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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10장17~24절
제목 : 기뻐해야 할 이유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와 별도로 따로 칠십 인을 세우고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가 지역으로 둘씩 전도하러 보냈습니다.
전도하러 보낼 때에 전도인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 미칠 화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70인이 전도를 마치고,
기뻐하며 돌아와 주의 권능으로 행한 일들을 보고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기뻐하십니다.
1. 칠십 인의 기쁨(17~20절)
1) 칠십인이 기뻐하며 돌아왔습니다(17절).
“[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기뻐 돌아와. - 제자들의 사역이 성공적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아마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들을 자기들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제자들의 이 보고는 귀신을 쫓아낸 일이 예상외의 놀라운 경험이었음을 가리킵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며, 그 결과 많은 사람을 고통에서 구원하고 이와 더불어 예수님에게 그러했듯이
자기들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는 놀라운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구할 때,
놀라운 이적이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마 21:21).
*마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가나무가 곧 마른지라.
2)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18절).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본절의 의미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습니다.
(1)70인의 제자들이 사역할 때 사단이 추방당했다는 견해.
(2)사단의 경우를 예로 들어 제자들로 하여금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신 말씀이라는 견해.
(3)예수께서 광야 시험을 이겨내셨을 때 사단이 하늘에서 추방되었다는 견해.
(4)70제자뿐만 아니라 향후 전도자들의 복음 전도를 통해 결국 사단의 세력이 완전히 패배하게 될 것을 뜻한다는 견해 등입니다.
어쨌든 70제자들의 귀신 축사(逐邪)는 악의 세력의 패배를 보여주는 명백한 표라 할 수 있습니다.
3) 내가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19절).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뱀과 전갈 - 문자 그대로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의 상징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제자들이 뱀과 전갈을 밟아 죽였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바울이 뱀에 물렸으나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은 경우가 있을 뿐인데(행28:3-6) 그것은 본문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뱀과 전갈은 주로 사단의 세력을 상징합니다(창 3:1-15;고후 11:3;계 9:3,5,10).
본문의 출처라고 보여지는 시91:13의 맥락에서도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시91:13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결국 이 말씀은 앞 절(18)과 같은맥락에서 사단의 세력이 제자들에 의해 짓밟힌다는 의미이나 다만 여기서는 사단의 실체가 더 구체화되며 제자들에게 악한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사실이 보다 강조됩니다. 창13:15에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이 처음
나옵니다.
이제 이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며,
그 제자들 또한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4)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20절).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귀신들을 제어하는 권세를 기뻐하는 것이 잘 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에 비하면 귀신 축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는 제자들의 사역의 목적이나 참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보증수표가 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마 7:22,23).
*마7:22,23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만약에 주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는 자가 이기적인 목적으로 하거나 성취한 업적에 대해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된다면 그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지 못할 것입니다.
한편 유대교의 문헌에는 하늘의 책에 대한 사상이 많이 발견되는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이 기록되는 생명의 책을 가리킵니다.
(출 32:32,33;시 69:28;단 12:1;히 12:23;계 13:8;20:12).
*계20:12,15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2. 예수님의 기쁨과 축복(21~24절)
1) 예수님의 기뻐하심(21절).
“[2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 때에. -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성공적 사역을 치하하신 바로 '그 때'(at that time,NIV)를 가리킵니다.
또한 이 표현은 누가가 즐겨 쓰는 것으로 다른 곳에서도 많이 발견됩니다.
(2:38;7:21;12:12;13:31;24:33;행 16:18;22:13).
성령으로 기뻐 하사. - 마태의 병행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마11:25),
누가만의 독특한 표현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느끼는 기쁨임을 뜻하며, 계속 이어지는 감사의 기도 역시 하나님의 감동에 의한 일종의 계시임을 암시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 '천지의 주재'라는 호칭은 다분히 구약적인 표현으로(창14:19,22)전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전권적 위엄을 나타내며 '아버지'(파테르)라는 호칭은 아람어의 '압바'(abba)에 해당하며 따뜻한 부자 관계를 나타 내주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온 천하 만물의 주관자이신 창조주께서,
바로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심을 나타냅니다.
성도들도 그리스도와 영적 일체를 이룸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롬 8:16).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
'이것'이란 아마 예수님의 사역 즉 그가 베푼 이적들과 말씀의 선포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 그리고 방금 70(72)인의 제자들이 체험적으로 터득한 것들일 것입니다.
여기서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과 '어린아이들'이 대조되고 있는 데,
전자는 율법에 대한 지식과 지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후자는 세상적 지혜나 율법적 지식이 부족하지만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는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사상 즉 지혜로운 현자(賢者)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는 생각을(위경 제 4에스라 12:35-38) 뒤엎는 역설적인 말씀으로서 바울에게서도 발견되는 사상입니다(고전 1:18-31).
또한 본절은 소위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자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 그리하여 멸시와 천대를 당하던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한 애정을 암시하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2)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상호 인식에 대하여 언급(22절).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1) 모든 것을 내게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 여기서 '모든 것'(판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①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계시(Jeremias),
②(본문이 단 7:13,14;마 28:18과 평행을 이룬다고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 위임(委任)받은 하나님의 권한(Lagrange, Schniewind),
③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Weiss),
④모든 사람(Bengel),
⑤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필요한 모든 것(Holtzmann),
⑥그 하나님의 뜻(Plummer),
⑦모든 교리(Harnack) 등.
그런데 본문에서 '모든 것'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주셨다'(파라디도미)의 의미와 연결시켜 보아야 합니다.
'주셨다'는 동사는 스승이 제자에게 지식, 교리, 전통과 같은 것을 물려주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하며(막 7:13;고전 11:2,23),
권력이나 권위를 위임하는 데도 사용됩니다(4:6).
이렇게 볼 때 앞에 열거한 제 견해들은 어느 것이 틀리거나 어느 것이 정확하게 맞다기 보다는 종합적으로 취해질 세상의 것이라 하겠습니다.
결국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와 동일하다는 사실입니다.
(2)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여기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상호 인식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절은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론적(存在論的)인 관계,
즉 복음서들이 한결같이 증거해주는 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증거합니다.
물론 성도들도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능력에 의해 아버지를 안 것이 아니라 아들이신 예수의 중재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지식이 너무도 부분적이라는 점에서 예수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3)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23절).
“[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그런데 제자들이 '보는 것'(what you see, NIV)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다음의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넓은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리고 행하실 이적들과 가르침들을 통해서(4:6)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인식하며 하나님과 아들 사이의 비밀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22절).
(2)좁은 의미에서, 제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굴복시킬 때 경험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을 언급한 마태복음의 문맥에서는(13:16) 전자에 가깝고, '듣는 것'을 생략한 누가복음의 문맥에서는 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24절)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많은 선지자와 임금. - 제자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옛 선지자와 임금들을 제자들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본절의 말씀에는 과거에 가장 종교적이었던 사람들(선지자)과 가장 높은 신분의 사람들(왕)조차 보지 못한 것을 지금에 평범한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사상을 말하려는 누가의 의도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미래에 성취되기를 대망한 사람들이고(사 52:15) 왕들 가운데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야와 같은 왕들은 옛
계약을 신뢰한 자들로서 선지자들의 계시를 받아들여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성취되기를 열망했었습니다(시 110:1).
*시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야를 보지 못했고 구원의 시대가 도래 했다는 복음의 선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보고 들었으니 복된 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2:30;히 11:13;벧전 1:10,11).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히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3. 전도의 기쁨.
전도는 일석이조(一石二鳥)가 아니라
일석삼조(一石三鳥)의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전도를 통해서 내가 기쁘고
전도 받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전도자의 기쁨
전도하러 나갔던 70인의 제자들은 기뻐하며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전도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도에 아무런 장애가 없고 즐거움만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들도 전도하다 이리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했을 것이고 문전박대를 받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인내로 전도하는 일을 계속했을 때,
기쁜 일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당장은 어렵고 낙담되는 일이 있지만, 나중에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전도는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일과 같습니다.
쟁기질을 하며 땅을 갈아엎고 씨를 뿌리는 것은 고달픈 일입니다.
당장 수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추수 때는 열매를 거두는 때입니다.
큰 기쁨이 있습니다.
창고가 가득 차는 뿌듯함이 있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6)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자는 그와 같은 기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지옥 불 못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불신자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기쁨이 얼마나 황홀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기쁨은 점점점점 지옥 불 못을 향해서 달려가는 영혼을 전도로 구원해 내게 된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이러한 기쁨만 얻는 것이 아니라
전도를 통해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이름을 외칠 때 귀신들이 굴복하는 체험도 하며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2) 결신자의 기쁨
대상자가 분명히 복음을 깨닫고 구원받았다면
그는 자신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겼음을 알고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감격(感激)과 환희(歡喜)입니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마리아 여인을 기억하십니까?
그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요4:29)
넘치는 기쁨을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70인의 제자들이 귀신들이 항복한 것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20절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가장 기뻐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이 가장 큰 기쁨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 고침을 받은 것을 인해서 크게 기뻐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런 일이 있음으로 인해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을 인해서 크게 기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잘 했더니 장사가 잘 된다고 기뻐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주님의 은혜로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며 크게 기뻐합니다.
그 심정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얼마나 기뻐하고 있습니까?
영혼의 구원은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더 크게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타까운 것은 우리들이 구원받은 때,
얼마간을 제외하고는 기뻐할 줄을 모르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구원받을 때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었음을 기뻐하십시오.
주님은 그것을 가장 크게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번 받은 구원은
결코 취소되거나 잃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님을 기뻐하십시오.
성경은 계3:5절에서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이 단순하여 어린이라도 쉽게 이해하고 믿을 수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만일 철학적인 사고를 요하는 것이라 한다면,
특별히 지적 능력이 뛰어난 소수 이외에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구원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임을 감사하십시오.
3) 예수님의 기쁨(21절)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리스도인이 전도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전도의 결과로 죄인 한 명이 회개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선한 목자로서 잃은 양 한 마리를 되찾는 것 같은 기쁨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 죄를 지신 어린양으로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시기 때문에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이미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구원을 이루신 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죄인이 전도 받아 구원받지 않으면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지은 명작 중에
[행복한 왕자]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동화의 제목이 행복한 왕자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왕자에 대한 이야기인 듯싶으나
왕자보다는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한 마리의 제비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 동화 속의 왕자는
실상인즉 어느 마을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왕자의 동상입니다.
그 동상의 두 눈동자는 녹보석으로 되어있고,
왕자의 칼자루에는 홍보석이 박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왕자의 동상은 항상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왕자의 동상이
행복한 것처럼 보여 행복한 왕자라고 불렀으나,
왕자는 결코 행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너무 가난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들을 바라보는 착한 마음은 결코 행복해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길 잃은 제비 한마리가 우연히 왕자의 동상 옆으로 날아왔다가
그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제비는 가던 길을 멈추고
왕자의 청을 들어
왕자의 두 눈에서 녹 보석을 뽑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줍니다.
또한 칼자루에 박힌 홍보석을 뽑아서 어느 불쌍한 아가씨에게 갖다 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왕자의 동상과 갈 길을 놓친 제비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비는 겨울 아침 싸늘하게 얼어 죽은 시체가 되어 동상 발아래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왕자의 심장도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왕자와 제비의 진실한 행복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이 제비와 같이 평화의 왕이신 그분의 뜻을 받들겠습니까?
전도하는 사람은 전도하는 일로 인해 기쁨을 얻게 되며,
전도 대상자에게 기쁨을 주며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이것을 사탄이 패배한 사건으로 설명하십니다(17~19절).
이처럼 사탄이 아무리 가공할 만한 권능을 가졌어도 주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패배자일 뿐입니다.
아무리 악의 세력이 여러 모양으로 우리 신앙을 흔들더라도,
주의 이름을 의지하는 자를 결코 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새 창조 해가시는 주님의 역사도 막지 못합니다.
이미 굴복한 사탄의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또 우리를 통해 ‘평화’(6,9절)를 이루어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힘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신뢰하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2) 예수님을 통해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순전하게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만 나타내십니다(21~24절).
가진 게 없어 간절하게 사모하고 자신을 다 버려 주님을 얻은 이들에게만(9:57~62) 그 나라를 볼 눈을 열어주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면서 예수님을 배척하던 자들에게는 숨기십니다.
교만한 그들은 믿기에는 아는 것이 너무 많고,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지식이 부족하고 받은 은혜가 모자라서 믿지 않는 게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죄인인 나를 상대해주신 하늘 아버지와 그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나라를 얻은 어린아이입니까?
단순한 신뢰와 순종으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참된 기쁨은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데 있습니다(17,20절).
하나님의 뜻(21절)은 사탄의 패배를 넘어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공적인 사역보다 하나님 나라으 백성이 된 나의 신분이 더 복되고 소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이 기쁨이 내 영혼을 지배하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