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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동학,증산 스크랩 해월 해월신사의 피신과 최보따리 일화 -삼암 표영삼
멩이 추천 0 조회 22 08.01.23 23: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해월신사의 피신과 최보따리 일화

표영삼__ 서울교구·선도사

머리말


    해월신사는 평생에 걸쳐 관으로부터 끈질긴 지목을 받았다. 피신하기 위해 이사한 횟수도 30여 차례나 되며 혼자서 몇 달씩 피신한 횟수도 40회가 넘는다. 끈질긴 노력으로 동학을 민중에게 뿌리내리게 하였으며 제도화에 이바지하였다. 많은 일화와 교훈도 남겼으며 최보따리, 최법퍼리라는 별명도 남겼다. 포덕 26년(1885)부터 1년 간에 있었던 교훈과 일화를 살펴보면 ① 천주직포설과 ② 최보따리·최법퍼리라는 별명 ③ 이천식천설이란 설법 ④ 사인여천의 생활화 등 여타의 설법을 하였다. 이제 여러 법설과 일화를 간추려 살펴보기로 한다.

천주직포설


    을유년(포덕 26년) 6월에 상주 앞재(前城)에 있던 해월신사는 청주와 진천 지역을 순회하였다. 어느 날 진천 금성동(金城洞)을 다녀오다 청주 북이면 금암리(琴岩里, 大周里)에 있는 서택순의 집에 들렀다. 마당에 들어서자 안방에서 베 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심상을 물리쳤으나 베 짜는 소리는 여전하였다. 서택순에게 누가 베를 짜는가 물었다. 며느리라고 대답하였다. 해월신사는 웃으며 “며느리가 베를 짜는가, 한울님이 베를 짜는가.” 되물었다. 서태순은 어리둥절하여 대답을 못했다. 해월신사는 점심도 거르고 베 짜는 며느리의 부지런함에 감동되는 한편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베 짜는 이가 바로 한울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며느리가 베를 짜는가, 한울님이 베를 짜는가.” 물었던 것이다. 구체적인 설법은 없었으나 해월신사의 말씀에는 두 가지 암시를 담고 있었다. 하나는 노동이란 한울님의 창조적 행위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노동을 신성시하면 이에 걸맞은 사회적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 어린 며느리가 점심도 거른 채 부지런히 베 짜는 일을 하면 그에 따른 대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20년 전 당시 신분제 사회나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노동을 천민들의 몫으로 여겼다. 노동하지 않으면 삶을 꾸려나갈 수 없다. 자신이 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해야 한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물질적대사(物質的代謝)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껏 노동에 대한 인식과 제도가 바람직하게 마련되지 못했다. 해월신사는 노동을 개별적인 생존을 위한 물질적 대사 행위로 보지 말고 한 차원 높여서 한울님(온 천지생명체계)의 창조적 행위로 보자는 것이다. 노동하는 행위를 한울님의 행위로 한 차원 높였을 때 그에 대한 대책도 한 차원 높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노동을 한울님의 차원에서 이해하게 되면 무엇인가 알맞은 제도가 마련되리라는 것이다.
    이런 뜻이 담긴 설법은 여러 곳에서 했다. 말로도 하고 몸으로도 하였다. 『천도교창건사』 포덕 26년조에 “평시라도 낮잠을 자거나 또는 공수무료하게 있는 법이 없고 반듯이 짚신을 삼았으며 노끈을 꼬았으니 만약 노끈을 꼬다가 일감이 다하고 보면 꼬았던 노끈을 다시 풀어 꼬았다.”고 하였다. 필자는 음성읍 용산리(龍山里)에 가서 해월신사가 노끈을 꼬며 일화를 남긴 곳을 찾아본 적이 있다. 읍에서 북서쪽으로 2키로 정도 가면 새터라는 마을이 나온다. 이곳 마을에서는 해월신사가 왔을 당시 집집마다 부업으로 노끈을 꼬아 팔았다고 한다. 노끈은 발이나 돗자리를 짤 때 쓰는 고급품이었다. 해월신사는 이 마을에 와서 도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노끈을 꼬았다 한다. 어느 날 노끈의 원료(나무껍질)가 떨어져 쉬게 되었다. 이때 해월신사는 꼬았던 노끈을 다시 풀어 꼬았다고 한다. 제자들이 이유를 물으니 “한울님이 쉬지 않듯이 사람도 손놓고 쉬어서 되겠느냐.”고 하였다 한다.

최보따리와 최법퍼리


    이해(1865년) 6월에 갑신정변 때 공을 세운 심상훈이 충청감사가 되어 내려왔다. 그의 첫 번째 행위는 각 군현 수재들에게 동학도를 색출하라는 명령이었다. 많은 도인들이 체포되었다. 『해월선생문집』에는 “6월 초3일에 김연국이 와서 일이 일어났음을 알렸고, 저녁에는 장한주(蔣漢柱)가 달려와 강시원·이경교(李敬敎)·김성집(金成集) 3인이 붙들려 갔다.”고 하였다. 해월신사는 장내리에도 체포령이 내릴 것을 짐작하고 장한주를 대동하고 공주 마곡사(麻谷寺)로 피신하였다. 한달 후에 보은으로 돌아와 김연국에게 ≠렝?돌보게 하고 장한주와 같이 경상도 영천(永川) 화계동(花溪洞)으로 내려갔다. 『해월선생문집』에는 “다음날 김연국과 장한주를 대동하고 영천 반부장대(半阜場垈)로 가서 일박한 다음 다시 떠나 화계동(花溪洞, 火溪洞 불냇)으로 가서 한 산막(山幕)을 찾아 안식구들과 몇 달간 묵었다.”고 하였다.
    9월 보름께야 처자를 데리고 김연국·장한주와 더불어 상주 화령면(化寧面) 전성촌(前城村)으로 올라왔다. 보은 장내리에 남아 있던 살림살이는 죄다 관원이 가져가버려 보따리 몇 개만 지고 전성촌을 찾았다. 『동학사』에는 “상주 화령 전성촌으로 옮겨서 지냈다. 선생은 항상 이사를 자주 했고, 봇짐을 지고 다니므로 세상 사람들이 별호를 최보따리라 붙였다.”고 하였다. 이 곳 봉촌리(鳳村里)에 사는 박문영(朴文榮, 1914)도 해월신사가 이사할 때 보따리만 짊어지고 오자 ‘최보따리’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했다. 지금도 원통봉 아래 있는 김씨 부인의 묘소를 ‘최보따리 묘’라고 한다. 속설에는 경전을 보따리 속에 챙겨 넣고 다녀 ‘최보따리’라는 별명을 얻었다고도 한다. 해월신사는 또 한 가지 별명이 있는데 ‘최법퍼리’라는 별명이다. 이 말은 청산현 문암리에서 전해지고 있다. 필자는 어느 해 가을에 문암리에 가서 해월신사가 살던 집자리라는 박승재(朴昇載)의 집에서 하루를 묵은 적이 있다. 마을 고로로부터 이곳에서는 해월신사를 최법퍼리라고 불렀다 한다. 해월신사는 포덕 28년(1889)경부터 ‘법헌(法軒)’이라는 존칭을 얻게 되었다. 법헌이란 동학의 최고 어른이 있는 법소(法所)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동리사람들은 이 법헌(法軒)이란 발음을 잘 몰라 ‘법퍼리’라고 받아들었다. 그래서 최법퍼리라고 와전된 것이다.
    해월신사가 전성촌에 와서 생활할 때 청주에 사는 서인주와 보은 송림면 구강리(九江里)에 사는 황하일(黃河一)이 마련해 준 식량으로 연명하였다. 11월에 여름옷을 입고 온 식구가 떨고 있었다. 『시천교종역사』에는 “11월에 이치흥(李致興)이라는 도인이 엷은 옷으로 추위에 떨고 있는 해월신사를 보고 민망하게 여겨 무명 7단(1段, 포목 1匹의 반)을 가져다드려 옷에 풀 솜을 넣어 추위를 보냈다.”고 하였다.

이천식천 설법


    포덕 27년(1886) 3월경부터 세상이 조용해졌다. 찾아오는 젊은이가 늘어났다. 『시천교종역사』에는 그들 중에 서인주, 황하일, 박준관(朴準寬), 박도일(朴道一), 손천민, 이관영, 권병덕, 권병이(權秉一), 박덕현(朴德賢), 서치길(徐致吉), 박치경, 송여길(宋呂吉), 박시요(朴時堯) 등이 끼어있었다고 하였다. 해월신사는 이들 젊은이들에게 여러 가지 법설을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이천식천(以天食天)설이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천지만물이 시천주(侍天主) 아님이 없나니 이천식천은 천지의 상리(常理)니라. 연이나 제군은 일 생물을 무고히 함은 시천주로써 천주를 상함이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천식천은 이천화천(以天化天)이라.”고 하였다. 한울님이 한울님을 먹고, 한울님이 한울님으로 된다는 말이다. 이는 대신사의 시천주 신관념을 확대 해석한 것이다. 모든 천지지간의 생명체는 온천지생명체계(한울님)의 씨앗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체계(한울님)는 밖으로부터 자유에너지를 신진대사할 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이 자유에너지의 신진대사관계가 바로 이천식천(以天食天)이며 이천화천(以天化天)인 것이다. 오늘의 생태순환逵?통한다. 모든 생물(한울님)은 서로 자유 에너지의 대사관계를 갖게 마련이다. 개체생명과 개체생명 사이에는 신진대사관계의 사슬이 있다. 여기서 해월신사가 말하려는 것은 “함부로 다른 생물을 해치거나 상하게 하지 말자.”는 것이다.
    인간은 생태계에서 최상 위에 있다. 많은 생물들이 공급해주는 자유에너지를 신진대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18세기부터 시작된 영국의 산업혁명을 통하여 300년을 지나오면서 우리 인간은 자연계의 정복자가 되고 말았다. 함부로 자연계를 약탈하고 파괴하여 왔다. 그 결과 생태계를 교란시켜 지구의 온난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대로 가면 결과는 너무도 뻔하다. 고도의 산업화가 진행함에 따라 생물의 다양성은 파괴되고 자원고갈과 폐기물의 과다배출은 생태계를 마비시키고 말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그리고 이 세계는 나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다. 온천지 생명체계와 같이 살아가는 세계이다. 우리들의 차원을 온 천지생명체계인 한울님의 차원으로 높일 때 해결의 실마리가 열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천식천의 설법이다.

여타의 법설


    해월신사는 이밖에도 전성촌에서 여러 법설을 하였다. 천인합일의 말씀을 하였다. 한울님 따로 사람 따로 마음 따로 떼어보지 말고 하나로 보라고 하였다. 사람과 그 마음과 모든 생물은 온 천지생명체계(한울님)라는 하나의 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물일체(萬物一體)의 생각을 가지고 다른 생명을 이해하라는 말이다. 이 법설도 천식천설(天食天說)과 관련되어 있다. 과거 우리들은 심령(心靈)과 육체를 따로 보아왔다. 죽으면 영혼은 저 세상으로 간다고 믿어왔다. 해월신사는 “심(心) 즉 천(天)이며 천(天) 즉 심(心)이라.” 하여 온 천지생명체계를 떠나서 심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온 천지생명체계의 틀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이치에 투철(透)해야 도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하였다.
    다음 법설은 귀신과 조화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다루었다. 이 말은 송대(11세기) 이후의 철학적 귀신론과 무관하지 않다. 장횡거(張橫渠)는 “귀(鬼)는 굴(屈)이요 신(神)은 신(伸)”이라고 하였다. 해월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통속적인 귀신론을 부정하고 생성변화하는 그 자체를 귀신으로 보자는 것이다. 우리들이 보고 듣고 말하고 웃는 일상적인 것이 모두 조화라는 말이다. 지금은 귀신론이 자취를 감추었으나 120년 전에는 도처에 귀신이 도사리고 있었다. 특히 농촌에 가면 생활자체가 귀신론에 파묻혀 있었다. 이런 미혹을 떨쳐버리지 않으면 세상을 바꿀 수 없었다. 여겨서 해월신사는 세상의 실체를 바로 보는 안목을 넓혀주기 위해 계몽적인 설법을 했던 것이다. 다음은 부부간의 화목을 강조하였다. “부부화순(夫婦和順)은 오도의 초보“라 하여 수행의 기본으로 삼으라 하였다. 수행이란 오매한 세계를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가정생활에서 소중한 부부관계를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부부간의 화목은 생활세계를 건실하게 바꿀 수 있는 기본이다. 이 기본을 떠나서 바르고 참되고 뜻있는 삶이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부인이 부명(夫命)을 불순하거든 부(夫) 성을 진(盡)하여 배하라.”는 말이 있다. 그 중 ‘부명(夫命)’이란 표현은 해월신사의 말을 잘 못 전한 것으로 보인다. 명령이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분부이다. “온언순사(溫言順辭)로써 일배(一拜) 일배하면 수(雖) 도척(盜拓)의 악이라도 반드시 감화가 되리라.”는 뒤의 말을 보면 명령이 아니다. 아랫사람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윗사람이 절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부인은 일가의 주인”이므로 남편은 평등한 인격관계를 유지하면서 주인대접을 해야 한다. 명령이 아니라 뜻을 전하는 것이다. 뜻이란 바로 명(命)이기도 하다. 따라서 명(命)자는 남편의 뜻으로 바꾸어 해석해야 한다. 즉 “부인이 부의(夫意)을 받아주지 않거든 부(夫) 성을 진(盡)하여 배하라.”는 말로 바꾸어야 한다.

결론


    해월신사의 법설은 우리의 생활을 바꾸는데 주력했음을 알 수 있다. 대신사는 새로운 삶의 틀을 창조하는데 가르침의 초점을 맞추었다. 해월신사도 우리의 삶을 한 차원 높이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자신의 말보다 수운대신사의 본뜻을 밝히는데 힘을 기울였다. 대신사로 돌아가 생각하고 말씀하고자 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이천식천설을 비롯한 그 많은 설법은 해월신사의 독창력이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수운대신사의 본뜻을 시대에 맞게 재해석한 내용들이다. 인시천, 인즉천, 인내천과 같은 가르침도 대신사의 시천주라는 본뜻에 바탕을 두고 시대에 맞게 재해석한 가르침이다. 우리들도 대신사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오늘의 시점에서 재해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신인간 146.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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