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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雲先生事蹟 / [事蹟] / [輿地勝覽]
輿地勝覽略。
陜川海印寺在伽倻山西。新羅時所創。有崔致遠書巖碁閣。題詩石。海印寺之洞。俗云紅流洞。洞口有武陵橋。自橋循寺而行五六里。有崔致遠題詩石。後人名其石曰致遠臺。讀書堂。世傳崔致遠隱伽倻山。一朝早起出戶。遺冠屨於林間。不知所歸。海印寺僧。以其日薦冥冠,禧舃,寫眞留讀書堂。堂之遺址在寺西。昌原月影臺。在會原縣西海邊。崔致遠所遊處。有石刻剝落。咸陽名宦崔致遠。致遠寄海印寺僧希朗詩下。題防虜太監,天嶺郡太守遏粲崔致遠。瑞山名宦崔致遠。眞聖時爲太守。王召爲賀正使。盜賊交午。道梗不行。泰仁名宦崔致遠。致遠自以西學多所得。及東還。將行己志。而衰季多疑忌不能容。遂出爲大山郡太守。
上書庄。在慶州金鰲山北蚊川上。眞聖主八年。先生上書陳時務十餘條。此其所也。州人今建屋守護。李鍾祥詩。西遊高幕憶書庄。漠漠東還意更長。一入伽倻消息遠。浮雲落照古都忙。
讀書堂。在慶州狼山西麓。先生讀書之所。古井尙存。後人因其舊礎而堂之。肄業其中。竪遺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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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고적】
상서장(上書莊) 금오산 북쪽에 있다. ○ 고려 태조가 일어나자,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이 그가 반드시 천명(天命)을 받을 것을 알고, 글을 올렸으니, “계림은 누런 잎이요, 곡령(鵠嶺 송악(松嶽))은 푸른 솔이로다.”는 말이 있었다. 신라의 임금이 듣고 그를 미워하니, 최치원은 즉시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다가 죽었다.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신라 사람들이 탄복하여, 마침내 그가 살던 곳을 상서장(上書莊)이라고 이름지었다.
上書莊。在金鼇山北。○高麗太祖之興,新羅崔致遠知必受命,上書有“鷄林黃葉,鵠嶺靑松”之語。羅王聞而惡之,致遠卽帶家隱居伽倻山海印寺終焉。其鑑識之明,羅人服之,乃以其所居名上書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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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록(海槎錄)》은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이 인조 14년(1636)에 일본으로 사신 갔다가 이듬해(인조 15년,1637) 돌아올 때까지 나날이 적은 것, 곧 일기이다.*
해행총재(海行摠載) 해사록(海槎錄)
병자년(1636, 인조 14) / 9월 / 3일(갑진)
흐림. 경주를 떠나 봉황대(鳳凰臺)에 올라갔다. 봉황대는 홍살문 밖에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다. 흙을 쌓아 만든 것이라 하는데, 이런 것이 성 남쪽에 거의 열이나 벌여 있어, 옛 도읍은 반드시 대의 남쪽에 있었음을 상상하게 된다. 반월성(半月城)이 남쪽에 있고, 김유신(金庾信)의 묘가 서쪽에 있고, 포석정(鮑石亭)ㆍ첨성대(瞻星臺)ㆍ금장대(金藏臺)가 모두 아득히 바라보인다.
신라(新羅)가 나라를 세운 지 천 년이 되었는데, 삼한(三韓)을 통합하고 한때의 문헌(文獻)이 찬연(燦然)하여 볼 만하였으나, 너무도 부지런히 부처를 섬겨, 절이 여염에 두루 찼으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한가. 계림금궤의 설[鷄林金櫃之說]이 비록 국사(國史)에서 나왔으나 야인(野人)의 말이라 상고할 수 없다. 지금 나라 안의 김 성(金姓)이 거의 신라의 후예이고, 김부(金傅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의 이름)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이 합병하였으나, 그 외손(外孫) 완안 아골타(完顔阿骨打)는 곧 권행(權幸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시조)의 후예인데, 중국을 분할(分割)하여 다스리고 백 년 동안 대를 이었으니, 어찌 신명(神明)의 후예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최고운(崔孤雲)의 상서장(上書庄)이 있던 곳을 물으니,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 있다가 출발하여 낮에 구어역(仇於驛)* 경북 경주시 외동읍 구어리 *에 닿으니, 현풍 현감(玄風縣監) 유여해(兪汝諧)ㆍ장기 현감(長鬐縣監) 양응함(梁應涵)이 와서 기다렸다. 현풍의 하리(下吏) 김흥룡(金興龍) 등 수십 인과 관비(官婢) 설매(雪梅) 등 수십 인이 와서 뵙고, 술과 안주를 대접했다.
이에 앞서 상사가, ‘현풍 현감이 일본으로 데리고 갈 아이를 보내지 않으니, 이는 우리 사행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라 하여, 삼공형(三公兄 조선 시대 각 고을의 호장(戶長)ㆍ이방(吏房)ㆍ수형리(首刑吏)의 세 관속)을 잡아오게 하였는데, 내가,
“현풍의 하인들이 모두 옛날 현감이 오는 것을 기뻐하는데, 아전들을 형신(刑訊)하여 실망시키는 것은 부당하며, 지금 현감은 곧 나와 직무를 교대한 사람입니다. 옛사람은 직무를 교대한 사람을 존중하였으니, 억누르고 욕보이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상사가 웃으며 나의 말을 따랐다.
울산 부사(蔚山府使) 오섬(吳暹)도 와서 기다렸고, 좌병사(左兵使) 허완(許完)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였는데, 곧 나의 외당숙이다. 병영(兵營)까지 5리 못 미쳐 또 사람을 보내왔으므로 곧 병영에 들어갔다. 종사관이 뒤따라 도착하여 곧 울산으로 향하였다. 상사는 내일 바로 동래(東萊)까지 가려 하나, 멀어서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 한다.
[주-D001] 계림금궤의 설[鷄林金櫃之說] : 신라 13대 임금 미추니사금(味鄒尼師今)의 6대조인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에 관한 설화. 즉 호공(瓠公)이 시림(始林 계림)을 지나다가 숲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발견하고 가 보니, 자줏빛 구름이 하늘에서 드리운 곳의 나뭇가지에 금빛 궤짝이 있고 그 밑에 흰 닭이 울고 있으매,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친히 가서 그 금궤에서 사내아이를 얻어 알지라 이름지었다는 설화.[주-D002] 완안 아골타(完顔阿骨打) : 금(金) 나라 태조(太祖)의 이름. 완안은 여진(女眞)의 한 부족명이면서 아골타의 성임. 금 나라는 뒤에 중국에 들어가 송(宋) 나라를 물리치고 중국의 북쪽 반을 차지하였음.
ⓒ 한국고전번역원 | 정봉화 (역) |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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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집 제9권 / 기(記) / 최고운묘기〔崔孤雲廟記〕
한림시독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사(翰林侍讀學士兵部侍郞知瑞書監事) 문창(文昌) 최공 고운(孤雲)의 사당이 함양(咸陽) 백연(柏淵) 가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공이 일찍이 천령(天嶺)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떠난 뒤에도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천령은 지금 함양이 되었기에 함양부의 사람들이 공의 사당을 세워서 제사 지내고 있다.
공의 휘(諱)는 치원(致遠)이다. 어려서 당(唐)나라에 들어가 건부(乾符) 원년(874)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 시어사 내공봉(侍御史內供奉)이 되었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도통(都統) 고변(高騈)이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불렀다.
광계(光啓) 원년(885)에는 조사(詔使)의 일원이 되어 우리나라로 돌아와 김씨(金氏) 왕조를 섬겨 한림시독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사가 되었다.
건녕(乾寧) 원년(894)에는 시무 십사(時務十事)를 올렸으나 왕이 써 주지 않자 이에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하루아침에 관과 신을 벗어 숲 속에 남겨놓았으니 죽은 바를 알 수 없다.
국사(國史)를 살펴보면 공이 본국에 돌아온 지 21년 만에 좌복야(左僕射) 배추(裴樞) 등 38인이 청류(淸流)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백마역(白馬驛)에서 죽으면서 당(唐)나라가 결국 멸망하였고, 그로부터 또 29년이 지나서 신라도 멸망하였다고 되어 있다.
대개 이때는 공이 이미 은거한 뒤였다. 아마도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예견하고, 또 종국(宗國)이 필시 망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초연히 멀리 떠나서 세상을 피해 살면서 돌아오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마음으로 후량(後梁)에 신하도 되고 싶지 않았고, 또 고려 왕씨(王氏)의 신하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깊은 산속으로 도피한 것이 아니겠는가?
고변이 황소를 토벌할 때에 공은 비분강개하면서 고변을 위해 격문을 지어 여러 도(道)의 병사들을 모아서 천하에 이름을 떨쳤고, 황소가 없어진 다음에는 조서(詔書)를 받들고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만일 공이 종신토록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다면, 청류의 화(禍)를 어떻게 면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비록 그 화를 면치 못하였더라도, 필시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면서까지 후량의 조정을 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주(慶州) 남쪽에 상서장(上書莊)이 있는데 세상에서는 공이 이곳에서 왕씨(王氏)에게 글을 올린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왕씨가 처음 일어날 때에 공이 진실로 글을 올려 은밀히 도왔다면 무슨 까닭으로 세상을 피해 홀로 행동하면서 산수지간에서 노년을 마치려고만 하고 벼슬은 하지 않으려고 했겠는가?
왕씨 왕조 중엽에 공에게 문창후(文昌侯)를 추증하고 국학(國學)에서 제사를 올리게 하니 세상에서 영광으로 여기었다. 그러나 공의 높은 절조는 왕씨를 섬기지 않은 바로 그것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탄식을 이루 다 말 할 수 있겠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 아래에서 굶어 죽은 것을 백성들은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다.”라고 하셨다. 만일 은나라가 망하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굶어서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굶어 죽은 것은 그들의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함이었기에 천하의 칭송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공이 가야산에서 관과 신을 벗어놓고 떠난 것으로부터 시간적으로 살펴보면 그때는 이미 김씨 왕조가 망한 뒤였다. 이는 공의 뜻 또한 몸을 깨끗이 하려고 한 것이니, 저 백이ㆍ숙제 두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금상(今上) 21년에 모후(某侯)가 함양부에 수령으로 나가 공의 사당에 참배하고는 부(府)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그 남은 터에 사당을 개수하고는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대저 국학에서 공의 제사를 올린 지가 오래 되었으니 부(府)의 관아에 꼭 사당을 세울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기왕에 공의 유적이 있고 보면, 또한 백세토록 없어지지 않게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에 기문을 쓴다.
[주-D001] 최고운(崔孤雲) : 최치원(崔致遠, 857~?)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다. 869년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縣尉)가 되고,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885년(헌강왕11)에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등이 되었으나 국정의 문란함을 통탄하며 외직을 요청하여 지방의 태수를 지냈다. 893년 견당사(遣唐使)에 임명되었으나 가지 못했고 이듬해 시무10조를 상소하였다. 그 후 난세를 비관하여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이 있다.[주-D002] 자금어대(紫金魚袋) : 적동(赤銅)으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장식에 붙어 있는 주머니로 당송(唐宋)시대에 관리가 가지고 다니면서 자신의 신분을 표시하던 것이다. 공복(公服)의 띠에 매달아 관직의 귀천을 구분했다.[주-D003] 황소(黃巢)가 …… 불렀다 : 황소(黃巢)는 당나라 말기 농민반란의 우두머리이다. 왕선지(王仙芝)의 반란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킨 뒤 전국 각지를 전전하면서 가는 곳마다 관군을 격파했고 5년 뒤에는 장안에 입성하여 스스로 황제에 올랐지만, 관군의 반격이 있자 자결했다. 당시 최치원은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주-D004] 건녕(乾寧) …… 남겨놓았으니 : 시무 십사(時務十事)는 진성여왕 8년(894)에 잘못된 정사가 많고 도적들이 떼지어 일어나는 상황에서 최치원이 올린 10조목의 개혁책이다. 《삼국사기》와 《동사강목》을 포함해 대부분의 역사서에서는 당시 시무책이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정권을 쥐고 있던 진골귀족들에게 배척을 받아 결국 시행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관직을 버리고 소요하다가 마침내 은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주-D005] 좌복야(左僕射) …… 멸망하였다 : 당(唐)나라 애제(哀帝) 때에 권신(權臣) 주전충(朱全忠)이 배추(裵樞) 등 조사(朝士) 30여 명을 백마역에 집결시켜 하루저녁에 다 죽이고 그 시체를 황하(黃河)에 던져 넣은 사건을 말한다. 당초 주전충의 좌리(佐吏)였던 이진(李振)이 진사시(進士試)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조사들을 매우 미워하여 주전충에게 말하기를 “이 조사들은 늘 스스로 청류(淸流)라고 하니, 황하(黃河)에 던져서 영원히 탁류(濁流)가 되게 하시오.” 하니, 주전충이 그 말을 따랐다고 한다. 《唐書 卷240 裵樞傳》 《通鑑節要 卷48 唐紀 昭宣帝》[주-D006]
상서장(上書莊)이 …… 올린 곳 : 상서장은 최치원이 왕건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계림에는 나뭇잎이 노랗고 곡령에는 소나무가 푸르다.〔鷄林黃葉, 鵠嶺靑松.〕”라는 구절을 넣어 편지를 써 보냈다고 하는 곳이다. 이 구절은 신라의 망할 것을 예고하여 왕건에게 아첨한 것이라고 하여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심지어 후대의 이익이나 안정복은 신라왕이 이를 듣고 미워하자, 최치원이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는 상서장이 진성왕(眞聖王) 때 올린 시무 십조(時務十條)를 쓴 곳이라고 적고 있어서 분명치 않다.
[주-D007] 왕씨 …… 여기었다 : 최치원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1020년(현종11)에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從祀)되었으며,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주-D008] 백이와 …… 있다 : 이 말은 《논어》 〈계씨(季氏)〉에 보인다.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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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자집 시고 제6책 / 시(詩) / 영동사 345〔其三百四十五〕
스물여덟에 조서 받들고 신라로 돌아왔으니 / 廿八東歸奉詔遙
시기가 많았으나 자취는 도리어 초연했다오 / 世多疑忌跡還超
작은 고을에 큰 재능을 어찌 펼 수 있을까 / 百里何能展驥足
부질없이 시무책 십여 조항만 진달했다오 / 謾陳時務十餘條
신라 헌강왕(憲康王) 11년(885)에 최치원(崔致遠)이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동쪽 신라로 돌아오니 당시 나이 28세였다. 왕이 최치원을 머물러두어 시독 겸 한림학사 병부시랑(侍讀兼翰林學士兵部侍郞)을 삼자 최치원은 갖고 있던 포부를 펴고자 하였는데,정사가 쇠하여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되지 못해서 외방으로 나가 태산 태수(太山太守)가 되었다.진성여왕(眞聖女王) 때 부성 태수(富城太守)가 되었는데,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올리자 왕이 아찬(阿飡)으로 삼았다. 최치원은 자신의 불우함을 상심하여 더 이상 벼슬할 뜻을 갖지 않고 스스로 산수 사이를 방랑하였다. 경주(慶州)의 남산(南山),강주(剛州)의 빙산(氷山),합주(陜州)의 청량사(淸凉寺),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의 월영대(月詠臺)와 같은 곳이 모두 그가 노닐던 곳이다. 뒤에 가솔들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에 은거하였다. 친형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定玄) 선사와 도우(道友)를 맺고 여생을 보냈다. 태산군(太山郡)은 지금의 태인현(泰仁縣)이며 부성군(富城郡)은 지금의 서산군(瑞山郡)이다.
[주-C001] 시(詩) : 《무명자집》 시고 제6책에 실린 시는 작자 나이 67세인 정묘년(1807, 순조7) 세모에 지은 시부터 70세인 경오년(1810)에 지은 시에 이르기까지 3년 동안 창작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무명자집》 시고 제6책의 후반부에 실린 〈득실에 대해 읊다〔詠得失〕〉라는 시의 원주에 “모두 9수인데 한 수는 제8권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고, 《무명자집》 시고 제5책 〈영사 93〉의 주석에 ‘12권 기묘조(己卯條)’에도 시가 있다고 언급한 것을 종합하면 원래 제6책 이후로도 많은 시가 있어서, 최소한 12책 이상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1811년에서 1826년 작고할 때까지 만년에 해당하는 15년간의 시는 산일된 듯하다.[주-D001] 영동사 345 : 〈영동사 344〉 참조.[주-D002] 작은 …… 있을까 : 이와 관련하여 《삼국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유비(劉備)가 형주(荊州)를 통령할 때 방통(龐統)을 종사(從事)의 신분으로 뇌양현(耒陽縣)의 현령에 제수하였는데, 그가 맡은 현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자 그를 파직하였다. 이에 동오(東吳)의 장령인 노숙(魯肅)이 유비(劉備)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방사원(龐士元)은 백리 정도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인재가 아닙니다. 그에게 치중(治中)이나 별가(別駕)의 소임을 맡기신다면 그때 비로소 그의 뛰어난 재능을 제대로 펼 수 있을 것입니다.’〔先主領荊州 統以從事守耒陽令 在縣不治 免官 吳將魯肅遺先主書曰 龐士元非百里才也 使處治中別駕之任 始當展其驥足耳〕” 《三國志 蜀志7 龐統傳》[주-D003] 신라 …… 하였는데 : 신라 제49대 임금 헌강왕(憲康王) 11년(885) 3월의 일이다. 《三國史記 卷11 新羅本紀11 憲康王》 《崔文昌侯全集 孤雲先生史蹟 家乘》[주-D004] 정사가 …… 되었다 : 헌강왕 12년(886)의 일이다. 동년 7월 5일에 헌강왕이 죽은 뒤 최치원(崔致遠)은 태산군(太山郡) 태수가 되었다. ‘태산태수(太山太守)’는 《삼국사기》에는 ‘大山郡大守’로 되어 있으며 《동사강목》에는 ‘太山郡太守’로 되어 있고 그 주석에 ‘泰仁’으로 되어 있는데 이에 근거하면 ‘태산’이 옳다. ‘대산’은 충남 홍산(鴻山)의 옛 이름이며 ‘태산’은 전북 태인(泰仁)의 옛 이름으로, 현재의 전북 정읍시 칠보면 일대에 해당한다. 《東史綱目 第5上 乙巳》 《韓國地名沿革考 大山ㆍ太山》 《崔文昌侯全集 孤雲先生史蹟 家乘》[주-D005] 진성여왕(眞聖女王) …… 삼았다 : 최치원이 부성군(富城郡) 태수가 된 것은 진성여왕 7년(893)의 일이며 시무책을 올리고 아찬(阿飡)이 된 것은 진성여왕 8년(894) 2월의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경주 금오산(金鼇山) 북쪽 문천(蚊川) 가에 상서장(上書莊)이라는 유적이 있는데, 최치원이 시무책을 작성한 곳이라고 한다. ‘부성’은 충남 서산(瑞山)의 옛 이름이다. ‘아찬’은 17관등 중 6번째 등급으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이다. 《三國史記 卷11 新羅本紀11 眞聖王》 《東史綱目 第5上 癸丑》 《崔文昌侯全集 孤雲先生史蹟 家乘, 上書莊》 《韓國地名沿革考 富城》[주-D006] 경주(慶州)의 남산(南山) : 금오산(金鼇山)을 이른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尙道 慶州府 山川 金鼇山》[주-D007] 강주(剛州)의 빙산(氷山) : ‘강주’는 경북 영주(榮州)의 옛 이름이다. ‘빙산’은 지금의 경북 의성(義城)에 있는 산으로 당시 영주에 속해 있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5 慶尙道 義城縣 山川 氷山》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8쪽》[주-D008] 합주(陜州)의 청량사(淸凉寺) : ‘합주’는 경남 합천(陜川)의 옛 이름이다. ‘청량사’는 가야산(伽倻山) 월류봉(月留峯) 아래에 있는데, 최치원이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0 慶尙道 陜川郡 佛宇 淸凉寺》 《崔文昌侯全集 孤雲先生史蹟 月留峯》[주-D009]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雙溪寺) : 최치원이 글을 읽었던 곳이다. 쌍계사 입구에 문처럼 마주보고 있는 두 바위 중 동쪽 바위에는 ‘쌍계(雙磎)’, 서쪽 바위에는 ‘석문(石門)’이라고 쓰여 있는데, 최치원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또한 최치원이 직접 지은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가 있는데,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현재 국보 제47호로 지정되어 있다. 《崔文昌侯全集 孤雲先生史蹟 雙溪寺》[주-D010] 합포현(合浦縣)의 월영대(月詠臺) : ‘합포현’은 회원현(會原縣)의 옛 이름으로 지금의 경남 창원(昌原)에 있다. ‘월영대’는 회원현 서쪽 바닷가에 있으며 지금은 경남 마산(馬山)에 속해 있다. 또한 회원현에 있는 두척산(斗尺山) 봉우리 위에 고운대(孤雲臺)가 있는데, 고운대에 있는 늙은 감나무는 최치원이 직접 심은 것이라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2 慶尙道 昌原都護府 山川 斗尺山, 卷32 慶尙道 昌原都護府 古跡 月詠臺》 《崔文昌侯全集 孤雲先生史蹟 月詠臺》[주-D011] 뒤에 …… 은거하였다 : 이와 관련하여 뒤에 치인촌(治仁村)으로 고쳐 부른 치원촌(致遠村)이라는 곳이 있다. 또한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 서쪽에 학사대(學士臺)가 있는데, 최치원이 직접 심었다는 늙은 회나무가 있어 여기에 누대를 세우고 학사대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崔文昌侯全集 孤雲先生史蹟 學士臺》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이상아 (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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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제18권 / 경사문(經史門) / 최 문창(崔文昌)
신라 시중(侍中) 최치원(崔致遠)이 고려 태조가 사저(私邸)에 있을 때 보낸 편지에 “계림에는 누른 잎이요, 곡령에는 푸른 솔이로다[鷄林黃葉 鵠嶺靑松].”한 문구가 있었는데, 뒤에 현종(顯宗)이 “그는 고려의 왕업(王業)을 비밀히 협찬(協贊)하였으니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공자묘(孔子廟)에 배향(配享)하고 문창후(文昌侯)로 추봉(追封)하였다. 대저 선성(先聖 공자(孔子)를 이름)의 묘에 배향하는 것을 공(功)만으로 한다면 한(漢)의 소하(蕭何)ㆍ조참(曹參)이 마땅히 먼저 배향되었어야 할 것이다. 최치원은 신라의 대신인데 만약 이미 고려의 왕업을 비밀히 협찬한 뜻이 있었다면 그것은 패역(悖逆)에 해당되어 신하답지 못한 것이다. 하물며 그가 말한 문구가 참서(讖書)의 투식(套式)에 불과한 것이니, 어찌 족히 높일 수 있겠는가? 그가 지은 난랑비(鸞郞碑)에 이르기를, “〈우리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설교(設敎)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는 실로〉 3교(敎 유(儒)ㆍ불(佛)ㆍ도(道)를 말함)를 포용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와서는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魯司寇)의 취지요,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여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주사(周柱史)의 종지(宗旨)요, 모든 악함을 짓지 아니하고 뭇 착함을 받들어 행함은 축건 태자(竺乾太子)의 교화이다.” 하였다. 난랑(鸞郞)은 화랑(花郞)이다. 화랑은 비설(鄙媟)하기가 심한 것이다. 비록 덕의(德義)의 선비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그 사이에 몸을 굽혀 들어가겠는가? 그 식견의 비열함이 이와 같다. 하물며 노자(老子)와 불(佛)까지 공자와 같이 높여서 이단(異端)으로써 유교(儒敎)를 해치는 우두머리(首)가 되었는데, 우리 유교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와 같이 숭봉(崇奉)하였는가?
퇴계(退溪)가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그의 불(佛)에 아첨하는 문자를 보매 매양 마음에 통분한데 그의 신(神)이 어찌 양무(兩廡)의 배향(配享)을 편안히 여기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이 이미 정론(定論)이 있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퇴계에게 일마다 존모(尊慕)를 극진히 하면서 유독 퇴계의 이 말만은 채택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내가 일찍이 시를 짓기를,
광명에 난적을 토벌하는 데는 격문을 지어야겠지만 / 廣明討亂檄宜草
글을 지어 부처에 아첨한 것은 허물이 많다 / 作書侫佛多愆尤
새벽에 암탉이 울 때 기미를 본 것은 밝았으나 / 牝晨昏德見幾明
신하로서 외국과 사귀는 것은 과연 무엇을 구함이었나 / 爲臣外交果何求
계림 황엽에는 옛 신하로 곡할 일인데 / 鷄林黃葉舊臣哭
곡령의 왕업을 도리어 걱정하네 / 鵠嶺王業還堪憂
고려의 일어남을 밀찬했다 함은 크게 틀린 말이요 / 隆興密贊語大謬
양무에 배향된 것은 저도 응당 부끄러운 것이다 / 兩廡血食渠應羞
상서장 앞에 손벽을 한번 치니 / 上書莊前一拍手
문순의 정론이 이제 유유하네 / 文純定論今悠悠
하였다. 이 시가 족히 단안(斷案)이 될 만하다.
[주-D001] 최 문창(崔文昌) : 문창(文昌)은 신라 말기의 학자ㆍ정치가인 최치원(崔致遠)의 봉호. 호는 고운(孤雲)ㆍ해운(海雲)이다. 당에 유학하여 빈공과(賓貢科)에 급제, 황소(黃巢)의 난에 고변(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항복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입국 후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아찬(阿飡)에 이름. 아찬은 신라 17관계(官階) 중 여섯째 관등에 불과하니 저자가 대신의 지위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한 것은 잘못임.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ㆍ《고운집(孤雲集)》 등이 있다. 《類選》 卷9下 經史篇8 論史門5.[주-D002] 계림에는 …… 솔이로다[鷄林黃葉 鵠嶺靑松] : 이 대문은 신라(新羅)는 시들고 고려(高麗)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곡령(鵠嶺)은 송악(松嶽)의 옛 이름.[주-D003] 공자묘(孔子廟)에 …… 추봉(追封)하였다 : 최치원이 공자묘(孔子廟)에 배향된 것은 고려 현종(顯宗) 11년(1020)이고,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된 것은 현종 14년(1023)이다. 《高麗史 顯宗世宗》[주-D004] 우리나라에 …… 이는 실로 : 이 부분은 《고운집(孤雲集)》 속집(續集)에 실려 있는 난랑비 서(鸞郞碑序)에 의해 보충한 것임.[주-D005] 노사구(魯司寇) : 공자(孔子)의 별칭. 노(魯) 나라의 사구(司寇)를 지냈으므로 공자를 이름. 사구는 법을 맡은 관리.[주-D006] 주주사(周柱史) : 노자(老子)의 별칭. 주(周) 나라 장서실(藏書室)의 주하사(柱下史)로 있었으므로 줄여서 주사라 한 것임.[주-D007] 축건 태자(竺乾太子) : 석가(釋迦)를 이름. 축건은 인도(印度)의 별칭. 석가는 정반왕(淨飯王)의 태자임.[주-D008] 광명에 …… 지어야겠지만 : 이 구절은 최치원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황소의 난을 토벌한 것을 이름. 광명(廣明)은 당 희종(唐僖宗)의 연호.[주-D009] 글을 …… 많다 : 이 구절은 난랑비 서(鸞郞碑序)를 지은 것을 이름.[주-D010] 곡령의 …… 걱정하네 : 이 구절까지가 왕건(王建)에게 글을 보내 “계림(鷄林)에는 누른 잎이요, 곡령(鵠嶺)에는 푸른 솔이로다.” 하여 신라의 망할 것을 예고하여 왕건에게 아첨한 것을 이름. 본래 신하는 사사로운 외교가 없는 것임.[주-D011] 문순(文純) : 퇴계(退溪) 이황의 시호.[주-D012] 이 시 : 이 시는 《성호선생전집(星湖先生全集)》 권7에 상서장(上書莊)이라는 제목으로 보이는데 그 서(序)를 참고로 옮긴다. “고려 태조가 일어날 때, 최치원이 그가 반드시 천명(天命)을 받을 줄 알고 글을 올렸는데, ‘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나왕(羅王)이 이를 듣고 미워하니 최치원이 곧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감식력(鑑識力)의 밝음에 나인(羅人)들이 탄복하여 그가 살던 곳을 상서장(上書莊)이라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철희 성낙훈 양대연 (공역) |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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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星湖全集) 이익(李瀷)생년1681년(숙종 7)몰년1763년(영조 39)자자신(子新)호성호(星湖)본관여주(驪州)특기사항근기(近畿) 실학파(實學派)
星湖先生全集卷之七 / 海東樂府 / 上書莊
高麗太祖之興。崔致遠知必受命。上書有雞林黃葉鵠嶺靑松之語。羅王聞而惡之。致遠卽帶家隱居伽倻山海印寺終焉。其鑑識之明。羅人服之。乃以其所居。名上書莊。
廣明討亂檄宜草。作書佞佛多愆尤。牝晨昏德見幾明。爲臣外交果何求。雞林黃葉舊臣哭。鵠嶺王業還堪憂。隆興密贊語大謬。兩廡血食 三字缺。上書莊前一拍手。文純定論今悠悠。
성호전집 제7권 / 해동악부(海東樂府) / 상서장〔上書莊〕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일어났을 때에, 최치원(崔致遠)이 그가 반드시 천명을 받을 것임을 알고는 상서(上書)하였는데, 그 글에 “계림에는 누런 잎이고 곡령에는 푸른 솔이다.〔雞林黃葉 鵠嶺靑松〕”라는 말이 들어 있었다. 신라 왕이 듣고 미워하니, 최치원이 즉시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의 감식(鑑識)의 명철함에 대해 신라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이에 그가 거처하던 곳을 상서장(上書莊)이라 하였다.
광명에 난적 토벌 격문을 지은 것 잘한 일이지만 / 廣明討亂檄宜草
글을 지어 부처에게 아첨했으니 허물이 적지 않네 / 作書佞佛多愆尤
암탉 울어 군덕 혼매할 때에 기미를 봄이 밝았으나 / 牝晨昏德見幾明
신라 신하로 외국과 사귀었으니 무엇을 바랐을까 / 爲臣外交果何求
계림의 누런 잎을 옛 신하가 곡하는데 / 雞林黃葉舊臣哭
곡령의 왕업을 도리어 걱정하였구나 / 鵠嶺王業還堪憂
융흥을 몰래 도왔다는 것은 아주 틀린 말이고 / 隆興密贊語大謬
양무에서 제향을 받는 것은 부끄러워할 일이라네 / 兩廡血食渠應羞
상서장 앞에서 손뼉을 한 번 치노니 / 上書莊前一拍手
문순의 정론이 이제는 아득하네 / 文純定論今悠悠
[주-C001] 해동악부(海東樂府) : 악부(樂府)는 중국 한(漢)나라 때에 각 지역의 음악을 채집하여 정리하는 관서(官署) 명칭이었는데, 나중에는 채집된 음악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시대가 흐르면서 악곡(樂曲)은 분리되고 가사(歌詞)만 남아 시(詩)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해동(海東)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니, 해동악부는 우리나라의 역사나 문물을 소재로 사용한 악부를 말한다. 특히 성호의 해동악부와 같이 역사 사실을 소재로 사용한 악부를 영사악부(詠史樂府)라고 한다.[주-D001] 광명(廣明)에 …… 것 : 광명은 당나라 희종(僖宗)의 연호로 880년에서 881년 전반기까지이다. 당시는 황소(黃巢)의 반란으로 혼란한 시기였는데, 최치원(崔致遠)이 병마도통(兵馬都統) 고변(高駢)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으면서 이 시기에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지었다.[주-D002] 글을 …… 아첨했으니 :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고 한다. 설교(說敎)의 근원이 선사(仙史)에 자세하게 실려 있으니, 실로 삼교(三敎)를 포괄하여 군생(群生)을 교화하는 것이다. 들어오면 집안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자는 것은 노(魯)나라 사구(司寇)의 종지(宗旨)이고, 무위(無爲)로 일을 처리하고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시행하자는 것은 주(周)나라 주사(柱史)의 종지이며, 제악(諸惡)을 짓지 말고 제선(諸善)을 봉행하자는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의 교화이다.” 하였다고 한다. 성호는, 최치원이 불교를 유교와 나란히 높인 것을 비판적으로 보아, 부처에게 아첨했다고 한 것이다.[주-D003] 암탉 …… 밝았으나 : 최치원이, 여왕이 나라를 다스려 혼란스러워진 것을 보고 신라가 곧 망할 것임을 알았다는 뜻이다.[주-D004] 신라 …… 사귀었으니 : 최치원이, 고려 태조가 사저(私邸)에 있을 때 편지를 보낸 것을 말한다. 그 편지에 “계림에는 누른 잎이고 곡령에는 푸른 솔이로다.〔鷄林黃葉 鵠嶺靑松〕”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주-D005] 융흥(隆興)을 …… 말이고 : 《국역 성호사설》 제18권 〈경사문(經史門) 최 문창(崔文昌)〉에 “현종(顯宗)이 ‘그는 고려의 왕업(王業)을 비밀히 협찬(協贊)하였으니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공자묘(孔子廟)에 배향(配享)하고 문창후(文昌侯)로 추봉(追封)하였다.” 하였다.[주-D006] 양무(兩廡)에서 …… 일이라네 : 대본에는 ‘三字缺’로 되어 있으나, 《국역 성호사설》 제18권 〈경사문 최 문창〉에 의거하여 ‘渠應羞’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고려사》 권2 〈세가(世家) 현종〉에 의하면, 최치원은 1020년(현종11) 8월에 내사령(內史令)에 추증하여 공자(孔子)의 문묘에 배향하였으며, 1023년 2월에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성호의 뜻은, 이단으로 취급하던 도교와 불교를 유교와 나란히 높여 공자를 모독한 최치원이 공자의 문묘에 배향된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주-D007] 문순(文純)의 정론(定論) : 문순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시호이다. 《국역 성호사설》 제18권 〈경사문 최 문창〉에 “퇴계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부처에게 아첨하는 그의 글을 보고는 일찍이 통분스럽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의 신(神)이 어찌 감히 양무의 배향(配享)을 편안히 받아먹는단 말인가.’ 하였으니, 이는 이미 정론이 있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퇴계에 대해서는 일마다 존모(尊慕)하기에 겨를이 없으면서 유독 이 말씀만은 채택하지 않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헌순 (역)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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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선생문집 제10권 / 동사문답(東史問答) / 성호 선생에게 올린 편지. 정축년
저는 최고운(崔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일에 가만히 의심을 갖습니다. 고운은 신라왕실의 중신(重臣)으로서 몰래 고려조에 부탁하는 “계림(鷄林)엔 누런 잎 지고 곡령(鵠嶺)엔 푸른 소나무 무성하네.[鷄林黃葉 鵠嶺靑松]”라는 글귀를 남겼습니다. 지금 경주(慶州)에 상서장(上書庄)이 있으니, 또한 추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현종(顯宗) 세대에 와서 결국 이것을 가지고 공을 삼아 벼슬에 봉하였으니,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또 《삼국유사》에서는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에게 보낸 답서를 고운이 지은 것으로 적고 있습니다. 이 답서는 본래 황탄(荒誕)하여 믿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에 이르기까지는 반드시 유전하여 말하는 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上星湖先生書[丁丑]
東史凡例大義。則前已禀定而畧有所補。如賢者書官而書卒。若姜邯贊,崔冲之類是也。其有可惡者。只書卒。若琴儀,李奎報之類是也。權奸則一皆書死。此等筆例。大槩如是矣。安市,盖馬,帶方三考。畧具別紙仰告。伏乞賜敎焉。王太祖分明是纂。麗人之婉順其辭者。爲尊諱也。我旣非其臣子。則當從史家本例。書曰泰封將王建稱王。逐其君弓裔。裔走死。其曰泰封將者。爲臣之辭也。其曰稱者。自尊之辭也。其曰逐者。紀實事也。其曰裔死者。裔爲羣盜也。更乞賜敎。愚於崔孤雲事。竊有疑焉。孤雲以羅室重臣。潛託麗朝。有黃葉靑松之句。今慶州有上書庄。亦可醜也。到顯宗世。竟以此爲功而封爵焉。實有其事故也。且三國遺事。以麗祖答甄萱書。爲孤雲作此書。本荒誕難信。然至若如此事者。則亦必有流傳而言者矣。以史考之。孤雲中唐僖宗甲午科。時年十八。則是丁丑生也。麗祖答萱書在戊子。孤雲至此。盖七十二歲矣。或以此書不入孤雲本集爲疑。則黃葉靑松之句。亦不入于集中何也。史所謂密贊祖業者是。而盖欲諱其迹而刪去之耳。此等議論。似涉深刻。而孤雲東國之望也。以一國之望。而其事如此。則豈不爲賢者之一大眚乎。若本朝之陽村輩。恐當一例。伏乞更賜指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