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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에서 살아남기
이 홍사
강석의 사무실은 경제은행 바로 뒷골목에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팔 층짜리 상가건물인데 칠 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허름한 옛날 건물이지만 이 골목은 미얀마 경제의 중심지라 양곤에서는 임대료가 비싸기로 소문난 곳이다. 법률사무소와 관세사무소가 빼곡하게 들어앉은 건물이었다. 칠 층까지 땀을 흘리며 걸어서 올라가야만 했다. 앞서서 올라가는 강석의 티셔츠 등골에는 땀에 젖어 있었다. 칠 층까지 올라가는 계단은 끝이 없었다. 땀을 흘리며 앞서 올라가는 강석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여기에 살면 스케일링을 못해서 어쩌나?
-이 나라도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서 치과가 많아.
-스케일링도 해?
-그런 건 아니지만 곧 하겠지.
강석의 성감대는 이빨과 잇몸에 있다는 이상한 인간이다. 한국에 있을 적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석 달에 한 번씩 스케일링을 받았다. 양치질을 하면 그렇게 기분이 황홀하고 스케일링을 받으면 오르가즘을 느낀다는 희한한 인간이다. 하여 스케일링을 받는 날만 잡아도 마음이 설렌다고 했으며 칫솔도 뻣뻣한 것, 잇몸을 자극하는 것을 골라 쓰던 인간이었다.
-하긴, 마누라가 생겼으니 스케일링을 안 받아도 되겠네.
-그것과 그것은 엄연히 다르지.
강석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라가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런가? 아직도 성감대는 살아있는 모양이네? 참, 희한하네.
칠 층까지 올라가서 보니 복도는 더 더웠다. 완전 찜통이었다. 각 사무실에서 내뿜는, 에어컨 송풍기에서 발산하는 열기가 복도 가득했다. 칠 층까지 올라오면서 보니 이 건물도 미얀마의 여느 건물과 다름이 없었다. 각 층마다 칸막이를 해서 작은 사무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구조였다. 땅은 넓은데 반해 시내 건물의 사무실은 돌아설 공간도 없을 정도로 좁게 산다.
강석을 만난 것은 전혀 뜻밖이었다. 양곤에서 이 인간을 만나다니, 강변 백사장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찾은 기분이었다.
길거리 노점에서 플라스틱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팥빙수를 먹다가 만난 것이다.
양곤의 길거리 팥빙수!
얼음조각이 사각사각 씹히는 게 울대부터 내장까지 시원한 느낌이었다.
한국에서는 지금도 그런 걸 파는 곳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더운 이 나라에서는 일 년 내내 길거리, 육교 밑에서 파는 싸구려 팥빙수였다. 워낙 싸고 맛있어서 누구를 데리고 가서 먹으면 맛에 한번 놀라고 가격에 한번 놀란다.
시내에 나올 적마다 나는 그곳에 들러서 팥빙수를 먹는다. 가끔은 팥빙수에 우묵 같은 젤리를 넣은 스페셜 팥빙수를 먹기도 한다. 스페셜이라는 특별한 단어가 붙었지만 한화로 계산하면 겨우 이백 원 정도 더 비싸다. 그걸 먹으면 팥이 지닌 고유의 맛이 사라지기에 몇 번 먹어보고는 그냥 싸구려팥빙수를 먹는다. 일부러 일 삼아서 팥빙수를 먹으려고 그곳에 들리는 건 아니다. 교통 상황을 생각하면 그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극심한 교통체증이다. 복잡한 시내이지만 바로 앞에 도로의 가장자리에 한 차선을 유료주차장으로 만들어 주차하기 편하기 때문에 그곳에 주차를 한다. 주차료는 종일 세워두어도 고작 이백 원이다.
시내에 나오면 대개는 거기에 주차를 하고 걸어 다니며 볼일을 본다. 시내는 연일 거대한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교통질서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십 분 걸으면 되는 곳인데 차로 움직이면 삼십 분이다. 그 밀리는 틈을 억지로 파고들어가 보면 주차할 곳이 없다. 주차할 공간을 찾는데 또 몇 십 분이 걸린다. 몇 년 사이에 차가 폭발적으로 불어나 연일 이 모양으로 도로가 몸살을 앓고 여기저기서 신경질적으로 울리는 경음기 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지지만 무덤덤하게 넘어갈려니 죽을 맛이다. 이 나라 정부에서도 양곤은 차가 포화상태라 승용차에 한해서 더 이상 양곤 넘버를 내주지 않고 있다. 그만 들여오라는 얘기다.
미얀마는 자동차 생산국가가 아니라서 세계의 중고차량이 다 모여 있다. 그 중에서도 운전대가 반대쪽에 달린 일본의 중고차가 엄청 들어온다. 그게 교통체증의 주범이다. 일본제 중고버스에서 승객을 부리면 중앙선 쪽으로 내려 무단횡단 한다. 또 추월하려면 차 대가리를 완전히 내밀어야 운전자가 앞의 상황이 보이는 실정이라 어디서고 끼어들어 도로를 막기 일쑤다.
육교 옆에 보이는 무역센터 모퉁이를 돌면 술래파고다가 길 한가운데 로터리 삼아 있고 바로 옆에 양곤 시청이 있으니 양곤, 아니 미얀마에서는 가장 복잡한 도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술래파고다를 지나면 양곤 경제은행 본점이 있다. 오늘은 경제은행 본점에 들러야 했다. 한국에서 달러를 송금하면 지점에서는 인출하지 못한다. 아직 온라인망이 확대 정착되지 않아 지점에서는 해외에서 외환으로 송금되는 업무를 취급하지 않는다. 본점에 들러 달러를 미얀마 돈으로 환전해서 내 현지 계좌로 옮겨야 했다. 이번 주에 결재를 해야 할 곳이 많다. 결재할 액수를 다 인출하면 큰 포대에 두 자루는 넘을 게다. 돈을 들고 다니려면 포터를 불러야할 실정이다. 미얀마에도 고액권이 있다. 하지만 고액권은 다 부자들 창고에 쌓여있다. 아직 은행을 믿지 않는 곳이다. 하여 거액을 인출하면 천 짯짜리 다발을 차곡차곡 자루에 담아 메고 다녀야하는 실정이다. 어쩌다 외국인이라고 편리를 생각해서 오천 짯짜리를 주기도 하는데 그 대가로 이백 짯을 받는 희한한 시스템이다. 현지 계좌로 옮기고 결재할 곳을 돌아다니며 영수증을 먼저 받고 돈을 받을 사람을 데리고 부근의 경제은행 지점에서 인출하여 은행에서 주는 방법이 수월하다. 언젠가 두 군데 공사대금을 지불하려고 돈을 인출했는데 현금이 산더미였다. 네 자루에 나누어 담아 은행문 밖에 쌓아놓고 차를 가져와서 트렁크를 여니 은행 경비가 트렁크에 실어주었는데 돈이 든 자루가 트렁크 가득했다. 돌아다니며 지불하는데도 거래처 사무실로 옮기면서 주차요원에게 천 짯을 주고 포터를 시킨 적이 있어 가급적이면 결재 받을 사람을 가까운 은행 지점에 데리고 가서 인출하여 바로 주곤 한다. 은행에서 바로 찾은 돈다발인데 받는 사람마다 다 돈다발을 풀어서 세어본다. 그게 보통 시간이 걸리는 게 아니다. 세 놈이 붙어도 두 자루를 세려면 한나절이다. 그게 싫어서 은행에 데려가서 바로 찾아주고 세어보든 말든 내 길을 가는 게 편하다.
오늘 시내 볼일은 은행에서 송금되어 온 외화를 환전하여 현지 계좌에 입금하는 일과 부근의 전자상가에 들러, 16GB짜리 USB를 하나 사는 일인데 강석을 만나고 행선지가 바뀐 것이다.
미얀마는 영국의 지배를 거의 백 년 받았다. 노인들도 영어가 되는 나라다. 미얀마 언어의 팔 할은 영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 발음은 달라졌지만 영어가 지배적이다. 영어를 모르고는 미얀마에서 소통이 불가능하다. 하여 영어 기본화화 천 문장이 담긴 DVD를 사왔다. 그걸 보고 익혀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 들어보니 보통 재미가 아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재미도 있지만 영어가 미얀마어로 변하는 과정은 어원도 재미있다. 그 어원을 이해하고 충분히 활용하고 싶은데 가지고 있는 8GB로는 그 동영상 강의를 다 담을 수가 없다. 16GB정도면 넉넉할 것이다. DVD내용을 USB에 복사해서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어디를 가더라도 컴퓨터가 있는 곳에서 짬이 나면 그 강의를 들으며 무료한 시간을 달랠 심산이었는데 우연히 강석을 만난 것이다.
강석을 만나기 전에는 느긋하게 팥빙수를 시원하게 먹고 있었다.
팥빙수를 먹은 시간을 거의 열한 시쯤이었다. 점심 먹기에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 팥빙수가 점심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숙소에서 아홉 시에 나섰으니 거기까지 가서 주차하는데 두 시간이나 걸렸었다. 한국 같으면 차로 이십 분 남짓 걸리는 거리지만 두 시간을 꽉 채웠다. 차가 밀리면 담배에 손이 간다. 거기까지 오는 동안 담배를 거의 반 곽이나 피웠다. 시내에 나오면 볼일이 많든 적든 무조건 하루를 잡아야 한다. 은행도 한국과는 다르다. 금세 끝나는 게 아니다. 보통 세 시간은 걸린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시간은 돈이 아니다. 시간이 돈이라는 건 우리의 상식이고 여긴 태평이다. 바쁜 게 없는 나라다.
시원하게 비운 팥빙수 한사발로는 아쉬움이 남았다.
앉은뱅이 플라스틱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론지를 입은 꼬마 숙녀에게 빈 사발을 가리키며 원 모어라고 하고 한 사발을 더 시켰다. 아줌마는 딸과 둘이서 팥빙수 장사를 하고 있었다. 아줌마가 만들고 딸이 서빙을 한다. 딸은 중학생정도의 나이인데 불평은 고사하고 웃으며 서빙을 하고 설거지를 한다. 한쪽에는 드럼통을 잘라 만든 화덕에 장작불을 지피고 팥을 삶고 있었다. 아직 LPG가 보편화되지 않은 나라다. 팥이 다 삶겼는지 김에서 풍겨오는 팥 냄새가 구수했다. 팥빙수만 파는 게 아니다. 뿌연 빛깔이 나는 우유에 무슨 열매 같은 화초를 띄워 얼음을 넣어서 만든 음료도 있는데 장이 나쁜 내가 도전해서 먹어보기에는 자신이 없었다. 뭐라고 불리는 음식인지 모르겠지만 둘러앉은 현지인들은 팥빙수보다 그것을 즐겨먹고 있었다. 다시 시킨 팥빙수는 금세 나왔다. 팥빙수보다 팥빙수사발을 전해주는 소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먼저 보았다.
한참 공부할 나이인데.........
이름 모를 연민에 잠깐 잠기고 있는데 또렷한 모국어가 들렸다.
-이야! 팥빙수 맛있겠다.
관광지나 유명파고다가 아닌 시내에서는 좀체 듣기 힘든 모국어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고 소리의 진원지를 훑어보다가 한 족속과 눈이 마주치면서 눈길에 불꽃이 튀었다. 나만 놀란 게 아니라 그 인간도 놀랐는지 그 자리에 꼿꼿이 굳은 채 서 있었다. 찢어진 청바지에 소매가 긴 남방을 걸치고 있는 족속, 누구인가를 인지하는 순간 손목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팥빙수 사발을 떨어트릴 뻔 했다.
-이 인간이 왜 여기 있어?
-아니, 이 인간은 여기 웬 일이야?
서로가 누구인지 묻고 자시고 확인할 필요도 없이 한눈에 알아보았다.
강석이었다. 이 강석.
이 인간이 여기 있을 줄이야. 벌써 십 년이 넘었지 싶다. 소재파악이 미궁으로 빠진 지. 어느 날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진 인물이었다. 이제는 이 인간의 기억도 친구들 사이에서 잊어져 가는 모양이다. 어느 날 졸지에 너무나 완벽하게 종적을 감춘 인물이라 친구들을 만나면 항상 이 인간의 행방이 화제의 도마에 오르곤 했는데 이젠 누구를 만나도 이 강석의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기억에서 잊어져 가고 있거나 찾기를 포기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 강석과는 친구로 지내던 사이다. 친구라고는 하지만 학연이나 지연과는 관계가 없다. 이 강석이 지금으로 따지면 조용한 커피전문점인 카페를 운영하고 있던 삼십대 초반에 손님과 주인으로 만난 인물이다. 당시에 시를 끼적이며 습작을 하던 우리는 그 카페를 아지트로 삼고 들락거리며 급속도로 이 강석과 친해졌다. 이 강석은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긴 나이인데 혼자 살고 있었다. 아니다. 지금은 독일의 코쟁이에게로 시집을 가서 독일로 날아간 수경이와 동거를 하고 있었다. 수경이를 낚아채간 독일의 코쟁이도 그 카페의 손님으로 들락거리던 작자였다.
성격이 드세고 남성호르몬 중에서도 유독 폭력성 호르몬이 풍부한 그녀와 동거를 하면서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매일 밤, 잠은 안자고 싸움만 하는지 이 강석은 얼굴에 손톱에 할퀸 자국과 눈가에 멍을 달고 다녔다. 물리적으로 감당이 안 되는 그녀와 무슨 일로 헤어지고 중풍으로 누워계시던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평화가 깃드는가 싶더니 어느 날 소식이 깡통이 된 물건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수경이와 헤어지고, 커피 카페를 접으면서 살고 있던 아파트를 팔고 백수가 되어 먼저 장가를 간 동생 강수 집에서 제수씨에게 밥을 얻어먹으며 어정쩡하게 얹혀살다가 어느 날 종적을 감추었다.
사라지기 전에 강석과 나는 한동안 어지간히 붙어 다녔다. 쓴다던 시와 시평은 뒷전이고 탑을 보기위해 옛 백제지역을 훑고 다녔고 단지 조개의 맛을 분석하기 위해 서해안과 남해안을 이박삼일 동안 훑고 다니며 조개를 먹은 적도 있다. 강석은 식도락가였고 골동품과 석탑에 관한한 전문가였다. 내가 탑의 상승감과 안정감의 파악도 강석에게 배운 것이다. 또 남의 마음을 후려잡는 재주가 있어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이 인간이 무얼 하나 궁금해질 지경이었는데 사라진 것이다.
이 인간이 사라지고 주변의 친구, 지인 모두가 행방을 궁금해 했었다. 간혹 이 인간의 얘기가 나오면 동생 강수에게 연락하여 혹시 연락이 있더냐고 물어보지만 도리어 형이 연락이 되면 좀 연락을 부탁한다는 한결같은 대답을 들어야 했다. 강수 걱정만 시키는 것 같아 나중에는 안부전화를 하기조차도 미안했었다.
그 성격에 어디 가서 중이 되어 어느 암자 깊숙이 칩거하고 있었을 거라는 말도 있고, 선원이 되어 외항선을 타고 오대양을 떠돌 거라는 추측도 무성했지만 그것은 단지 추측일 뿐, 차츰 우리 무리에서 잊혀져가고 있었다. 죽은 자와 떠난 자는 남은 이의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는 법.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얼른 보기에 강석의 얼굴에는 변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헤어스타일도 그대로이고 복장도 청바지에 캐주얼한 차림 옛날 그대로였다. 단지 얼굴에 손톱자국과 눈가에 달고 살던 멍은 없었다.
-여기 웬일이야? 어쩜 그렇게 연락이 없었냐?
-한국은 살아가기에 너무 복잡하잖아? 근데 여기 어쩐 일이야?
그의 질문을 들으며 주머니에 든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팥빙수 서빙을 하는 꼬마처녀에게 전해주며 팥빙수 값을 계산했다. 마치 강석이가 도망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작자를 여기서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압도해 허둥지둥 서둘렀다.
-어디에서 살고 있어?
-여기 어쩐 일이냐고 내가 먼저 물었잖아?
-나? 일하러 왔어. 왜 그렇게 연락이 없었어? 다들 죽은 줄 알고 있어.
-죽었다 생각하고 살고 있어. 여기서 무슨 일을 하는데?
나보다 강석이가 나에게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야! 이럴 게 아니라 어디 가서 커피라도 한잔하며 얘기 좀 하자. 어디 커피집이 없나?
시내지만 전문 커피가게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강석의 팔을 이끌고 들어간 곳은 부근의 허름한 현지 음식점이었다. 커피도 팔고 이름이 뭔지는 몰라도 만두처럼 생긴 현지 음식을 파는 집이었다. 만두처럼 생긴 찐빵과 믹스커피를 시키고 마주 앉았다. 할 말이 엄청 많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만남의 공백이 길어서 그런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고 서먹서먹한 기운이 돌았다.
-이야! 너무 뜻밖에, 오랜만에 만나니 말문이 막히네. 강수에게라도 연락을 좀 하지? 엄청 찾고 있던데?
-핏줄이 사라졌는데 찾지 않으면 인간 아니지.
툭 던진 말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뼈대가 불거진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강수에게 뭔가 서운한 것이 앙금으로 남은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물을 수는 없었다. 강수네 집에 얹혀사는, 불편한 동거를 하는 동안 강수나, 강수 아내인 제수씨에게 마음의 상처를 받는 말을 들었을 수도 있었겠다고 짐작하고 화제를 바꾸었다.
-미얀마 온 지 얼마나 되었어? 근 십 년은 넘었지?
-십일 년째야. 한국을 떠나온 지가. 캄보디아에 이 년 버티다가 이곳으로 왔어. 근데 너 여기서 무슨 일을 하냐?
너? 오랜만에 너라는 하대를 들으니 어딘지 모르게 조심스럽게 형성되어 있던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동갑은 아니지만 너, 나 하며 하대하던 사이였지.
-나? 여기서 주택을 짓고 있어.
-역시나 노가다를 못 벗어나는구나! 아파트야, 단독주택이야?
-빌라야. 땅을 사서 직접 지어서 분양하는 일이야.
-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곳인데 일이 장난이 아니네? 한국의 사업은 접었나?
-아니, 그대로 하고 있으면서 왔다 갔다 해. 근데 너는 여기서 뭐 먹고 사냐?
-컨설팅 업을 하고 있어. 돈은 안 되고 그냥 밥만 먹고 있어.
들어보니 강석은 한국 투자자를 상대로 사업자 등록을 대행해주고 공장 부지를 알선, 투자전반을 알선해주고 세무 관리를 해주며 커미션을 먹는 대행사를 하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서로 사무실과 숙소가 어디인가를 묻고 가장 궁금한 것이 떠꺼머리 노총각이 장가를 갔느냐는 것이었다. 그것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임신 칠 개월이야.
-그렇구나. 미얀마 아가씨냐?
그렇다고 했다. 몇 살 터울이 지느냐고 물었고 열여섯 살이라는 대답을 들으며 이 나라에 그런 노처녀가 있었구나, 다행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서른 살 가까이 차이나서 딸 같은 아이를 데리고 사는 꼴사나운 일은 결코 아니다. 대화에 두서가 없었다. 시내에 어쩐 일이냐고 서로가 물었고 나는 은행에 가는 길이라고 했고 강석은 사무실에 나가는 길이라고 했다. 들어보니 사무실은 바로 경제은행 본점 뒤 골목에 있다고 했다. 시간이 괜찮으면 은행에 같이 갔다가 사무실 구경을 가자고 제안했었다. 시간이 안 된다면 은행 볼일을 다음날로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따라가서 사무실이라도 알아둘 참이었다. 순순히 그러자고 했었다.
은행을 향해서 천천히 걸으면서 강석은 누구는 잘 있냐? 누구는 정년퇴직했느냐? 누구는 어떻게 지내느냐? 오로지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인간들을 하나씩 호명하며 안부를 물었다. 안부를 묻는 목소리에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 있는 듯했다. 다들 친하게 지내던 인간들이었다. 십 년은 금방 지나갔지만 아이들 안부를 물으니 어지간히 오랜 세월이다. 짚어보니 초등학교 다니던 녀석들이 군대에 가 있는 세월이었다, 나는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그들의 안부를 비교적 상세히 전해주었다. 누구 아이는 군대에 갔고 누구 마누라가 자궁암 초기 진단으로 자궁을 들어내고 빈궁마마가 되었다는 남의 치마 속 안부까지 전해주었다. 은행에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둘은 서로 궁금한 것을 묻느라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분양은 좀 했어?
내가 하는 일에 관한 상황을 다 들은 강석은 은행 문을 나서면서 물었었다.
-아직........ 빨리 시작한 건 이제 마무리 작업이야. 언제 우리 현장 한번 둘러보자. 전문가가 봐야지.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렇게 하기로 하고, 나 여기 있다는 거. 한국 들어가면 비밀이다.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마.
-왜에? 남의 불알이라도 떼먹고 도망 친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자리 잡아서 금의환향할 때까지 숨기고 싶어.
-어릴 적에 그 만큼 벌었으면 되었지. 무슨 금의환향? 지금 들어가도 금의환향이겠네. 이 나이에 아들 하나 안고 가면.......
그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음악에도 탁월한 재능과 안목이 있는 강석은 이십대 시절에 나이에 비해 엄청 큰돈을 벌었다. 강석이 시작한 것은 정음사라는 간판을 단 작은 음반가게인데 공단도시에서 여공들을 상대로 카세트테이프 장사를 했다. 이른바 틈새시장을 노린 것이다. 음반이 팔리는 것보다 빈 테이프에 신청곡을 받아서 녹음을 해주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빈 테이프 삼백 원에 사서 신청곡과 추천할만한 팝송을 녹음을 해서 주고 사천 원을 받았으니 열 배 이상 남는 장사를 했다. 사는 집 다락방에서 후배 두 놈이 24시간 세 대의 고속 녹음기를 돌리고 매일아침이면 녹음한 테이프를 라면박스 가득 가게에 내오는 형편이었으니 돈벼락이 따로 없었던 모양이다. 여공들은 노래보다 카세트테이프 케이스에 노래 제목을 볼펜으로 쓴 강석의 글씨와 강석의 외모에 반했다는 말도 있었다. 강석은 하루 종일 가게에 앉아 카세트테이프에 들어갈 표지에 노래 제목을 적으면서 주문을 받는 게 당시의 일이었는데 소변보러 갈 틈도 없었단다.
그 때는 내가 강석을 만나기 전이었다.
말로만 들은 얘기인데 공단 여공들 사이에서 정음사라는 음반가게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월세 이십만 원 짜리에 빈손으로 시작한 음반가게를 삼 년 하고나니 당시의 우리 나이로는 꿈도 꾸지 못할 아파트가 한 채 생기고 시내 중심가에 음악다방이 아닌, 고급 커피전문점을 차릴 형편이 되었다고 했다. 그 나이에 그건 신화였다. 그 신화는 자주 어울리는 지인들 사이에 전설로 존재하고 있다.
내가 강석을 안 것은 그 커피전문점을 들락거리면서였다. 하여, 그 이후의 사실만 내 기억에 존재한다. 투자한 것에 비하면 커피전문점은 큰돈을 벌지 못했다. 고급 커피전문점에는 고급 손님이 들락거려야하는 법이거늘, 우리 같이 주머니가 얄팍한 문청들이 아지트삼아서 죽치면서 커피대신 메뉴에도 없는 삼겹살을 구워서 소주를 사다 마시고 있었으니 장사가 잘 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강석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단골이라고 오히려 제가 그런 술자리를 스스로 주선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래도 뒷돈이 있었든지 그 카페를 칠 년이나 이끌고 갔다. 돈이 안 되는 손님인 우리는 눈치도 없이 거의 매일 죽치고 있었다. 가게를 접을 적에도 우리에게 상의를 했다. 아지트가 없어지니 매우 죄송하고 미안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넘긴다고 했었다. 정작 가게 주인을 우리로 착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가게만 접은 게 아니라 살던 아파트까지 팔고 강수네 집에 얹혀살며 골동품 경매를 보러 쫓아다니다 어느 날 종적을 감추었다.
나도 강석을 따라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골동품 경매장에 몇 번 갔었다. 골동품에 대해 문외한이라 강석의 옆에 앉아 강석이 눈독을 들이다가 찍어주는 물건만 응찰하곤 했다. 그런 골동품을 사가면 늘 아내에게 퇴박을 맞았던 기억이 새롭다.
이거? 주인 만나면 곱절은 받을 수 있어. 골동품 전문가 소견이야.
그게 내 변명이었지만 주인을 만나기는 고사하고 주인을 잘못 만난 당시에 샀던 골동품들이 지금은 애물단지가 되어 방치된 것이 집과 사무실에 수두룩하다. 골동품은 자주 들여다보고 닦아야 그 값어치를 발휘하는 법인데 나나 아내는 관심이 없어 그 물건들의 값어치는 퇴색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칠 층 복도!
양곤의 여느 상가와 다를 바가 없이 좁았고 에어컨 송풍기에서 내뿜는 후덥지근한 열기에 이마에 땀이 배어나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강석의 사무실은 칠 층 복도 맨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미래컨설팅
출입문 위에 큼직한 원목에 양각된 한국어 간판이 걸려있었다. 라벨은 붙지 않았지만 보아하니 이 강석 표였다. 간판에서조차도 정성이 듬뿍 들어간 강석의 꼼꼼한 성격을 대변하고 있었다.
-간판 직접 만든 거지?
-심심풀이로 짬이 날 때마다 조금씩 쪼아서 만든 거야. 근데 맘에 안 들어.
-뭐가 맘에 안 들어? 아주 걸작인데........ 미래컨설팅? 혹시 한인회보에 광고를 내는 그거야?
-응. 봤어? 한인회보에 광고가 나가고 있지.
-응. 한인회보에서 여러 번 보았어. 그러나 그 회사를 네가 하고 있을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냐?
강석은 피식 웃으며 전자자물쇠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좁고 후덥지근한 복도와는 영판 다른 세상이었다. 시원한 냉기가 돌았고 생각보다 사무실이 넓고 깨끗했다. 강석이 직접 자물쇠 비밀번호를 누르기에 안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여직원 하나가 타이핑을 하다가 일어서서 어눌한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이 나라는 땅은 넓어도 엄청 좁게 산다. 이 부근의 변호사 사무실에 가면 돌아설 틈도 없다. 이 부근의 사무실은 거의 대부분이 그렇다. 사무실이 넓다고 하자 강석은 사무실을 두 개를 빌려서 칸막이를 털어버린 것이라 했다. 나는 접대용 소파에 앉아 땀을 식히며 사무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한문으로 쓰인 액자며, 족자, 이 나라에서는 쓰지 않는 벽지며, 곳곳에 강석의 손길이 닿은 듯 했다. 소파에 자리를 잡자 여직원이 시키지도 않은 냉커피를 냉큼 내왔다. 커피로 입을 축이고 물었다.
-인테리어도 직접 했냐? 완전히 이 강석 표네!
-여보! 뭐해? 나와서 인사드려야지.
강석은 안쪽에 따로 문이 달린 회의실을 향해 소리쳤다. 회의실이라고 써서 붙였지만 사장실인 모양이다. 이 강석의 입에서 여보라는 말이 나오니 감회가 새롭다. 평생 떠꺼머리총각으로 늙을 줄 알았는데 이제 보통 범부로서의 모양새가 갖추어져 가는 느낌이다. 정작 놀란 것은 강석의 바뀐 태도가 아니라 회의실에서 나서는 임신복을 입은 여자를 보면서였다. 그녀도 나를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어? 이게 누구야? 찐찐아. 찐찐아 맞지?
그녀를 보고 나도 모르게 소파에서 엉거주춤 일어서 있었다.
-네! 이 선생님 아니세요? 오랜만이네요.
-둘이 알고 있는 사이야?
-이야! 연락이 안 되더니 이 작자에게 시집을 갔구나?
-사업은 잘되셔요?
그 말을 하며 찐찐아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어안이 벙벙해 앉아있는 강석을 보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다.
-야! 이 강석, 너 복 받았다. 미얀마에서 최고 엘리트요, 최고의 미녀를 아내로 맞았으니....... 이런 아내를 맞으려고 여태 장가를 안 갔었구나!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셔요.
찐찐아의 한국말은 유창하다. 양곤 외국어대학 한국어과를 나온 수재인데 훤칠한 키에 미모는 어디를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정도다. 내가 양곤에서 만난 통역 중에서 가장 한국말을 잘하는 통역이었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들어오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자막을 번역을 한다고 했었다. 삼 년 전, 미얀마에 일을 시작할 적 나와 연결이 되어 내가 외국인 투자자로서 회사 설립하는 동안 법적인 문제와 통역을 완벽하게 해주었던 미모의 노처녀였다.
-둘이 잘 알고 있는 사이로군.
-예전에 내가 회사를 만들 적에 만났어. 그때도 사귀고 있었나? 분명히 싱글이라고 했는데?
-그때는 내가 필요할 때만 가끔 불렀지. 프리랜스로 뛰고 있을 당시였지.
-그때 이미 마음을 품고 연애를 시작했었구먼.
-그런 셈이야.
강석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두서없는 우리의 말을 듣다가 하대를 하는 것이 이상했던지 찐찐아가 물었다.
-두 분이 친구세요? 보통사이가 아닌 것 같네요.
-응. 오래된 친구야. 친한 친구! 불알친구라고 하면 알아들어?
불알친구는 아니지만 강석이 서글서글하게 대답하며 되물었다.
-알죠. 어릴 적 친구, 왜 불알친구가 양곤에 있다고 말 안했어요?
불알친구가 무슨 뜻인지 안다는 건 당연하다. 내가 예전에 일을 맡길 적에 테스트한 결과 벼룩의 간을 빼어 먹는다는 한국 속담까지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엘리트다. 한국어에 관한한 완벽한 찐찐아다.
-나도 몰랐어. 오늘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났어.
-그랬구나. 사업은 잘되세요? 달러가 올라서 힘들겠어요.
찐찐아는 나를 보고 물었다. 그런 것까지 짚는 여자였다. 사실이다. 초기에 투자를 할 적에 일 달러에 천 짯 정도 하던 달러가 정권이 바뀌면서 슬금슬금 올라서 지금은 천오백 짯 가까이 된다. 나는 달러를 가지고 나와서 사업을 하고 분양을 하면 달러로 바꿔서 들어가야 한다. 환차로 인해 가만히 앉아서 오 할을 손해를 보고 들어가는 셈이다. 빌라를 지어서 분양해서 오 할이 남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렇게 남는 집장사는 없다. 오 할이 남는다 해도 투자초기에 수업료를 왕창 냈으니 본전에 밑돈다. 은행에서 기다리면서 이미 강석에게 들려주었던 얘기다. 생각하면 가슴이 시리고 조바심이 인다. 그보다 우선 난처한 것은 여태 찐찐아에게 하대를 했는데 친구의 부인이 된 상황에서 하대를 한다는 것은 예가 아닌 듯 했다. 예전에 찐찐아를 만나 회사를 만들면서부터 한국의 존댓말이 엄청 헷갈린다는 말에 그냥 편하게 하대를 하기로 했던 것인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아직 집은 덜 지었고요. 투자기간이라 괜찮은데 앞으로가 걱정이네요.
존대를 해도 말이 그냥 무난하게 나왔다. 인간의 혀는 상황에 따라 쉽게 변한다고 했는데 나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인 모양이다.
-미얀마에서 살아남기 작전에 들어가세요. 우리는 그 작전에 들어갔어요.
-살아남기 작전? 그게 무슨 007 작전인데요?
그 물음에 대답은 강석의 입을 통해 들어야 했다. 강석의 말로는 내가 상투를 잡았다는 것이다. 땅값이 최고로 올랐을 적이고 달러가 폭등하기 직전에 투자를 왕창 했으니, 우선 분양이 되는대로 환전해서 가지고 들어갈 생각을 하지 말고 땅을 사는 것이다. 지금이 투자 적기인데 나는 좀 빨랐다는 게 강석의 지적이었다. 군사정권이 물러나면서 군부에서 지닌 땅이 엄청 많이 시세를 무시한 매물로 나와 땅값이 하락하면서 주택가격도 동반하락 했다는 것이다. 짚어보니 모두가 맞는 말이다. 땅값이 내렸을 적에 땅에 재투자를 하는 것이다. 달러는 언젠가 예전 가격으로 회복되게 되어 있다는 게 마주앉은 부부의 주장이다.
-지금 들어오는 투자자들에게도 미얀마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는 거야? 물타기를 하라는 얘기군.
-그렇지. 이른바 물타기야. 여기 앉아있으면 정보가 엄청 빠르지. 분양이 되는 되로 말을 해. 그 돈에 맞는 땅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나 한국에 빚이 많다. 빚에 가위가 눌릴 지경이야.
-간 큰 놈이 널 장사 하는 거야. 한국의 금리가 오른다고는 하지만 미얀마보다는 약해. 한 템포를 늦춰서 갚을 생각을 하고 물타기를 해. 미얀마에서 살아남으려면 느긋해져야 한다. 성질 급한 놈이 무조건 지는 거야. 여기 사람들 아무리 급해도 급한 티를 내지 않는다. 그게 생존 방법이야.
-그러는 너는 땅에 투자를 좀 했나?
강석은 성질 급한 한국인들이 투자를 포기하고 들어가면서 헐값으로 던지는 땅을 좀 사두었다고 했다. 좀이라는 말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사람들은 너무 급해서 그게 문제라고 하면서 찐찐아의 이름으로 사니 현지 은행에서 담보대출이 가능하단다. 그렇게 사두었다가 다른 한국 투자자가 들어와서 땅을 찾으면 웃돈 얹어서 되팔고 성질 급한 다른 업체에서 철수하는 땅을 헐값에 거두는 형식으로 불려나가고 있다고 했다.
-컨설팅 업체를 빙자한, 완전히 부동산 투기업체구먼!
-업종에 관계없이 성질 급한 한국투자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하는 거야. 여기는 발전 가능성과 경제성장의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약속의 땅이고 기회의 나라야. 조금 더 높이 날아라.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단다.
-자기, 이 선생님 성질 좀 급하죠?
강석 옆에 앉은 찐찐아가 불룩한 아랫배를 버릇처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강석을 보고 물었다. 가만히 보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친구! 성질 급하기로는 불붙은 화살이지.
-예전에 회사 차릴 때도 엄청 급했어요. 한국 사람들 급한 건 알지만 유독 심했어요. 조금만 늦어도 못 견뎌했어요.
정확한 지적이다. 느긋해질 나이가 되었지만 기다림은 좀체 몸에 익지 않는 품목이다. 그 찐찐아의 지적을 물고 강석이 입을 열었다.
-이 땅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느긋해져야 된다. 실패의 요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어. 당신 같은 사람은 내부의 개혁이 필요한 곳이야. 머리를 잘 써서 성공하는 곳이 아니라 맘을 느긋하게 써서 성공하는 땅이야. 수없이 보따리를 싼 한국 투자자들을 보고 깨달은 사실이야.
-내부 개혁을 단행하면 성질 급한 나의 내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꼴까닥 숨이 넘어갈 건데, 어쩌지?
-쿠데타가 아니라 혁명이나 혁신이라고 생각해. 혁명이나 혁신! 이제는 그 성격에 혁명을 일으킬 나이가 되었어.
역시 정확한 지적이다. 나는 할 말이 궁해져 팔짱을 끼고 소파에 등을 묻고 눈을 감았다. 참 멀리 왔다. 걸어온 길이 아득하다. 미얀마에서 살아남기 작전은 내 내부에서 펼치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 나와의 싸움이다. 갈 길 또한 아득히 멀다. 그 아득함 속에 뚜벅뚜벅 말없이 묵묵히 걸어가는 등이 구부정한 사내의 뒷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그게 내 미래의 모습인 것 같다. 그렇게 맘을 먹으니 앉은 자리가 편안해지고 느긋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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