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보편적 우주론적 사랑
“증가하는 무질서에 대한 통계적 필연성(nécessité statistique)이라는 악의 문제(problème du Mal)를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통합적 형이상학으로서의 사랑’이다” [CM, p, 174]
샤르뎅 신부는 《물질의 심장》에서 과학자로서 예견되는 미래의 악과 이를 해소하기 위한 필연적인 방편에 대해 말하고 있다. ‘무질서에 대한 통계적 필연성’이란 무엇이며, 왜 이것이 악의 문제인 것인가? 실존주의자인 가브리엘 마르셀은 현대 세계를 “찟어진 세계”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모든 분야가 점점 더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서로 소통과 일치가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통과 일치가 불가능한 것은 조화와 균형이 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곧 무질서이다. 통계적으로 즉, 확률적으로 미래에는 점차 이러한 무질서가 증가할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분야가 보다 더 전문화되고 세분화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악의 문제와 연관되는가? 사실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악의 출발점이 무질서에 있다. 무질서 자체가 악이라고 할 수야 없겠지만, 대부분의 악은 무질서에서 발생한다. 예를 들어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노동자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기업가의 결정이나, 자기 민족과 국민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는 합리적인 명분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키는 한 국가의 수장은 그들의 정신적인 무질서를 잘보여주고 있다. 무엇이 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인지 무엇이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인지 분명하게 질서지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비-도덕적인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갈등 공화국’이라 불릴 만큼 삶의 곳곳에서 갈등상황이 유발되는 사회도 사실은 가치의 무질서를 말해주고 있다. 두 사람이나 두 단체가 서로 다 같이 존중해야할 공동의 가치가 우선된다면, 이러한 갈등은 쉽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때, 갈등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번영과 국민의 행복을 우선적인 가치로 생각하는 정치가라면 결코 자기 당의 이익을 위해서 그토록 상대방을 제거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며, 진정으로 인류의 복지나 인류애를 위해서 연구하고 기술을 발전시키는 과학자라고 한다면, 결코 치명적인 세균이나 핵무기 혹은 생화학 병기 같은 것은 결코 개발하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대형교회로 몰려드는 것도 일종의 영적인 무질서라고 할 수 있다. 영적인 질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고 사랑이지, 외적인 화려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증가하는 무질서를 외면할 때, 악이 만연하게 될 것이며 미래는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샤르뎅 신부가 다소 급진적인 사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면 바로 이러한 미래에 만연할 악에 대한 염려 때문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는 미래에 학자나 과학자가 가져야 할 사랑을 모든 학문과 모든 분야가 서로 소통하고 일치하는 “사랑이 지배하는 통합의 형이상학”이라고 불었다. 다소 유토피아적인 비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는 없다.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는 것, 허상인 것을 실재라고 할 때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이지, 궁극적인 선한 목적을 위해 일치 혹은 화합을 하자고 하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유토피아적 비전이다. 모든 유토피아적인 비전은 사실상 실현 가능성을 말하고 있기 보다는 삶의 지표, 삶의 지향성을 제시하는 일종의 ‘이정표’의 역할을 한다. 비록 도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공동의 목표, 즉 이정표가 있을 때, 서로 화합과 일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공동의 목적지가 있다면 “가다가 그만가도, 간 만큼은 이득이 된다.” 이것이 실재론적인 영성이 의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