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압 외 1편
곽문연
백화점에 갔다
옷을 사본지 오래다
내가 모르는 옷값 앞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일, 십, 백, 천 다락같이 높아진 치수 앞
세상의 저편에서 나는
노래 소리만 들었던 것일까
그들이 날개를 비비며 노래 부를 때
나는 가뭄을 대비한 웅덩이를 파고
한 여름 벼를 죽이던 깜부기를 뽑아냈다
살만 보이지 않으면
땅 파는 일에 지장 없던 세상 위로
고속철이 생겨나고 벤츠가 달리고
우주를 넘나들 때
나는 상추쌈으로 밥을 먹고 이를 닦았다
끌어내려도 내려가지 않는 수치 앞에서
나의 수치를 다시 조율한다
흰 눈 덮인 빨간 산수유 가지 위
발가벗어도 가지를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비비새 앞에서
나의 눈높이를 수정하는 아침 청량하다
내가 내리는 눈높이의 정체는
수십 길 크레바스로 갈라져도
식지 않을 연민 같은 것
원초적 그리움 같은 것이다
갚아야 갚아지는 빚
참으로 신기한 세상이다
어제 정수기 기사에게 준 와인 한 잔이
오늘 굴비 한 두름으로 오고
어제 옆집에 준 잡채 한 그릇이
오늘 참기름 한 병으로 돌아왔다
말로만 듣던 윤회
육도(六道)를 돌지 않아도
다음 생까지도 아닌 당대에서 이루어지는 응보들
주말농장 창고에서 날마다 개잡는 소리
연한 고기를 만들기 위해
거꾸로 매달아 전기로 지지던 아재
결국 두 다리 걷지 못하고 누워만 있고
어느 여름 허리 병에
지네 백 마리 갈아 환 지어 먹은 나는
나올 듯 나오지 않는 문장 앞에서
지네 지나가는 듯 지끈거리는
머리 스멀스멀하다
곽문연
1940년생 충북 영동 출생
춘천대학교 졸업, 중대예술대학원 수료
2003년 <문학마을> 등단, 시집 <단단한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