광주 목현동에서 남한산성 남문 성벽까지 총 12킬로미터(30리)길은
조선시대 관원들이 군사정보를 전달하거나 선비들의 과거 길로
병자호란 당시 청군과 47일간 결전을 벌였던 인조임금의 고뇌를 재현하였다.
2014년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며
역사와 문화를 알리고자 국토부에서 공모, 조성한 길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과 47일간 결전을 벌였던 인조임금의 고뇌를 재현'하였다는
'한양 삼십리 누리길' 이정표의 궁금증은
참으로 어이없이 해소된다.
포장도로 두 곳에 조성된 소규모 쌈지공원,
입간판 형태로 세워진 안내문에 당시 실록의 기록을 옮겨놓았다.
1637년 1월 30일, 청나라에 항전하던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 이르러
아홉 단 높이 위에 앉은 청 태종 아래 무릎을 꿇고
세 번 큰 절을 올리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였다.
우리는 세 번 절할때 마다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고 배웠는데
실록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고 한다.
건너 산 능선 아래
남한산성 옹성 성벽 두 곳이 보인다.
포장도로를 한참 내려오니 갈림길이 나온다.
이정표에 '지화문'은 도로를 따라가라지만
왼쪽 산길로 접어든다.
아스팔트슁글 지붕을 인 정자가 나오고
조금 더 지나가니 엉성한 철망 위로 성벽이 보인다.
유적발굴조사를 위해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문이
내게는 경비가 서있는 만큼 엄하다.
곳곳 축 처진 철망 넘기는 여반장이다.
왼쪽 경사는 아래로 급하고
오른쪽도 위로 급한 경사면이다.
그 위로 다시 성벽이 둘러져있다.
외성을 따라간다.
남한산성이 백제 온조왕 때 도성이었다는 견해가 있지만
발굴조사 결과 백제 성곽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통일신라 673년(문무왕 13),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
'한산주' 또는 '한주'는 신라의 광역 행정구역인 9주 5소경의 한 주로,
주치가 백제 한성 근처인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로 추정된다.
2005년, 제4암문과 수구터 주변 발굴 조사시
조선시대 성벽 안쪽에서 '주장성' 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확인되어,
신라 '주장성'의 옛터를 따라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고려사』에 몽고군이 침입하였을 때
‘광주성(廣州城)’으로 피하여 항전하였다는 것 등이 전한다.
산성 안에서 고려시대 건물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광주성'은 바로 '남한산성'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후금의 위협과 이괄의 난을 겪은 뒤
인조 2년에 지금처럼 다시 고쳐 쌓기 시작했다.
원성에는 동·서·남·북 모두 4곳의 성문이 있다.
암문도 원성 11곳, 봉암성 4곳, 한봉성 1곳 등 16곳이 설치되었다
여장은 처음에 벽돌로 쌓았으나
영조 20년, 에 벽돌을 제거하고서 기와로 덮었으며
정조 3년 다시 전돌로 바꾸었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2258>
'남문'인 '지화문'이다.
정조 3년, 성곽을 보수하며 '지화문'이라 명명하였다.
사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한양을 나와
남한산성으로 들어서면서 이용했던 문이기도 하다.
'성남누비길 2구간, 검단산길' 출입구다.
'함께 더불어 누빌수 있는 성남시의 아름다운 숲길'을
의미한다는 설명이다.
지화문 앞 좌우로 성남시에서 지정한 보호수,
수령이 오백년 넘은 것을 포함하여 느티나무 네 그루가 서있다.
성곽방어를 위한 시각적 차폐를 위해서,
또는 사람의 왕래가 많고 경사가 심하여
토양유실을 막기위해 식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 옛길 안내도'다.
지화문 문루에 오른다.
보호수가 있는 성문 앞 조망이다
문루를 돌아나와 내성 성곽을 따라 걷는다.
안쪽 숲그늘에 가린 좋은 길도 있지만
고대하던 남한산성 순성을 성곽과 함께하고 싶었다.
폭염이 예보된 날,
덕분에 햇살에 노출되기는 했지만...
여장이 산허리를 따라 올라간다.
미세먼지 예보가 나쁘지는 않았는데
도심쪽 전망이 썩 좋지않다.
잠시 뒤돌아 보니
검단산을 지나며 보았던 통신탑이 산너머 보인다.
성곽을 따라 얼마를 더 올라가니
웅크린 앞산 너머 통신탑이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옅은 안개에 가린 부연 도심이
무더운 날 애써 찾아온 이에게 야속하다.
곧게 뻗은 도로가 산밑으로 모습을 감춘다
높이 8미터라는 성벽 바깥이다.
이 곳에도 외곽 순성길이 이어지는지
소로가 끊이지 않고 따라온다.
안쪽으로 무심하게 던지듯 쌓은 돌더미 위에
누군가 돌탑을 세워놓았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길이 능선따라 가파르게 올라간다.
거대한 구름이 무리를 이뤄
따가운 햇살을 잠시라도 삼켜주면 좋겠다.
가파른 경사위로 조성된 성 안,
짙게 드리운 나무그늘에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트인 성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숲그늘에서는 무더위를 충분히 날려버릴 정도다.
아마도 그 훌륭한 피서법을 아는 사람들이
그늘 아래 벤취에서, 혹은 돗자리에서 오수를 즐기거나
나름대로 움직임을 최소화한채 상념에 빠져있다.
지형을 따라 오르거나 내린 허연 성체가
손으로 잡아끌면 끈처럼 딸려올듯 하다.
조금 높은 곳에 정자가 보인다.
언뜻 보니 현판이 없고 안내도에 별다른 소개가 없어
발치에서 사진으로만 담는다.
여장쪽으로 팔을 내밀듯
가지를 뻗은 소나무가 신비스럽다.
근대화 이전 생활연료는 나무가 대부분 이었는데
그로 인해 우리 산하 대부분이 헐벗었었다.
성 안쪽으로는 소나무가 잘 보존되어있다.
산성 내 주민들이 뜻을 모아 산림감시원을 두고
도벌을 막아 보호한 덕분이다.
산성 내 숲을 보호하고자 주민들이 결성한 '금림조합'이
90년 가까이 활동해온 결과다.
선출한 산림감시원 50명을 6명씩 교대로 활동하게 했는데
극빈자 계층에서 선발하여 빈민구제에도 도움이 되었다 한다.
이러한 활동은 2016년 까지 계속되었다는 설명이다.
내성 성곽길과 성곽 옆으로 난 길이 만난다.
총 열여섯 곳에 설치된 암문 중
'제 6 암문'으로 성을 나서 외성을 사진에 담는다.
노인 한 분이 수어장대로 가는 입구에서
'아이스깨끼'를 팔고있다.
'아이스깨끼 1,500원'이라고 적어 붙인
스티로폼 아이스박스에는 하드가 가득하다.
산성길을 걸으면서 그 광경을 지나친 다른 노인 한 분이
다시 돌아오는 길인지,
"많이 파셨어요?" 인사를 건넨다.
"그럭 저럭요." 대답에,
"하나만 주세요." 하신다.
"내가 원래 찬 걸 잘 못먹는데
하나 팔아드릴려구요."
노인 어른의 따스한 마음쓰심이 훈훈하다.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사를 지휘, 명령하도록
성의 높은 곳에 지은 건축물을 '장대'라 한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장대 다섯 곳 중 서쪽에 있으며
처음 건립할 당시 단층누각으로 지어 '서장대' 라 하였다.
영조 27년(1751) 2층 누각을 증축하며
내편은 '무망루', 외편은 '수어장대'라 명명하였다.
이 수어장대는 인조14년(1636),
병자호란때 인조가 친히 수성군을 지휘하며
청군과 45일 간 대치, 항전하던 곳이다.
다섯 개 중 현존하는 유일한 장대다.
수어장대 오른편 전각 안쪽에
'무망루' 편액이 걸려있다.
원래 수어장대를 2층으로 증축하며
2층 누각 내편에 걸려있던 현판을
1989년 전각을 새로 지어 일반인이 관람할수 있게 하였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수모와
볼모로 잡혀갔다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영조가 이름 지은 것이다.
전각 오른쪽에 기념비와 전나무가 한 그루 보인다.
이승만대통령 방문 기념으로 식수하였다는 기념비다.
수어장대로 들어서는 입구,
굳게 닫힌 문 뒤로 '청령당'이라는 서당이 있다.
이곳에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동남쪽 부분 책임을 맡은 '이회'는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내 공사를 마치지 못하였다는 모함을 받아 처형당한다.
하지만 강직한 성품을 아는 이회의 처첩은
남편의 성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을 다니며
축성자금을 마련해 돌아오는 길에 비보를 듣고 강물에 투신한다.
후에 그의 무고함이 밝혀지고
서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이회'와 처첩의 넋을 달래게 했다.
수어장대를 들어서는 입구 맞은편
담에 맞물린 바위가 보인다.
'수어장대'라는 글씨가 새겨져있다.
이 바위를 '매바위'라고 부른다는데
여기에는 전해지는 얘기가 있다.
'청량당'과 이어지는 전설이다.
남한산성 축성 책임을 맡은 광주유수 이서는
이회와 승려 벽암에게 성을 나누어 쌓게 하였다.
북쪽 성의 축조를 맡은 벽암은 일을 순조롭게 진행시켜
기일 안에 축성을 끝내고 공사비를 남기기까지 하였다.
이회는 세심하고 견고하게 성을 쌓다보니
기일 안에 공사를 끝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공사비가 부족해 사재를 털어 넣기까지 하였다.
공사가 지연되자 이회가 게으르고 무능하며
주색을 탐하는데 공사비를 낭비하였다는 소문이 났다.
이 일은 조정에까지 알려져
그를 문책하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이회는 광주유수에게 잡혀와 문책을 당하게 되어
사실대로 고하였지만 결국 참수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회의 목이 잘려 땅바닥에 떨어지자
어디선가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시체를 빙빙 돌더니
뜰 앞 바위에 앉았다가 사라졌다.
매가 앉았던 바위를 살피던 병사가 깜짝 놀라 보고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바위위에 매의 발자국이 뚜렷이 남은 것이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관가에서 새로 쌓은 성을 조사했더니,
벽암이 쌓은 성은 허술했으나
이회가 쌓은 성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견고하였다.
그때서야 이서는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하며
이회의 죽음을 통탄하였다.
그래서 그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려고
서장대 옆에 청량당이라는 사당을 지었다.
이후로 서장대 뜰에 있는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벽암이 쌓은 북쪽은 지금 성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없으나
이회가 정성을 다해 쌓은 성은 아직도 튼튼하게 성벽을 이룬다.
<출처; 경기문화포털>
수어장대를 나서 다시 성곽을 따라간다.
구불구불 휘어지는 성곽이 유연하고
안팍으로 숲이 울창하다.
높은 성벽은 여전히 정해진 출입문 외
접근을 막아서는 역할에 충실하다.
성곽 안쪽으로 숲그늘 길과 갈라지는 갈림길에
막걸리를 파는 노점상이 보인다.
조금 더 가니 문루가 보인다.
서문, '우익문'이다.
성문을 나와 전체적인 모습을 담으려했으나
운신할수 있는 좁은 공간에서는 어렵다.
하는수 없이 상층부만 담는다.
인조가 청 황제에게 항복하기 위해
나섰던 문이기도 하다.
부지런히 따라온 외성길이
어느새 저만치 달아났다.
뿌옇게 가린 도심 방향,
지상 123층, 555미터 높이 '롯데월드타워'가 오똑하다.
'매탄터(처)'라는 설명이 있다.
지름 5미터, 깊이 1미터 정도의 구덩이가 파여있는데
숯을 묻어두기 위한 구덩이, 매탄터로 보인다.
소금뿐만 아니라 숯도 산성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이라
성내 94곳에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설명이다.
능성이 적군이 물러날 때까지 성안에서 버티는 전술인데,
전쟁이 일어나면 왕과 군대, 인근 백성이 모두 성안으로 이주하고
논과 밭작물 등 적군이 이용할수 있는 모든 것들을 불태워 없앤다.
성안에서 연료를 사용하기에
연기도 없고 간편한 숯만큼 좋은 것도 없으니
이를 평소에 비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성곽 중간에 서서
소나무 사이로 진행방향을 본다.
아득해 보인다.
시간은 3시 40분이 넘어서고 있고
동료들과 약속한 시간은 2시간 남짓 남았다.
돌아갈 방법을 미리 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5시쯤 출발해야한다는 기준 말고는
정한바가 없기 때문이다.
'제 5 암문', '연주봉 옹성 암문'이다.
연주봉 옹성은 길이 150미터 정도로
이 암문을 통해서 왕래한다.
연주봉은 성 내부 관측이 가능한 요충지로
이를 방어할 필요에 의하여 옹성을 쌓았다.
암문이면서 홍예식에 문도 달려있다.
강직하면서도 품위있는 소나무가 멋지다.
마음이 조금씩 조급해진다.
성 내부 숲그늘로 이어진 길이 유혹한다.
'북장대터'가 표지로 남아있다.
능선을 따라가는 성곽이 훨씬 가까워졌다.
북문에 해당하는 '전승문'이다.
이름과는 달리 패전 기록이 있는 문이다.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으로
군사 3백여명이 청군을 기습공격하기 위해 북문으로 나갔다가
계략에 빠져 전멸당하고 만다.
'법화골전투'다.
정조 3년(1779)에 성문을 개축하며
'전승문'으로 명명하였다.
아마도 그때의 패전을 잊지말자는 각오였으리라.
남한산성 안내도다.
다시 길이 가팔라진다.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에는
125개소의 군포가 있었다 한다.
아쉽게도 지금은 남아있는 곳이 없고
이곳이 '제 1 군포터'로 확인된다.
주변보다 약간 높고 정면 3칸, 측면 1칸의 주춧돌,
와편과 조총탄환이 다수 발견되었다 한다.
성 안길을 걷다가 다시 갈림길이 나온다.
이번에는 성곽길을 따라 왼편으로 간다.
'제 2 군포터'다.
'제 4 암문'이다.
바깥에서 보면 바로 안이 보이지 않고
둘러쌓은 성벽이 보인다.
다리에도 무리가 오는지
속도가 조금씩 느려진다.
그래도 잠시 멈추지 않는다.
발굴조사 안내문이 붙어있고
출입통제선이 둘러쳐진 안쪽이 어지럽다.
'제 3 암문', '봉암성 암문'이다.
다른 암문과는 달리
규모가 제법 크고 문도 달려있다..
외성인 봉암성을 연결하는 주출입구로
다른 암문과는 달리 문루만 없을뿐
성문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암문 왼쪽으로 다시 성곽을 따라간다.
동문과 동장대 구간 여장 보수공사 안내문이다.
공사기간이 2018년 5월 23일,
이미 2개월이 가까이 지났다.
오른쪽길을 따라가니
성곽쪽으로 올라서는 길이 보인다.
다시 성곽에 올라서니
또 다른 군포터가 나온다.
뒤돌아 보니 막혀있다.
'제 2 암문', '장경사신지 옹성 암문'이다.
안팎을 연결하는 단궤레일이 암문을 지난다.
이곳은 '장경사신지옹성'을 출입하던 곳으로
일반 암문보다는 규모가 크고
장경사신지옹성을 쌓으면서 신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사출입통제가 된 곳에서부터
이곳은 공사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훼손되었는지, 그도 아니면 빠뜨렸는지
통제선이 없던 곳을 우연히 넘어선것 같다.
지난 폭우에 경사면이 유실되어
크고작은 돌이 길 위에 돌출되어있다.
이곳에서부터는 레일이 두 개 설치되어있다.
공사자재 야적장 넓은 공터 뒤로
'장경사'가 보인다.
하지만 오늘 주목적은 남한산성 순성이다.
성곽길을 찾아 앞으로 더 나아간다.
공터 끝에서 '제 1 암문', '장경사 암문'을 만난다.
출입통제선이 보인다.
그 맞은편 쉼터 정자 앞으로 샛길이 보인다.
올라가보지만 더 이상은 길이 없다.
아쉽지만 '장경사'까지 돌아나와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걷는다.
신자는 아니지만 사찰은 꺼리지 않고 들어가는 편이다.
오늘은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다.
다시 성곽과 만나는 길이 나오는데,
'동문과 장경사 구간 탐방로 우회'안내판이 보인다.
역시 공사기간은 2017년 12월 31일로
이미 반 년 넘게 지난 상태다.
이제는 포기하고 동문을 찾아
포장도로를 따라 걷는다.
내려가는 갈림길 윗쪽으로
망월사 표석이 웅장하다.
동문, '좌익문'에 닿았다.
남한산성을 통과하는 남한산성로가
꾸준히 이어오던 남한산성을 잘라놓았다.
내성모습이다.
외성을 사진에 담기 위해서는
좌우로 갈라지는 도로위에서 셔터를 눌러야한다.
아무리 각도를 잡아도 역광과 각도에
제대로 된 모습을 담기는 어렵다.
정조 3년(1779) 개축하면서 좌익문이라 하였는데
이는 행궁에서 왕이 남쪽을 향해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붙인 이름이다.
남문과 함께 사용은 많이 하였으나
낮은 지대에 축조되어 계단을 쌓고 성문을 달아
우마차 통행은 불가능했다.
시간이 5시 9분을 넘어서고 있다.
아직도 북문을 지나 남문까지는 가야하지만
더 이상 개인적인 사정으로 지체할수는 없다.
지도앱으로 교통편을 검색한다.
다행히 광주시내버스인
15-1번 교통편이 확인된다.
이곳 정류장과 도착지 도착예정시간도 확인되니
동료들과 시간 약속을 한다.
남한산성은 꼭 가보고 싶던 곳이다.
순성과 둘레길, 행궁을 둘러보고
굴욕의 역사 단편들도 돌과 나무, 바람에 전해듣고
짙은 숲길을 유유자적하고 싶었다.
머지않은 날 미처 돌지못한 성곽도 돌고
행궁과 숲길도 다시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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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행 중간 중간 나타나는 역사의 현장에 숙연해 집니다. ^^
사진과 그곳의 역사의 상황을. 일일히 삽입해서 올리시는 열정에
감탄을 자아냅니다
염천에 너무 무리하지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