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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83회. '조선시대 궁녀는 전문직이었다' (2000.08.26.)
83회 : 조선시대 궁녀는 전문직이었다
조선시대 궁녀는 전문직이었다
방송일: 20000826 조회수 : 5213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프롤로그
-비오는 처마6(보고)
-사당 칠궁자막6 사적 제149호,칠궁
이곳은 조선시대 일곱 후궁의 신주를 모신 곳이다
-위패들9 비록 정실 왕비는 되지 못했지만 자신이 낳은 아들이 왕이 됐던 여인들
-문열린 위패Z.I 10 그들은 궁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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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타이틀 조선시대 궁녀는 전문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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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1
-칠궁 사당 내부
칠궁은 청와대 경내에 위치하고 있어 그동안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돼 왔던 곳인데요,
곧 개방될 예정이라고 해서 저희 역사스페셜에서 먼저 취재를 했습니다.
이 칠궁은 궁녀에 관한 얘기가 깃들여 있는 곳입니다.
-전체 사당F.S 궁녀글씨 입체적으로 돌출
궁녀--하면 아마도 왕의 승은을 입기 위해 암투와 시기를 벌이는 모습이거나 아니면 왕과 왕비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 궁녀들은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요
백제 의자왕과 삼천 궁녀의 전설은 -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얘기인데요,
-세종실록 책 표지내용 한문으로 나온다
세종실록에 그 전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 볼까요
'의자왕이 신라에게 패하게 되자 궁녀들이 이 바위로 달아나 스스로 강물에 떨어져 죽었으므로 낙화대라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볼 때 삼천궁녀는 과장이라 하더라도 삼국시대에 궁녀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궁녀제는 고려시대때 시작됐다고 하는데요, 그것을 이어 조선시대 초기에 구체적인 규정과 체제를
마련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정비된 궁녀제는 조선말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궁녀란 좁게는 상궁과 내인을 말하고 넓게는 무수리나 비자같은 하녀들까지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궁녀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는 어디였을까요?
그리고 궁녀로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바로 이 칠궁안에 그들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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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1 칠궁이란 무엇인가?
- 그곳엔 궁녀로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이들이 있다
-산에서Z.O 칠궁 외경9 서울 궁정동, 청와대 경내 -
-대문 안으로 카메라 트레킹15 (좀보고)
평소 굳게 닫혀 있는 이 문을 들어서면 오래된 재실을 볼 수 있다
-칠궁 사당PAN15 이곳엔 7개의 사당이 있는데 후궁이 낳은 왕들이 자신들의 생모를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위패단 PAN, 위패11 그렇다면 이 위패의 주인들은 누구일까
-정빈이씨 진종 생모위패 C.G5 추존된 왕 진종의 어머니인 정빈 이씨-
-위패C.G3(6개위패 20)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
-위패C.G3 장희빈으로 더 유명한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
-위패C.G3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
-위패C.G3 비운의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
-위패C.G3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
-위패C.G3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가 그 주인들이다.
-사당+6위패 C.G5 이중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명은 궁녀 출신이다.
-홍교수 인터뷰 "후궁 어머니가 꼭 왕비이지 않은 왕들도 상당히 있습니다 그런 왕들의 생모는 절대로 종묘
에는 들어갈 수 없으나 그렇다고 일반 사당하고 똑같이 모실 수 없기 때문에 격을 높여서 궁자를 붙여서
서울의 여기저기에 그런 사당들을 마련했던 것인데요"
-영조 영정4 그중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는 무수리로 궁녀 중 가장 비천한 신분이었다
-육상궁1S 15 영조는 무수리 출신의 생모에 대한 효심과 열등 의식으로 직위초부터 숙빈최씨의 묘를 능으로
만들길 원했다
-홍교수 인터뷰 "영조는 자기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분이 미천 하다는데에 대해서 상당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조는 왕이 되던 그 이듬해 원년에 이곳 사당을 짓고 육상묘라고 하였다 왕의 사친이지만
바로 궁이라고 붙이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연못 사당7
-냉천전 사당 PAN,현판22 냉천정에는 영조의 어진이 보관돼 있었다
영조는 그 어떤 곳보다 이곳을 자주 들렀다고 한다.영조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정이 깃들어 있다
-사당1S,덕안궁 현판6 원래 육상궁을 제외한 나머지 사당은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비오는 처마,사당17 1908년 각 사당을 이곳에 모아 육궁이라고 불렀고 1929년 순헌귀비 엄씨의 사당이
옮겨 오면서 칠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위패7 칠궁에 모셔진 여섯명의 왕의 생모들 그들은 궁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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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2
-동궐도 뒤에 스크린처럼 조선전기 임금들은 주로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에서 정사를 보았는데요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되자 이후 3백년간은 창덕궁이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치르는 역사의 주무대가
되었습니다.
-동궐도
이것은 1820년대 조선 후기에 그려진 창덕궁의 모습인데요,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들은 주로 어디서
생활했는지 한번 볼까요.
왕과 왕비의 일상적인 생활 공간을 내전이라고 하는데요, 궁궐의 뒷부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희정당 돌출 옆으로
이곳 희정당은 원래는 왕의 침전이었으나, 순조이후로는 왕이 공식활동을 하는 곳인 편전처럼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대조전 돌출 옆으로
이 희정당 뒤편, 구중 궁궐 가장 깊은 곳에 왕비가 기거하고 생활하던 공간이 있는데요, 대조전입니다.
왕과 왕비가 동침하는 침전이 바로 이곳에 있죠.
왕과 왕비의 생활 공간인 내전의 동편에는 세자의 활동공간인 동궁이 있었구요,
서편 뒤쪽으로는 왕대비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궁녀들도 이 일대 어디에선가에서 생활하며 자신들이 맡은 일을 했을 텐데요,
궁녀들은 이 넓디넓은 궁궐안 어디서-과연 어떤 일을 했던 것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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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2 궁녀의 임무 하는일(독특한 일 중심)
-체계적이었으며 월급까지 받았다
-궁궐 외경PAN8 각각의 전각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창덕궁-
-인정전PAN28 (좀 보고)
왕과 신하가 만나 의논하고 정사를 보는 집무 공간 뿐 아나라 왕과 그의 가족이 생활하는 전각들이 모여 있다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들은 궁궐내에서 각각의 전각에서 따로 독립세대를 이루며 생활했다.
-대조전 현판,대조전 PAN14 따라서 대전 중궁전 동궁전 대비전 등의 궁녀들 또한 각각 따로 뽑았다.
그렇다면 궁녀들의 주된 근무 공간은 어디였을까,
-PD와 얘기 교수11 조선시대 후기에 그려진 궁궐의 평면도인 동궐도형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설계도Z.I 교수 INT "동궐도형에는 소주방이라고 하는 곳이 여러 군데 보여서 임금의 수라상을 마련하거나
아니면 궐내의 잔치때 잔치 음식을 마련하는 곳들이 많이 분포돼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소주방으로 가는 두사람8 궁녀들은 주로 의식주에 관계된 일을 주어진 역할에 따라 분담해서 일했다.
-수라간 팻말에서 아침, 저녁 수라와 잔치 음식 등을 준비하는
수라간옆 방에서 트레킹9 일은 궁녀들이 맡은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다.
-이강근 교수 인터뷰 "이자리는 왕과 왕비의 침전이었던 그 대조전의 서쪽 행각 바깥에 있는 것으로서
원래 임금님의 수라상을 마련하던 소주방이 있던 자리입니다.
그런데 1917년 외정때에 불타고 나서 다시 지으면서 서양식으로 개조돼 있기는 하나 여전히 임금님의
수라상을 마련하던 곳이었고 그 수라상을 마련하던 궁중 나인들이 주무시던 곳이 바로 이옆에 있는 방
온돌방이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방PAN2 (보고)
-대조전으로 카메라C.G7 대조전은 창덕궁에서 가장 내밀한 왕비의 생활 공간이다
-대조전 문열리고복도 보이고3 왕과 왕비가 잠을 자는 대조전의 침전에 궁녀들의 특별한 업무가 있었다
-왼쪽 방문열리고 들어가면
양측면4개방문열리는9 중앙의 큰방은 왕과 왕비의 침전이고 그 둘레에는 여러개의 작은 방이 있다.
-카메라 위로 올라가는5 침전을 둘러싸고 있는 이 작은 방에서 궁녀들은 숙직을 섰던 것이다.
-위 부감에서 동온돌등 자막10 각각의 작은 방에 한명씩 들어가 숙직을 섰는데 그곳에 이부자리를 두지
않았다.
-자막 빠지고 옆으로 왕과 왕비가 함께 잘때는 노상궁들이 숙직을-
서온돌등 자막10 섰고 젊은 궁녀들의 접근은 금지됐다
-실사 숙직 방들 스케치26 이 숙직은 지밀에서 했다
지밀이란 말 그대로 가장 지엄하고 중요하여 말한마디 새어 나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침전과 안사랑 대청등이 있는 곳에서 근무하며 왕과 왕비를 보필하는 가장 중요한
업무를 맡은 핵심 부서가 지밀이다
-(이불)침방 스틸7 왕과 왕비의 옷, 이부자리 등을 만드는 부서인 침방-
-수방 스틸4 의복과 장식물에 쓰이는 수를 놓는 부서인 수방-
-생과방스틸5 음료와 과자를 만드는 곳인 생과방이 있으며
-세수간스틸6 세수간에선 세숫물과 목욕물을 준비하는 일을 전담한다. 내전 청소도 이들의 임무다
-세답방 스틸6 빨래와 그 뒷손질을 담당하는 세답방까지 궁녀들은 각 부서별로 일했다.
-교수 INT "침전 일과 주변에 주로 수라간을 중심으로 해서 침방이라든지 수방이라든지 또 생과방 이라든지
하는 궁녀들의 작업실들이 배치돼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성호사설책 표지3 궁녀의 수는 얼마나 될까-
-기록 자막7 영조때 이익의 성호사설에 궁녀는 육백팔십사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궁녀수 F.S에서 Z.I 4 고종 실록에도 궁녀의 수를 적어 놓은 기록이 있다
-대전에서 세손빈궁 시녀수12 대전 및 각전궁의 궁녀는 다 합해서 480명-
이들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궁녀는 5백명에서 6백명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전회통 표지 핀12 대전 회통에 의하면 '궁녀란 궁중 여관의 별칭으로 상궁이하의 궁인직'
이것은 즉 궁녀란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 관리라는 뜻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외경4 관리- 그렇다면 궁녀도 직급이 있었던 것일까
-책보는손4 궁녀들은 맡은 일에 따라 품계가 나눠져 있었다. 경국대전에 그에 대한 기록이 있다.
-PD와 얘기하는 교수EFF 7 "궁녀와 후궁을 포함한 궁궐에서 근무하는 여성들을 내명부라고했는데요"
-내명부책4 정1품 빈이하로부터 종4품 숙원까지는 국왕의 여자로 후궁을 말하며,
-내명부책 C.G11 궁녀는 정5품에서 종9품까지 10등급으로 나뉘며 그 업무에 따라 품계가 달랐다
-신명호 교수 INT "정5품이면 양반 관리하고 비교한다면 참판 고 밑에쯤 되는 상당한 고위 관리는 아니지만
중견 실무자라로서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월급 지급 기록 한자8 궁녀들이 관리였다면 녹봉을 받았을 것이다
태조실록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한글 기록 자막7 (그냥 보기)
-궁녀 스틸 기록12 궁녀들은 매월 정기적인 보수로 쌀 세말 그외 옷감 등도 특별히 하사 받았다.
-한국정신문화원외경7 우리는 장서각에서 또다른 단서를 찾았다
-검색화면 궁중예산서 표지4 1896에 쓰여진 궁중예산서가 바로 그것이다
-여관 봉급 Z.I( 7,4) 11 여관봉급- 이백사십원.
대전 소속 궁녀들에게 지급할 봉급 총액이
이때 궁녀들은 돈으로 월급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관봉급Z.I 자막 10 (보기)
-검색하는 PD 검색PAN되다가5 또다른 서류 하나
-다시와서 한곳Z.I 봉급 명세9 궁녀 개개인들의 월급을 적어 놓은 명세서다
-월급 명세서C.G22 궁녀들의 봉급은 어느 정도나 됐을까
우리는 앞의 자료와 연구 논문를 근거로 순종때 지급됐던 궁녀들의 월급 명세서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한국은행외경4
-발권정책팀 팻말5 당시 가장 높은 보수였던 196원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화폐 책 넘기는8 당시 경제 상황이 고려돼야 하기 때문에 화폐 자체로는 과거와 현재 돈의 가치를 정확히
환산할 수는 없다.
-쌀가격추이 책9 우리는 1926년의 80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쌀가격과 현재의 쌀가격을 기준으로 비교할 수
있었다.
-담당 인터뷰 "쌀가격 기준으로 환산했을 때 그당시 1920년대 당시는 20원 했다 99년말 현재 15만9천원
상회했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했을 때 1926년에 196원은 오늘날 150만원을 상회한다고 할 수 있겠다"
-궁내부비예산 명세서 12 궁녀들은 맡은 업무와 연차에 따라 월급이 달랐고 품계에 따라 월급이 차등 지급
됐다
-이배용 교수 인터뷰 "실제로 궁녀는 조선왕조에서 정식으로 월급을 받는 소위 여성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들을 전문직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려서부터 궁궐에 들어와서 자기가 맡은 일을 평생토록
하는데 특히 왕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수준 높고 체계있는 자기의 전문 영역을 개발할 수 있게 되는거죠"
-서류 여관 봉급 Z.I 12 궁녀-그들은 국가에서 월급을 지급 받았던 공무원이었으며 전문직 여성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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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3
-영조 가례의궤도감에 상궁 궁녀들 그림
여관이라 -
여성에겐 관직의 길이 열려 있지 않았던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궁녀가 여성 관리였다는 사실은 잘
모르셨을 겁니다.
-뒤쪽 가리키며
제 뒤쪽에 보이는 것은 정순 왕후의 혼례 행렬이 그려져 있는 영조정순후가례도감도청의궤의 반차도입니다
왕비를 따르는 수많은 행렬 중에 여기 궁녀들의 행렬도 보입니다.
-MC 한쪽에 있고 양가에 상궁, 기행 내인, 보행내인 등 궁녀들의 모습을 한번 자세히 보시죠.
그 사이로 옮겨가며 -기행내인쪽에 서서 말을 타고 가는 이 사람은 한번 볼까요 .
-기행내인 글씨 돌출
기행 내인 - 말 그대로 말을 타고 가는 궁녀라고 써 있군요.. 가례때 입는 장삼을 입었습니다.
-보행내인쪽에 서서 보행내인 글씨 돌출
그 뒤를 따라서 걸어 가는 이들은 보행내인입니다.말을 타지 않고 걸어가는 것으로 보아 직위가 좀 낮은 듯
보입니다.
-상궁 글씨 앞으로
장삼을 입고 말을 타고 가는 이사람은 또 누굴까요 - 상궁이군요.
장삼은 보행내인 이하는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걸로 봐서 궁녀도 계급과 직위가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성 관리인 궁녀-
그렇다면 이들 궁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궁녀의 선출과 교육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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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3 궁녀의 선출과 교육
-아파트 외경3
-김용숙 교수 뒷모습15 40여년 동안 궁중 풍속에 대해 연구해 온 김용숙 교수-
그는 고서의 기록과 실존했던 상궁들의 증언을 토대로 궁녀의 생활을 고증하는 작업을 했왔다.
-생각시 1명사진 12 우리는 궁녀를 몇살에 뽑는지 김교수를 통해 확인 할 수 있었다.
각 부서별로 그 나이가 달랐다
-상궁과 꼬마내인 외출사진10 지밀은 4,5세,침방과 수방은 7,8세 그외 부서는 13세 미만으로 궁녀는 어린
나이에 뽑혀 들어왔다
-김용숙 교수 INT "지밀은 왕의 눈에 닿기도 쉬운 자리고 제일 대표 그러니까 교양도 어느면에서는 왕자 왕녀
못지 않게 4살부터 들어와서 말 익힐때부터 후천적인 준비라고 할까 궁중에서 길러지는 것이니까
품격이나 관습이나 못든 행동이나 이런 것들이 궁중화되어 있다고 생각했을 것"
-궁녀 사진10 그렇다면 궁녀의 출신 성분은 어떠했을까
-같은 책기록 7 예종때 궁녀의 신분에 관한 기록이 있다
한명회는 '양반 관료 첩의 딸과 양인의 딸을 뽑자'고 했고
-같은 책기록12 신숙주는 '그때그때 임시로 선택하고 법을 미리 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이때만 해도 명확한 기준이 없었던 듯하다.
-기록13 그러다가 조선 중기 효종때엔 궁녀를 양가의 딸 중에서 뽑았다
-이배용 교수 인터뷰 "조선초기에는 관청의 여자 종을 선발하기도 하고 기첩 소생이 궁녀로 선발되기도 했다
그런데 점차로 시기가 흐르면서 양가집의 규수들이 궁궐로 선발돼서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하게 나타나고
그러다 보니까 민간에서 일찍이 궁녀로 뽑히지 않기 위해서 조혼을 하는 풍습도 생겨나고 그랬다"
-기록13 궁에서는 되도록이면 양가의 딸을 궁녀로 뽑길 원했지만 폐단이 생기자
영조는 양가의 딸을 궁녀로 뽑지 못하게 법으로 명문화시켰다.
-김용숙 교수 인터뷰 "상사람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지만 서울에 있는 공상 계급에서 들어왔고
침방까지는 중인 계급을 썼다는 거예요"
-사발4 궁녀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가 있다. 처녀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팔에 앵무새 피15 이것은 12,13세의 당시로서는 성숙한 나이의 경우에만 실시하던 것으로 앵무새의 피
한방울을 팔에 떨어뜨려 피가 묻지 않으면 처녀가 아니라해서 탈락시켰다.
-김용숙 교수 인터뷰 "선조에서 죄인이 없다거나 병에 걸린 사람
전과자 그런것도 없어야 되고"
-궁녀들 서있는 스틸13 왕을 가까이서 모셔야 하고 또 왕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궁녀의 선출
조건은 까다로웠다.
-황혜성궁중요리학원 외경3
-황혜성 강의하는5 궁중음식 기능 보유자인 황혜성씨-
그는 주방 상궁에게서 궁중 음식을 전수 받았다
-황혜성 얼굴EFF "이런 책을 공부할려면 한문을 알아야돼"
-젊은 한희순 상궁사진6 그의 스승은 소주방에서 음식을 담당했던 한희순 상궁이다.
-늙은 한희순 상궁사진13 궁녀들이 어떻게 일했는지-
황혜성씨는 스승인 한희순 상궁에게서 전해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황혜성선생 인터뷰 "손금보는 것처럼 그럼 손을 보고 일하던 손인지 아니면 수나 놓고 깨끗이 바느질이나
하는 손인지 아신데요 그래서 너는 세답방이나 가라 손이 너무 거친사람을 보고는 너는 세답방,빨래터나 가라
아무튼 13살에 들어가서 운명이 그렇게 정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큰방 상궁들이 와서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맵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손을 보고 갈자리를 정해
줬대요"
-수라상7 과정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아야 하며 까다로운 궁중 법도를 익혀야만 가능했던 것이 궁중 일이었다.
-수라상 요리11 궁녀는 일단 소속 부서에 배치되면 철저한 도제식 교육을 받고 길러졌다
-황혜성 선생인터뷰 "각 부서마다 다 나눠서 소속이 됐잖아요
주방상궁 밑에 들어간 사람은 주방에서 파나 다듬고 너 가져와라 하면 가져오고 그런 정도로 일을 시키니까
그 일을 따라서 10년을 해야 돼요 혼자서 독립해서 시키는게 아니야"
-쥐불 겁주기18 쥐부리 글려란 궁녀들에게 입조심을 시키기 위한 교육이었다.
그해 입궁한 견습 내인들을 세워 놓고 내관들이 횃불을 입으로 들이대며 지지는 시늉을 하며 위협하던 궁중
행사였다.
-김용숙 교수 인터뷰 "첫째 일장 일조가 맡은 첫날 궁중은 아주 무서운데니까 나라님을 모시고 아주 무서운
데니까 말한마디도 하지 말고 보면 본데 들으면 들은데 둬라"
-황혜성교수 인터뷰 "아주 조용조용 말을 하고 둘이서 한방써도 바깥에 소리가 나가지 않게 둘이서 말할 때도
아주 소근소근 얘기하더라구요"
-궁체 글씨 쓰는11 궁녀는 궁중 법도는 물론 맡은 업무, 기타 교양을 쌓기 위한 철저한 수련 과정을 거쳐야
했다
-빽빽한 궁체 Z.I 11 마치 활자로 인쇄한 듯 보이는 이 필체는 궁녀들이 쓰던 궁체다.
-서재 붓에서 김교수11 궁체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김진세 교수-
-궁체책 옮겨 쓰고 공부 10 그는 궁체를 궁녀들을 수련시키는 또하나의 수단으로 해석하고 있다
-김진세 교수인터뷰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를 버린 글씨다 자기 버리면 어떻하느냐 자기를 버리는 대신에
모든 정성과 모든 힘과 모든 충성심을 윗전을 위해 바쳐야 되기 때문에 끝까지 끝이 내려올 때 까지도 붓끝에
충성심 정성 정숙 온아함 이 여자들이 지켜야 할 모든 것들이 거기 가 있는 거죠.
궁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개성 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궁체 글씨13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와 스승인 상궁에게 전문 교육을 받으며 키워진 궁녀들-
-궁체 글씨F.S에서 Z.I스케치13 궁체는 조선시대 궁녀들이 받았던 엄격한 교육과 통제된 생활을 대변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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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4
-궁궐 원근법있는 담벼락
궁녀들이 맡은 바 임무가 다 달랐듯이 직위에 따라 복장도 조금씩 달랐습니다.
-생각시,각시, 궁녀, 상궁
궁녀들은 어떤 복장을 했는지 한번 볼까요
-생각시,각시 복식 입은
먼저 내인이 되기 전 어린 나이의 견습 내인입니다. 생머리를 매었기 때문에 이들을 생각시라고 불렀는데요
-생각시 머리 설명
머리를 보시면 이렇게 곱게 빗어 뒤에서 두가닥으로 땋아 말아 올려서 뒷머리 밑에 나란히 붙여서 묶는
것인데요, 그위에 댕기를 늘이고 다녔다고 합니다.
-궁녀 복식 입은
입궁한지 15년이 되어 내인이 되면 머리 모양이 달라집니다.
머리를 얹어 쪽을 졌구요, 옷은 남치마에 옥색저고리와 생각시와 같습니다.
-상궁복장(첩지,궁중정장)
그리고 일반 내인에서 15년이 지나면 상궁이 됩니다.
상궁들은 옥색저고리와 남색 치마에 당의를 입었습니다
머리장식인 개구리 모양의 첩지를 머리에 달았습니다.
-세명 일렬로 서 있고
궁녀는 네다섯의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낯설고 엄하기만한 궁궐에 들어와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고서야 상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평생을 궁궐에서 살아야 했던 궁녀들- 어떻습니까,
궁녀들의 생활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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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4 궁녀의 생활( 연애 스캔들 포함)
-창덕궁 부감7 (좀 보고)
궁궐에 들어와 15년이 지나면
-방문 누각 트레킹15 견습 내인들은 관례식을 치르고 정식 내인이된다.이때부터 궁녀로서 본격적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관례식 재현 절10 관례식은 곧 성인으로 독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궁녀에겐 이 관례가 사실상 혼례이기도 했다
-서있는 재현 궁녀12 궁녀는 왕을 위해 평생을 살아야 하는 여인이기 때문에 왕에게 시집가는 것과 마찬
가지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관례식 궁녀 사진7 관례는 신랑 없는 혼례식인 것이다
-황혜성 인터뷰 "스승한테 옷을 한벌 잘 해서 입혀야지 스승이,그걸 입고 고종황제 앞에 나란히 같은해
들어간 사람들이 서서 큰절을 한번 하고 나면 그게 신랑이예요"
-관례식 올린 궁녀2명14 관례식을 치른 궁녀는 스승 상궁으로부터 독립해 두명씩 짝을 지어 한방을 쓰며
살게 된다.
-김용숙 인터뷰 "그사람들은 같은 처소끼리는 또 안된답니다
말이 똑 같이해서 싸움 날까봐 그런지 이를테면 세수간하고 소주방내인이면 둘이서 같이 살수가 있는거예요
같이 뭐라고 그럴까 룸메이트라고 그럴까요 그렇게 해서 둘이 살아 갔는데"
-달 밤9 동거하는 궁녀들끼리 간혹 동성연애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책 기록 한자5 연산군 일기에는 궁녀들의 동성 연애에 관한 기록이 있다
-기록7 '선왕조에 교붕 즉 동성 연애의 풍속을 개혁코자 했는바 이를 두려워 하지 않고 범하는 자가 많다'
-세종,정종실록책5 또한 실록에는 궁궐을 출입하던 관료와 궁녀간의 간통 사건도 간간히 등장한다
(보기)
-궁녀 방안Z.I 11 한번 궁궐에 들어오면 궁녀들은 평생을 궁궐에 갖혀 살아야 한다.그런데 예외가 있었다
-출궁기록19 가뭄이 들면 궁녀를 궁궐 밖으로 내보내 살게 했다.
세종조에는 여러차례에 걸쳐 궁녀를 수십명씩 출궁시켰다.그 이유는 뭘까
-이배용 교수 인터뷰 "전통시대에서 자연적인 재해는 음양의 도가 어그러졌을 때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그럴 때 가뭄이라든가 천재가 일어날 때 유교를 이념으로 하는 국가에서는 너무나 지나치게 어려서부터
궁궐에 들어와 갖혀 사는 어떤 여성들의 원한이 쌓여 있지 않은가 그런데서 궁녀들중에서 몇 명을 바깥으로
보내서 그것을 풀어주고 그러면서 음양의 조화를 모색해 가는 그런 절차도 있었다"
-기록F.S3 그러나 궁밖으로 나왔다고 생활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기록핀14 (보고)
궁밖으로 나왔다고 해도 궁녀는 다른 남자와 살 수 없었다
-신명호 교수 인터뷰 "궁녀는 국왕 옆에서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국왕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큰 여성들이었다
그래서 국왕 옆에 있었다는 사실하나만으로 출궁이 되어도 신하들은 국왕의 여자일 가능성이 있었던 여자이기
때문에 감히 범접을 못하게 수절을 하게 했다"
-곤장 밑그림+기록14 경국대전에는'조정의 관리로서 궁중에서 내보낸 궁녀를 데리고 사는 자는 장 백대에
처한다'는 규정이 보인다
-갇혀사는 궁궐 이미지30 궁녀는 궁궐과 자신을 얽메고 있는 굴레속에서 외부와의 인연을 끊고 차단된채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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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5
-달 떠있는 밤 분위기십장생 뒤에 측면 누각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평생을 갇혀 지내는 궁녀들,그들에게 있어서 최대 희망 사항은 바로 승은을 입는 것
일겁니다.
왜냐하면 왕의 총애를 받아 승은을 입게 되면 그 위상은 물론 대우가 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중을 드는 입장에서 시중을 받는 입장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죠.
후궁 역시 왕비처럼 간택을 해서 뽑기도 했는데요, 궁녀들은 일의 특성상 왕을 가까이 할 기회가 많기 때문에
간택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후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궁녀가 승은을 입고 왕자녀를 낳게 되면 종4품 숙원에서 높게는 정1품의 빈, 즉 후궁의 자리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나 5,6백명의 수많은 궁녀들 사이에서 왕의 눈에 띄어 총애를 얻는 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십장생 달쪽으로Z.I
따라서 왕의 승은을 입는 것은 궁녀가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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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5 궁녀의 권력과 승은
-칠궁외경PAN14 칠궁엔 왕의 승은을 입고 권세를 부렸던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장희빈이다-
-위패 Z.I 14 장희빈은 숙종의 총애를 얻어 왕자를 낳고 왕비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홍성민 인터뷰 "경종을 원자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당시 서인과 남인들 사이에 심각한 정치적 파란을
불러오게 했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구요 그 당시에 왕비였던 인현왕후와 왕비를 서로 주고 받으면 다시
말하면 인현왕후가 왕비 자리에서 쫓겨 났다가 그 자리에 희빈 장씨가 왕비가 되었다가 다시 쫓겨났다가
인현왕후가 들어오고 결국 희빈 장씨는 죽음을 당하고 아주 파란 만장했던 그런 인생 역정을 밟았던 분이다"
-후궁 왕비 금 기록13 숙종은 이후 후궁을 왕비로 승격시키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불켜진 궁녀 걷는 실루엣12 승은은 곧 신분 상승을 의미한다. 그것은 궁녀들의 최대 희망이었다
-김용숙 인터뷰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오면 승은 했다는 말이있었는데 삼축당 김씨(고종의 후궁)가 그래요
불려서 올라갈때는 만인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려서 투기와 안되기를 바라는... 치마까지 뒤집어 입지 않아도
다 소문난데요, 몇분안에"
-달밤10 왕의 승은을 입기만 하면 젊은 궁녀도 일약 특별 상궁이라는 지위로 뛰어 오르게 된다
-이배용 교수 인터뷰 "아주 행운이 있어가지고 왕녀나 왕자를 생산하게 되면 품격이 상승해서 정1품에서 종4
품까지 후궁 대열에 오를 수 있고 자기 친척 가솔들이 궁궐에 들어올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는데 그런 영광도
있지만 한편에서는 왕비의 질투라든가 궁녀간의 시샘이라든가 또 정치적인 격동기에서는 파란을 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불행을 겪었던 후궁들도 역사속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것이죠"
-내명부기록11 승은은 왕과 궁녀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신명호 박사 인터뷰 "왕은 궁중내에서 남성 통치자라서 남성의례를 대표하고 왕비는 여성통치자로서 여성의
의례를 대표하고 그런 상황에서 궁녀들은 바로 왕비를 도와서 여성 의례를 수행하고 여성 노동을 담당하는
그런 부분이지만 동시에 국왕이 궁녀를 자기 여자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공적인 부분이 순신간에
국왕과의 사적인 남녀간의 관계로 변화될 수 있는 그런 이중적인 관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낙선재 걸어가는 옹주2명 17 (보고)
여든 두 살의 이해원 옹주-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의 딸이다.
어린 시절 살던 사동궁에서 왕이 있던 본궁으로 들어 왔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이해원 옹주EFF "여기는 윤비가 계셨고 이방을 여기 피아노가 있었어 그래서 피아노 배우셨다고 일본여자가
교사였어 밤낮 여기와서 놀았지 마루에서"
-낙선재 건물PAN9 상궁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해원 옹주 인터뷰 "여기서 젊은 상궁은 우리를 귀여워했어요
생머리를 하고 들어오면 놀리고 노래하라고 그러고 춤추라고 그러고 우릴 놀리고 귀여워 했어요.
그렇게 위엄있게 안하고 위엄있는 내인들이 있죠 큰방 내인 큰방 상궁 대전 상궁이나 하는 분들은 위엄을
갖췄어요"
-상궁들 사진13 상궁은 왕의 측근에서 중요한 정보를 얻을있었으며 그 영향력도 커 정승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뇌물 받는 이미지17 실제로 왕이 총애하는 궁녀에게 줄을 대기 위해 뇌물을 주었던 사례를 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기록 보고)
-제조상궁사진13 어명을 받들고 내전의 재산을 관리했던 제조 상궁은 정치적으로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치에 있기도 했다
-수렴 청정 이미지 10 특히 수렴 청정 시기 대비전의 궁녀들의 권세는 막강했다
-신명호 박사 인터뷰 "대비들은 조선시대 여성교육이라는 것은 사실 문자 교육이라는 것은 사실상 없다
대비들이 수렴 청정을 해서 국정을 총책임지지만 상서문이라든가 명령서를 한문으로 작성할 수도 없고 한문
으로 된 공문서를 읽을 수도 없죠
그럴 경우 대비 옆에서 각종 공문서를 번역해주고 대비의 명령을 한문으로 작성해 주고 이런 역할들을 글자를
아는 궁녀들이 담당했다.그럴 경우는 궁녀들이 대비 수렴청정기 막후에서 상당한 실세로 활동했다"
-궁녀들 복도 걷는13 권력의 최측근에 서 있던 궁녀, 그들은 궁안의 또다른 실세로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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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6
-기본 세트
궁녀는 입궁하게 되면 평생 동안 왕실을 위해 봉사해야 했습니다.
한번 궁궐에 들어오면 나갈 수 없는게 바로 궁녀들이었습니다
-궁녀가 지은 시조
여기 이 글은 어느 궁녀가 지은 시조인데요,한번 읽어볼까요
-글씨 한줄씩 발생
'연못에 든 고기들아
누가 너를 몰아다가 여기에 두었느냐
북쪽바다 맑고 넓은 연못
어디두고 이 못에 와 있느냐
들고서 못 나가는 처지는
너나 나나 무엇이 다르랴'
궁궐에 갇혀 사는 자신의 심정을 연못 속의 물고기에 비유했는데요, 구중궁궐의 꽃다운 궁녀하면 화려한
생활이 연상될지 모르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궁궐은 창살없는 감옥이었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외부와 단절된 채 한평생을 궁궐에서 지내온 궁녀들은 나이가 들어 병이 들면 궁궐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마땅히 의지할 곳이 없었던 궁녀들에겐 또다른 어려움이기도 했습니다. 과연 궁녀들은 그들의 집이었던던
궁궐에서 나와 어디서 어떻게 만년을 보내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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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6 궁녀의 만년(마지막 상궁과 퇴출)
-꽃들에서 요금문쪽 카메라13 (보고)
창덕궁의 뒷문인 요금문은 환자나 죽은 시신이 나오는 문이다
-문F.S에서 Z.I 13 왕족외엔 궁에서 죽을 수 없다는 궁궐법도 때문에 궁녀들은 나이들고 병들면 이 요금문
으로 나가야 한다
-황혜성 선생 인터뷰 "산것처럼 태워서 이서문 뒤쪽으로 넘어가면 서쪽에 문이 하나 있어요 그리로 데리고
나갔대요 죽어도 대접을 제대로 받기도 어렵고"
-궁말 찾아가는 트레킹6 그렇다면 궁궐에서 나와 궁녀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았을까
-빽빽이 들어선 집들11 서울 은평구 갈현동, 궁말.
궁녀가 모여산 마을이라고 해서 궁말이라고 불리었던 곳이다.
-궁녀 마을 C.G7 숙종때부터 궁녀들이 살기 시작해 조선시대말까지 20,30가구를 이루고 있었다고한다
-이성영 향토사학자인터뷰 "서오능에 숙종왕을 모시게 되가지고 그왕을
생전에 모시던 대전에 내전에 모시던 궁녀들이 여기 나와서 살게 됐죠 정년 퇴직후 여기와서 능이 가까운데
여기와서 많이 살았다고 그래요"
-김상궁 묘역 PAN15 고양시 일산구-
이곳에는 90년대초까지 상궁의 묘가 있었다.
-정동일 EFF "뒤에 보이는 산등성이 정발산인데 정발산 아래 쪽 내려와서 나무 심어져 있고 조그만 돌이
있는곳 이곳이 안동김씨의 묘역이 있던 곳이다"
-책들고 가리키는 정동일14 궁녀들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자손이 없기 때문에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PD와 정 뒷모습5 (보고)
-정동일 인터뷰 "이장되는 부분은 원형을 그대로 옮겼는지 화장을 모셔서 했는지 알수가 없는 상태다"
-학림사 전경5 서울 상계동에 자리한 학림사-
-나무T.D부도8 학림사 입구엔 특별한 부도가 있다
부도는 스님들의 사리나 유골이 안치돼 있어야 한다.
-이강남 인터뷰 "여기보면 상궁연화 요렇게 음각이 돼 있는데 상궁연화의 부도탑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부도 상궁연화 글씨Z.I 8 놀랍게도 이 부도의 주인은 상궁이었다-
-부도 상궁연화 글씨C.G10 상궁 연화-그녀는 궁궐에서 나와 이곳 학림사에 만년을 보냈던 궁녀였다
-스님 인터뷰 "여기 몸담고 있었던 상궁 노비를 통해서 자세히 얘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여기 많은 상궁들이
몸담고 있다가 생을 마치게 되면 바로 요밑 300미터 위치에 화장터,그곳에서 화장을 했다"
-봉은사 전경3 서울 강남의 봉은사-
-현판4 이곳엔 또다른 궁녀의 흔적이 남아 있다
-경내 부처7 석가 여래상 뒤의 불화가 바로 그것이다
-불화 손으로 상궁시주 "시주 만 상궁 돌아가신 상궁이 시주했던 것 청정화는 불명입니다"
-상궁 이름글씨 타이트7 마땅히 의탁할 데 없던 궁녀들은 절에 시주하며 그들의 만년의 쓸쓸함을 달랬던
것이다
-김상현교수 인터뷰 "고종이 재위해 있던 한 사십여년 동안에 불화가 한 220점 그중에 22점 대개 10% 정도의
불화에 궁녀들의 이름이 보입니다.그 궁녀들은 단순히 궁에 누구라고만 쓰지 않고 거기에 불문까지도 등장이
됩니다."
-시립 중계 복지관 외경3 서울 시립 중계 노인 복지관 -
-찾아들어가는 피디12 이곳엔 마지막 상궁 한분이 살고 있다
-서류 찾는 11 의지할 데 없이 떠돌다 이 복지시설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었다
-서류 사진13 마지막 왕 순종의 비인 윤비를 모셨던 성옥염 상궁은 어떻게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일까
-박희삼 인터뷰 "보문사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보문사 절에서 8년전 인연 모시게 되다가 중풍이 오셔서
관리가 힘들게 되니까 저희 복지관으로 의뢰를하셔서 오신 것으로 알고 있다"
-찾아 들어가는6
-피디EFF "이자리가... 할머니 자리예요"
-비어있는 침상11 성옥염 상궁의 침상은 비어 있었다.
중풍이 악화돼 병원으로 옮긴 것이다
-강남병원 전경3
-인사하는4/6 "성상궁님 (그렇게 부르기 오래간만")
-얼굴2사람6 성상궁의 소식을 듣고 황혜성씨가 달려왔다
-사진8 (보고)
-얼굴 두사람6 30년만의 만남.두사람은 서로를 기억하고 있었다
-황혜성 인터뷰 "볼이 부었는데 고왔어요 참고왔는데 이제 팔십노인네 나도 이제 팔십노인넨데 서로 얼굴은
알아 보는데"
-침상 마지막 상궁14 이 시대 마지막 상궁은 외롭게 자신의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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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7
-동궐도
이 시대의 마지막 상궁
병중에 있으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몸짓이 안타깝습니다.
규율과 법도에 얽매여 외부와 차단된 채 외롭고 쓸쓸한 생을 보내야 했던 궁녀...
어쩌면 이들은 봉건적인 왕조 사회의 희생자였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활동이 제약되던 시기-
왕과 왕비를 보필하는 임무와 함께 최상층 문화인 궁중의 음식과 복식 그리고 한글문학, 궁중문학 등을 보존
해온 궁녀들은 과소 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궁녀는 국가로부터 정식월급을 받고 일한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분야에서의 장인이었으며 최고의 전문직 여성들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