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화수 소설 |
전설2 [세포와 풍경화]
제1부 돌개바람(제111회)
7. 요동하는 가을-13
학생들이 경찰서를 포위하자 경찰들은 지레 겁을 먹고 항복해버리고 말았다. 여기에 남로당 경북 도 간부들이 나와 서장과 담판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서장의 친일 경력과 우리 인민에게 가한 죄상을 들먹이면서 행한 일방적인 요구요 협박이었다. 결국 그들은 경찰을 무장해제하고 경찰의 무기를 모두 접수했다.
그리고는 그들 중의 누군가가 경찰서 밖에 나와 시위대를 향하여 경찰이 백기를 들었다고 외치자 시위대는 서장을 처단하라고 외쳐대더니 급기야는 경찰서 안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경찰관들은 모두 담을 넘어 줄행랑을 쳤다. 남로당 간부들과 마주해 있던 경찰 서장을 비롯하여 간부들은 도망하지 못하고 인질 상태가 되었고 무기고에 거둬들였던 무기들은 시위대의 손에 탈취되었다.
경찰들은 간부들과 형사들이 여섯 명이나 피살되고 여럿이 부상당하는 과정에서 나머지 경찰들은 현장에서 도망쳐 버렸다. 나중 보도에 의하면 주로 대구방적 노조원들이 주동이 되고 학생들이 가세한 폭동으로 전해졌다.
유치장에 갇혀 있던 온갖 잡범들과 함께 모든 유치인들이 풀려나 세상 만난 듯이 기고만장해서 시위대에 합세, 온갖 패악을 다 행함으로써 시위는 목불인견의 폭동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시신(屍身) 시위에 관한 소문은 뒷날 가지가지 형태로 가지를 치고 나타났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앞서 소개한 이야기도 여러 이야기들 중 한 가지일 뿐일 수 있다.
당시 청구대학에 다녔던 학생의 목격담을 기록한 것이지만 다른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때 동문동 청구대학 앞을 통과한 시신 행진에서, 담가에 실제로는 시신이 없거나 시신처럼 위장한 다른 것을 얹어서 지나갔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의전의 실제 시신 행진은 나중에 삼덕동로타리로 불리게 되는 사범학교[현재의 ‘경대 사대 부속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학교] 앞 네거리에서 반월당이 있는 곳으로 하여 중앙통으로 행진하다가 대구경찰서로 향했다는 말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그것은 나중에 시위에 관련되어 체포된 주모자급 학생 대표자들이 의전을 비롯해서 사범학교 전문부, 상업학교, 경구중학교 학생 간부들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기록은 이 쪽을 택하여 전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때 의전 학생들이 몇 개의 시신이나 시신인 듯이 위장한 담가를 들고 몇 개의 코스를 행진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심지어는 의전 학생들이 들고 나선 그 시체는 원래 삼덕동에 있는 대구 사범학교에 있었던 것을 의전으로 옮겼다고도 하고, 의전에 있던 것을 사범학교를 비롯해서 여러 학교에 돌려가면서 전시 시위했다고도 하여 사실에 대한 것은 지금까지도 종잡을 수 없다.
--------------------- 9월 19일 (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