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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당선생문집 (靜養堂先生文集)
서명 정양당선생문집 (靜養堂先生文集)
저자 성명 김윤명 (金允明)
자 수우 (守愚)
호 정양당 (靜養堂)
판사항 木版本
발행년 1935
권수 5
책크기 32×21㎝
사부분류 별집류
59/80연보
『정양당선생문집』은 김윤명(金允明 ; 1541~1604)의 시문집이다. 김윤명의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수우(守愚), 호는 정양당(靜養堂)이다.
이 책은 1935년 간행되었다. 권1은 시 56수, 권2는 서(書) 5편, 권3은 부록 31편, 권4는 세계도, 권5는 부록 2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시에는 도산서원 주위의 경관을 보고 감흥을 읊은 것이 많다. 「도산유행(陶山留行)」은 도산서원의 길이 공자가 있던 곳과 같고 산은 마치 무릉도원과 같다고 찬미한 내용이며, 「도산추야대월(陶山秋夜對月)」과 「도산월야청강(陶山月夜聽江)」은 도산서원에서 달을 배경으로 명상하여 마음속에 떠오르는 감회를 읊은 것이다. 「청량산월야용전운(淸口山月夜用前韻)」은 도산서원 뒤편 이황(李滉)이 자주 찾던 청량산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지난날을 회고하여 읊은 것이며, 「도산춘야억선생(陶山春夜憶先生)」은 매화와 대나무가 뜰에 가득한 모습을 완상하면서 이황에 대한 사모의 정을 간절하게 그린 작품이다. 「물시(勿視)」·「관물(觀物)」·「물언(勿言)」·「물동(勿動)」·「근언(謹言)」·「술지(述志)」 등은 사물의 이치 또는 수신·계행의 뜻을 담은 교훈이나 실리적인 내용의 시이다. 시에서는 대체로 전형적인 유학자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물언」에는 정직하여 법을 어기지 않고 묵묵히 순진(醇眞)함에 도달하여 어짊에 이르는 오도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술지」 2수는 명리(名利)를 생각하지 않고 학문과 의리로써 선현을 숭모하고 세상을 구제하여 인(仁)을 실현할 것을 강조한 내용으로, 작가의 도학적인 사상이 담겨져 있다. 이밖에 이언적(李彦迪)·이전인(李全仁)·조목(趙穆)·이안도(李安道)·노수신(盧守愼)·김성일(金誠一)·김인후(金麟厚) 등 명유(名儒)들의 인품을 경모하는 내용의 시도 있다. 서(書)에는 권호문(權好文)·기대승(奇大升) 등과 주고받은 편지가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저자의 교유관계를 알 수 있다.
김윤명의 아버지는 예조참판 세균(世勻)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로 판서 이행(利行)의 딸이다. 1572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578년 우정언(右正言), 1580년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그 뒤 전라도관찰사·병조참판·대사간·대사헌 등을 지낸 뒤, 1582년 호조참판·의금부도사·오위도총부부총관 등이 되었다. 1584년 벼슬을 사직하고 귀향하여 성리학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였으며, 역동서원(易東書院) 등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정양당집 건(靜養堂集 乾) 이미지정보
정양당집 곤(靜養堂集 坤) 이미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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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수(金益壽)조선시대사인물
조선전기 병조참판, 관상감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인경(仁卿)분야조선시대사유형인물성격문신
성별남
출생일1491년(성종 22)
사망일미상
본관김해(金海)
경력병조참판, 관상감제조
시대조선
성격문신정의
조선전기 병조참판, 관상감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개설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인경(仁卿). 김진손(金震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영정(金永貞)이고, 아버지는 김세균(金世鈞)이며, 어머니는 강이행(姜利行)의 딸이다.생애 및 활동사항1513년(중종 8)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어 1519년(중종 14) 진사로서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1521년(중종 16)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에 이어 지평(持平)을 거쳐, 1529년 경기도재상어사(京畿道災傷御史)로 파견되었다. 1536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다녀와 장령(掌令)·동부승지가 되었다.이해 부인의 투기로 첩을 독살한 사건이 있어 체직(遞職)주 01)되었으나, 이듬해 예조참의가 되었다. 1543년 진하사로 북경에 다녀와 충청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주목사로 있을 때 직사(職事)에 힘쓰지 않았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이듬해 예조참의가 되고, 명종이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1546년(명종 1) 우승지·경연참찬관·도승지로 지방의 자제를 훈도할 방법을 진언하여 「외방학교신명절목(外方學校申明節目)」이 마련되자 이를 전국에 권장하기에 이르렀다.이어 형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다시 충청감사가 되어 여러 읍의 수재(水災)를 해결하는 데 노력하였다. 1548년 병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관상감제조가 되었다. 1549년 온성(穩城)에서 야인들이 노략질하는 일이 발생하자, 함경도 비변대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인종실록(仁宗實錄)명종실록(明宗實錄)국조방목(國朝榜目)사마방목(司馬榜目)
주석
주01관직이 타인으로 교체됨
집필자집필
(1996년)이봉래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익수(金益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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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수(金益壽)
[진사] 중종(中宗) 8년(151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40위(70/100)
[인물요약]
자(字) 인경(仁卿)
생년 신해(辛亥)【補】(주1)
1491년 (성종 22)
합격연령 23세
본인본관 김해(金海)
거주지 한성([京])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문과] 중종(中宗) 14년(151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3위(23/29)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타과 중종(中宗) 14년(151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 병과(丙科) 13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세균(金世鈞)[生]
품계 : 통훈대부(通訓大夫)
관직 : 행금산군수(行金山郡守)
[처부(妻父)]
성명 : 김의겸(金義謙)【補】(주2)
[주 1] 생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주 2] 처부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출전]
『정덕8년계유8월20일생원진사방(正德八年癸酉八月二十日生員進士榜)』(여주이씨 옥산문중 전적(驪州李氏玉山門中典籍)-사마방목(司馬榜目)[보물 제5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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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수(金益壽)
[문과] 중종(中宗) 14년(151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3위(23/29)
[인물요약]
자(字) 인경(仁卿)
생년 신해(辛亥) 1491년 (성종 22)
합격연령 29세
본인본관 김해(金海)
거주지 한성([京])【補】(주1)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진사] 중종(中宗) 8년(151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40위(70/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29명 [甲3‧乙7‧丙19]
전력 진사(進士)
관직 호조참판(戶曹參判)
문과시험답안 책문(策問)
타과 중종(中宗) 8년(151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40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세균(金世鈞)[文]
[조부(祖父)]
성명 : 김영정(金永貞)[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김진손(金震孫)[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강이행(姜利行)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김의겸(金義謙)
본관 : 미상(未詳)
[주 1] 거주지 : 『정덕8년[중묘8년]계유방목(正德八年[中廟八年]癸酉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B13LB-6])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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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1560년(명종 15)~1622년(광해군 14) 이정(而靜) 순천(順天)
東籬先生文集卷之四 / 祭文 / 祭二兄安陰公
金允明 1545 1606 順天 守愚 松磵
有具爾之五人。紛旣翕而且湛。恒接武而攻文。誓無忝於多男。豈色養之敢望。欲使父母而安樂。菽水之不能繼兮。祿仕之又不可得。慟伯氏之摧絶。禍忽延於先考。何父兄之仁德。反不弔於彼昊。四人同守乎一室。三年不離於一日。同急難之鴒原。奉衰暮之鶴髮。曾日月之幾何。忽遭亂而蒼黃。哀母子之相隔。痛豺虎之陸梁。幾阻離而痛哭。得尋遇於山谷。疫已甚於咸寧。分一家而四適。相負母而轉徙。在避寓而遘虐。人水火之不通。獨二弟之在側。兄曾危而蹔差。廼載輿而來訣。旣毒癘之薰骨。亦奄奄於終天之夕。時余身之無恙。不得已奉以出外。遂他疾之纏綿。將荏苒於二載。婦人不窺乎中門。飮食必須乎孫兒。竟獲佑而痊可。寔神明之所扶持。好蔽美而求疵。何人心之險巇。嗟萬事之何言。渙余涕之漣洏。兄聰明而秀發。早擅名於詞塲。登蓮榜於妙齡。謂門楣之顯揚。兄之志豈不如古之人。兄之才豈不如今之人。有志有才而無命。壽又纔過乎六旬。豈邊幅之敢修。篤兄弟之友于。乍相離而不樂。得相覯而怡愉。同姜被而偃卧。忘昕夕而談笑。忽覊旅於中年。悵音信之杳杳。罷薄宦而歸來。庶共老於桑鄕。何二竪之內賊。藥無效於扁倉。時余之受恩賜兮。方劬書而數墨。冀老弟之成立。常勉勵以講習。承病裏之書札。宛字畫之如昔。欲見汝之雖切。恐妨汝之誦讀。謂微恙之適然。當春和而勿藥。登余名於除書。得一命於殘驛。旣念余之行李。又軫余之冠服。遂僶俛於一行。因就辭而省謁。裁京書而手封。喜一字之不錯。悵告別之在邇。問歸期之遲速。旣謝恩而南還。至用安之途中。日將暮而西側。忽鄕奴之告凶。始疑信之不定。仰蒼昊而搥胷。至驛舍而掩面。攬涕淚之無從。反余哭於寢門。日纔踰於旬浹。計離別之未久。慟音容之永隔。撫幼女之在室。見銘㫌之倚壁。方詔使之臨來。値多事於弊郵。啓九重而催召。曾何得以少留。遂呑聲而南邁。向北風而悲憂。嗟道里之脩敻。悶此身之如拘。聞兄事之始襄。舍先塋而新卜。歿不得以飯含。窆不得以臨穴。縻殘年於末官。致生死之兩別。嗟夢寐之非眞。接誰昔之面目。念昔日之充堂。常如手而如足。何零落之至此。使我二人而悲傷。筭年歲之未衰。或早世於康強。將形影之獨弔。益酸苦而摧膓。方歲律之云暮。始丐暇而還鄕。覽先廬之頹落。江山慘其增凉。忽二弟之相看。但有淚之滂滂。披新阡於宿草。目無覩而彷徨。賚綿酒而遠來。羅薄羞於舊堂。嗟此生之已矣。安得洩此懷之茫茫。倘神魂之不昧。願一歆乎玆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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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일록 부록 인명록(人名錄)
김윤명(金允明) : 1541~1604.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 본관은 김녕. 자는 수우(守愚). 호는 정양당(靜養堂).
김윤안(金允安) : 1562~16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 자는 이정(而靜). 호는 동리(東籬). 아버지는 현감 박(博)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2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임진왜란 때 김해(金澥) 휘하에서 형 윤명(允明)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604년에 생원으로 상소를 올려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으나, 선조가 이언적(李彦迪)의 사적에 미심쩍음이 많다고 하여 부당하다는 전교를 내렸다. 1612년에 증광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대구 부사ㆍ대사간을 역임하였다. 특히 대구 부사로 있을 때 백성을 관대하게 다스리고 권세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정온(鄭薀)이 영창대군 피살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제주로 유배될 때에는 시를 지어 그를 위문하였다.
김윤명(金允明) (1545~1606) 시소러스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현감 김박(金博)의 아들로, 1568년(선조 1)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하여 안음 현감(安陰縣監) 등을 지냈으며, 유성룡(柳成龍)ㆍ정사성(鄭士誠)과 교유함.
송간(松澗)@김윤명 수우(守愚) 송간(松磵)@김윤명 장가옹(長歌翁) 윤명(允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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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慶長 1529 1601 海州 善林 竹溪
金允明 1545 1606 順天 守愚 松磵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년 을사 > 9월 10일 > 최종정보
영조 1년 을사(1725)9월 10일(갑진) 맑음
01-09-10[27]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좌찬성 최경회(崔慶會) 등에게 시호와 포상의 은전을 내려 주기를 청하는 전라도 생원 이만영(李萬榮) 등의 상소
전라도 생원 이만영(李萬榮)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예로부터 제왕이 절의를 위해 죽는 사람에 대해 포상(褒賞)하여 높이고 권장한 것은 비단 충성스러운 혼과 꿋꿋한 넋을 위로하여 답할 뿐만이 아니라 불쌍하게 여기고 도와주려는 뜻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니, 실은 나라를 위하여 풍교를 세우고 강상을 부지하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임진년(1592, 선조25)의 변란을 당하여 충성을 바치고 절개를 지키다 죽은 사람이 한두 사람으로 헤아릴 수 없지마는 열성조에서 훈공을 기록하고 충성을 포상하고 시호를 내려 주고 작위를 증직해 주는 은전도 갖추어 주었으니,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공적은 서로 비슷하나 포상이 고르지 못한 경우가 있다면 나라에서 베푸는 은전에 얼마나 흠이 되는 일이며 공의(公議)가 얼마나 애석해하고 탄식할 일이겠습니까.
섬 오랑캐가 침범하여 열읍(列邑)이 와해될 즈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순절(殉節)한 선비들이 호남에서 많이 나왔는데, 만약 그중 가장 이름난 이를 말한다면 증(贈) 영의정 김천일(金千鎰), 증 좌찬성 고경명(高敬命), 증 좌찬성 최경회(崔慶會)가 이들입니다. 세 신하는 모두 백수(白手)로 의병을 일으켜 칼을 뽑아 들고 목숨을 바쳐 적과 싸워 후일에 수복하는 기초가 되었으니, 그 공과 그 절개가 어찌 참으로 우뚝하고 빛나지 않겠습니까. 선묘(宣廟)께서 즉시 훈공을 기록하라 맹부(盟府)에 명하시고 또 사원(祠院)에 편액을 반사하라 명하시어 높이고 장려하는 은전을 일체 균등하게 시행하였으니, 증시(贈諡)하는 은전에 이르러서도 마땅히 세 사람이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번 성고(聖考)께서 임어하시던 날에 김천일과 고경명 두 신하는 증시의 은전을 받았는데 유독 최경회만 고르게 은전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개 최경회의 후손이 영체하여 김천일이나 고경명 두 신하와 같이 억울함을 말하지 못하여서 성상께서 두루 살펴 주지 못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신들이 삼가 엎드려 생각해 보니, 최경회는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후손으로 성품은 충과 효를 온전히 지키고 학문은 밝은 스승의 질정을 받았으며 한 번 벼슬길에 나온 후에는 문무의 재주를 온전히 해서 명성과 덕망을 쌓았습니다. 왜구가 처음 쳐들어왔을 때 이광(李洸)의 군대가 공주(公州)에서 무너지고 황영(黃永)의 적이 금산(錦山)으로 들어 왔는데 김천일은 멀리 기보(畿輔)를 향하고 있고 고경명은 금산에서 죽었으니 호남 백성의 목숨이 거의 어육이 되었습니다. 최경회는 그때 어미의 상중에 있었는데 군중들이 추대하니 상복을 입고 시의를 좇아 변통하여 소매를 걷어붙이고 싸움에 임하며 말하기를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그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치욕을 씻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구구한 사정과 예는 돌아볼 것이 없다.’라고 하며 궤연(几筵)에 절하고 동남으로 격문을 전하니, 달포 안에 갑자기 큰 진을 이루게 되어 밤낮으로 군사를 움직여 장수(長水)에 나아가 주둔하니 왜노(倭奴)가 듣고 영남으로 물러나 의거하였습니다. 최경회가 의병들과 힘을 합쳐 싸워서 개령(開寧)의 적을 막아 냈습니다. 선묘(宣廟)께서 전교하시기를 ‘영남의 우계(右界)와 호남 한 도가 지금까지 보전된 것은 이 사람의 공 아닌 것이 없다.’라고 하고 특별히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에 제수하였습니다. 적병이 진주(晉州)를 포위하자 어떤 이가 그 형세를 보고 진퇴하여 후일의 공적을 도모하기를 권하였는데, 최경회는 주먹을 불끈 쥐고 성난 소리로 말하기를 ‘성이 보존되면 내가 존재하고 성이 없어지면 나도 죽는다. 참으로 이렇게 구차하게 삶을 도모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며 이에 9일 밤낮을 적과 대항하며 적병을 여러 번 물리쳤는데 외부에서 구원병이 끊어지고 내부에서는 병기와 군량이 다하여 일이 이미 글러지자 북쪽으로 향하여 재배하고 이르기를 ‘형세가 궁하고 힘이 다하여 한 번 죽음으로 보답합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의연히 목숨을 바쳤습니다.
대개 의병을 일으킨 이래 도처에서 이겨서 우리 군사에게 사기를 더해주고 적을 좌절하게 한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무주(茂州)의 전투에서 한 적장이 등에는 족자 한 개를 짊어지고 손에는 8척의 언월도(偃月刀)를 잡고 앞길을 막고 있자 최경회가 활시위를 힘껏 당겨 활을 쏘자마자 거꾸러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등에 지고 있던 것은 바로 공민왕(恭愍王)이 그린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손수 제하고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이 그 위에 시를 쓴 것으로 바로 그 왜노가 우리나라에서 얻은 것이었습니다. 최경회가 죽을 때에 신임하던 막료에게 그 칼과 그림을 손수 주며 그 형인 최경장(崔慶長)에게 전해 주라고 하면서 이르기를 ‘우리 형님이 내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마땅히 의병을 일으킬 것이니 이것으로 표지를 삼으라.’라고 하였습니다. 그 칼과 그림은 지금까지도 최경장의 후손 집에 보관되어 있으니 그 한결같은 충성과 장한 공렬은 혁혁하여 마치 어제의 일과 같아서 천백년이 지난 후대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털이 곤두서게 할 것입니다. 성이 함락된 후에 천장(天將) 오종도(吳宗道)가 전쟁에서 죽은 장사들을 위해 지은 제문에 ‘최공이 군사를 벌이고 병기를 빛내 위엄을 보이니 왜노들이 더욱 어렵게 여기고 꺼리게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선묘께서 듣고서 전교하시기를 ‘천장이 칭찬하고 왜노가 어렵게 여기고 꺼리었으니 이름이 삼국을 진동시킬 만하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이조 판서를 증직하고 또 문려(門閭)를 정표해 주셨으며 관리를 보내 치제하고 그 사당에 포충(褒忠)이라는 편액을 내려 주셨고, 인조조(仁祖朝)에 이르러 좌찬성을 더 증직하고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더해 주셨습니다.
아, 최경회의 충절이 이미 저와 같고 열성조에서 높이 포창하신 것이 또 이와 같은데 시호를 추증하는 은전이 지금까지 거행되지 않고 있는 것은 다만 신들이 때에 맞춰 아뢰어 청하지 못한 죄입니다. 지금 밝으신 성상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충성을 포상하고 절개를 장려하는 은전을 더욱 급선무로 하시니 신들이 이에 서로의 기쁨을 이야기하며 발을 싸매고 천리 길을 와서 대궐 아래에서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세 신하의 충성은 일체 공이 같다는 것을 믿어 살펴 주시고 또 신들의 말이 공적이고 사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채택하시어 속히 담당 관사에 명하여 은혜로운 시호를 특별히 내려 주시어 포상하고 높이는 은전으로 삼으소서.
그리고 신들은 여기에서 강개해 마지않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 당시의 계의병장(繼義兵將) 최경장은 바로 최경회의 형입니다. 7세에 능히 ‘까마귀는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라는 시를 지어 향당에서 기이하게 여겼는데 연이어 대과(大科)와 소과(小科)에 급제하여 중외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명성과 공적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임진년(1592, 선조25)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 마침 상중이었는데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는데 몸에 상복을 입고 있어 임금의 행차를 호위할 수 없다.’라고 하며 곧 아우 최경회와 함께 뜻을 합쳐 향읍에 효유하여 의로운 군사를 불러 모아 조카인 지평 최홍재(崔弘載)를 시켜 고경명의 군대가 있는 금산으로 달려가게 하려고 했는데, 금산의 병사가 패하자 최경회는 슬픔을 참고 대장이 되고 최경장은 머물러 궤연을 지켰으니 그들이 책려하고 계획을 세워 적을 막고 저지하려는 계획은 조금도 늦춘 적이 없었습니다.
계사년(1593) 6월에 최경회가 진주에서 의롭게 죽자, 나라를 걱정하는 것과 개인적인 슬픔을 둘 다 차마 잊을 수 없어서 비록 나이가 많고 근력이 쇠진하지만 오히려 분연히 동생을 이어서 의병을 일으켜 그해 8월에 최경회의 남은 무리를 모아서 피눈물을 흘리며 군사들과 맹세하며 영남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대로 행조(行朝)에 글을 올리고 도내에 격문을 전하니 몇 달이 되지 않아 주군(州郡)에서 향응하였습니다. 도원수 권율(權慄)이 조정에 장계로 보고하고 비변사에서 그 뜻을 아뢰기를 ‘아우는 나라를 위해 죽고 형이 또 뒤를 이어 의병을 일으키니 옛사람에게서도 그 짝을 찾기 드문 경우입니다.’라고 하니, 상께서 가상하게 여기고 장려하며 그날로 특별히 장악원 정에 제수하고 계의병장의 인수를 겸하여 주며 면려하셨습니다. 또 본도의 감사에게 전교하시어 마음을 함께하여 협력하라고 하였으며 또 해당 관사에 전교하시어 관문을 만들어 감영과 본진(本陣)에 나누어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최경장은 명을 받들고 감격하여 더욱 한결같은 충정을 독려하여 옥과현(玉果縣)에 주둔하고 방책을 세워 훈련원 부정 선의문(宣義問)을 부장으로 삼고, 서천 군수(舒川郡守) 김윤명(金允明)을 종사관으로 삼아 의병들을 격려하여 이끌고 전진하여 고성(固城)의 견내량(見乃梁)을 막아 지켰습니다. 얼마 후에 원수(元帥)의 관문(關文)으로 인하여 군사를 석주(石柱)로 이동시키고 시설과 구획을 모두 알맞게 하니 기계와 병량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미처 적을 만나지는 않았으나 휩쓸렸던 것을 회복하고 적을 베어 버린 공이 있었으며, 저 약탈을 일삼던 추한 오랑캐도 그가 최경회의 형인 것을 알고는 풍문을 듣고 겁을 먹어 무기를 거두고 물러가 피했습니다. 그해 12월에 왕세자가 분조(分朝)를 세우고 전주(全州)에서 무군(撫軍)하니 최경장이 즉시 달려 나아가 사은하였습니다. 그때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이 담양(潭陽)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아직 군졸이 없었습니다. 이에 무군사(撫軍司)에서 조정에 계문(啓聞)하여 계의병의 무기와 병량을 모두 김덕령에게 옮겨 주라고 하였으니, 대개 최경장의 나이가 이미 망칠(望七)이라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싸우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에 최경장은 그 병량을 모두 수송해 주고 그 진호(陣號)를 파하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최경장이 능히 한번 전공을 세울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의병을 일으킨 날에 죽지 못하여 당시에 의병을 일으킨 선비와 같이 포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충성과 효도가 다른 사람보다 못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아, 신하의 충성과 의로움은 본디 성패(成敗)와 사생(死生)을 가지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고 오직 그 당시에 의에 맞게 처신했느냐와 마음씀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니, 지금 이 최경장이 동생이 죽은 뒤에 이어 떨쳐 일어나 노년의 나이에 의병을 일으킨 것이 어찌 늠름하게 대의를 우뚝 세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처음에는 조카를 시켜 금산으로 달려가 구원하게 하려 하고, 중간에는 동생을 진주에서 의롭게 죽게 했으며, 결국에는 자신도 이어서 일어나 의로운 군사를 불러 모아 충용장이 쓸 수 있도록 하였으니, 그 당당한 충의의 기개는 마땅히 죽었느냐 죽지 않았느냐를 가지고 차등을 두어 다르게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최경장에게 끝까지 무기를 들고 싸워 충성을 다하게 두었더라면 그 성패와 이둔(利鈍)을 비록 미리 예측할 수 없더라도 그가 장차 최경회가 죽은 자리로 달려 나가 목숨을 바칠 것이라는 것은 전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신들이 또 삼가 들으니 일찍이 숙묘조(肅廟朝) 때 본도의 유생들의 상소로 인하여 특별히 고 지평 박광옥(朴光玉)에게 증직을 더하고 시호를 내려 주는 은전을 베푸시고, 충용장 김덕령과 함께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에 같이 향사하라고 하셨다 합니다. 대개 박광옥은 창의하는 병사를 처음 일으켰으며 청을 설치하고 병사를 모집하여 의병에게 준 공이 있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나가 죽은 절개가 있는 것이 아닌데도 성고(聖考)께서 오랜 뒤에 추가로 장려하여 포상하신 것이 오히려 저렇게 더욱 융숭합니다. 하물며 최경장이 전후로 힘을 다하여 주선하고 모은 군사를 위촉하여 최경회와 김덕령의 공적과 절개를 이루게 한 것이 어찌 박광옥보다 못하겠습니까. 포장하는 은전이 유독 미치지 않은 것을 신들이 강개하고 분통해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최경회에 대해 올린 상소에 부득불 나란히 충성을 바친 형제의 아름다운 일을 진술하여 작질을 증직하고 포상의 은전을 내려 주기를 기대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굽어살피시고 모두 윤허하여 후생을 격려하고 권장하는 바탕이 되게 해 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지금 그대들의 상소를 보니 두 신하의 충절이 위엄이 있고 당당하게 살아 있는 것만 같다. 해당 조로 하여금 내게 물어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주-D001] 문정공(文靖公) : 원문은 ‘文正公’인데, 《목은고(牧隱藁)》 〈조선목은선생이문정공행장(朝鮮牧隱先生李文靖公行狀)〉에 근거하여 ‘正’을 ‘靖’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2] 본진(本陣) : 원문은 ‘本陳’인데, 전사하는 과정의 오류로 보아 ‘陳’을 ‘陣’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은정 (역)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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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子澂 1523 1594 濟州 仲明 鼓巖
고암공(鼓巖公) 자징(子澂) 양자징(梁子澂, 1523~1594)으로 자는 중명(仲明)이며, 고암은 그의 호이다. 소쇄 처사(瀟灑處士) 양산보(梁山甫)의 아들이고,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사위이자 문인으로 유학에 깊은 성취를 보였으며, 도의로써 송강(松江) 정철(鄭澈)ㆍ중봉(重峯) 조헌(趙憲)ㆍ우계(牛溪) 성혼(成渾) 등과 교유하였다. 도곡집(陶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