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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치 소리 _두 세계의 만남과 상호 침투, 그리고 융합
◈ 저자: 김동리(金東里). 본명은 김시종(金始鍾).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학교를 거쳐 서울 경신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했다. 19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화랑의 후예」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산화(山火)」가 연속 당선되었다. 1930년대에 등단한 작가 그룹의 대표적인 존재로 주목을 받았으며, 해방 후에는 한국청년문학가협회의 건설을 주도하고 우파 진영을 대표하는 작가·평론가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서라벌예술대학 교수를 거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와 예술대 학장을 역임했다. 한국의 현대소설가들 가운데서 동양적 전통의 세계, 종교의 세계, 민속의 세계에 가장 깊이 관심을 기울여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룩한 작가로 평가되지만, 당대의 역사적 상황과 지식인의 고민을 정면으로 다루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무녀도(巫女圖)」, 「황토기(黃土記)」, 「역마(驛馬)」, 「흥남 철수」, 「등신불(等身佛)」, 「까치 소리」 등의 단편과 『사반의 십자가』, 『을화』 등의 장편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 해설자: 이동하(서울시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소설과 기독교』, 『한국 현대소설과 종교의 관련 양상』, 『한국 문학과 인간 해방의 정신』, 『한국 문학 속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등 다수의 저서를 냈으며,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성(聖)과 속(俗)』을 번역한 바 있다.
1. 한 살인자의 이야기
여기 한 사람의 살인자가 있다. 이름은 봉수. 까치 소리 때문에 사람을 - 그것도 봉수 자기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따르던, 지극히 순결하고 착한 사람을 - 죽였노라고 말하는 살인자이다. 바로 이 봉수라는 살인자의 사연을 담고 있는 소설이 김동리의 「까치 소리」이다.
일찍이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김동리의 「까치 소리」를 두고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다.
"『죄와 벌』의 살인 동기와 『이방인』의 살인 동기에 이제 우리는 「까치 소리」의 살인 동기를 세계문학 속에 등록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김윤식의 이러한 평가는 「까치 소리」라는 소설이 만만치 않은 문학적 의미와 깊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평가를 가능케 한 김동리의 「까치 소리」란 대체 어떤 소설인가? 이제부터 그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2. 겉 이야기(外話)와 안 이야기(內話)
「까치 소리」의 서두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단골 서점에서 신간을 뒤적이다 「나의 생명을 물려 다오」라는 얄팍한 책자에 눈이 멎었다. '살인자의 수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생명을 물려준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나는 무심코 그 책자를 집어들어 첫 장을 펼쳐 보았다. (중략) 나는 그 책을 사왔다. 그리하여 그날 밤, 그야말로 단숨에 독파를 한 셈이다. 그만큼 나에게는 감동적이며, 생각케 하는 바가 많았다. (중략) 나는 다음에 그 수기의 내용을 소개하려 하거니와 될 수 있는 대로 그의 문학적 표현을 살리기 위하여 본문을 그대로 많이 옮기는 쪽으로 주력했음을 일러둔다.
위에서 발췌 인용한 서두 대목을 읽다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항이 두 가지 있다. 그 첫째는, 이 「까치 소리」라는 작품이 액자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의 중심이 되는 안 이야기를 겉 이야기가 마치 액자처럼 둘러싸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소설을 액자소설이라고 일컫는 터이거니와, 「까치 소리」의 경우, 작품의 중심이 되는 봉수의 이야기(즉, 안 이야기)를, 봉수의 수기를 사서 읽은 사람의 이야기(즉, 겉 이야기)가 마치 액자처럼 둘러싸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둘째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김동리가 이 작품을 쓰면서 이야기의 핵심이 살인 사건이라는 점을 초두에 언급함으로써, 독자들의 궁금증을 강하게 유발하고 있으며, 독서 과정에 은연중 긴장감이 감돌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작품의 서두에서부터 독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고 독서 과정에 은연중 긴장감이 감돌도록 만드는 기법은 액자에 해당하는 겉 이야기의 단계를 벗어나 안 이야기로 들어간 다음에도 변함없이 이어진다.
「까치 소리」의 안 이야기에 해당하는 부분은 '수기'라고 소개되었던 데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었던 바 그대로 주인공인 봉수의 1인칭 고백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그 고백의 진행 양상을 보면, 먼저 동네의 늙은 회나무에 둥지를 친 까치의 울음소리가 무시로 들리곤 하는 정황이 소개되고, "아침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오고, 저녁 까치가 울면 초상이 난다"는 속신(俗信)이 언급된 다음, 까치가 울기만 하면 심한 기침과 더불어 "봉수야 날 죽여 다오"라고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는 어머니의 모습이 제시되고,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차츰 정말로 어머니에 대한 살의를 느끼게 되는 봉수의 모습이 제시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이들 모자는 어찌하여 이처럼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져 있는가?"라는 궁금증에 강렬하게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그리고 독자를 이러한 궁금증 속으로 몰아넣은 다음에 이어지는 소설의 전개는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는 가운데 빠른 속도로 펼쳐지며, 결국 봉수가 살인을 저지르기는 하되,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을 좋아하고 따르던 영숙이라는 소녀를 죽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결말에까지 나아가는 동안 「까치 소리」는 간결하면서도 밀도 있는 소설 구성의 한 모범을 보여 준다.
3. 속신의 실현에 담겨 있는 의미
그런데 이처럼 소설 전체의 결말부를 이루고 있는 봉수의 살인은, 그가 저녁 까치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바로 그 까치 울음소리로 말미암아, 느닷없이 저질러진다. 그러고 보면 그의 살인 행위는 "저녁 까치가 울면 초상이 난다"고 하는 속신이 실현된 사례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앞부분에 "저녁 까치가 울면 초상이 난다"고 하는 속신이 제시되어 있었던 것을 상기하면, 결국 이 작품의 안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볼 때 '속신의 제시 → 그 속신의 실현'이라는 공식으로 간단히 요약될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저녁 까치가 울면 초상이 난다"고 하는 속신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근거 없는 속신이 「까치 소리」라는 소설 속에서는 정말로 실현되고 있으며, 그것의 실현이 살인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살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죽은 영숙이라는 소녀는 「까치 소리」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 가운데서 가장 착하고 순결한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봉수에게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물이 바로 그 봉수에게 살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게 되었는가? 이 물음과 관련해서는 위에서 이미 '속신의 실현'이라는 명제가 제시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명제가 사태의 전말을 빈틈없이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까치 소리」라는 소설의 표면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것은 물론 위의 명제이지만, 우리는 이 소설을 읽어 가는 동안, 위와 같은 명제의 이면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미묘하면서도 강렬한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 힘이 모든 작중인물들을 완벽하게 장악하여, 최후의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내닫도록 만들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까치 소리」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곧 그 힘의 진정한 실체를 파악하는 것에 다름 아닐 터이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힘의 실체에 관한 물음에 대한 답은 결코 단일한 것일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생각의 방향이나 감수성의 깊이에 따라서 그 답은 상당히 다양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세 가지 정도만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우선, '순결한 속죄양의 제의적(祭儀的) 희생'이라는 신화적 원리에서 답을 찾는 입장이 가능하다. 그런가 하면, 언령(言靈)이라는 말을 가능케 할 정도로 강력하면서도 사람들의 의식 아래에 잠복해 있게 마련인 언어의 특이한 힘에 대한 인식을 열쇠로 삼아 이 작품의 해독을 시도해 보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정신분석의 방법에 입각하여, 외아들인 봉수와 홀어머니인 그 어머니 사이의 특이하고 병적인 모자(母子)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그 모자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봉수의 영숙 살해를 해명하는 입장도 가능하다 - 그리고 이 밖에도 자못 다양한 답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을 터이다 - .
그런데, 우리가 어떤 답에 이르게 되건 간에, 도저히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각자 우리 나름의 답을 찾아 나가도록 만드는 과정에서 이 「까치 소리」라는 작품이 참으로 무겁고 깊은 비극적 울림을 가지고 우리 모두를 전율과도 같은 감동에 휩싸이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4. 「까치 소리」와 『오델로』
지금까지 우리는 「까치 소리」에 나오는 영숙의 죽음을 두고 '비극'이라는 표현을 여러 번 썼다. 사실 영숙의 죽음은 지극히 순결하고 착한 사람이 그 자신 좋아하고 따르던 사람으로부터 살해당한 것이라는 점에서 「까치 소리」를 읽는 독자들의 마음속에 강렬한 비극적 충격을 던져 준다. 우리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보면서 대번에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델로』에 등장하는 데스데모나의 죽음을 연상하게 된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영숙의 비극과 데스데모나의 비극은 '지극히 순결하고 착한 사람이 그 자신 좋아하고 따르던 사람으로부터 살해당한 것'이라는 결말 자체의 성격에서는 동일하지만, 그러한 비극적 결말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은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까치 소리」에는 『오델로』의 이야고에 해당하는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이야고는 『오델로』 속에서 그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를 가지고 비극적인 사건을 차근차근 만들어 가는 인물이다. 그처럼 주체적인 의지를 가지고 사건을 만들어 가는 인물이 「까치 소리」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델로와 봉수 역시 '주체적인 의지'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오델로의 경우는 어쨌거나 그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에 따라서 데스데모나를 죽인 셈이지만, 봉수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의 살해 행위는 표면적으로 보면 까치 소리의 주술적인 힘에 피동적으로 홀린 결과였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 거기에는 그의 주체적인 의지가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았다. 표면이 아닌 이면의 차원으로 가서 따져 보아도 그의 살해 행위에 그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가 개입되어 있지 않았다는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결국 봉수의 영숙 살해라는 비극적 사건은 인간의 주체적인 의지가 개입되지 아니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비극의 현장에서 인간은 모두 주체성을 발휘하지 못한 채 그저 피동적으로 휘둘리기만 하는 존재들로 나타난다. 살해자인 봉수도, 피살자인 영숙도, 또 봉수의 어머니도, 봉수의 애인인 정순도 다 그러하다. 그러니까 "아무도 주체성을 갖지 못한 채 스스로 알지 못하는 힘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휘둘리기만 하다가 살인자와 피살자가 되어 버렸다"는 내용의 비극이 바로 「까치 소리」인 셈이다.
이처럼 「까치 소리」가 주체성 부재의 비극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이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제약하는 부정적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보는 것도 가능하다. 특히 고대 그리스 이래 오랜 전통과 권위를 확보해 오고 있는 서양 비극론의 입장을 수용하는 자리에 서서 본다면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필연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다시 곰곰 생각해 보면, 서양의 비극론에서 말하는 평가 기준을 우리가 절대적인 기준으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주체성을 견지하는 가운데 투쟁을 전개하다가 비극적 결말에 도달하는 이야기가 문학적 가치를 확보할 수 있다면, 주체성을 갖지 못한 채 스스로 알지 못하는 힘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휘둘리기만 하다가 비극적 결말에 도달하는 이야기 역시 얼마든지 그것대로의 문학적 가치를 확보할 수 있다. 전자의 이야기에 인간의 진실이 깃들 수 있다면, 후자의 이야기에도 역시 인간의 진실이 깃들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전자의 이야기든, 후자의 이야기든, 인간의 진실을 깊이 있게 파헤치면서 미적인 성취를 이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까치 소리」는 후자의 유형에 속하는 이야기이면서 인간의 진실을 깊이 있게 파헤치는 한편 미적인 성취를 이룩한 작품으로서, 분명 뚜렷한 문학적 가치를 확보하고 있다.
5. 두 세계의 만남
「까치 소리」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닫힌 세계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세계는 "아침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오고, 저녁 까치가 울면 초상이 난다"고 하는 속신이 군림하고 있는 세계이다. 그 세계는 사람이 주체성을 갖지 못한 채 스스로 알지 못하는 힘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휘둘리기만 하다가 비극적 결말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세계이다. 한마디로 말해 사람이 비합리적인 운명의 힘에 의해 지배당하는 세계, 전근대적 세계, 초역사적 혹은 탈역사적 세계이다.
하지만 「까치 소리」의 등장인물들이 놓여 있는 세계는, 6·25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역사적·현실적 세계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봉수의 심리적 문제도 따지고 보면 6·25전쟁이라는 역사적·현실적 사건에서 연유한 내적 상처로 이해되어야 마땅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방금 지적된 사실을 종합해 보면, 「까치 소리」라는 작품 속에서는 전근대적·탈역사적 세계와 역사적·현실적 세계 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결론이 가능해진다. 그 만남은 참으로 기묘한 만남이지만 또한 자연스러운 만남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만남에는, 억지로 갖다 맞춘 듯한 느낌이 없다. 억지로 갖다 맞춘 듯한 느낌이 들기는커녕, 그 두 세계가 자연스럽게 만나 상호 침투한 끝에 하나로 융합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정도이다.
6. 김동리의 창작 경력 속에서 「까치 소리」가 놓여 있는 자리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는 「까치 소리」라는 작품이 발표된 시기는 언제였던가? 1966년이었다. 김동리의 소설가로서의 공식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던 해가 1935년이니까, 이 작품은 그가 등단한 지 30년도 넘은 시점에서 나온 셈이다.
김동리의 창작 경력은 1935년에서부터 1970년대 말까지 40년 이상의 폭을 가지고 있거니와, 다수의 학자들은 그 기간을 크게 초기·중기·후기의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해방 이전의 기간이 초기에 해당하며, 해방 직후에서부터 대략 1950년대 말까지가 중기에, 1960년대 초부터가 후기에 해당한다. 「까치 소리」는 1966년에 발표된 소설이니까, 이러한 구분 방법에 따르면 김동리 문학의 후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아니, 바로 그 후기를 대표하는 존재의 하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작품이다.
김동리 문학의 후기를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될 만한 소설로는 이 「까치 소리」 이외에 「등신불」(1961)이라든가 『을화』(1978)와 같은 작품이 있거니와, 이들 세 작품을 나란히 놓고 검토해 보면, 자못 흥미로운 공통점이 금방 드러난다.
「등신불」은 전설의 분위기를 담고 있는, 아득한 옛날에 있었다고 하는 만적 스님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이야기와, 2차 대전 때 학병(學兵)으로 중국 전선에 끌려 나갔다가 탈출하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연결시켜 놓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전자의 이야기는 전근대적·탈역사적 세계에 놓여 있는 반면, 후자의 이야기는 역사적·현실적 세계에 놓여 있는 것인데, 「등신불」이라는 작품 속에서 그 양자가 자연스럽게 만나 상호 침투한 끝에 하나로 융합하는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을화』는 무교(巫敎)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와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바로 그 무교를 위협하던 개화기의 시대상 이야기를 연결시킴으로써, 역시 전근대적·탈역사적 세계와 역사적·현실적 세계의 만남과 상호 침투, 그리고 융합을 이루어 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 작품은 1936년에 발표되었던 단편 「무녀도」의 개작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거니와, 「무녀도」에서는 그 두 가지 세계 중 전자 쪽이 훨씬 큰 비중을 지녔던 데 비하여, 『을화』에서는 작가가 후자 쪽의 비중을 상당히 강화시킨 결과, 전자와 후자가 거의 대등한 비중을 가지고 만나는 것으로 전체적인 성격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김동리의 후기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들은 모두 전근대적·탈역사적 세계와 역사적·현실적 세계의 만남과 상호 침투, 그리고 융합을 보여 주고 있는 셈이다. 위에서 필자가 '자못 흥미로운 공통점'이라고 표현하였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시야를 좀 더 넓혀서 관찰해 보면, 이러한 모습은, 방금 언급된 세 작품뿐 아니라, 김동리 문학의 후기에 들어 창작된 작품들 대다수에서 두루 나타난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김동리가 초기 및 중기에 발표한 작품들의 경우는 어떠하였던가? 그 작품들에서는 방금 언급된 바와 같은 양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김동리의 소설가로서의 활동은 1935년부터 시작되거니와, 그때부터 대략 1950년대 말까지 이르는 긴 기간 동안, 김동리의 소설 세계는 두 개의 계열이 서로 섞이지 않고 병존하는 양상을 일관되게 유지해 왔다. 그 계열 가운데 하나는 역사적·현실적 세계를 구체적으로 다루는 작품군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근대적·탈역사적 세계를 원형론적 시각에서 다루는 작품군이었다.
작품의 수로 따지면, 전자 쪽이 훨씬 많다. 여기에 드는 작품들 가운데에는 「혼구(昏衢)」, 「인간 동의」, 「흥남 철수」, 「밀다원 시대」 같은 가작(佳作)도 있지만, 실패작도 많았다. 여기에 비하면 후자 쪽은 작품 수에 있어서는 전자 쪽보다 못하지만 거의 예외 없이 탁월한 문학적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바위」, 「무녀도」, 「황토기」, 「달」, 「역마」, 『사반의 십자가』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방금 열거된 작품들의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사실 이 후자의 계열이야말로 김동리 문학의 독특한 면모를 뚜렷이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작가 자신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고, 당연히 이쪽의 창작에 남다른 의욕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쪽은 그 성격상 애초부터 다산(多産)이 불가능한 것이었다는 점이 한계로 작용하였던 것 같다.
어쨌든 김동리는 작가 활동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1950년대 말에까지 이르는 긴 기간 동안 이처럼 두 개의 계열로 뚜렷이 나뉘는 문학 세계를 보여 주었다. 그동안 그의 작품 세계는 해방을 전후하여 중요한 변화를 보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기간을 초기와 중기의 두 단계로 구분하는 작업도 가능한 터이지만, 초기에나 중기에나, 두 개의 계열이 섞이지 않고 분열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변화가 없었다. 그랬던 것인데, 작가 생활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김동리는 마침내 그 양자의 결합을 성취하였다. 후기의 작품들 대다수가 그 점을 증명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성과가 바로 「등신불」, 「까치 소리」 그리고 『을화』인 것이다. 이처럼 작가 생활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그전까지 계속 분열되어 있었던 두 계열의 결합을 이룩하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질적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만한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김동리는 문학적으로 행복한 마무리를 짓는 데 성공한 작가였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까치 소리」가 액자소설의 형태를 취한 것은 적절한가?
액자소설은 보통 '안 이야기'가 특별히 기이하거나 괴상한 면모를 지니고 있어서 독자들이 보기에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판단될 경우에 작가들이 즐겨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액자라는 장치에는 이야기의 개연성에 대한 독자들의 불신을 줄여 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해 보면, 김동리가 「까치 소리」라는 소설을 쓰면서 액자 장치를 끌어들인 것은 적절한 조치였다는 판단이 금방 내려진다. 「까치 소리」라는 작품에서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까치 소리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하는 사건은 참으로 기이하고 괴상한 사건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2. 「까치 소리」에서 인상적으로 독자에게 다가오는 이미지가 있는가?
김동리의 탁월한 소설들을 읽다 보면 예외 없이 인상적인 이미지들을 여럿 만나게 된다. 「까치 소리」도 예외가 아니다. 두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봉수가 정순을 만나는 장면에서 정순은 '연꽃'의 이미지로 묘사된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더니 정순이, 아, 그 어느 꿈결에서 보던 설운 연꽃 같은 얼굴을 내밀었다. 순간, 나는 그녀가 무슨 옷을 입고, 얼굴의 어디가 어떻다는 것을 전혀 의식할 수 없었다. 다만 저것이 정순이다, 저것이, 아, 설운 연꽃 같은 그것이다, 하는 섬광 같은 것이 가슴을 때리며, 전신의 피가 끓어오름을 느낄 뿐이었다.
여기에서 제시되고 있는 '설운 연꽃'의 이미지는 참으로 강렬하고 매혹적인 것이어서, 독자들은 무엇 때문에 봉수가 그처럼 정순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지를 다른 아무런 보충 설명 없이도 이해하고 남음이 있으며, 그런 봉수에게 공감과 연민을 품지 않을 수 없다는 느낌에 빠져들게 된다.
그런가 하면 정순과 함께 몰래 떠나려던 계획이 좌절된 후 절망에 사로잡힌 봉수가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보리밭 길을 헤매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새까만 돌멩이'의 이미지도 여간 인상적인 것이 아니다. 해당되는 대목을 한번 읽어 보자.
그 어스름 속으로 비둘기 뗀지 새 뗀지 분간할 수도 없는 새까만 돌멩이 같은 것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새까만 돌멩이 같은 것들'로 표현한 것은 얼핏 보기에 기이한 느낌을 주지만 실제 이 장면에서는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생명체인 새를 무겁고 딱딱한 상태로 굳어 있는(죽어 있는) 돌멩이 - 그중에서도 특히 불길한 느낌을 안겨 주는 '새까만' 돌멩이 - 에 비유함으로써 김동리는 봉수의 비정상적인 심리 상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곧 일어나게 될 봉수의 영숙 살해라는 끔찍한 비극의 전조(前兆)를 자연스럽게 마련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3. 한국 현대소설의 역사 속에서 김동리가 차지하는 위치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위의 물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한국 현대소설에 나타난 두 가지 중요한 경향을 근대 지향성과 전통 지향성으로 대별해 볼 때 김동리는 전통 지향성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낸 대표적 작가다"라고 규정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한국 현대소설의 주류를 이룬 계몽주의적 흐름에 맞서서 반계몽적 낭만주의의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우리 소설사의 영역을 넓혀 준 대표적 작가가 김동리다"라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김동리의 문학 세계가 정신적인 측면으로 보나 기법적인 측면으로 보나 한국 현대소설사 속에서 한 높은 봉우리를 이룬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폭넓은 합의가 내려져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김동리 문학을 '현실도피적인 문학의 전형'이라고 보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도 없지는 않다.
<자료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까치 소리, 이동하/재편집: 오솔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