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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에서 하신 네 번째 말씀 / 마 17:45-50
KBS에서 방여오디는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방송의 내용을 보면 버린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이 만나서 부둥켜 안고 용서를 구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나온다. 한번은 이런 내용이 있렀다. ‘어머니, 왜 나를 버리셨나요? 나를 버리시려면 왜 낳으셨나요? 내 또래의 친구들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학교를 오고갈 때 나는 어머니의 얼굴도 모르고 어머니의 이름 한번 불러보지 못하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이 못난 어미를 용서해다오.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단다.’ 그러면서 서로 부둥켜 안고 우는 모습을 보면 보는 사람들도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여러분, 버림받아 본 적이 있나?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버림받아 본 적이 있나? 부모나 자식으로부터 버림받아 본 적이 있나? 친구로부터 버림받아 본 적이 있나? 사랑하는 애인으로부터 버림받아 본 적이 있나? 직장 상사로부터, 또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아 본 적이 있나? 버림받는다는 것은 슬프고 고통스럽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마디 말씀은 이렇다.
제1언의 말씀 :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제2언의 말씀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제3언의 말씀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제4언의 말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 막 15:34)
제5언의 말씀 : ‘내가 목마르다.’(요 19:28)
제6언의 말씀 : ‘다 이루었다.’(요 19:30)
제7언의 말씀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오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마디 말씀 중 네 번째 말씀을 살펴보겠다. 첫번째 말씀은 눅 23:34절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는 용서의 말씀이다. I.C. 라일은 이렇게 말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동안에 하신 것이거나, 십자가에 세워진 직후에 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의 댜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 속죄제물로 드려져 피를 쏟으시는 순간에 이와같은 중보의 기도를 하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그분의 처형됨을 기뻐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를 구하셨다. 운명하시는 순간까지 용서하셨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까지 용서하셨다.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분들이 있나? 이번 고난주간을 맞아 용서하기 바란다.
두 번째 말씀이 무엇인가? 눅 23:43절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는 구원을 약속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양 옆에 두명의 강도가 있었다. 예수님의 용서를 위한 기도에 마음이 변화된 것인지 한 강도가 예수님께 부탁을 해왔다. 그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조롱했다. 그러나 무죄한 죽임을 당하면서도 욕하고나 저주로 대항하지 앟고, 고통을 묵묵히 감수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누가는 그의 말을 이렇게 적었다. 눅 23:40-42절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생전에 그렇게 악하게 살았던 강도였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다. 구원이 자신의 공로가 아닌 오직 예수님의 은혜임을 증명하고 있다. 혹시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이 있나? 구원은 자신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로 받는다. 나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로 받는다. 고난주간을 지내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고행이 아닌 감사가 되기를 바란다.
세 번째 말씀이 무엇인가? 요 19:26절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이는 모친을 부탁하는 말씀이다. 요 19장에 의하면, 십자가 아래에는 예수님의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도 서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피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어떻게 지켜보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미친사람처럼 울부짖거나 쓰러지고 말았다. 예수님은 모친의 마음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요한을 향해 머리짓을 하면서 말씀을 하셨다. ‘보라, 네 어머니라.’ 어머니의 노년을 부탁하셨다.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들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애쓰심을 볼 수 있다. 혹시 부모님과 좋지 못한 관계에 있나? 고난주간을 부모님과 관계회복의 기간으로 삼기 바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세 번째 말씀을 하신 후 세시간 가까운 침묵이 흘렀다. 예수님은 세시간 동안의 침묵 속에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진노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끔찍한 형벌을 당하셨다. 이것은 견딜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이다. 출혈과 함께 지옥을 넘나드는 것같은 육체의 고통이 있었다. 정신적인 고통 역시 견디기 힘들었다. 사랑하는 제자 유다에게 배신당한 아픔과, 수제자 베드로에게 부인당한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은 육체적 고통에 그치지 않는다. 정신적인 고통이 전부가 아니다. 영혼으로 당하신 고통이 있다. 주님이 당하신 영적인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고통이다. 바로 아버지와 단절되는 고통이다. 제6시부터 네 번째 말씀을 하신 제9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다. 예수님이 이땅에 탄생하실 때 빛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이셨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순간에는 어둠을 내리셨다. 인간의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다.
아이작 왓츠는 이렇게 고백했다. 찬 143장 3절 ‘주 십자가 못 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목 박혔을 때에 해가 빛을 잃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없는 세상은 암흑천지이다. 예수님이 없는 삶은 어둠 아래에 있다. 그 안에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어둠의 영의 지배를 받는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요 12:3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도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어둠 가운데 있었다. 우리 안에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울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엡 5:8절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11절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둠의 세력에서 벗어났다. 다시는 어둠의 자식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한다.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교회는 다니면서도 여전히 어둠의 영에 인도를 받는다면 엄청난 불행이요 비극이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 시간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신다. 고후 6:14-16절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갖기 바란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채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 마 27:46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캔서스대학 해부학 교수 메츠키 박사는 십자가형의 고통을 의학적으로 분석했다. ‘십자가 형은 온 몸의 체중이 두 손바닥에 박힌 못에 매달려지기 때문에 피부와 살이 찢겨 많은 피가 흐르고 통증이 심하다. 또한 가슴으로부터 팔에 이르는 근육들이 극도로 팽창하여 호흡장애를 가져온다. 숨을 내쉴 수가 없어 근육에 산소공급이 안된다. 그래서 심한 경련을 일으킨다. 이런 증세를 조금이라고 참으려고 죄수는 몸을 위로 치켜 올리려고 하는데 이때마다 체중은 발등에 꽂힌 못에 의지하므로 그 고통은 가중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견딜 수 없었다. 몸무게로 인하여 서서히 찢어지는 손에 박힌 못 주위, 이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으려고 발에 힘을 주면 찢어지는 발의 아픔이 계속 더해지며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예수님은 견디고 견디다 못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부르짖으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부르짖음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씀이 아니라 고통을 호소하는 고통의 표현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한국말에도 ‘좋다’라는 표현을 ‘좋아죽겠네’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진짜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무 좋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였다. 우리 한국말에 놀랄 때에 ‘엄마야!’ 하는 것은 엄마를 부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놀랐다는 놀람의 표현이다. 이처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표현은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원망의 표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아픔이 큽니다’ 하는 아픔의 표현이다. 또한 이것은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사실 이런 말은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멸망하는 죄인이 부르짖으며 통곡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왔다. 예수님은 구원자로 오셨다. 마태는 예수란 이름의 뜻을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고 했다. 그런데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버려진 채 부르짖고 있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 어찌 자신마저도 구원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을까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누가는 당시 사람들도 그런 의문을 갖고 있었음을 증언해 주고 있다.
눅 23:35-39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그러나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철저히 버림받는 것이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이해될 수 없다. 고전 1:23-24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모른다. 그들은 십자가 위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예수님의 절규에서 고통을 이기지 못해 울부짖는 죄수 이상을 보지 못한다. 그게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리셨는지 안다. 그 분이 왜 저주의 십자가를 지셨고, 그분이 왜 그 저주의 형틀에 못 박히셨는지를 안다. 이건 말할 수 없는 은혜이다. 이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혜이다. 눈물로 감사해야 할 은혜 중의 은혜이다. 찬 143장 4절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아이작 왓츠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그리스도의 수난)’을 보신 분들이 있다. 멜 깁슨은 카톨릭 신자이지만 지금으로부터 13년전 약물 중독으로 방황하던 자였다. 그는 어느날 성서를 읽다가 십자가의 고난의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의 나이 35세에 구원을 체험한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만난 날부터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 꿈은 100% 복음영화를 만들어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는 ‘브레이드 하트’로 아카데미 영화 감독상과 제작상을 받은 후에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제작 스폰서를 구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벤허’처럼 간접적인 종교영화도 아니고 직접적인 예수 영화가 성공한 사례가 없었다고 모두 반대했다. 더구나 예수의 마지막 12시간을 중심으로 한 수난의 이야기만으로는 영화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 영화 역사상 영어가 아닌 히브리어로 대화를 하며, 영어자막을 쓰는 그런 영화는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할 수 없이 멜 깁슨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라도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멜 깁슨은 ‘성령이 나에게 임하시고 주님은 나에게 복음전파의 도구로 이 영화를 만들라고 명하셨다’라고 고백했다. 그는 자기 재산 2,500만불(280억원)을 투자해서 영화를 만들었다. 할리우드에서는 ‘이제 멜 깁슨은 망했다’라는 소문이 났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개봉되던 첫날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몰렸던지 첫날 수입이 2,360만불이나 되었다. 그래서 제작 첫날 투자한 모든 제작비를 환수하게 되었다. 극장마다 부흥회가 시작되었고, 강도와 살인범이 이 영화를 보고 회개하고 자수했다. 타락했던 자들이 돌아왔고, 믿지 않던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기 시작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남미, 호주, 이슬람 국가까지 회심의 기적들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제작을 가장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은 이 영화가 반유대인의 정서를 자극한다고 영화상영 반대시위를 벌렸다. 이 영화 시사회에서 유대출신 기자가 영화감상 후에 멜 깁슨에게 물었다. ‘당신은 정말 유대인이 예수를 죽였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의 견해를 직접 듣고 싶습니다.’ 그러자 멜 깁슨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들 유대인이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 내가 그분을 죽였습니다. 나의 죄가 그 분을 돌아가시게 했고, 나의 죄 때문에 그 분이 이런 수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사 53:5절의 말씀으로 시작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여러분이 이 영화를 보았다면 무엇을 느꼈나? 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고난만 늘 생각을 했는데, 그 이전에 12시간을 끌려 다니면서 채찍질을 당하고 피투성이가 되기가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셨는가를 이 영화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우리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우리 주님이 고난을 받으심으로 이 교회가 탄생되었다. 누가 예수님을 못 박았나?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얼마나 많이 범하고 있나? 이제는 더 이상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범하지 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구원받은 것처럼, 더 많은 영혼이 구원받아 주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 아직도 예수를 모르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 한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희생하는 고난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말하고 있다. 골 1:24절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 말은 바로 사도 바울의 고백이다. 사도 바울은 이 고난을 기꺼이 받겠다고 한다. 이 말 그대로 사도 바울은 일평생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헐벗고, 굶주리고, 매를 맞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순교자가 되었다. 아무쪼록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구원받게 된 은혜를 감사하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지 몇 시간이 지났는데 무슨 힘이 남아있어서 크게 소리 지를 수 있었나? 운명하기 전 죽을 힘을 다하여 하신 말씀이다. 아버지와 단절된 영혼의 고통에서 비롯된 울부짖음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한 순간도 끊어진 적이 없다. 늘 함께 하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요 10:30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그런데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버려졌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본래 이 말씀은 시편에 있다. 22: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죽음 직전에 있는 예수님이 시편을 말씀하신 것을 통해 그분이 얼마나 말씀을 사랑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정의했다. 1: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은 태초의 말씀이시다. 예수님은 육신이 되신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시다. 그럼에도 말씀을 사랑하여 가까이 하셨고 암송하셨다. 또한 그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가르치셨다. 더 나아가 자신의 모든 생애를 통해 말씀을 이루어가셨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생애는 말씀에 붙들린 생애였다. 그랬기에 십자가의 모진 고통 속에서도 말씀을 붙들 수 있었다. 숨쉬기 힘든 상황에서도 말씀으로 기도할 수 있었다. 우리가 고난주간 도안에 꼭 생각해 봐야 할 게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내가 어떤 관계에 있는가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말씀의 사람인가를 확인해야 한다. 예수님의 고통 당하심을 보고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내가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자신의 눈물에 속고 있다고 보면 된다. 시편 기자가 이렇게 고백한다. 119:161-163절 ‘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나는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율법을 사랑하나이다.’ 시인의 고백을 통해 자신이 말씀의 사람인지를 확인해볼 수 있다. 시인은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또한 주의 말씀을 경외했다. 그는 하나님을 즐거워했기에 또한 주의 말씀을 즐거워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또한 주의 법을 사랑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기 바란다. 돈벌이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기 바란다. 어떤 놀이나 재미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기 바란다.
어떤 형제가 수련회에 참석했다. 자기도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며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을 만나야 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만나주십시오.’ 너무나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뜻밖에 하니님의 음성이 들렸다. ‘네가 나를 만나서 뭐할래?’ 정작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그는 아무 대답도 못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 그 형제가 간증문을 작성했다. 그 간증문의 일부이다. 그때에 하나님은 침묵을 깨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만나서 뭐할래?’ 저는 그 순간 아무 말씀도 못드렸습니다. 정말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고, 하나님이 정작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이 멈춰버렸습니다.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을 때 이내 들려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살아가거라. 네게는 이미 내가 준 말씀이 있으니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거라.,’ 이 말씀을 하시고는 이내 떠나가셨습니다. 찬송가 442장 3절이 생각납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주님도 우셨고 나도 울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눈물로 고백하면서도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건 성서가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말씀의 삶은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살다가 말씀을 따라 영광스럽게 죽는 사람입니다. 신앙을 감상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삶입니다. 신앙은 말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시편의 말씀으로 아버지께 버림받았음을 증거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나? 아버지께서 정말 독생자 예수를 그렇게 버리셨나? 그렇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셨고,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셨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인류의 죄를 짊어지셨기에 십자가에서는 가장 큰 죄인이 되었다. 하나님은 인류이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진노의 잔을 쏟아 부으셨다. 완전히 버리셨다. 버린척 한게 아니다. 버리신 흉내를 낸 것이 아니다. 주님 곁에서 수종들던 천사도 보이지 않는다. 태양조차 예수님께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십자가 아래에는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하는 여인들이 있었지만, 그게 조금은 위로가 되었을지 몰라도 아버지께 버림받은 것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한번도 아버지의 말씀에 불순종하신 적이 없었던 예수님께서 왜 그처럼 버림을 받으셔야 했나? 하나님의 뜻에 한번도 ‘아니오’ 하신 적이 없었던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버림을 받으셔야 했나? 죄는 우리가 졌는데 불순종은 우리가 했는데 왜 예수님이 버림을 받으셔야 했나? 우리의 죄 때문이다.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예수님이 속죄양으로서 버림받아 죽으셨다. 요일 4:9-11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렇다. 주님은 우리 때문에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셨다. 그러나 주님은 한순간도 우리를 탓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보면 그걸 분명히 알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게서 갈릴리 호숫가로 오셔서 고개숙인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대답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한가지를 확인하셨다. 그 한가지가 무엇인가? 사랑이다. 베드로가 지금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셨다. 사실 그거면 됐다. 예수님한데 뭐가 더 필요하겠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예수님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그 예수님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주님께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기를 바란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에수님, 사랑합니다. 그것 분예요.’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라는 고백을 받으신 예수님은 고난주간 내내 만나자고 하신다. ‘사랑합니다. 그것 뿐예요’라는 고백을 기뻐하신 예수님이 매일마다 보자고 하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셨다. 이번 한주간을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작게라도 그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1 종려주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