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통신 2024년 가을호-63호
남의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마라
<제사상 앞에서 요 깔고 이불 덮고 드러누운 부부>
조선조 때 쓴 어느 야담집에 나오는 옛이야기 하나 해 보겠습니다. 오래전에 본 이야기라 출처가 기억나지 않네요.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 한 선비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길이었다. 날이 저물어 머물 집을 찾다가 산속에 허름한 초가를 발견했다. 선비는 자신의 사정을 말하고, 하룻밤 묵어가게 해달라고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은 젊은 부부였는데, 흔쾌히 허락했다.
그 집은 사랑방과 안방으로 이뤄져 있고, 방 사이에는 미닫이문으로 되어 있었다. 선비는 사랑방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날이 마침 어머니 제삿날이었다. 선비는 제사를 구경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부부는 구경해도 된다면서 미닫이문을 열어주었다.
밤이 이슥하여 자시(子時, 11~1시)가 되자, 제사상이 차려지고, 제사가 행해졌다. 그런데 한참 제사를 지내던 부부가 제사상 앞에 요를 깔고 이불을 덮고 드러눕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이쿠, 못 볼 것을 봤구먼.”
선비는 깜짝 놀라 얼른 미닫이문을 닫았다. 그렇게 제사는 끝났다.
“선비님, 안방으로 오셔서 제사 음식 좀 드시지요.”
부부는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이 음복하고, 제사 음식을 선비에게 권했다. 마침 시장하던 참이라 선비는 주인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같이 제사 음식을 먹었다. 그런데 왜 부부가 제사상 앞에서 드러누웠는지 선비는 몹시 궁금해서 물었다.
“아, 그러셨지요. 우리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 소원이 제가 장가를 들어 아이 낳고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임종하시면서까지 그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가들어 이렇게 잘살고 있다는 모습을 어머니께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셨군요. 난 그것도 모르고….”
선비는 부부의 사연을 듣고 미안하여 말끝을 흐렸다.
이야기 재미있었나요. 우리는 이 이야기처럼 집집이 예가 다르다고 해서 가가례(家家禮)란 표현을 씁니다. 그래서 ‘남의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라’는 속담도 생겼습니다. 우리는 굳이 어떤 관습으로 인한 예법을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어떤 집은 제사상에 닭을 올리고 안 올리고, 문어를 올리고 안 올리고 하는 가풍이 있는 것이지요. 그 가풍도 상황에 따라 세월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마음이지요. 미풍양속(美風良俗)이라 하잖아요.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풍습>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언론은 시끄럽습니다. 차례(茶禮)와 제사(祭祀)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지요. 차례를 핑계로 신문에는 며느리에 대한 혹사와 남녀 갈등에 관한 문제가 언제나 대문짝만하게 실립니다. 그러면서 디지털 시대에 꼭 그렇게 차례를 지내야 하냐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어쩌면 그런 갈등은 당연한 처사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내키지 않은 차례를 지내야 하는 며느리의 입장을 언론은 대변해 주고 있으니까요. 남자들은 여자들이 한 음식으로 술이나 먹고 있고, 여자들은 종일토록 음식을 만들어내야 하는 어려움이 토로 됩니다. 누가 봐도 잘못된 일이지요. 차례 준비는 남녀 구별 말고 같이 해야 하는 일인데, 아마도 일부 가문에서 그런 풍습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기야. 이런 예법 때문에 예송논쟁(禮訟論爭)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예송논쟁으로 사람이 죽고 귀양 가고, 그리고 임금이 갈리는 무시무시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깟 장례 복식(服飾) 문제가 무엇이라고, 서로 죽이면서까지 예법을 따졌을까요. 이런 논쟁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끝나지 않을 겁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면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지난 추석에도 방송에서는 차례(茶禮) 문제가 화두였습니다. 여행지에서 지내는 차례 이야기였습니다. 어떤 집안은 휴대전화에 차례상 사진을 켜놓고 차례를 지낸다는 명절 여행에 얽힌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명절이 끼면 대체 휴무가 따릅니다. 명절날 앞뒤로 하루씩 쉬는 규정을 말합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끼면 평일 하루를 더 쉬게 됩니다. 그렇게 긴 연휴가 주어지다 보니, 평소에 낼 수 없었던 여행시간을 냅니다. 그런데 여행 중에도 조상에 대한 차례는 지내야 하니, 그런 방법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명절 당일이 아닌 미리 차례를 지내거나 생략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차례와 제사에 얽힌 이야기는 관습과 풍습, 종교적인 문제와 시대적인 의식 문제까지 결부되어 아주 복잡합니다. 디지털 시대와 아날로그 시대의 갈등일 수도 있는데요. 무엇이든 지혜롭게 풀어간다면 참 좋겠습니다.
<관혼상제 의례의 중요성>
의례는 세월이 흐르면서 관습이 됩니다. 그러나 관습이라고 해서 꼭 옛 방식으로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꼭 지켰던 관습 중 관혼상제(冠婚喪祭)도 그렇습니다. 관혼상제는 사례(四禮)라 해서 아주 중요하게 여겼던 관습이지요. 그 중요성으로 인해 이재가 지은 『사례편람』처럼 많은 의례 서적이 나오고, 서로들 자기주장을 내세우며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습은 시대마다 달랐고, 세월 따라 변했습니다. 그렇게 변하면서도 사례(四禮)를 어떤 형태로든 꼭 치르는 일은 왜일까요. 참으로 묘하지요. 이를 서양 문학 용어로 말하면 아이러니라 할까요. 사람들은 옛것은 모순이며 잘못된 관습이라 하면서도 어떤 형태로든 의례를 꼭 치릅니다.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 전혀 다른 형식이 되어도 사례를 행합니다. 이런 현상으로 본다면, 사례는 일생의 의례이면서 한 가지 일을 넘는 ‘매듭’이라 봅니다.
매듭은 ‘얽힘’으로 볼 수 있는데요. 의례를 일생의 얽힘이라 한다면, 그 의례로 새롭게 얽혀 살아가는 ‘어울림’이지요. 그런 어울림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사람들은 의례를 꼭 행하고자 했습니다. 관례는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었음을 결정하는 매듭이고, 혼례는 두 남녀가 부부가 되었음을 결정하는 매듭이고요. 상례는 이승과 저승을 결정하는 매듭이고, 제례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 유대를 결정하는 매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 중요한 일생의 의례이지요. 그래서 이때마다 사람들은 서로 어울려서 축하하고 위로하며 살아갑니다. 공동체가 유지되는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의례의 방식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이런 매듭으로 서로 어울려 살아갑니다. 어울림은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 시대에 행했던 의례를 행하는 이유입니다.
<차례와 제례, 조상과 후손의 만남>
제례(祭禮)와 차례(茶禮)가 다르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제례는 기일이나 상장례 때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거나, 산신제나 서낭제처럼 신을 강림시켜 먹이고 기원할 때 행하는 의례이고요. 차례는 명절처럼 달과 계절과 해가 바뀌었음을 알리고, 조상들께 시식(그때 나는 음식)과 절찬(계절 음식)을 올리는 의례입니다. 차례를 지내는 때는 설, 한식, 단오, 추석 등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설날과 추석에만 대부분 가정에서 올립니다. 이처럼 제례와 차례는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제례 때는 축문을 읊는 등 절차가 좀 까다롭지만, 차례는 축문도 없고 단잔 재배로 끝입니다. 차례는 조상들께 새해가 되었다거나 가을 추수가 잘 되었다는 사실을 고하는 의미가 큽니다. 그래서 사실 차례에는 많은 음식을 차리지는 않습니다. 시절 음식으로 설에는 떡국이면 되고, 추석에는 송편이면 족하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조상에 대한 깊은 정과 예의 차원에서 수많은 음식을 진설합니다. 어쩌면 인지상정이라 할까요.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정이지요. 살아서 함께 했던 모든 일이 이 의례를 통해서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평소에는 살기 바빠 조상 생각을 잘못하다가 명절이나 기일에는 의례를 통해서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제례나 차례는 조상과 후손이 만나서 어울리며 끈끈한 혈통과 정을 이어주는 매듭이 됩니다.
무엇보다 의례를 통해서 일 때문에 헤어졌던 가족이 다 같이 모일 수 있습니다. 맛난 음식도 같이 먹고 그동안의 일들을 담소로 나누는 시간이 됩니다. 비록 지역마다 가정마다 제례나 차례 음식 진설과 진행 방법은 다 다르지만, 그 의미는 같아요.
<천도를 바라는 느릅령의 호랑이>
태백시 삼수동 여랑골에는 다음과 같은 천도(薦度)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사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이야기이지요. 이 이야기는 『강원의 설화』에 전하고, 『태백시지』 등에도 비슷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옛날 황지에 황씨 성을 가진 효자가 있었다. 그는 마침 아버지 기일이 되어서 제사상에 올릴 어물이 필요했다. 그런데 황지에서 어물을 사기 위해서는 삼척의 소달장으로 가야만 했다. 소달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느릅령[유령재(楡嶺재)]을 넘어야 했다. 그런데 느릅령에는 매년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사람을 해쳐서 혼자 넘기에는 어려웠다. 황 효자는 당장 그날 밤이 아버지 기일이라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황효자는 혼자 느릅령을 넘어 소달장에 가서 제사상에 올릴 어물을 사서 다시 느릅령을 넘어오게 되었다. 날은 이미 어두웠고, 같이 재를 넘을 사람도 없었다. 그는 용기를 내서 혼자 느릅령을 넘어오는데, 아니나 다를까. 황 효자 앞에 소복을 입은 여인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서 있었다. 황 효자는 얼마나 무서운지 머리가 버썩 서고, 온몸에는 자기도 모르게 진땀이 났다. 그러나 황 효자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나는 재 너머 사는 황 씨라고 하는데, 당신은 누구요. 나는 부모님 제사를 올리려 급히 가야 하니, 길을 비키시오.”
그랬더니, 그 여자가 갑자기 땅에 엎드려서 눈물을 뚝뚝 흘려 울면서 말했다.
“저는 이승에서 억울하게 죽었어요. 한을 품고 저세상으로 가게 되었지요. 그러나 한이 많아서 저세상으로도 편히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고향 사람이라도 만나면 나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제가 미처 얘기도 하기 전에 모두 기절을 해버리니, 여태껏 한을 풀지 못하고 이렇게 있습니다. 부디 내 한을 풀어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네 한을 풀어줄 수 있느냐?”
“제가 저승으로 갈 수 있도록 제사를 지내 천도를 해주시면 됩니다.”
황 효자는 아버지 제사에 쓰려고 샀던 어물로 여인을 천도하는 제사를 차리고, 정성껏 빌어 저승으로 갈 수 있도록 했다. 그러자 여인은 자신의 이름은 여랑이라고 하면서, 황 효자가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주어 한을 풀고 저승으로 간다면서 황 효자에게 넙죽 절하고는 사라졌다. 그래서 나중에 사람들은 그 골짜기를 여랑골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시는 느릅령에 귀신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강원의 설화』 각색)
아주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많이 듣던 <아랑의 전설>과 같은 옛이야기의 형태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제사에 있습니다. 제사는 조상과 후손, 신과 인간의 만남이나 기원에만 주어지지 않고, 억울한 영혼을 극락이나 천상과 같은 저승으로 보내주는 천도(薦度)의 역할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제사가 가지는 또 하나의 매듭이며 어울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