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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교통발달사 5
조선시대 통신제도[봉수,파발],조운제도,배의 종류
1. 조선 전기 통신제도 더욱 빠른 통신법이 개발되다
조선시대의 봉수는 외적의 침입 같은 국경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정부나 이웃지방에 알리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역로제도가 주로 중앙의 공문을 지방관아에 전달하는 하향식인 것과 달리 봉수제는 변경에서 중앙으로 급보를 전하는 상향식인 것이 특징이다.
선조30년에는 파발제도가 등장했다. 파발은 나라의 긴급하고 중요한 소식만을 빠르게 전달하는초특급 관용통신망이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봉수제도의 발달
봉수제도의 정비
긴급 통신수단으로의 봉수제도(烽燧制度)는 조선시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의 봉수는 외적의 침입 같은 국경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정부나 이웃지방에 알리고, 그 지방 주민이 재빨리 대응토록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봉수망은 국가의 신경조직과 같아 역로와 함께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아울러 통치체제를 효과적으로 다지는 데도 한몫 했다.
역로제도가 주로 중앙의 공문을 지방관아에 전달하는 하향식인 것과 달리 봉수제는 변경에서 중앙으로 급보를 전달하는 상향식인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역제는 행정기능 중심인데, 봉수제는 군사기능 중심이었다. 봉수는 삼국시대부터 이용했으나 본격적으로 법제화된 것은 고려 후기였다. 조선의 봉수제는 이를 토대로 정비되었다.
조선시대 때 변경의 봉수대는 긴급한 사정을 발견하면 지체 없이 밤에는 횃불로써, 낮에는 연기로써 알렸다.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어서 횃불이나 연기로 연락할 수 없을 때는 봉수군이 직접 다음 봉수대로 달려가서 알리는 식으로 차례대로 중앙에 보고했다.
원래 봉수란 용어는 밤에 불로써 알리는 ‘연봉(燃烽)’과 낮에 연기로 알리는 ‘번수(燔燧)’를 합친 말이다. ‘봉화(烽火)’란 말은 야간의 연봉만을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주간의 번수까지 포함한 뜻으로 바뀌어 고려 말기부터 봉화로 불렸다.
봉수대는 신호를 인식할 수 있을 만한 거리, 즉 몇 십 리마다 한 곳씩 세웠는데, 전망과 관측이 쉬운 산마루에 세웠다.
봉수의 관리와 책임은 그 기능에 맞게 군대가 맡았다. 중앙에서는 병조의 무비사(武備司)가,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수령,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도절제사, 순찰사 같은 군사 책임자가 관리했다. 수령은 봉수군의 차출과 그들의 근무활동을 감독하는 연대책임을 졌고, 주위의 상황은 물론 봉수대 시설의 이상 여부를 늘 살펴야 했다.
각 봉수대에는 봉수군과 지휘 책임자인 오장(伍長)이 배치되어 봉수대에서 기거하면서 밤낮으로 살펴 이상 유무를 수령에게 보고하고, 수령은 유사시에 즉시 관찰사에게 보고했다. 관찰사는 3개월 단위로 3·6·9·12월 말에 정기적으로 근무상황을 병조에 보고했다.
봉수군은 14세기 말부터 봉졸(烽卒), 봉군(烽軍), 봉화군(烽火軍) 등으로 불렀는데, 별칭으로는 봉화간(烽火干), 착망군(着望軍), 착망인(着望人), 후망인(侯望人), 해망인(海望人) 등도 있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하면서 명칭이 봉수군으로 결정되었다.
처음에는 봉수군만이 봉수대에서 근무하였는데, 통솔에 문제가 있어 세종28년(1446)경부터 반장인 감고(監考), 즉 오장(伍長)을 배치했다. 봉수대에서 근무하는 감고와 봉수군의 수는 시대나 장소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고, 근무일수도 달랐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보면 변경지대의 봉수대에는 봉수군 50명과 감고 10명이 10일마다 교대로 근무하였으며, 봉수군은 출퇴근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반드시 부근의 주민을 차출한 것으로 나와 있다.
신호를 알리는 봉화법(烽火法)은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신호의 표시는 정세의 변동에 따라서 횃불이나 연기의 수, 즉 거수(炬數)로써 구별토록 했다. 일찍이 고려 때나 중국 당나라에서는 4거법(炬法)이 일반적이었으나, <경국대전>에서는 5거법(炬法)으로 정했다.
평상시 아무 일이 없으면 1거(炬)로 하다가 사태가 일어나면 거수(炬數)를 늘렸다. 육지는 적병이 국경 쪽으로 움직이면 2거(炬), 국경에 접근하면 3거(炬), 국경을 침범하면 4거(炬), 우리 군대와 접전하면 5거(炬)로 올렸다. 바다에서는 적선이 바다 위에 나타나면 2거(炬), 해안에 가까이 오면 3거(炬), 우리 병선과 접전하면 4거(炬), 적군이 육지로 상륙하면 5거(炬)를 올리도록 했다.
봉수제는 그 기능에 걸맞게 신속해야 했다. 원래 봉수는 동서남북 어느 쪽에 위치하든지 대략 12시간이면 중앙에 전달되어야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봉수군의 태만, 봉수대의 관리 소홀로 전달되는 것이 너무 늦거나, 불통되기도 했다,
중종 27년(1532)에는 변방에서 서울까지 5~6일이 걸렸다는 기록도 있다. 이래서 정부에서는 봉수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법적 조치를 취했다. 근면 성실한 봉수군은 표창하고 태만하거나 불성실한 봉수군은 엄히 징계하였는데, 심하면 참형을 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중엽부터 기강이 무너지면서 결번(缺番)과 대립이 잦았고, 때로는 도적들이 봉수대를 차지하고는 거짓으로 봉화를 올리기도 했다.
봉수망의 구성
봉수는 신속한 연락을 주 기능으로 하기 때문에 각 봉수대는 이웃 봉수대와 긴밀한 연락망을 이루고 있었다. 봉수의 연락망은 기능의 중요성에 따라 간선과 지선으로 나누었는데, 변경지방에서 중앙으로 직접 통하는 직봉(直烽: 직통봉수대)과, 간선을 보조하는 지선인 간봉(間烽: 간통봉수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북쪽으로는 두만강변 함경도 경흥의 서수라에 있는 우암봉수대(牛巖峰燧臺), 동남쪽으로는 남해변의 경상도 동래에 있는 다대포의 응봉봉수대(應峰烽燧臺), 서북쪽으로는 압록강변의 평안도 강계 만포진에 있는 여둔봉수대(餘屯烽燧臺), 같은 서북쪽 압록강 입구의 평안도 의주에 세운 고정주봉수대(古靜州烽燧臺), 서남쪽으로는 전라도 순천 방답진의 돌산봉수대(突山烽燧臺)를 각각 기점으로 하여 정해진 노선을 따라 서울의 목멱산(木覓山: 남산) 봉수대로 집결하도록 구성했다.
조선 초기부터 외적들의 침입이 그치지 않자 북방의 봉수망부터 확장해서 강화했다. 예를 들어 세조 1년(1455) 강계부 적유령에 봉수대가 증설되어 종래 압록강변을 따라서 의주를 경유하던 봉수망 외에 회천-영변으로 이어지는 훨씬 빠른 봉수로가 개설되었다. 전국의 봉수망은 직통봉수대와 간통봉수대를 합해서 모두 670곳쯤 됐는데, 간선 봉수망 다섯 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제1봉수로는 함경북도의 경흥을 출발~회령~길주~북청~영흥~안변~철원~양주~서울의 목멱산(남산) 제1봉수대까지인데, 직봉 122개와 간봉 58개로 짜여졌다.
제2봉수로는 경상남도 동래를 출발하여~경주~안동~충주~용인~서울의 목멱산 제2봉수대까지인데, 직봉 44개와 간봉 110개로 짜여졌다.
제3봉수로는 평안북도의 강계를 출발하여~의주~정주~평양~개성~서울의 목멱산 제3봉수대까지 직봉 79개와 간봉 20개로 되어 있었다.
제4봉수로는 평안북도 의주를 출발하여~서해안을 따라~순안~해주~연평도~서울의 목멱산 제4봉수대까지 직봉 71개와 간봉 21개로 짜여졌다.
제5봉수로는 전라남도 여수의 돌산을 출발하여~진도~해남~영광~공주~천안~안산~김포~강화~서울의 멱목산 제5봉수대까지 직봉 61개와 간봉 24개로 되어 있었다.
사람과 말이 전하는 긴급 통신법 ‘파발’
파발제도의 등장
봉수제도가 조선 중기 이후 가능이 약화되고, 통신기능을 지니고 있던 역제도 물자운반에 치중되면서 새로운 통신망이 필요했다. 더구나 임진왜란을 맞아 봉수제도는 거의 마비상태가 되어 변방의 사정을 중앙에 신속히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나라의 위급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만든 봉수로도 화급함을 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잇따라 터지자 더욱 빠른 통신제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선조30년에 등장한 파발(擺撥)제도다. 이 제도는 조정의 일반적인 공문이나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보통 우역제도가 아니라 나라의 긴급하고 중요한 소식만을 전달하는 초특급 통신망인 ‘급행’ 우역제도였다.
파발제도를 처음 건의한 사람은 인조의 장인인 한준겸이었다. 그는 왕명을 받아 명나라에 머무는 동안 그곳 군사들이 쓰는 파발제도를 보고 매우 이상적인 통신방법이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귀국하자마자 조정에 건의했고, 선조의 허락을 받아 비로소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도로, 파발군, 파발마 같은 여건을 충분히 갖출 수 없어 중국 사신들이 주로 다니던 서발에만 시행하는 등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의 파발제도를 알고 있었던 조정에서도 한준겸의 건의 이전에 이 제도를 검토했다. 그러나, 역시 제도의 도입에 필요한 이런저런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아 시행하지 못했다.
파발제도가 정착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선조 34년(1601) 도체찰사인 이덕형(李德馨)의 강력한 주청 때문이었다. 조정에서는 명나라 군대가 전국 주요 도로에 설치했던 파발막(擺撥幕)을 재활용해서 파발군 6~7명을 소속시킨 뒤 연락업무를 맡겼다.
파발은 신속성이 중요하지만 처음에는 전용 파발로가 개설되지 않아 주로 역로를 이용했다. 하지만 때로는 봉수대를 따라가거나 지름길을 택하는 등 웬만하면 최단거리로 달렸다.
파발로의 개설
파발은 다시 기발(騎撥)과 보발(步撥)로 나누었다. 기발은 일반관리들이 타는 조랑말이나 당나귀가 아닌 날쌘 군마를 타고 전달하는 파발이고, 보발은 보병이 걷거나 뛰어서 전달하는 파발이었다. 기발은 파발로 25~30리마다 1참(역)을, 보발은 30~40리마다 1참을 두었다.
기발참에는 팀장격인 파장(擺將) 1명과 발군(撥軍) 5명에 군마 5필씩 딸려 있었으나, 보발참에는 군마가 없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기발이 물론 빨랐지만 보발도 젊고 날랜 병사들을 뽑았던 터라 서울과 동래 사이를 23일 만에 주파하기도 했다. 보발은 밤낮 없이 달리는 것이 임무였는데, 중간에 잠시도 쉬지 않고 릴레이식으로 달렸다.
조선 후기의 파발망 조직은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을 3발로 나누었는데, 각각 서발, 북발, 남발이라고 불렀다.
서발은 서북노선(西北路線)으로서, 서울~개성~평양~의주간에 41참(站)을 두고 전체 거리는 1천50리였다.
북발은 동북노선(東北路線)으로서, 서울~안변~함흥~회령~경원~경흥간에 64참(站)을 두고 전체 거리는 2천300리였다.
남발은 동남노선(東南路線)으로서, 서울~경기도 광주~충주~문경~상주~대구~청도~밀양~동래 사이에 31참(站)을 뒀고, 전체 거리는 920리였다.
3발 가운데 서울-의주 사이의 서발 41참에는 기발을 두었는데, 중국과 몽고의 침입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북발과 남발에는 보발만 두었다. 중국사신의 왕래나 몽고 오랑캐들의 침입이 잦던 서발의 기발들은 가장 숨가쁘게 뛰어다녀야 했다. 이들은 변방의 급보를 서울 궁궐에 전달한 뒤 서울 북문 밖 불광동에서 머물며 오갔기 때문에 이곳을 구파발이라 불렀다.
파발제도는 비상교통망이기도 했는데, 일반관리들이 행정업무를 위해 타고 다니던 역로제도와 완전히 다른 조직으로 운영했다. 이렇게 역마와 기발 그리고 파발군이라 불리던 보발들이 쉴새없이 전국의 길을 누빔에 따라 전국을 연결하는 장거리 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일반백성들도 차츰 이 관용 길을 따라 여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전국을 떠도는 보부상들에게는 훌륭한 장사 길로 이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첩보(捷報)’라고 부르기도 했던 보발병사들과 보부상들은 지리를 안내하고 각 고을의 명산물을 소개하는 정보교환 때문에 친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상업발달에 한몫 하기도 했다. 이렇게 발달해오던 역로와 파발은 조선중엽에 와서 관민이 공용하는 국도로 차츰 변했다.
파발제도의 운영
기발과 보발이 급보를 전달할 때는 주로 ‘현령전송(懸鈴轉送)’ 방법을 썼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교통이 더욱 빨라야 나라를 적으로부터 신속히 방어하고 구할 수 있다. 그래서 고려 말부터 쓰기 시작한 이 전송방식은 시간을 다투는 적군의 정보나 적을 막을 수 있는 임금의 작전명령을 역로보다 더 빠르게 전달한다.
‘현령’이란 말은 ‘방울(鈴)을 단다(懸)’는 뜻인데, 실제 방울을 쓴 것은 아니고 공문서가 들어있는 봉투에 동그라미를 그려 표시했다. 동그라미가 한 개면 급하고, 두 개면 한 개보다 더 급하고, 세 개가 그려져 있으면 나라의 존망을 좌우할 만큼 시급하고 중요한 문서라는 뜻이다.
시급한 문서는 등에 현령을 표시한 관복을 입은 가장 젊고 날랜 병사가 현령 깃발이 꽂힌 빠르고 힘센 군마를 타고 쉬지 않고 밤을 새워 파발로를 달려 전달했다. 각 역에는 보통 관리들이 타는 당나귀만 있었는데, 이 제도가 생기면서 현령을 위한 군마가 한 필씩 대기했다.
중요한 문서는 반드시 기밀을 유지해야 했으므로 관인을 찍어 가죽 주머니에 넣어 전달했다. 국가의 최상급 기밀문서는 분실과 도난을 방지하기 위하여 현령병을 무장시켜 전달하기도 했다.
파발은 빠르고 건장한 발마(撥馬)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끝난 뒤 역이 쇠퇴하면서 발마의 확보가 어려웠다. 그래서 민가에서 기르는 말을 징발하는 등 민폐를 끼치기도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조 2년(1624)에는 각 장수들이 거느리는 군대에서 잘 달리는 ‘능주마(能走馬)’를 반드시 확보하도록 정했다.
파발의 역인 각 발참에는 책임자인 파장이나 발장(撥長)을 한 명씩 배치했다. 발장은 글을 아는 지식층 신분으로서, 종9품부터 정6품까지 있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전령인 발군은 궤군(潰軍), 방군(防軍), 정군(正軍), 노장군(老將軍), 농군(農軍), 정초군(精草軍), 또는 장무대(壯武隊)에서 날래고 건장한 기병을 주로 뽑아 배치했다.
이 파발제도는 조선 후기로 가면서 많은 폐단을 가져왔다. 더러 전달이 늦을 때도 있었고, 관료들이 발군과 파발마를 불법으로 이용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국가 기밀이 누설되는 일도 있었다. 이 파발제도는 고종 32년(1895)에 현대식 전기통신 시대가 개막되면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민간통신의 주역 사발통문
최단거리 통신
역로나 파발조직이 조선조 중기까지는 가장 빠른 `관용교통망`이었지만 더욱 빠른 통신방법이 백성들 사이에 생겼다. 등짐장사꾼들인 보부상패거리들이 특히 자주 쓰던 사발통문이 그것이다.
사발통문은 원래 백성들이 관청에 억울한 사정을 기록한 호소문이나 또는 그들 사이에 전달되는 비밀 통지문을 말한다. 그런데, 이때 주모자의 이름을 감추기 위해 관련자의 이름을 사발모양으로 삥 둘러 적고 그 가운데 용건을 기록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국가의 관용통신인 우역이나 파발은 일정한 역로를 통해서 전달되지만 사발통문은 이런 길의 제약을 받지 않은 최단거리 지름길 통신이었다. 사발통문을 띄우거나 접수하던 보부상 통신센터는 임방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또한 보부상들의 집결장소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고을마다 있었다.
각 고을의 임방은 모두 직선 코스로 연결되어 있었다. 어느 고을의 보부상 우두머리가 ‘무엇무엇을 구해서 언제까지 어느 고을로 모이라’는 사발통문을 내리면 젊고 날쌘 청년이 그것을 들고 지름길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 마을에서 마을로, 고을에서 고을로 전달했다.
2. 조선시대의 수상교통 조운정책의 개혁과 강화
전국에서 세곡을 걷어들이기 위한 조운제도는 가장 조직적이고 규모가 큰 수상교통체계였다. 고려 말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경제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농토개혁과 조운제도 재정비를 서둘렀다. 이에 따라 중앙정부가 조창·조선·조군을 직접 관장하는 ‘관선조운체제’가 제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조운제도 일부를 수정해야 할 만큼, 왜구의 노략질과 해난사고도 잇따랐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강에 진과 도를 설치하다
조선전기에 전국의 간선도로는 9개였다. 이들 간선도로 중에서 제4, 5, 6, 7, 8, 9로 등 6개 도로는 한양 도성의 남쪽에 가로놓인 한강을 통과해야 했다. 삼남지방을 비롯한 한강 이남지방과의 왕래에 한강은 큰 장애물이었다. 그리고 서울 북쪽에 가로놓인 임진강은 황해·평안도 등 북부 지방과 한양 사이의 교통을 차단하고 있었다. 이 두 강은 도성의 방어를 위한 자연적인 방어선은 될지 모르지만 백성들의 교통에는 큰 걸림돌이었다.
사람이 물 위에 다리를 놓게 되기까지, 자연은 두 가지의 지혜를 주었다. 그 중 하나는 계곡의 물이 돌을 굴리며 내려가다가 물길의 중간 중간에 하나씩 남겨 둔 것이고, 또 하나는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려 계곡을 가로질러 준 것이다. 사람들은 전자에서 징검다리를 놓는 법을 알게 되었고, 후자에서 외나무다리를 놓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러나 토목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사회에서는 큰 강에 다리를 놓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리보다는 사용하기 쉬운 배를 타고 강을 건넜고 양쪽 지점에 나루터가 생겨났다.
조선시대 주요 간선도로가 통과하는 한강에는 일찍부터 광나루(廣津)·삼밭나루(三田渡)·서빙고나루(西氷庫津)·동작나루(銅雀津)·노들나루(露梁津)·삼개나루(麻浦津)·서강나루(西江津)·양화나루(楊花渡)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특히 광나루·삼밭나루·서빙고나루·동작나루·노들나루는 5강진(江津)이라고 해 일찍부터 한강을 건너는데 중요한 길목으로 이용되었다. 이들 한강의 양쪽 나루터를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건네주는 나룻배는 양편을 이어주는 최대의 교통편의 시설이었다.
나루는 규모에 따라 도(渡)와 진(津)으로 구분되었다. 넓은 강에 있는 나루는 도, 이보다 좁은 강에 있는 나루는 진이라 했다. 그러니까 같은 한강 줄기라도 양화도처럼 강폭이 넓은 곳에 있는 나루는 도라고 했고, 노량진처럼 강폭이 좁은 데에 있는 나루는 진이라 했다.
진도(津渡)는 고려시대부터 제도적으로 설치, 이용했는데, 예성강의 벽란도(碧瀾渡), 임진강의 하원도(河源渡), 대동강의 관선진(觀仙津), 그리고 한강의 사평도(沙平渡)와 양화도(楊花渡) 등이 그것이다. 진도제(津渡制)는 조선시대로 이어졌으나 고려의 것을 거의 그대로 이용했다. 서울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겨짐에 따라 한강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 조선시대 초기 한강에는 양화도와 사평도밖에 없었다.
그 후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면서 진도(津渡)가 서민의 교통시설로서 계속 확장 설치되었지만 국가가 관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태종이 호패법을 실시해 전국의 인구 동태를 파악하고 아울러 그 이동을 조사하며 범죄인들을 적발하는 과정에서 진도의 중요성이 대두되었고, 이후 국가는 별감(別監)을 파견해 진도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도(渡)의 책임자인 별감은 세종 때를 전후해 도승(渡丞)으로 지위가 올라가는데, 세도가의 자제들이 이를 차지하고 권세를 부려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도승에게는 복무의 대가로 위전(位田)이라는 녹봉과 각 진·도의 운영비용으로 진척위전(津尺位田)이 지급되었다. 조선후기 한강의 11개 진·도에는 관선과 사선을 합해 63척의 도강선이 운행되었다.
진도의 사무는 우두머리인 도승을 보좌하는 진이(津吏)가 처리했으나, 실제 나룻배를 모는 사람은 진부(津夫) 또는 진척(津尺)이라 부르는 뱃사공들이었다. 진부들은 강제로 동원되어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진부는 도강뿐만 아니라 생선을 잡아 궁궐에 바치는 일까지 맡는 등 혹사를 당해 이를 피해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
한강의 진·도제는 곧 전국으로 퍼져나가 대동강, 임진강, 금강, 영산강, 낙동강 등 내륙의 큰 강들에도 설치되어 인마의 도강이 활발한 나루는 규모에 따라 진·도로 지정하고 해당 지역의 지방관청이 별감을 파견해 관리했다. 무임 승선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 도강용 관선은 한강에만 배치되었고 지방의 진·도에는 거의 민간용 유료 사선이 도강운행을 했다.
조운제도의 변천
조운정책의 개혁
근대화 이전의 조선에는 고개와 구릉, 하천이 많았으나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해 육상교통이 제한적으로 발전했다. 비록 전국 각지에 도로가 개설되어 있었지만 인마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역로와 파발로 중심의 행정·군사적 도로들이었고 경제발전을 위한 화물 운송용 도로는 아니었다.
따라서 물량 이동은 육지에서는 인력과 우마에 의존했고, 강에서는 강선(江船)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 초기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저서인 <택리지(擇里志)>에서 사람이 터를 잡는 데에는 첫째 지세가 좋아야 하고, 다음은 교역이 편해야 하며, 특히 지세에 있어서는 먼저 물길을 살펴본 후에 들판의 형세, 산악의 모양 등을 헤아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선왕조의 수도인 한양은 수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한강 하류와 서해안을 통해 충청남도·전라도의 서남부지방과 황해도·평안도 서북부지방의 물자가 한양으로 운송되었고, 한강의 상류인 남한강·북한강을 통해 충청북도와 강원도의 물자가 들어왔다.
한강 상류와 이어지는 낙동강은 경상도 지방과 서울을 연결하는 중요한 내륙수상 교통로였다. 한강상류 유역에는 광주·여주·충주·원주·춘천 등 도시들이 발달해 사람들은 주로 한강의 수로를 이용해 왕래했다.
그러나 18세기까지는 왜구와 몽고의 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외침과 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조선의 민간경제가 자급자족적인 구조로 변화해 지역간의 원거리 교통이나 교역은 그리 발달하지 못했다. 고려 이래로 백성이 국가에 바치는 세금인 세곡을 걷어들이기 위해 국가가 강제적으로 운영하던 조운(漕運)이 가장 조직적이고 규모가 큰 수상교통체계였다.
조전(漕轉), 조면(漕輓), 해운(海運), 수운(水運), 참운(站運)이라고도 불렀던 조선전기의 조운은 고려의 조운을 토대로 해 재정비한 수상운수였다. 그러나 12세기 말 고려 무신의 난을 계기로 국내정세가 동요하면서 조운제도 기능이 약화되기 시작해 고려 말인 14세기 후반 왜구가 창궐하자 거의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조운의 폐허로 세곡의 수상 운송이 불가능해지자 고려조정은 세곡의 대부분을 육로를 통해 운송했다. 국가에서는 이를 위해 역로 요소 요소에 원과 관(院館)을 두어 운송을 원활하게 하려 했지만 수송 중 관리들의 부정과 착취가 극심해 결국 국고에 납입되는 세곡의 수송량은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국가 재정이 날로 궁핍해져 결국 고려왕조의 쇠망을 불러오는 큰 원인이 되었다.
위화도회군으로 고려 말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경제기반을 강화시키는 방법으로 농토개혁과 조운제도를 재정비했다. 조운제도의 정비작업은 국가재정의 부강이 시급했던 당시로서는 농토개혁인 과전법(科田法)과 함께 매우 중요했던 당면 과제였다.
이를 위해 이성계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까지 문신으로 삼도수군도체찰사를 역임하면서 조운 정비에 공을 세우고 운하 건설을 시도했던 왕강(王康)과 간신으로 대사헌을 역임하면서 특히 농지개혁과 조운 정비에 공헌했던 노숭(盧嵩) 등을 기용해 조운제도를 다시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성계는 각 지역의 세곡을 수집 보호하는 장소인 조전성(漕轉城)과 조운선이 험한 해로를 피해 운항할 수 있는 운하인 조거(漕渠)를 건설하고, 정몽주(鄭夢周)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운로 요소에 역참에 해당하는 수참(水站)을 설치했다.
아울러 고려 말기에 거의 폐쇄된 세곡을 모아 임시 보관하는 창고인 조창(漕倉)들과 운송 선박인 조운선(漕運船)들을 서둘러 복구한 결과 40여 년 동안 불통됐던 세곡의 조운이 다시 개통되어 국고가 충실해지고 백성들의 삶도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개경에서 새로 천도한 한양은 조운을 위해서는 최고의 적격지였다. 한반도의 중앙을 관통하는 한강변에 위치해 수로와 해로의 이용이 쉬웠고 고려가 남긴 조창들을 관리하기도 편했다.
중앙정부가 조창·조선·조군을 직접 관장하는 관선조운체제(官船漕運體制)로 방향을 돌린 조선왕조는 초기부터 조운제도 정비에 적극 노력해 조창을 복구 확산하는 한편 조선을 많이 건조하고 조운을 철저히 관리 감독해, 필요한 세곡을 거의 차질 없이 지방에서 한양의 국고로 운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조운에 대한 왜구의 노략질이 계속되고 해난사고도 자주 일어나서 한때는 조운제도를 포기하고 사선(私船)에 의존한 세곡 운송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종과 세조의 강력한 추진으로 조선왕조의 세곡운송정책은 제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창의 재정비
관선조운체제의 핵심은 조창과 조선·조군의 확보에 있었다. 조선왕조는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로 황폐한 조창을 복구하면서 새로운 조창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경상도에는 고려 때의 마산창(馬山倉-창원)과 통양창(通陽倉)을 복구하고 새로 설치한 불암창(佛巖倉-김해) 등 3곳의 창고에 남부 연해안 지방의 세곡을 집산해 조운했다.
북부 내륙지방의 세곡은 고려시대부터 조령(鳥嶺)이나 죽령(竹嶺)을 넘어 북한강과 남한강의 수로를 이용해 상납되었지만, 지역의 생산조건과 교통의 어려움 때문에 포화(布貨)로 대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가장 많은 세곡을 상납하던 전라도에서는 고려 때의 용산성(龍山城)과 영산성(榮山城)에 조창을 설치하고 인근의 세곡을 수납해 조운하던 체제를 강화했다. 용산성은 그 후 세종 10년(1417)에 피포(皮浦)로 옮긴 후 덕성창(德城倉)으로 개명했다.
충청도에서는 고려시대부터 크게 두 개의 운송로를 이용했다. 즉 서해안을 경유하는 해로와 한강을 이용하는 수로였다. 충남지방의 세곡은 서해안의 부세곶(貢稅串)·경양포(慶陽浦)·범근천(犯斤川) 등지에서, 충북인 내륙지방의 세곡은 한강 상류의 연천(淵遷)·앙암(仰巖)·추호포(推乎浦)·이포(李浦) 등지에서 수납되어 서울의 국가창고인 경창으로 운송되었다.
이들 세곡의 수납지도 대개 고려시대의 조창 또는 조운포구의 옛터와 인근 지역에 설치되었다. 즉 경양포는 하양창(河陽倉)이, 연천(淵遷)은 덕흥창이 있던 곳이다. 그밖에 강원도에서는 흥원창(興原倉)과 소양강창(昭陽江倉), 황해도에서는 금곡포창(金谷浦倉)과 조읍포창(助邑浦倉)을 설치해 각기 한강과 예성강의 수로를 이용해 세곡을 운송했다.
이처럼 조운제도 조기 정상화를 겨냥한 조정의 노력으로 점차 체제가 갖추어져 조선왕조의 조창은 <경국대전(經國大典)> 때 9개 조창으로 정리되었다.
아산의 부세곶창((貢稅串倉)에서는 충남, 충주의 하흥창(可興倉)에서는 충북과 경상도, 함열의 덕성창과 나주의 영산창(榮山倉), 그리고 후에 새로 설치된 법성포창(法聖浦倉)에서는 전라도, 원주의 흥원창(興原倉)과 춘천의 소양강창(昭陽江倉)에서는 강원도, 배천의 김곡포창(金谷浦倉)과 강음의 조읍포창(助邑浦倉)에서는 황해도의 세곡을 수납해 서울 경창으로 운송 수납하고,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는 직접 경창으로 수납하는 체계를 갖추었다.
조운선을 움직이는 조군의 확보
국유선인 관선(官船) 중심의 조운제도를 확립하면서 배를 움직이는 선원인 조군(漕軍)을 조졸(漕卒)이라고도 불렀는데, 사강(沙江)과 격군(格軍)으로 업무가 나뉘었다. 이들 조군은 거의 세습적으로 종사했고, 사공과 격군은 원래 양민 신분이었으나 배를 젓는 천역에 종사해 천민 대우를 받았다.
이들은 매년 계속되는 세곡의 운송, 허다한 잡역, 위험부담이 큰 해상 활동 등 혹독한 노동 때문에 도망해 유랑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조군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초기에는 수군이 조운업무를 담당했는데, 이른바 조전선군(漕轉船軍)이 그들이었다. 당시 수군은 해상 방어와 조운 업무에 번갈아 참여했다. 이는 14세기 후반 삼면 해안에 출몰해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 때문에 조운이 어렵게 되자 해안을 수비하던 수군이 대신 세곡 운송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비롯되었다.
15세기 들어 왜구의 횡포가 잦아들었지만 수군의 겸무는 시정되지 않았고 오히려 파선의 수리와 개조, 소금 굽기 등 과중하고 혹독한 노역을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게다가 조운 도중에 필요한 비용도 스스로 부담해야 하는 등 이들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천민이나 다름없었다.
이를 견딜 수 없었던 수군들은 도망하거나 대역(大役)을 투입하곤 했다. 이런 폐단은 결과적으로 해상 방어와 조운 운영에 큰 차질을 빚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군의 해상 방어 업무를 충분히 살리면서 조운을 원활히 하기 위해 수군을 조운노역에서 해방하고 그 대신 조운을 전담하는 새로운 집단인기선군(騎船軍)을 성종 때 조직했다.
이를 모체로 해 조군 4천470명을 모집해 각 조창에 나누어 배속하고 새로 확보한 조군에게는 고된 노역을 완화시켜 주었다. 성종 5년 (1474)에는 새로 1천490명의 조군을 더 모집해 좌, 우번으로 나누어 교대 근무케 하면서 조군의 체계를 확립했다.
조운용 교통로
조운로(漕運路)는 크게 해운(海運)과 강을 통해 운송하는 참운(站運)으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동해안으로 들어오는 왜구의 침탈을 막기 위해 주로 서해안과 남해안에 조창을 설치해 서해안 해로를 이용한 조운에 주력했다. 왜구의 횡포가 점차 해안에서 사라지면서 각 지방의 세곡은 해로와 강을 통해 수송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서해안은 섬이 많아 항로의 사정이 좋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장연의 장산곶(長山串), 태안의 안흥양(安興梁), 강화의 손돌항(孫乭項), 임천의 남당진(南堂津), 영광의 칠산양(七山梁) 등은 험난한 해로로 유명했다. 조선 초기에는 이 같은 해로의 악조건을 쉽게 극복할 만큼 항해기술이 뛰어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조운선이 난파 좌초되는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 중에서 가장 큰 해난 사고는 태조 4년(1395) 경상도 조운선 16척, 태종3년(1403) 경상도 조운선 34척, 태종 14년(1414) 전라도 조선 66척, 세조 원년(1455) 전라도 조선 55척이 침몰한 일이었다. 이 같은 조선의 침몰은 국가 재정에 막대한 손실을 끼칠 뿐 아니라 조운선과 조군의 확보, 민심에 끼치는 악영향도 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육지로 수송하는 육운론(陸運論), 민간의 선박을 고용하는 임선론(賃船論), 운하를 파는 조거책(漕渠策) 등 온갖 방안이 거론됐지만 어느 것도 실효를 거두기 힘들었다. 심사숙고 끝에 임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 경상도 세곡의 육로수송이었다.
조운정책을 지속하려던 태종은 조운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지만 연이은 조운선의 침몰로 해운을 계속 고집할 수 없게 되자 영의정부사까지 지냈던 한성부윤 하륜(河崙)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상도 세곡만큼은 육로로 수송하기로 결단했다.
그런데 명목은 육운이지만, 실제로는 낙동강과 한강을 이용하는 수운과 다를 것이 없었다. 즉 충주 김천(金遷)에 새로 경원창(慶原倉)을 설치해 해로로 조운하던 경상도지방의 세곡을 이 창고에 수납했다가 낙동강과 한강 상류를 통해 경창으로 운송하는 방법이었다.
이후 낙동강 연안의 김해 등지에서는 국영 조운선이 부족해 사선(私船)을 세내어 낙동강을 거쳐 내륙 운송로를 통해 경원창에 세곡을 수납했다. 그 후 세조 11년(1465)에는 경원창을 인근의 가흥리(可興里)로 옮겨 가흥창(可興倉)이라 하고, 규모를 확장해 경상도 세곡은 물론 이포(梨浦)·추호포(推乎浦) 등지에서 수납하던 충북지역의 세곡도 이 창고로 수납한 다음 한양으로 운송했다.
이렇게 경상도의 세곡은 육로수송으로 바뀌었지만 조정은 전라도 세곡의 해로운송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국가의 재정이 전라도 지방에서 조운되는 세곡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해안 해로가 험하긴 해도 한양으로 세곡을 운송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인조 때 전라도에서 수납하던 세곡은 4만176석으로 국가 전체 세곡 8만2천849석의 50%에 이르렀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의 조창들 중에서 3대 조창이 전라도 서해안에 위치하고 있어 전라도 지방 세곡의 해로운송은 불가피했다. 이래서 서해안 해로에서 가장 난파가 심했던 태안반도에 운하 건설까지 시도했던 것이다.
전국의 세곡이 수납되는 경창은 한양의 남쪽 강변에 설치된 중앙정부의 창고를 말한다. 해운을 통해 한강 하류를 거슬러 온 충남·전라·황해도의 세곡은 서강변에 위치한 광흥강창(廣興江倉)과 풍저강창(豊儲江倉)에, 한강 상류를 통해 들어오는 경상·강원·충북의 세곡은 용산 강변에 위치한 군자강감(軍資江監)과 풍저강창(豊儲江倉)에 수납되었다.
이들 중앙정부의 창고는 모두 태조 원년(1392)에 설치되어 국가 재정을 맡아 왔는데, 광흥창 세곡은 정부 관료의 녹봉으로, 풍저창 세곡은 왕실의 비용으로, 그리고 군자감 세곡은 군량미로 각각 충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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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시대의 해상교통 조운제도의 흥망과 새로운 제도의 도입
조선후기로 들어서면서 조군과 조선의 확보가 더욱 어려워졌다. 온갖 잡역에 동원된 조군들은 공역을 기피했고 기술자와 선재가 모자라 배를 건조하기도 힘들었다. 조운을 대역하던 사선들은 여러 가지 불법행위로 세곡을 횡령해 국가재정에 큰 손실을 입혔다.
마침내 숙종 30년에는 관선조운제도가 폐지되고 사선임운시대가 열렸지만 이 또한 부작용이 만만치 않아 이후 작대법이 도입되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조운선의 관리
조창의 관리와 조군의 확보
조창을 설치하고 선박과 조군을 확보하여 조운을 활성화시킨 조선 조정은 조운 항로관리에도 적극적이었다. 걸핏하면 일어나는 해난사고로 침몰하는 조운선은 국가의 재정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으며, 민간이 입는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런 조난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운항지침을 강화하고 항로도 철저히 관리했다.
조운 항로에 장애가 되는 암석과 토사를 수시로 제거하고 가장 위험한 태안반도 앞의 안흥량(安興梁) 해로를 피할 수 있는 운하건설공사도 고려에 이어 다시 시도했다. 하지만 험한 지형조건과 미숙한 토목기술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 대신 조정에서는 항로표지를 설치하고 조운선들이 항해규칙을 엄수하도록 하여 안전운항에 노력했다.
조운선의 침몰사고는 크게 두 가지 원인 때문에 생겼다. 출항기일을 어기고 늦게 출발하여 도중에서 폭풍을 만나는 것, 그리고 적재정량이 넘는 화물을 실어 전복되는 것이었다.
6, 7, 8월은 장마철이라 폭우와 폭풍으로 운항이 어려웠다. 거친 조류가 흐르고 암초가 많은 태안반도 앞 안흥량과 칠산량을 지나다가 폭풍이라도 만나면 사고를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해난사고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바람과 비가 적고 파도가 잔잔한 2월부터 5월 사이에 운항하는 것이었다.
이 기간에 각 조창에 정해진 적정시간을 넘겨 출항하면 해난사고를 당할 위험이 크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출항시간을 엄수하도록 했고, 특히 7월에 출항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했다.
무리한 짐을 싣는 것을 막기 위해 감독 주무관청인 전함사에서 정량을 싣도록 엄격히 지시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적재한도가 500석인 국영 조운선이 부족했기 때문에 세곡 운송에는 개인 소유 선박이 동원되었다.
이들 가운데 대선은 250석, 중선은 200석, 소선은 130석을 적재한도로 정했다. 이 규정을 어기고 과적하면 조운선에 종사하는 조군은 물론 감독관까지 처벌했다. 또 사고를 막기 위해 출항 때마다 30척을 선단으로 조직하여 운항토록 했으며 웬만하면 단독 운항을 금지했다.
조운제도의 핵심은 조창의 관리와 아울러 조운선과 사공 노릇을 한 조군의 확보였다. 관용 선박이 많을 때에는 조운이 원활했지만, 배의 확보가 어려울 때에는 침체를 면치 못했다. 그럴 때에는 수군의 전투용 병선까지 동원했다.
조선왕조는 선박을 건조하고 관리하기 위해 초창기부터 담당기관인 사수감(司手監)을 두었다. 사수감은 사제감(司宰監), 사수읍(司水邑), 전선읍(典船邑) 등으로 명칭이 바뀌다가 1471년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반포되면서 전함사(典艦司)로 정착되었다. 전함사는 전국의 모든 배와 세곡 운송을 맡은 조운선, 그리고 참선의 건조와 관리를 맡았다.
전함사는 도제조·제조·제검·별좌·별제 등이 전담관리로 배속되었고 내사(內司)와 외사(外司)로 구성되었다. 내사는 서울중부의 징청방(澄淸坊)에 있었는데, 선박과 조선의 관리 사무를 담당했다. 외사는 서강(西江)에 있었고, 그 자체가 바로 조선소였다.
조선시대의 조선소는 한강 연안을 비롯해 수군절도사의 군영이 있는 삼남지방의 수영에도 설치했다. 조선왕조 초기에는 관선의 건조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전함사는 국립조선소의 역할을 했다.
조선 전기에는 병선보다 조운선 제작에 치중했다. 특히 조운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태종대에 본격적으로 조선기술이 발전했다. 태종은 즉위하자마자 삼도조운체찰사 임정(林整)에게 조선작업을 명하여 그 이듬해 조운선 251척을 건조했다.
이어서 태종 10년(1410)에는 병선 185척을 건조했고, 태종 13년(1413)에는 평저선(平底船) 80척을 만들었다. 뒤이어 세조도 국가 재정을 더욱 충실하게 만드는 데에 조운제도가 매우 중요함을 깨닫고 조운선의 건조작업을 대대적으로 시행했다.
선박건조의 최고책임자인 감조경차관 안철손(安哲孫)의 지휘 아래 고을에서 선장(船匠)과 목공 300명을 징집하여 전라도의 변산반도와 완도 연안의 조선소에서 1년만에 선박 100여 척을 만들기도 했다.
선박의 수명이나 관리도 법으로 정했다. 선박은 건조 후 8년째에는 수리하고 이어 6년 뒤에 다시 수리하며, 다시 6년 뒤에는 개조한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조운선의 수명은 20년인 셈이었다. 조운선이 운항하지 않는 때에는 선박마다 조군 두 명을 배치하여 관리했다. 또 조운선을 침몰시키지 않고 무사히 임무를 수행하면 포상하는 제도도 만들었다.
민간 수상운수의 발전
사선조운이 발달시킨 민간 수상교통
국가의 조운제도 정비와 더불어 민간 수운업자에 의한 사선조운(私船漕運)도 점차 발달해 갔다. 고려시대부터 민간 수운업자들이 세곡 운송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조선시대 전기부터 한양은 경제적 정치적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곳을 관통하는 한강유역은 그 어느 강 유역보다도 경제적으로 번창했다. 한강은 경강(京江)이라 불렸는데, 이 유역에 있던 서강·마포·용산·송파 나루에 전국의 중요한 물산이 선박으로 운반되었다.
따라서 경강변에는 조선초기부터 운수업과 함께 선박으로 상업을 하는 선상업(船商嶪)이 발달했다. 이런 선상인들을 강남상인(江南商人)이나 경강상인(京江商人)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경강상인의 활동은 시초부터 세곡 운반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전국에서 거둔 세곡은 모두 조운선이나 병선으로 운반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건국 초기부터 관영 조운선이 부족할 때 사선을 동원하여 운반하기 시작했다. 태종 때에는 전라도 지방의 세곡 7만 석을 한양으로 운반할 때 30%에 해당하는 2만여 석을 사선으로 운반한 적도 있을 만큼 사선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태종 14년(1414에) 전라도 조창의 조선 66척이 침몰하는 사고를 계기로 민간해운업자들의 세곡 운송이 본격화된 뒤 15세기 중엽까지 사선이 세곡 운송에 큰 몫을 담당했다. 세조 대에 이르러서는 강력한 관선조운정책을 펴면서 사선들이 한때 세곡 운송 활동에서 배제되기도 했다.
그러나 관선 조운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 데다, 병선을 조운선으로 쓰는 바람에 해상 방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선의 동원이 불가피해졌다.
중종 5년(1510)에는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는데, 이를 계기로 조운용 병선을 소형 경쾌선으로 만들어 왜선을 공격하는 해안 방어책이 수립되었다. 그러자, 세곡의 운송이 더욱 어려워졌고, 드디어 사선을 빌려쓰는 대선제도(貸船制度)를 만들어 시행했다.
이 제도에 따라 중종 때의 조운은 거의 사선이 맡았다. 그뿐만 아니라 세도가나 지주들이 그들의 농장에서 거두어들인 곡물의 운송도 사선이 맡아 민간 수운의 영역은 계속 확대되어 갔다.
이렇게 민간 수운업자들은 미곡을 수송하기 위해 내륙 깊숙한 곳까지 뱃길을 개척했다. 멀리 남해안에서 평안도 연안 일대와 내륙의 모든 강에 사선의 뱃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에 따라 미곡과 어물, 소금, 목재 같은 상품도 함께 운반하여 매매하는 선상업(船商業)이 발달하게 되었다.
관영에서 사영으로 변한 조선후기 조운제도
조선 후기로 들어와 생산력이 높아져 생긴 잉여생산물이 유통되면서 전국 곳곳에 시장이 생겨나 지방에서는 장시(場市)와 포구(浦口)가 상품유통의 거점으로 자리 잡아 갔다. 물자 수송은 거의 선박이 맡았다. 수레와 넓은 도로 같은 육로교통이 발달되지 못한 탓이기도 했지만, 수로가 육로보다 화물을 대량으로 운송하는 데 훨씬 편리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세곡 운송을 맡으면서 경험이 축적된 것도 한몫을 했다. 육로는 인근 생산지역에서 포구로, 수로를 통하여 운송된 상품을 포구에서 다시 소비지역으로 배달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 고작이었다.
<택리지(擇里志)>의 저자이며 실학자였던 이중환(李重煥)은 물화의 유통에는 말이 수레보다 못하고, 수레는 배보다 못하다면서 해로와 수로의 활용을 강조했다.
“조선의 상업이 발달하려면 우선 교통이 발달되어야 한다. 수레와 선박을 사용하면 상품유통이 활발하고, 전국적으로 시장이 발달하여, 농업과 수공업도 아울러 발달하게 된다. 통상하는 자는 반드시 물길을 좋아하는데, 그 까닭은 수레 100채에 싣는 양이 배 한 척에 싣는 것에 미치지 못하고, 육로로 1천 리를 가는 것이 뱃길로 1만 리를 가는 것보다 편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수상운송을 주도한 선인(船人)들은 일찍이 16세기부터 세곡과 소작료 운송으로 토대를 굳힌 사선인(私船人)들이었는데, 조선후기에 와서는 경강선인(京江船人)과 지상선인(地上船人) 등으로 나뉘어 조선시대 민간경제를 좌우할 만큼 위세를 날렸다.
조선후기 사선인들의 수상운송은 네 군데 유통로에서 이뤄졌다. 첫째는 한강 어구에서 한양을 거쳐 한강 상류에 이르는 수로이고, 둘째는 한강 어구에서 충청도·전라도 연안을 거처 남해안에 이르는 해로이다. 나머지 둘은 한강 하구에서 북쪽으로 황해도·평안도 해안에 이르는 해로와 동해안의 경상도·강원도·함경도 해안을 잇는 해로였다.
사선임운시대의 개막과 작대법
조선후기로 들어오면서 조군과 조선의 확보가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조군은 온갖 잡역에 동원되었고, 위험이 커서 누구나 싫어하는 공역인데도 무상으로 동원하곤 했다. 마침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한 조군들이 공역을 기피하는 현상이 16세기말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하여 17세기 이후에는 조군을 거의 구할 수 없었다.
조운제도가 쇠퇴하게 된 다른 이유는 배 건조 작업이 어려워진 점이다. 조선작업에 강제로 동원된 기술자들이 고되고 푸대접 받는 관청기술자 되기를 기피한 데다, 배를 만드는 선재(船材)마저 구하기 어려워졌다.
이렇게 하여 조운제도는 17세기에 이르러 거의 파탄 직전에 처했다. 1592년의 임진왜란과 1636년에 중국의 청나라가 침입한 병자호란의 큰 전쟁이 끝나자 거의 모든 조창(漕倉)과 조운선이 파괴되고 조군이 흩어져 예전의 모습대로 조운을 복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기다가 조운을 대역하던 사선들은 세곡 운송으로 받는 합법적인 운임에 만족하지 않고 여러 가지 불법행위로 세곡을 횡령하여 국가재정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마침내 숙종 30년(1704)에 조정은 관선조운제도를 공식적으로 포기했고 본격적인 사선임운(私船賃運)시대가 열렸다.
처음 세곡의 수송은 지방 지주들의 배인 지토선(地土船)이 맡았으나, 18세기 전반에는 서울 상인들의 경강선(京江船)이, 18세기말 이후로는 정부가 보호하는 경강선인 주교선(舟橋船)이 맡았다.
그러나 경강선인들이 독점하면서 온갖 부정이 횡행했다. 곡물에 물을 타서 불어나게 하여 그만큼 곡물을 횡령하기도 했고, 세곡을 고의로 침몰시켜 횡령하고는 국가에다 선박 건조비용까지 요구하기도 했다. 이처럼 부정행위가 극심해지자 영조는 관선조운제도를 다시 살리려 했다. 조군과 조선을 다시 정비하고, 조창을 증설하여 국가가 직접 세곡운송을 주관하려 했지만 막대한 비용이 들어 쉽지 않았다.
심사숙고한 끝에 경강선의 철폐보다는 경강선을 보호 육성하는 작대제(作隊制)라는 법을 세웠다. 이것은 국가에서 수송경비를 지불하지 않고 경강선인들이 선단을 꾸려 자율적으로 운영하도록 한 제도였다. 이런 작대선은 한강에 임금 전용 배다리를 놓는 관청인 주교사(舟橋司)가 관리한다고 하여 주교선이라고도 불렀다.
작대법을 실시한 뒤로부터 세곡 운송은 좋은 성과를 거둬 조정 대신 가운데에는 작대법의 확대를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물론, 작대제도 운영과정에서 부정과 횡령이 극심하여 말썽을 빚었지만, 고종 18년(1882) 철폐될 때까지 100년 넘게 세곡 운송에 큰 역할을 했다.
4.조선시대 배의 종류 이충무공과 거북선, 바다를 잠재우다
조선시대에는 바다를 통한 외적의 침입이 잦아 민간 선박보다 군선이 발달했다. 조선 군선은 13종 829척에 이르렀고 대부분 군용과 조운용을 겸했다. 판옥선은 1555년경에 등장한 우리 수군의 주력 군선으로 일본 함대 격파의 주역이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판옥선을 바탕으로 한국 조선사에 길이 남을 걸작 거북선을 만들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때 무수한 일본 함대와 싸워 백전백승을 거두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조선전기의 군선들
13종의 다양한 군선 갖춘 조선 수군
조선시대에는 민간 선박보다 군용선박, 즉 군선이 더 발달했다. 바다를 통한 몽골, 왜구 등 외적의 침입이 잦아 이를 막기 위해서였다. <세계실록지리지(世界實錄地理志)>에 나와 있는 조선 군선은 대선(大船), 중대선(中大船), 중선(中船), 병선(兵船), 쾌선(快船), 맹선(猛船), 중맹선(中猛船), 별선(別船), 무군선(無軍船), 선(船), 왜별선(倭別船), 추왜별선(追倭別船), 추왜별맹선(追倭別猛船) 등 13종 829척이다.
대선, 중대선, 중선은 같은 종류의 배로서 크기만 다르다. 이들은 당대 수군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기간선종(基幹船種)이다. 그런데 대선, 중선, 소선이라 하지 않고 대선, 중대선, 중선이라고 부른 것은 왜구 때문이었다.
왜구는 수많은 10인 이하의 작은 배로 떼지어 침입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왜구를 토벌하는 군선은 그리 클 필요가 없어, 소선보다 조금 큰 규모인 30명 정도가 탑승할 수 있는 배면 족했다.
대선보다는 작고 중선보다는 큰 배가 지역에 따라 필요하게 되어 생겨난 것이 중대선이다. 대선, 중대선, 중선은 모두 각종 화기를 갖춘 무장군선으로서 고려시대부터 사용된 평선(平船)이었는데, 전투할 수 있도록 갑판을 설치하고 노를 달아 기동성을 높인 것이었다.
중선은 30명, 중대선은 50∼60명, 대선은 80명 정도가 탈 수 있었다. 이들 군선은 세조 때에 와서 대맹선(大猛船), 중맹선(中猛船), 소맹선(小猛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쾌선은 중선보다 몸집이 작고 속력이 빠른 쾌속선(快速船)이다. 정원은 10명 안팎으로 고려말기에는 그다지 쓰이지 않았으나 왜구가 거의 진압된 태종 무렵에 그 성능이 높이 평가되어 수도방위를 위해 한강의 여러 포에 배치했다.
무군선은 유사시에 대비하여 주로 서울 인근 각 포구에 대기시킨 예비군선이다. 본래 세종 원년(1419) 대마도를 정벌하고 난 직후에 방치해둔 공선(空船)이었다. 별선은 중선과 크기가 같지만 화기 등 무기를 중선보다 덜 장비한 정원 25명의 군선이다.
선(船)은 민간 배를 그대로 군용으로 징발하여 사용한 것이다. 맹선과 중맹선은 중대선에 노를 더 설치해 개량한 배이고, 왜별선과 추왜별선은 모두 왜선을 추격하기 위한 쾌속선이다.
병조선·맹선·거도선·검선
병조선(兵漕船)은 세조 때에 신숙주가 주동이 되어 부족한 조운선을 보조하기 위해 군대와 조운이 겸용할 수 있도록 만든 배다. 당시 사용하고 있던 대선, 중선, 소선 등의 군선을 개량해 만들었고, 후에는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군선으로 쓰였다.
조선 고금의 문물제도를 수록한 <동국문헌비고> 중 ‘변고’를 보면 세조 11년 신숙주가 중국, 일본, 류구(琉球) 등의 선박제도를 보고 이를 절충하여 군용과 조운용으로 두루 쓸 수 있는 대형, 중형, 소형의 병조선을 만들어 왕의 참석 아래 양화 나루터에서 시험하여 성공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병조선 중에서 대선을 군용으로 쓸 때는 80명의 수군이 탔고 조운선으로 이용할 때는 800석의 양곡을 운반했다.
맹선은 조선전기 수군의 주력 군선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보면 맹선은 정원이 80명인 대맹선, 60명인 중맹선, 30명인 소맹선으로 구분되어 737척이 각도에 배치됐다는 기록이 있다. 군용과 조운용을 겸할 목적으로 신숙주가 개발한 병조선을 바탕으로 수군이 더 탈 수 있도록 개조한 배다.
즉 종래의 잡다한 군선을 정리하여 대, 중, 소 세 종류의 군선으로 편성과 규격을 통일하고, 조운에도 겸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고려나 조선시대 군선과 비군용선은 추진방법에 차이가 있었다.
군선은 전투에서 빠른 기동성이 필요해 노를 사용했고, 비군용선은 돛으로 다녔다. 조선시대 군선들은 전투와 조운을 겸해야 했기 때문에 돛과 노를 모두 사용하는 범노선(帆櫓船)이었다.
조운용으로 쓰일 때는 대맹선이 800석, 중맹선이 500석, 소맹선이 200석 정도의 적재능력을 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맹선은 성종 초부터 선조 때에 이르기까지 군용보다는 조운용으로 더 많이 활용되었다.
거도선(居刀船)은 조선후기부터 전투에서 여러 가지 용도로 널리 쓰인 쾌속 소형선이다. 대형군선이나 조선에 싣고 다니면서 구명(求命), 연락, 어채(漁採), 저염(著鹽)용으로 썼다. 이후 거도선을 무장하여 소형 전투선으로 쓰기 시작해 중종 때인 1510년 부산에서 일어난 왜인폭동사건인 삼초왜란 때에는 위력을 발휘했다. 이에 따라 무거운 대형군선의 무용론도 나왔다.
명종 10년인 1555년 왜선 60척이 전남 해안을 침범한 을묘왜변 때 새로운 군선인 판옥선(板屋船)이 등장하고 이 배의 구명용으로 사후선(伺候船)이 나타나면서 거도선도 사라지고 말았다.
창검선(槍劍船)은 15명쯤이 탈 수 있는 소형배의 뱃전에 짧은 창과 검을 빈틈없이 꽂아놓은 군선으로서 적이 배 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개발했다. 이 특수 군선은 고려말에 등장해 조선초기까지 주로 왜구를 물리치는 데 쓰였다.
검선이 고려말에 등장했음을 입증하는 첫 기록은 <고려사절요(高儷史節要)>에 실려 있다. 고려 제32대 우왕 3년인 1377년 손광유라는 무장이 왜구와 싸우다가 부상을 당해 검선을 타고 겨우 빠져 나왔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조선 초기 세종 때는 검선 한 척에 비거도선 2, 3척을 짝지어 왜구에 대비하였고, 압록강에도 검선을 배치하여 강을 건너 침입해 오는 도둑 떼를 막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뿐만 아니라 중대선, 맹선, 추왜선 등의 군선 뱃전에도 창검을 꽂아 일본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포구에 정박시켜 놓고 겁을 주었다고 한다.
거북선의 모체가 된 순수 전함 판옥선
판옥선(板屋船)은 을묘왜변이 일어난 1555년경에 등장하여 임진왜란(1592∼1598)에서 우리 수군의 주력 군선으로 일본함대를 격파하는 데 주역을 담당한 순수 군선일 뿐만 아니라 거북선의 모체가 된 배다.
판옥선(板屋船)의 등장은 중종 때부터 본격화된 왜구의 침입 때문이었다. 중종 5년(1510)의 삼포왜란을 시작으로 중종 39년 왜선 20여 척으로 경상도 사량진에 침입해 사량왜변을 일으키고 명종 10년(1555)에 을묘왜변을 일으킨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조선기술을 배워 구조가 견고하고 화약을 넣어 불을 쏘는 총통 등의 화기로 무장한 큰 병선을 앞세웠다.
이와 같은 왜선은 맹선이나 소형 경쾌선으로 당해낼 수가 없어 적선을 능히 제압할 수 있는 새로운 군선 판옥선이 탄생하게 되었다. 판옥선은 을묘왜변이 일어난 명종 10년 가을에 왕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강에서 시험에 성공했다.
이 전함은 조운선을 겸하지 않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순수 군선인데, 이후 임진왜란에서 우리나라 수군의 주력함으로서 그 위력을 발휘, 각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판옥선은 노가 꽂혀 있는 자리를 경계로 하여 아랫부분인 하체와 윗부분인 상장(上狀), 그리고 갑판과 다락인 장대(將臺)로 짜여졌다. 다락은 사령관이 사용하는 지휘소이다. 구식군선은 평선 구조라서 노를 젓는 격군(格軍)과 전투병이 함께 뒤섞여 배 위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전투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판옥선은 이층 구조의 갑판으로 되어있어 격군들은 갑판 아래 선실 내에 자리잡고 적에게 노출되는 일없이 노 젓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또한 전사들은 갑판 위에서 전투에만 전념할 수 있어 군선으로서 탁월한 기능을 발휘했다.
판옥선은 노 한 자루에 5명씩의 노군을 배치할 수 있어 기동성도 뛰어났다. 나무판자로 갑판 위에 집(居)을 꾸몄다 하여 판옥선이라 불린 이 배는 상세한 관련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크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승선정원이 125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숙종 때의 기록인 <비변사담록(備邊司膽錄)>이나 기타 관련 사록을 보면 임진왜란 당시 이충무공이 탑승한 판옥선은 길이 70척에 탑승인원이 160명, 노가 16개이고 수군장들이 탑승한 판옥선은 길이 55척에 탑승인원 125명, 노가 14개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판옥선은 임진왜란에서 크게 위력을 발휘했다. 1592년 일본의 정권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을 침공하기 위해 일으킨 임진왜란 때 조선은 육전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해전에서는 이충무공의 지휘 아래 연전연승했다.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남해안 일대에서 벌어진 네 차례 큰 해전에서 거북선을 선보이기 전까지 왜선 210여 척을 격파하는 전공을 올렸다.
일본 수군의 400여 척 군선에 수적으로 밀리는 150여 척의 판옥선만으로 대항해 압승할 수 있었던 것은 충무공의 지략과 판옥선의 우수성 덕분이다. 일본의 사기에도 판옥선의 우수성을 인정하는 기록이 있다.
한산해전을 묘사한 <협판기(脇坂記)>라는 일본 사기를 보면 ‘본거지로 퇴각하려 할 때 판옥선이 밀어닥쳐 계속적인 불화살 공격을 퍼부어 배가 불타고 이름 있는 장수들이 모두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고, 일본의
<조선기(朝鮮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 배와 비교도 안될 만큼 큰 판옥선 밑으로 접근하였으나 선체가 커서 자루가 2간(間)이나 되는 긴 창도 미치지 못하여 배를 점령하는 것도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소총사격을 퍼부어 판옥선이 노젓기를 못하게 하고 불화살을 쏘아 겨우 승리를 거두었다.’`
임진왜란을 제압한 거북선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龜船)은 구시대 한국조선사(造船史)에 길이 남을 최고 걸작품이다. 세계 해전사(海戰史)에도 위대한 군선으로 기록된 한국 고유의 전투함이다.
임진왜란은 선조 25년인 1592년 4월 일본의 수령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만의 대군으로 현해탄을 건너 우리나라를 공격해 시작된 전쟁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4개월 전에 남해 수군의 사령관인 전라좌수사로 발탁되어 부임한 충무공은 왜군이 머지않아 쳐들어올 것을 내다보고 전라수영의 조선소에서 그가 창안한 거북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건조한 내용은 충무공이 전쟁 때 쓴 일지인 <난중일기>와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그리고 이충무공의 큰조카인 이분이 쓴 <이분행록(李芬行錄)>에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중 <당포파왜병장>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일찍이 왜적이 침입할 것을 걱정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앞에는 용머리를 달아 그 아가리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다. 비록 적선이 수백 척이라고 해도 그 속을 뚫고 들어가 대포를 쏘게 만들었다.’
충무공의 맏형 이의신의 아들로서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따라 종군한 이분도 <이분행록>에 이렇게 적고 있다. ‘장군께서 귀선을 창작하니 크기는 판옥선과 같은데, 지붕에는 판자를 덮고 판자 위에 십자 모양의 좁은 길을 냈다.’
이분은 또 <이순신행록(李舜臣行錄)>에 거북선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다. ‘거북선은 위를 판자로 덮고 그 위에 십자형으로 좁은 길을 내어 병사들이 다닐 수 있게 하고, 나머지는 쇠창을 꽂아 사방에 발붙일 곳이 없게 하였으며, 선수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붙였는데 그 입은 총구멍이다. 거북이 꼬리처럼 생긴 선미에도 밑에 총구멍이 있고, 좌우 뱃전에 각각 12개의 총구멍이 있다. 대개 그 모양이 거북이와 같으므로 귀선(龜船)이라 이름을 붙였다.’
무적함 거북선의 위력
귀선, 즉 거북선은 동서고금의 해전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창적인 전함이었다. 모습은 영락없는 바다의 큰 괴물이었다. 그러나 노를 저으며 전진해 오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큰 배였다. 병사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노가 저절로 움직이면서 배의 몸통 속에서 대포들이 연이어 포탄을 쏘아댄다.
이를 본 일본군들은 싸우기도 전에 겁을 먹고 우왕좌왕했다. 7년간 계속된 임진왜란 중에 거북선은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이분은 거북선의 활약을 이렇게 기록했다. ‘거적으로 쇠창 위를 덮고 선봉으로 돌진하자 적이 배에 올라와 덤벼들다가 쇠창 끝에 찔려 죽었고 에워싸고 습격하려다가 좌우전후에서 일제히 쏘는 총에 감히 달려들지 못하였다. 적선이 아무리 바다를 덮어 구름같이 모여들어도 거북선은 마음대로 드나들며 가는 곳마다 적을 쓰러뜨리고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당포파왜병장>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이번 전쟁에 돌격장이 귀선을 타고 출전했는데, 명령을 내려 적선들 속으로 뚫고 들어가 천(天), 지(地), 현(玄), 황(黃)의 각종 화포를 쏘게 했다. 왜선은 판옥선 크기만 한 것 9척과 중선 12척이 선창에 정박해 있었다.
그 중 대선은 층루(層樓)가 30, 40척 높이로 솟아 있고 밖에는 붉은 비단 휘장이 드리워졌고 사면에는 누런 글자가 크게 쓰여 있는데, 그 속에 왜장 한 명이 앞에 붉은 양산을 세우고 겁 없이 서 있거늘, 거북선으로 곧장 그 왜선의 층루 밑으로 쳐들어가 용머리 입으로 현자포를 올려 쏘고 또한 천자, 지자포를 쏘아 퍼부어 배를 격파하니 뒤에 따르던 여러 장수들도 철환과 화살을 섞어 퍼붓는 가운데 중위장 권준이 뚫고 들어가 그 왜장을 쏘아 맞춰 활시위 소리와 함께 왜장이 거꾸로 떨어졌다.’
거북선에서 가장 기발한 장치는 대포용 용머리이다. 용두의 입은 임진왜란 당시 포 구멍으로, 정조 때에는 유황과 염초를 태워 연기를 뿜어내어 적을 혼미하게 만드는 데 쓰였다.
거북선의 규격과 건조 척수
거북이 등 모양의 지붕에는 세울 수도 있고 눕힐 수도 있는 돛대가 있어 노와 돛을 이용하여 빠르게 전진할 수 있었다. 거북선의 크기는 초기의 것과 후기의 것이 조금 차이가 있으나 대략 길이 110척(33.7m), 너비 32척(9.8m), 높이 21척(6.3m)으로서, 가장 컸던 통제영 거북선은 승선정원이 158명이다.
거북선의 등판인 개판 밑에 있는 공간에서는 노군이 노를 저었고 군사들은 뱃전의 방패판 좌우에 뚫린 12개의 구멍을 통해 포를 쏘았다. 갑판 밑 좌우편에는 각각 12간씩 방이 있는데, 2간은 포탄 등 철물을 저장하고 3간에는 화포, 활, 창검 등 무기를 두었으며 나머지 19간은 군사들이 쉬는 곳으로 이용했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선공학과 교수로서 우리 전통 배인 한선(韓船)을 깊이 연구한 김재근 박사의 저서 <거북선의 신화>와 <한국의 배>에 따르면, 충무공이 임진왜란 중에 사용한 거북선은 3척뿐이고 전쟁이 끝난 후 숙종 때까지 5척으로 늘었다.
이렇게 극히 소수의 거북선으로 그 엄청난 왜적의 군선을 대파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거북선의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150년 후인 영조 때부터였다.
임진왜란 때 나라와 군대의 업무를 담당 처리하던 관청인 비변사(備邊司)의 일들을 기록한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을 보면 숙종 42년인 1716년까지 5척의 거북선이 있었고, 영조 22년인 1746년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는 14척, 영조 때 나온 조선역대의 문물제도를 기록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는 정조 6년인 1782년 가장 많은 40척을 보유한 것으로 적혀 있다.
이후 거북선은 계속 줄어 순조 8년인 1808년에 나온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30척, 순조 17년인 1817년에는 18척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렇게 다른 일반 전함보다 크게 늘지 않은 이유는 전투효과가 떨어지는 결함 때문이었다. 거북선은 병사들이 적군에게 노출되지 않고 마음대로 적진 속으로 들어가 적을 제압하고 무서운 용두의 위용으로 적의 심리를 교란, 기세를 약화시킬 수 있어 적선과 접전을 벌일 때는 돌격선으로 매우 적합했다.
그러나 노를 젓는 노군과 활을 쏘는 사수, 포를 쏘는 포수 등 전원이 밀폐된 좁은 실내에서 한데 뒤엉켜 붐비기 때문에 적을 추격하여 백병전이나 전투를 벌일 때는 갇힌 전사들이 마음대로 활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치명적인 결점이었다.
게다가 임진왜란 초기에는 서로 맞붙는 접전이 많다가 점차 일본 수군이 우리 수군의 실력을 알고 피하며 재빠르게 빠지는 전법을 쓰자 조선 군선은 왜군선을 추격하는 전세로 바뀌었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 후 거북선의 척수가 크게 늘지 않은 이유였다.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