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와 새재를 뜨겁게 노래한 정석주 시조시인
1. 작가 년보
경북 문경은 전국에서 시조문학이 왕성한 지역이다. 인근 상주시 지역이 동시·동화작가가 많이 배출한 것처럼, 문경에는 인구 7만의 자그마한 산골 농촌지역에서 시조작가가 많이 배출되고, 시조문학이 잉태하고 융성하도록 기여보비한 것은 정석주 시인이 있기 때문이다. 정석주 시인은 1966년도에 나래시조문학회를 결성하여 초대회장을 맡았고, 죽는 날까지 나래시조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정석주 시인(본명은 정환)은 1940년에 예천군 풍양면 흥천리 675번지에서 출생하여 풍양초등학교, 대구중학교, 대구영신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66년 문경시 점촌읍 신기리에 정착하여 10년간 신기1리 이장을 맡았다. 그해 1월1일 나래시조문학회 회장을 맡아 1987년 1월 18일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영면할 때까지 20 여년을 오로지 나래시조의 비상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묘지는 예천군 지보면 어신리 선영에 모셔져 있다.
정석주 시인이 공식적으로 문단에 등단한 것은 1980년 8월 시조문학이며, 1981년에는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었다. 또한 미래시 동인,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농민문학회 회장, 문경대관 상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저서로는 시조집 『자유투고가』, 『산하(山河)』, 『새재』, 『설야(雪夜)』 그리고 유필집으로 『연가(戀歌』가 있다.
2. 문경문학관에 상설 작가초대석에서 만난 정석주 시인
문경문학관은 2018년 12월 1일 창설되었다. 당시 권득용 이사장은 창설 당시 문학관 네면 벽에 13개 작가초대석 편액에 어느 장르, 어느 분을 모시느냐로 고심하였다. 그래서 시조부문에 세 분을 모셨는 데 정석주, 신후식, 권갑하 시인이다. 그 이후 4년이 되어가도록 정석주 시인 코너에는 선생의 시집이나 사진, 유품이 모셔지지 못하고 텅비어 있었다. 최근인 2022년 9월 15일에 사과박스 크기만한 우체국 택배가 문학관에 배달되었다. 보낸 분을 보니 대구시 달성군 현풍읍 중리에서 생활하는 허민홍이라는 시인이었다. 내용물을 열어보니 정석주 시인이 생전에 찍은 사진 2매, 제3시조집인 『설야(雪夜)』, 민병찬 시인등이 마련한 유필집인 『연가(戀歌)』 와 82년판 계간 나래시조문학 봄호 등 20여권의 오래된 문예지이다. 허민홍 시인은 ‘문예지 2권에는 붓으로 쓴 친필 시작품이 실려있다’며 노오란 부전지를 붙여 보내는 정성을 보였다. 82년 봄호인 제7호의 권두언을 살펴보자.
일곱 번째의 동인지를 냅니다./ 열화같은 창작의욕과 탄탄한 본연의 인간성으로 다져진 「나래가족」의 알뜰한 목소리이기에 더 정갈하고 소중스럽기만 합니다./ 더구나 이번호를 시발점으로 하여 우리는 계간시조 동인지로서의 효시가 되기에 그 의의는 자못 크다고 하겠습니다. 흔히들 일회성이라고들 하는 동인지의 생명력을 우리는 겸손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결연하게 거부하면서 「나래」는 지난 2년 동안에 년3회씩 동인지를 속간하여 왔으며, 이제 장도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중략) / 우리는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는 80년대의 시조부흥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중차대한 사명감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창작에 정진하여 동인지의 활성화를 꾀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시조를 사랑하는 동호인에게는 항시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 「나래」는 전국의 시조동인회와 부단한 작품교류와 대화의 광장을 계속 실천해나갈 것입니다.// 정석주 주간
문경문학관에는 ‘산하와 새재를 뜨겁게 노래한 시조운동가 정석주(1940~1987)’ 코너에 작가 연보와 대표작품과 작품세계가 게시되어 있다.
통일로에 서면- 산하 32
向北의 마음이사 통일로 그 뿐이랴
줄곧으로 달리고 싶은 녹이 슬은 철마하며
끊어져 낭자한 허리 잘려진 강둑하며
철새도 제 철이면 무심하듯 넘나는데
인연은 어이하여 푯말로나 갈라지고
그리는 정들은 쌓여 망향봉을 울리는가 (후략)
작품세계: 정석주의 시세계는 ‘山河와 새재에 준 애정과 서정’으로 압축할 수 있다. 『설야(雪夜)』와 『산하(山河)』에서는 유장한 호흡과 웅혼한 리듬, 뜨거운 역사의식으로 山河를 절절히 노래했으며, 『새재』에 실린 작품들은 시조의 멋과 맛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을 얻었다.
3. 나래여 활활 펼쳐라
정석주 시인은 나래문학회와 나래시조의 창립자이자 1987년 작고할 때까지 회장을 맡아 혼신의 열정을 다 바쳤다. 나래시조문학회 문우들은 작고 후 10년 후에 『정석주 유필집』을 내었다. 유필집 출판비용을 부담한 민병찬 시인은 1987년 2월 19일 예천군 지보면 까막수리 선영하에 그를 묻고 ‘戀歌’ 시비 앞에서 다음과 같은 시로 곡송(哭送)하였다. ‘돌기둥(석주) 무너진 날에’라는 추모헌시에서 ‘날마다 우러러 보던 새재는 말이 없고/ 당신이 절규하던 「산하」는 그대론데/ 「설야」에 밤길 가듯이 적막하게 가신 그대。// (중략) // 봄풀은 푸릇푸릇 이 산하에 다시 돋고/ 물려줄 「나래」 텃밭 꽃이 피고 푸르리니/ 이승 일 접어두고서 편한 잠에 드소서。’
리강룡 시인은 〈산하에 준 애정과 그 서정〉에서 ‘그의 문학행보에서 주된 활동기간은 1980년이다. 1960년대부터의 준비 기간을 거쳐 1980년에 작품 “비구니”가 “시조문학”지에 천료된 이래 1987년 1월 18일 할렐루야기도원에서 영면하기까지이니 그의 문단활동 기간은 불과 7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못 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의 범상하지 않았던 삶의 모습에서 연유된다고 생각한다. (중략) 석주 그 특유의 뚝심을 바탕으로 동천(冬天)에 올려진 나래의 깃발은 그칠 줄 모르고 펄럭이게 되었고 그는 동인활동에의 “형극의 길”을 달게 지고 걸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경문학관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신후식 시인 코너에서 신 시인이 고(故) 정석주 회장을 바라보며 “님께서 다독여 온 회원들의 방명을 시비 “연가” 언저리에 새겨두었고, 그 가운데 몇 사람은 떠났지만 연륜 30년의 「나래시조문학회」는 오늘도 시조 창작과 보급에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갈 그날까지 피안의 시조를 가꾸소서”라고 읊조리는 듯하다.
정석주 회장 코너 옆에는 정회장이 천료한 권갑하 현 나래시조 이사장이 ‘누이감자’라는 시조로 사은에 보답하며 안경을 쓰고 턱을 괸 채 환히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