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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구하였다. "주님과 어른을 원망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이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해 달라고 주께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였다.
8.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에, 물린 사람은 구리로 만든 그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21:7-9)
7 The people came to Moses and said, “We sinned when we spoke against the Lord and against you. Now pray to the Lord to take these snakes away.” So Moses prayed for the people. 8 Then the Lord told Moses to make a metal snake and put it on a pole, so that anyone who was bitten could look at it and be healed. 9 So Moses made a bronze snake and put it on a pole. Anyone who had been bitten would look at the bronze snake and be healed.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이 구원 사역의 배경부터 밝히십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반역부터 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에덴에서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가고 말았습니다.
에덴의 동쪽은 죽음의 도시를 이릅니다.
여러분은 자식이 죽어갈 때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배경입니다.
하나님께서(주체) 죽을 죄인을(객체) 살리시는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간 우리를 다시 에덴으로 회복셨던 것입니다.
그 구원의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데에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30. 예수께서는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적도 제자들 앞에서 행하셨다.
31.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20:30,31)
이렇게 두꺼운 성경은 딱 한 사람 이야기만 다룰 뿐입니다.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믿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 월수입이 얼마나 되셨는지 혹은 취미가 무엇인지 그런 일에 관심도 없습니다.
구원과 상관도 없는 정보를 일절 제공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구원의 사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두고 미리 예언하신 구약의 한 부분을 인용하셨습니다.
이 부분이 구원의 핵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요3:14)
여러분들도 구급차에 그려진 이런 상징물들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광야에서 들었던 구리뱀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모세의 구리뱀처럼 당신이 장대 끝에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요3:14,15)
성경은 예수께서 세상을 구하러 오신 그 성육신의 사건을 이릅니다.
그렇게 오신 그리스도는 십자가로써 구원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또 그를 통해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의 구원으로의 일관성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머리는 사람인데 몸통은 말인 괴물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말이라고 해야 합니까? 혹은 사람이라고 해야 합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로 시작해서 하나님 나라의 영생으로 끝나야 기독교입니다.
그리스도로 시작해서 장로님이 반값에 산 빌딩으로 끝이 난다면 그것은 괴물입니다.
특별히 그 영생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오직 십자가의 희생이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 일이 구약에 상징되어 있었는데 모세의 손에 들렸던 구리뱀이라는 것입니다.
소망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경우 하나님 나라 자음 모음부터 외워야 합니다.
기억 니은 디귿.......
그래서 제일 먼저 구원의 대상인 내가 누구인지부터 물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들 합니다.
이것을 세상의 인간론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그런 인간론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 아예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기는 왜 죽어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숨 쉬고 있고 버젓이 살아있는데.......
그런데 죽은 사람들은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법입니다.
화병에 꽂힌 꽃을 생화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죽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의 뿌리가 잘려있기 때문입니다.
2,3일 후에 그것은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있는 존재라고 설득시키려 해도 세상 사람들은 수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성령께서 오셨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죽어 있었구나!”
흙반죽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반쪽에 성령의 생기가 들어가면 제대로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예수님으로 인해 살게 되었구나!”
그래서 감사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 죽음의 도시 에덴의 동쪽의 삶을 표현하자면 애급의 종살이와 유사할 것입니다.
물론 그 애급 땅에서도 나름대로 소망이 있었습니다.
아들은 흙벽돌 전문학교를 나왔습니다.
손자는 공부를 잘해서 지푸라기 반죽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밤잠을 자지 않고 공부해서 쌓은 스펙입니다.
그렇게 살았는데 어느 날 그 땅의 왕이 이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궁궐을 다 지었으니 더 이상 흙벽돌이 필요 없겠구나’
그래서 다음날 아침 왕이 이런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히브리인 아버지들은 이제 아들을 낳거든 홍해에 가져다 버려라!”
그 왕에게는 사람의 생명이 흙벽돌 만드는 수단에 불과 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바로를 순종하자면 제 낳은 아들을 제 손으로 죽여야 했습니다.
바로를 거부하자면 애급의 군대에게 죽게 생겼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히브리의 부모들은 흑암의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 내 주먹을 믿는다는 둥
제 손으로 해결 못 하고 일만 생기면 하나님부터 부르냐는 둥
자신만만했던 그들이 날 살려달라고 하나님을 부른 것입니다.
그 부른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역사는 첫 번째 그 바로의 땅에서 나오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내가 이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땅을 나오는 일은 그들에게 불가능했습니다.
애급 군대의 칼이 그들을 막고 있었습니다.
또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의 소망할 장소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망에 대해서라면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소망의 장소는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확고부동한 약속의 땅입니다.
그리고 또 그 소망의 장소를 가기 위해서는 모든 수고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길 가다가 어려우면 차라리 되돌아 애급으로 가겠다거나 거기까지 가는 길에 맨날 만나냐! 불고기 반찬 어쩌고 얼큰한 육개장 저쩌고 불평하면 안 됩니다.
거기 사막에는 맛집이 없었습니다.
믿음
물론 모세의 입에서 나온 “그들을 애급에서 구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졌겠습니까?
삽 들고 괭이 들고 애굽 군대의 활과 창을 대항할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쟁에서 갑자기 개구리가 나타났습니다.
눈을 씻고 확인해 본 것입니다.
이제는 메뚜기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정확히 열 번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그대로 되었고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또다시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때처럼 정확히 그 일을 반복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겁나했던 바로의 활과 창은 완전히 무용지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개구리로 이로 혹은 질병으로....... 싸우셨습니다.
그들이 독재자의 땅에서 나오게 된 밤이었습니다.
그날 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애급의 큰 아들들이 모조리 죽은 것입니다.
애급땅에는 아주 줄초상이 난 것입니다.
그 때 쯤에 바로는 모세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만 나와도 몸을 벌벌 떨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들이 애급을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인들도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개구리가 등장할 줄 생각도 못했습니다.
다음에는 이들이 등장하고.......
바로가 피가 나도록 등을 긁으면서 칼 한 번을 휘둘러보지 못하고 항복할 줄이야!
그 중에 믿음 좋은 사람도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승리는 얻겠지만 싸우다가 천 명은 죽고, 천명을 팔이 잘리고.......’
그 용맹스러운 희생으로 승리가 올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해방되는 그 일에 그들은 오직 구경만 했을 뿐입니다.
이 듣도 보도 또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통해서 그들은 바로의 손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이 왕에게서 해방된 사건에 자신들이 한 일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두고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신득의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너희가 열 번의 기적을 보지 않았나!
너희들은 구경만 했을 뿐이다.
너희가 깨보니 죽음의 땅에서 해방되어 있지 않았느냐?
네가 하나님의 일에 무슨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냐.
끼어들지 말아라!
방해만 될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기만 해라!”
하나님은 이 사건들을 통해 매사에 바로 이 믿음을 적용하라는 메시지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 교훈을 잊을까 보아서 홍해 앞에서 하나님은 총정리를 해 주셨습니다.
칼 들고, 창 들고, 말 타고.......
“저 모지리들 스스로 독 안에 쥐 꼴이 되었다!”
애급 군대는 쫓아왔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양이며 소 말들을 끌고 애굽 군대를 대항 할 수 없었습니다.
또 앞으로 가자니 홍해가 막고 있었습니다.
아기까지 품에 안은 200만이 홍해를 헤엄쳐서 건널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서서 죽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또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바다 안에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더라!”
그 홍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살다 보면 애급 군대가 칼 들고 뒤에서 쫓아 오고 앞에는 홍해가 갈 길을 막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내 말대로 네 눈앞에서 바다가 길로 변할 것이다.
그 길로 걸어가라.”
하나님께서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홍해를 건너고 보니 거기는 식량을 보장할 수 없는 사막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 특별한 명령을 내리셨는데 첫째 하루 이상의 음식을 챙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갈 길인데 내가 그 길을 안 정하고 누가 정한다는 말인가!
둘째 하나님께서는 불기둥 구름기둥이 가는 데로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랬으니 날마다 이런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오늘은 살았지만 내일은 틀림없이 굶어 죽을 것이다.
또 내일은 더 깊은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것 아닐까?’
그들은 해 뜨면 불안에 떨고 잠자리에 들면 불만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현실을 보장받는 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한 200만을 데리고 가신 곳은 사막이었습니다.
사막에 무슨 먹을 것이 있고 또 마실 물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이 두 가지 명령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현실 보장이 아닙니다.
만사형통인지 뭔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부르시더니 내일 치의 음식을 챙기지 말고 또 네 계획 세울 생각을 말라는 것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가는 것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현실 보장이 될 수 없는 사막으로 부르셨고 더욱이 거기에서 현실을 부인하는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하나님의 임재가 보장되었을 때 현실이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삶에 적용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12.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다음에, 너희가 이 산 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때에,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징표가 될 것이다."(출3:12)
그렇게 200만이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 앞에 선 것입니다.
모세는 12인의 스파이를 그 땅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큰 일이 났습니다.
그 약속의 땅에는 자신들보다 더 힘도 더 세고 키도 더 큰 백성들이 칼과 창을 들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성벽은 강했습니다.
1. "이스라엘아, 들어라. 오늘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가서, 너희보다 강대한 민족들을 쫓아내고,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큰 성읍들을 차지할 것이다.
2. 거기에 있는 사람들, 힘이 세고 키가 큰 이 민족은, 너희가 아는 그 아낙 자손이다. '누가 아낙 자손과 맞설 수 있겠느냐?' 하는 말을 너희는 들었을 것이다.(신9:1,2)
그런데 그들이 이 가나안의 백성을 보는 순간 히브리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애급에서 보여주셨던 개구리도 이도 메뚜기도....... 다 잊고 말았습니다.
우박으로 애굽인들의 소들이 죽고, 결국은 그 장자들까지 죽었던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던 사람은 60만 중에 단 두 사람이었습니다.
8.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9. 다만 여러분은 주를 거역하지만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방어력은 사라졌습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민14:8,9)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기억입니다.
여러분, 이 기억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 기억을 못 해냈을 때 하나님은 한 세대를 사막에서 죽이면서 교육시키신 것입니다.
40년 동안!
그 믿음을 교육받았던 다음 세대가 거기 약속의 땅이 바로 보이는 곳에 서게 된 것입니다.
사랑
그런데 약속의 땅 코앞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질러가면 단숨에 가는데 에돔이 앞을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에돔에게 길을 내달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형제였고
물 한 바가지라도 돈 내고 사 먹을 것이고
혹시 밭을 밟고 지나갔다면 네 배로 갚을 것이고........”
“믿쉽니다. 아멘 할렐루야!”
부흥회를 열 번을 해도 에돔에게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에돔은 200만이 자신들의 내 논과 밭을 밟고 지나갈 일을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에돔 왕은 군대를 끌고 왔습니다.
결국 그들은 에돔 땅을 빙 돌아서 가나안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의 해는 머리 위로 사정없이 내리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이 그 말을 했던 것입니다.
5.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느냐?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느냐? 먹을 것도 없다. 마실 것도 없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난다."(민21:5)
40년 전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이 살아남은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들이 응애하고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홍해에 모두 수장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부모들이 간절히 원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음의 땅에서 구해주셨던 것입니다.
그 사막길은 그 약속의 땅을 향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입만 열면 불평을 해댔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바위를 열어 물을 주셨습니다.
40년 그 고생을 하고 드디어 상추와 깻잎에 삼겹살 쌈싸 먹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채 비빔밥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겨웠던 만나는 이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생기고 보니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한 것입니다.
5.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느냐?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느냐? 먹을 것도 없다. 마실 것도 없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난다."(민21:5)
그들이 에덴이 아니라 차라리 40년 전에 나왔던 에덴의 동쪽으로 되돌아 가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판을 뒤집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쓰러져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이 쓰러지고 형님 가족이 쓰러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엄청난 공포를 느낀 것입니다.
그들은 다급했고 하나님께 일단 살려주시면 기회를 봐서 다음에 회개하겠다고 했습니다.
탕자는 실은 아버지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돼지 사료를 훔쳐 먹다가 제대로 된 밥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리워서 집을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밥 때문에 돌아온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목욕시키고
잔치 베풀고
탕자는 일단 밥을 먹고 나서 회개를 한 셈입니다.
그 광야에서 에덴의 동쪽이 차라리 낫다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구리뱀을 보라고 살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구리뱀의 사건이 곧 십자가의 사건이라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를 두고 예수님은 기묘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사건을 요나의 사건에 비유하셨습니다.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나가셨다.(마16:4)
요나는 막돼먹은 불신자가 아닙니다.
요나는 누구보다 똑똑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똑똑했으니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니느웨에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였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서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눈치챘습니다.
하나님은 악당이라도 그들에게 살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그렇게 싫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 일에 자신이 도구가 되는 것은 더 싫었던 것입니다.
아니 나를 보고 일본놈들에게 축복을 전하라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 구역질 나는 놈들을 위해서!
하지만 요나는 별수 없었습니다.
불평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요나의 심정을 십자가에서 호소하신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께 여러분이 바로 니느웨입니다.
내일 오후쯤에는 뜨거운 육개장 국물을 입으로 후후 불면서 떠먹고 깻잎에 돼지 삼겹살을 싸 먹을 수 있었는데 그 일을 일주일 쯤 후에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주일 쯤 후에 육개장과 삼겹살 먹게 된 일 때문에 에덴은 말고 에덴의 동쪽으로 가겠다는 사람을 두고 니느웨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제 뜻대로 안 되면 애급으로 돌아가겠다는 무리를 니느웨라 이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죄인을 위해 나무에 달리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엄청난 갈등을 호소하신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죄인들을 사랑하신 위치입니다.
그 사랑이 요나의 일과 정확히 겹쳤던 것입니다.
8.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
8 Then the Lord told Moses to make a metal snake and put it on a pole, so that anyone who was bitten could look at it and be healed.
사막에서 40년을 훈련을 받았어도 상습적으로 불신의 고백을 토해내는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보이신 사랑입니다.
어떻게?
죽어가는 죄인들에게 회개를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무 위를 보라는 것입니다.
죄인을 위해 징벌을 대신 감당하시는 그리스도를 보라는 것입니다.
의를 행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의를 행하신 예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돼지 사료를 먹다가 제대로 된 밥을 먹으러 온 아들에게 일단 먹이고 나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 구리뱀을 보면 되는 것입니다.
목을 돌리는 수고조차 할 필요가 없습니다.
눈깔만 돌려도 됩니다.
지극히 단순한 요구와 결정적 결과입니다.
죽음의 지옥이냐 영생의 천국이냐?
하지만 이런 의심이 드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 전능하신 창조자께서 비천한 흙덩이를 위해서 어떻게 비참한 죽임을 당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그 능력으로 이런 사람들이 아닌 제대로 된 저런 사람을 또 만드시지 할 지 모릅니다.
장가가고 아이들을 가진 다음 저에게 그 하나님의 수수께끼가 풀렸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가진 후에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내 자식들이 변화된 다른 나의 경계선에 있었던 것입니다.
자식이 생긴 다음부터 내 옷을 사러 갔다가 아이들 옷부터 챙겼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빚을 져도 되고
새장사도 하고
콩나물도 기르고
저는 내 생명보다 아이들 생명을 더 중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치의 무게 중심이 나에서 자녀로 옮겨진 것입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미국 가서 보니 자식 때문에 한국에 남편을 두고 생이별하는 부부들이 많았습니다.
아이들 교육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입김을 불어 넣으셔서 사람이 태어난 것이 그 경계입니다.
자유 하셨을 분이 사랑으로 구속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식 사랑에서 벗어나실 수 없게 되신 것입니다.
또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자식들이 죽음을 택했을 때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못 박히시고
회초리질 당하시고
창에 찔리시고
뺨을 맞으시고
그 일들은 모두 우리를 에덴의 동쪽에서 에덴으로 옮기시는 과정에서 생겼습니다.
그 분이 모세의 장대 끝에 달렸던 구리뱀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눈깔만 돌려도 된다.
그 십자가를 보라!
그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