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 이상 못 하겠어 / 정희연
눈이 내린다. 눈 다운 눈, 함박눈이 내리면 좋으련만 연인들의 사랑을 시샘하는지, 첫눈이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리게 할 만큼 보잘 것이 없다. 영이를 만나기로 했는데 어쩌란 말인지!
며칠 후 “올해는 김장을 언제 할까요?”영이가 묻는다. “그래 첫눈이 왔었지 날 한번 잡아보세“ 김장할 때가 왔다. 고춧가루와 마늘은 고향에서 가져온다. 다른 것은 못해줘도 이것만큼은 해 주겠다는 90살 노모의 생각이다. 소금은 아버지 지인이 염전을 해서 떨어지는 일이 없다. 늘 풍년이었는데, 후쿠시마 오염수 방수로 여기저기 나눠 줘 소금창고가 동이 났다. 간수가 잘 빠진 5년 이상 묵은 소금을 쓰려니 아깝긴 하지만 눈을 딱 감는다.
이른 아침 풍암동 농수산물 시장으로 갔다. 배추가 숨이 죽어야 다음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소금물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서둘러야 한다. 너무 큰 것은 빼고 겉잎이 속을 잘 감싸고 무겁고 단단한 녀석을 찾는다. 한 바퀴 돌아본 후 눈에 들어온 가게로 들어간다. 소나무처럼 큰 나무 옆에서 자란 배추는 속이 지저분할 수 있어 피하는 것이 좋다. 여덟 망 스물 넷 포기를 샀다. 배추를 소금으로 절이는 것은 수분을 적당하게 빼줘서 양념이 잘 밸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다. 소금에 있는 마그네슘이나 칼슘이 배추의 펙틱과 결합하여 아삭아삭한 맛을 더한다. 지나치게 절이면 짜고 비타민과 당분이 빠져서 양념이 스며들지 않아 맛이 좋지 않다. 고르게 절이려면 서너 번 뒤집어야 한다. 소금 농도에 따라 다르지만 저녁에 시작해 아침이 되면 적당하게 숨이 죽어있다. 서너 번 행군 후 물기를 빼는데 반나절의 시간을 보내면 꼬독꼬독 해진다. 힘들고 손이 많이 가서 절임 배추를 사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끝낸 후 한가득 쌓인 김치를 보면 부자가 된 기분에 멈출 수 없다.
양념장을 준비 하려면 먼저 호박을 삶아야 한다. 껍질을 잘라내고 속을 걷어내 속살을 익기 쉽게 잘라 찜통에 물을 한가득 담고 물렁물렁해 질 때까지 삶는다. 다음은 다시마, 청각, 멸치로 육수를 낸다. 청각은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장 활동을 좋게 해 변비에 좋을 뿐만 아니라, 철분이 많아 적혈구 생성을 촉진하고 혈액을 통해 산소를 공급해 빈혈에 좋고,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하기 때문에 산성화된 몸을 알칼리성으로 중화시키는 효능을 가지고 있으며, 김치의 맛을 돋운다. 한쪽에서는 멸치젓을 끓이고 생강, 풋고추, 양파, 사과, 밥, 마늘 그리고 새우젓을 갈아 양념을 준비한다. 호박, 다시마, 멸치젓 끊인 물이 식으면 건더기만 걸러내 서로 합하여, 양념장과 매실액을 더한 후 마지막으로 고춧가루를 부어 1차 농도를 맞춘다. 시간이 지나면 고춧가루가 수분을 흡수해 진한 반죽이 되므로 처음에는 걸쭉하지 않게 하고, 마지막 간은 소금과 설탕으로 마무리 한다.
김치 버무리는 일이 남았다. 양념장과 갓, 파, 미나리, 당근을 섞어 소를 만든 후 잎 사이에 켜켜히 넣는다. 가장 어려운 작업이다. 남자와 여자를 따로 만든 이유를 알 듯한 시간이다. 꼼꼼함은 따라갈 수가 없어, 1차 버무린 후 아내에게 넘긴다. 지금까지 잘 했다고 당장이라도 업고 다닐 것처럼 이야기 하던 영이가 얼굴색이 확 변한다. 잎 하나하나 들쳐가며 양념을 골고루 빠진 곳 없이 잘 뭍혀야 무르지 않고, 변질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며 과한 정성를 들인다. 그릇에 담는 것도 맡기지 않는다. 눈으로 먼저 먹는 것이라며 하나하나 모양을 만든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인데 공든탑이 무너지려는 순간이다.
장모가 세상을 떠난 후 배달 되어오는 김치가 멈췄다. 무는 깍두기 두께로 납작하게 썰어 김치통에 담을 때 사이사이에 넣는다. 손질한 쪽파 한 단과 돌산갓을 양념에 버무리면 네 가지의 김치가 만들어 진다. 양념장은 충분히 만들어 보관해 놓으면 다음에 김치를 담을 때 손쉽게 만들 수 있다. 돌산 갓은 한두 번 더, 파김치는 떨어지면 담는다.
음식 문화가 서구식으로 바뀌어, 갈수록 김치를 만드는 가정이 줄어들고 있다. 아무리 좋은 밥상도 김치가 없으면 화룡점정인 격으로 하나가 빠진 셈이다. 김치는 음식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고유 문화인 것이다. 아기가 숟가락을 손에 쥐고 손가락에 힘이 생기면 젓가락 잡는 법을 가르치듯, 성인이 되면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이가 힘들어“이제 더 이상 못 하겠어”라고, 입 밖으로 나올까 봐 더 열심이다.
첫댓글 김장도 할 줄 아세요? 대단하시네요.
꼼꼼함은 따라갈 수 없습니다. 만년 보조입니다. 하하하!
이 글 잘 저장해 두었다 보면서 김장해도 되겠네요. 잎 하나하나 들쳐가며 골고루 양념 잘 묻혀야 변질되는 것을 막는다는 것, 이번 김장 김치 먹다가 발견했네요. 바빠서 대충 양념 묻혀 왔더니, 통 전체가 하얗게 곰팡이처럼 펴서 못 먹게 되었어요. 많이 배웠습니다. 정 선생님 수고를 보니 맛난 김치 드실 자격 충분합니다.
몇 년 같이하다 보니, 이제 눈을 감아도 보입니다.
수준급의 주부 냄새가 나는데요.
맛있는 김치 이야기에 침이 꼴깍 넘어가네요.
할 때 힘이 들어 다음에는 절대 안 한다고 해 놓고, 지나고 나면 또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다재다능한 정 선생님, 못 하시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부럽습니다.
특출나게 잘하는 한 가지가 필요한데 많이 부족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읽으니 김치 담는 게 정말 대단하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네요. '영이'라는 호칭이 정겹습니다.
고맙습니다.
우와, 이렇게 김장에 진심이신 남편 찾아보기 힘든데요. 보기 좋으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왠지 놓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이것이 큰 힘이 될 것 같은 느낌 같은 것,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