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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계보(3)
(마1:2-16)
<서 론>
4복음서는 다 같이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제 각각이 드러내고자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왜 한 권만 있으면 될 것 같은 내용이
네 권에 걸쳐서 있을까?
다 똑 같은 내용이지 않느냐?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고
예수님에 대해 어느 한 면으로 치우지지 않고
바르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4복음서를 종합적으로 읽고서 이해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모든 특징들을 알고
이해하지 못한다는데 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할 때,
마태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드러내고자 하는 특별한 면은 무엇인가?
바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말씀이죠.
그래서 우리가 그 계보를 살펴보고 있지만,
계보의 중심에는 다윗이 있습니다.
다윗이야 말로
예수님의 혈통적 조상이기도 하지만,
직분적인 면에서
메시아의 왕적인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마태복음의 계보는 14대씩,
세 시대로 나누어져 있는데,
먼저 족장시대의 계보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다윗의 왕권이 어떻게 세워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그리스도가 오시는 길이
어떻게 열리고 있는가...
비록 사람은 연약하여 실패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 길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정시대의 계보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의 왕권이 확립되었지만,
결국 인간 직분자의 한계를 드러내며
쇠퇴해가는 과정이죠.
인간 통치권자라고 할 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
완전한 통치자를 기다리도록 유도합니다.
오늘은 마태복음의 계보,
그 세 가지 구분 가운데서
마지막 세 번째,
바벨론 포로시대의 계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가 망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멈추느냐?
하나님의 약속이 종결되느냐?
결코 그렇지 않고,
그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이라는 무덤 속에 있는
죽은 자들과 같던 그 백성들을,
마치 마른 뼈를 살리셔서
큰 군대로 만드시듯이,
살리셔서 나라를 세우도록 하시고,
성전을 세우도록 하실 것입니다.
<본 론>
3. 포로시대가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12-16)
먼저 12절을 한 번 보시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다윗의 가계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면서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나라가 망했는데 왕이 무슨 소용입니까?
한 때 영광을 누리던 다윗의 가계는
역사 속에서 희미해지는 듯 보였습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이 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성경은 교회의 포로생활을 죽은 것과 동급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요나서를 보게 되면,
요나가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달아나다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나는 그곳을 스올이라고 부릅니다.
스올은 무덤이라는 뜻인데,
욘2:2절인데,
(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물론 요나는 북이스라엘 사람이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사건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의 포로로 잡혀갈 것에 대한
상징으로서 주어지는 것이지만,
이방나라에서의 포로생활이
무덤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의미를
확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가 참고할 만한 말씀이죠.
특별히 에스겔 선지자는 그러한 면에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데,
겔37장을 보게 되면
마른 뼈 환상이 나오거든요.
즉, 성령께서 환상 중에 에스겔 선지자를
어느 골짜기로 이끌어 가셨는데,
그곳에 마른 뼈가 가득한 환상을 보았던 것입니다.
겔37:1절에,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마른 뼈가 살아나게끔 대언하도록 함으로서
마른 뼈가 살아나도록 하셨습니다.
그 마른 뼈들은 말씀에 따라 다시 살아나서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그것은 곧 포로생활 가운데 있던 유대인들이
다시 회복될 것에 대한 말씀이거든요.
포로생활을 죽은 것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장면인데,
다음 구절을 보면,
그 환상에 대한 해석이 주어지고 있는데,
겔37:12,13절,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포로생활을 무덤으로 표현하죠?
포로생활에서 돌아오는 것은
무덤을 열고 나오는 것,
즉, 부활입니다.
호13:14절에는,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
이 말씀 또한 포로생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에 대한 말씀인데,
스올의 권세에서,
즉, 무덤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실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포로유배지는 무덤입니다.
포로생활은 사망한 상태입니다.
다윗의 후손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감으로서
다윗의 계보는 사망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고,
포로생활 가운데서 지친 그 백성들에게
소망을 주고 계셨습니다.
여고냐가 여고냐인 이유가 여기에 있죠?
여고냐의 원래 이름은 여호야긴입니다.
남유다를 개혁하여 바르게 세우고자 했던
요시야 왕의 손자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도저히 소망이 없는
그 백성들과,
그들의 통치자 여고냐의 모습에 실망하셨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철저한 파멸을 예언하셨습니다.
렘22:24,25절,
(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25)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네가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
이어서 30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는 왕이 된지 3개월 만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36년간 옥고를 치르게 되죠.
그 후 아들을 낳았지만,
왕위를 이어가지는 못합니다.
그 아들도 아들을 낳았지만,
아무도 다윗의 왕위를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유다에 왕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신구약 중간사를 보게 되면,
‘마타디아스’라는 사람이 헬라제국에 반기를 들고
왕조를 세우죠.
그것이 마카비 왕조입니다.
하스모니안 왕조라고도 하는데,
로마가 팔레스틴을 지배하기까지
유다를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통치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다윗의 후손도 아니었을 뿐더러,
하나님의 뜻은 유대인들이 계속
이방나라의 통치를 받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로마제국의 후원을 등에 입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인물이 헤롯인데,
예수께서 태어나실 당시
왕이었던 인물이죠?
그 또한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이 없었고,
다윗의 집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며,
심지어 유다 백성도 아니고,
아브라함의 후손도 아닌,
에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유다에 임한 것 같고,
다윗 집의 등불이 꺼진 것 같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왕 같은 제사장,
훌륭한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성전을 세우고
하나님께 참 된 제사를 드릴,
그 후손이 끊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해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
인류의 구원자가 오시는 길이
완전히 막힌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고냐라는 이름 속에
소망을 숨겨 두고 계셨습니다.
그 모든 불신앙과 악행 때문에
완전히 망해도 할 말이 없는 백성들이었지만,
하나님은 소망을 주고 계셨는데,
그것은 비록 그 백성들은 언약을 어기고
항상 멸망의 길을 걷고,
그래서 하나님과 더불어 세운 언약을 이어나갈 능력이
조금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고,
다윗의 집을 세우시고,
성전을 세우실 것이고,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는 사실을
그 이름을 통해 계시해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고냐의 이름의 뜻이,
여호와께서 세우실 것이다!
불신앙적인 인간들은 무너뜨리지만,
하나님은 세우실 것입니다.
인간들은 무지하여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걷지만,
그래서 스스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지만,
하나님은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실제로 여고냐는
바벨론이라는 무덤에 들어갔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왕하25:27절 이하에,
(27)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28) 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29) 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30) 그가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양이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단순히 여고냐 한 개인의 역사를
조망하는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모든 역사 속에는
유다의 미래가 예견되어 있습니다.
왕은 그 나라의 대표죠?
왕이 회복되는 것은 곧 그 나라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창녀와 결혼한 사건은
단순히 호세아 개인사가 아니잖아요?
이스라엘이 자기의 남편이신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음란하게 섬김으로서
창녀와 같이 되었다...
하나님은 비록 이스라엘이 창녀와 같이 되었어도
그 언약을 깨뜨리지 않으시고,
즉, 이혼하지 않으시고
창녀 고멜을 끝까지 사랑하는 호세아와 같다... 하는 것을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을 통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말씀이 아니라,
행동으로 계시하기 위해 선지자는
창녀와 결혼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고냐가 회복되는 사건은,
여고냐가 불쌍히 여김을 받아서
그 삶이 조금 편하게 되었다.
그래도 말년은 편하게 지냈다.
하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셨지만,
싸매 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미래를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고냐의 생애를 통해서.
비록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지만,
마치 무덤 속으로 들어가서 죽은 자처럼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 무덤 속에서 그를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즉,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사람은 무능하지만,
하나님은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은 악하여서 무너뜨리지만,
하나님은 세우실 것입니다.
여고냐의 이름 속에 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동시에 거기에는
그들을 위해 오실 메시야의 공생애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사실 또한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메시야는 초라하게 오셔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죽임을 당할 것이고,
무덤 속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 백성들의 불신앙으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끊어지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영광중에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즉, 부활하실 것이고,
승천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왕으로서 좌정하실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약속,
그 저주,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성취되었습니다.
실제로 유다에는 왕이 없어졌습니다.
다윗의 후손은 두 번 다시
왕좌에 앉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다윗의 왕위를 이어 받을 왕은 없어졌지만,
다윗의 왕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왕위에 앉을 메시야가
그 계보를 통해 오셨습니다.
유다를 다스릴 왕은
두 번 다시 세워지지 못했지만,
유다의 통치권을 뛰어넘어
온 세상,
온 인류를 통치하는 통치권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그 메시야에게 주어졌습니다.
저주는 변하여 복이 되었고,
다윗에게 주신 약속,
그 왕위가 영원할 것이라는 약속은
그렇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7:13)
이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한 소망은 여고냐의 이름 뜻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내가 하나님께 간구했다...’는 뜻의
스알디엘이라 지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죠?
내가 하나님께 간구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뜻이죠?
여고냐는 비록 자신과
자기 조상의 죄 때문에
포로로 끌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를 감옥에서 일으켜 세워 주셨고,
더욱이 아들을 주셨습니다.
아들은 항상 미래적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아들은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을 죄로부터,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줄
메시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들의 탄생은
여고냐에게 뿐만 아니라,
포로생활 가운데 있던
온 유다 백성들에게 소망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그렇게 약속을 따라
오고 계셨습니다.
여고냐의 아들 스알디엘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지만,
그는 바벨론에서 크게 고생하면서
자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 여고냐가 옥중에서 회복되었고,
바벨론의 귀족과 같은,
왕의 가족 중 한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곳을 영원한 고향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나그네와 같이 여겼습니다.
비록 바벨론의 모든 아름다운 것을
누릴 수 있는 위치였지만,
언젠가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음을
늘 되새기며 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믿음의 조상들이 싸움을 통해 쟁취하였으며,
선지자의 입을 통해
70년의 포로생활이 끝날 때,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던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렘29:10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래서 그는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스룹바벨이라 지었습니다.
바벨론에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고향이 아니라,
타국 바벨론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아들을 낳고서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 하는 뜻으로
그 아들 이름을 게르솜이라 지어 불렀듯이,
그 말은 곧,
지금 살고 있는 그곳 애굽이,
아무리 살기 좋고, 편해도
본향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스룹바벨의 이름의 뜻도 그렇습니다.
스알디엘은 바벨론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지만,
결코 그곳에 정착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하루 빨리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그 땅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 열망을 그 아들의 이름 속에
새겨 놓았던 것입니다.
그 아들 스룹바벨은 그의 기대대로,
바벨론 왕에 의해 유다의 총리로 임명 되었고,
그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뜻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왕이 될 수는 없었지만,
총리로서 통치권을 어느 정도 가질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습니다.
학2:23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종이라는 호칭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오직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이사야 같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크게 쓰임 받은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 개념에서 종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지만,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종은 그를 보낸 사람을 대신하는 사람이거든요.
즉, 하나님의 종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
그러면 그 말과 행동에 권위가 있다는 뜻입니다.
신적인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종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그 말은 그 종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종의 개념입니다.
스룹바벨이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다는 말은
그러한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쓰임 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비록 왕은 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에게서 예수님의 그림자가 나타나죠?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지만,
종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이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 쓰임 받는
일꾼이셨습니다.
옛 부터 종으로 부름 받아 섬기던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과 스룹바벨의 뒤를 잇는,
그 계보를 잇는 구원자이셨습니다.
그 계보를 잇는다고 해서
그들의 후배라는 뜻이 아니라,
사실 앞의 인물들은 모형일 뿐이죠?
예수님은 실체셨습니다.
즉, 구약시대에 쓰임 받았던 하나님의 종들은
장차 메시야가 어떤 모습으로 오실지,
어떤 사역을 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그림자 역할을 할 뿐이었고,
예수님은 그 모든 그림자의 실체이자 완성으로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스룹바벨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성전을 세웠다는 것이죠.
즉,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성전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성전은 7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70년 만인 주전 516년에 다시 세워졌습니다.
그것이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비록 솔로몬의 성전에 비해
볼품이 없었지만,
그 영광만큼은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했습니다.
학2:9절,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물론 여기서 약속하고 있는 궁극적인 대상은
예수께서 세우실 성전입니다.
돌로 만들어진 성전이 아니라,
그 몸으로 세우실 인간성전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이
성전에 대해 자랑하는 말을 들으시고,
이 성전을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겠다...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사흘 만에 부활하실
자신의 몸에 대해 하신 말씀이죠?
그 몸이 성전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스룹바벨 성전이었습니다.
어떻게 스룹바벨의 성전이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영광스러울 수가 있습니까?
솔로몬의 성전은 크고 화려했습니다.
이방인들이 보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웅장했습니다.
왕상10:4-6절,
(4)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모든 지혜와 그 건축한 왕궁과 (5) 그 상의 식물과 그의 신하들의 좌석과 그의 시종들이 시립한 것과 그들의 관복과 술 관원들과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크게 감동되어 (6) 왕께 말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사실이로다
그에 비해 스룹바벨 성전은 어땠습니까?
이방인이 아니라,
본국 백성들이 보기에도 초라한,
너무나 초라해서
통곡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스3:12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솔로몬의 성전은 왕국의 영광을 담고 있었지만,
스룹바벨의 성전은 이방나라의 통제 하에서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려운 현실,
그 태생적인 한계를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이 성전의 영광이 이전의 영광 보다 클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앞서도 말씀 드렸다시피,
결국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주시려는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간성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돌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지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기 때문에,
돌 성전은 쇠퇴해 가야만 했던 것이죠.
쇠퇴해 가다가 사라져야만 할 성전이
돌 성전이었습니다.
모세의 성막이 발전하여
솔로몬의 성전이 되었지만,
솔로몬의 성전은 쇠퇴하여
스룹바벨 성전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스룹바벨 성전은 더 쇠퇴해야만 하고,
종국에는 사라져야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간 성전,
그림자나 모형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실체이신 그 분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간 성전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참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어진 성전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돌이 아니라 사람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들로 지어진
참 성전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교회를 잘 세운다고 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게 되어 있습니다.
겉보기에 그것은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그 영광만큼은 솔로몬의 성전이 비할 바가 못 되고,
스룹바벨 성전을 압도하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들이 정신을 잃을 정도의 영광이
솔로몬의 성전에서 발현되었다고 한다면,
그 보다 더 한 영광과 권위가
이 교회를 통해서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
어떻게 교회가 능력이 없겠습니까?
한낱 돌로 지어진 성전을 보고서도
사람이 정신을 잃을 정도의 감흥이 있었다고 한다면,
교회의 참 된 영광이 드러날 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이
제 각각 재료가 되어 지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가득한 교회라고 할 때,
어떻게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고,
조롱거리가 될까요?
오히려 존경 받지 않겠습니까?
칭송을 받고,
숭배를 받고,
사랑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물질의 영광을 좇고,
겉으로 보이는 그것이 교회를 잘 세우고,
잘못 세운 기준이 되기 때문에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길가에서 밟히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냄으로 인해
그 영광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공동체입니다.
물질이 아니고,
값비싼 건축 자재나,
화려한 네온 십자가,
혹은 유명인사가 다님으로 인해
빛나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무엇으로 지어졌나가 아니라,
그 속에 무엇이 거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님의 생각이 바뀐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은
겉이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었습니다.
보석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건물이었습니다.
돌로 지은 성전은 될 수 없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그 영광을 드러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실체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세운 성막,
솔로몬이 지은 성전,
스룹바벨이 재건한 성전,
그 모든 것들은 그림자일 뿐이고,
그 모든 그림자들의 실체,
모세가 보았고,
다윗이 보았던,
그것을 솔로몬에게 그려 주어 짓도록 하였죠?
스룹바벨이 보고 소망을 가졌던 그 천상의 성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고,
그의 몸 된 이 교회였던 것입니다.
스룹바벨 성전이 보잘 것 없었듯이,
그래서 예전 성전을 보았던 사람들이
그 초라한 모습을 보고 통곡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성전,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 성전은
더욱 초라할 것입니다.
물질적인 영광은 사라져가고,
그것이 사라져가는 만큼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드러나기 때문인데,
인간 성전은 시작도 초라하고,
끝도 초라하여,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다 통곡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으로 이어질 것인데,
그 영광이라는 것은
이전 성전들의 영광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천상의 성전만이 담을 수 있는
영광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초라하고
박해와 고난을 통해,
성도들의 눈물을 통해 태어났지만,
기쁨과 영광으로 끝날 것입니다.
교회의 시작은 고난과 슬픔이지만,
그 끝은 항상 영광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항상 고통이 선행됩니다.
비록 해산의 고통이 크지만,
아이를 낳은 기쁨으로 인해
그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듯이,
참 교회가 탄생하기까지는
많은 고통이 동반되지만,
그 영광과 기쁨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전 고통은 다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교회 세우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질적인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인내해야 하는 괴로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물질적인 압박을 받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일이 짐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관계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사람 때문에 오래 참아야 하는,
교회를 오고가는 거리 때문에 인내해야 하는
상황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그 모든 영광을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혹은 닥칠 수 있는
모든 고난과 어려움들을 이겨내야 합니다.
희생 없는 사랑이 없고,
희생 없이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희생하지 않는 것은
참 된 사랑이 아니고,
희생 없이 누리려고만 하는 것도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기심입니다.
나를 위해 하는 신앙생활이지,
교회를 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개혁주의는 개인주의가 아닙니다.
개인주의가 마치 개혁주의인 냥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만 잘 하면 되고,
우리 가정만 안녕하면 되고,
우리 교회만 잘 세우면 되고...
그것은 개인주의입니다.
이기적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만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니까,
공동체를 위한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않고,
그것을 집단 이기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집단 이기주의도 결국
하나님을 위하거나,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고,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개혁교회는 개인주의가 아니고,
이기주의자가 설 곳이 없는 곳입니다.
이기주의의 반대말은 이타주의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살자는 말인가?
그 또한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항상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죠?
하나님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선행될 때,
이웃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해도 거짓되게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웃도 바르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고
결국 같은 것입니다.
사울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갈 때,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왜 교회를 핍박하느냐...? 가 아니라,
왜 나를 핍박하느냐?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무관심하고,
교회를 위해 희생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위해 죽겠습니다.
다 거짓말인 것이죠.
교회는 바벨론에서 고난을 당했지만,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기도하였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자,
하나님의 약속,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진심으로 대망하게 되었고,
그것이 참 믿음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 믿음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구하는 기도로
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이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의 계보에도
여러 인물들이 등장 하지만,
13절을 보십시오.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이렇게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스룹바벨 이후로 성경의 역사는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계속 그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이죠?
성경은 말라기 이후로
근 400년간 침묵합니다.
그 사이 바벨론도 망하고,
페르시아도 망하고,
헬라제국도 망하고,
로마제국이 세상을 제패했지만,
성경은 계속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침묵은 한 순간에,
한 아기의 울음소리와 함께
깨어집니다.
바로 온 인류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16절,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예수님의 부친이죠?
요셉까지는 낳은 사실이 있지만,
즉, 야곱은 요셉을 낳았지만,
요셉이 예수님을 낳은 사실은 없습니다.
엄밀하게 대가 끊어졌습니다.
즉,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거쳐,
다윗과 솔로몬과 르호보암과
여고냐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그 혈통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 모든 신앙의 조상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르지만,
그래서 낳고, 낳고, 낳고...
이런 식으로 낳음으로서 이어지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요셉이나 다른 누군가가
낳음으로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마리아의 태를 이용하셔서
스스로 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그 계보를 이어서 오고 계시지만,
예수님을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8절에서 그것을 설명하죠?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낳았다... 라는 표현이 없고,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표현이 담고 있는
중요한 의미는,
예수께서 바로 그 약속된 여자의 후손이시다...
하는 사실입니다.
결국 다윗의 왕권이 무너지고 몰락한 이유가 무엇이냐?
그 인간 본성에 내재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죄의 본성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은 그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난다고 해도
또 다시 망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인류에게 필요한 참 통치자는
단순히 잘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죄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왕이시지만,
제사장이시고,
스스로 통치하시지만,
성전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를 여실 것이고
그 백성들의 죄를 완전히 없애 주실
그 여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 한 마디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듯이,
성도는 동정녀 교회에게서 납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듯이,
성도 또한 성령으로 잉태되어 납니다.
그것을 거듭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본성 때문에
도저히 자격이 없던 우리에게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고,
성전의 재료가 될 자격이 없던 우리가
성전의 재료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사명을 부여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 통치를 받으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게 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참 제사장으로서
우리 죄를 완전히 씻어 주셨고,
참 된 통치권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성전을 세우셔서
죄 사함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 수 있도록 하시고,
하나님의 통치로 다스림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 사함의 은혜를 알아야 하고,
통치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교회가 세워진 이유가 그것입니다.
날마다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고
그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복음이 그 역할을 하죠.
말씀은 우리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찌르지만,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 죽음을 맛보지만,
그 말씀의 심판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여
회개하고 돌이킬 때,
다시 일으킴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완전한 부활이 있지만,
우리는 매 주, 말씀을 통해
부활을 맛봅니다.
생명의 말씀으로 부활한 성도는
말씀의 통치를 받습니다.
말씀을 떠난 것이 죄고 죽음임을 알기에,
영생을 사모하는 성도는
결코 말씀을 떠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고,
삶의 원리로 알아
붙잡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성도에게
참 된 부활의 기쁨을 맛보도록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활력을 얻게 하시고,
당장 눈앞에 죽음이 닥치더라도
부활과 영생에 대한
소망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가 교회를 바르게 세우고,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결 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로부터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의 계보는
무덤 속으로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활하여 새 생명을 얻는 상황을
떠올리도록 합니다.
즉, 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스스로 자유인이라 생각을 했겠지만,
메시야가 없는 그들의 삶은
결코 자유롭지가 못했고,
오히려 죄의 포로요,
무덤이라는 감옥에
갇힌 상태였던 것입니다.
자유는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얻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리스도를 맞아들일 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 된 자유,
죽음이라는 고통에서 자유를 얻는 방식도
그와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 분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 분의 몸 된 이 교회를
소망과 인내로 잘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는
참 되고 바른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 되고 바른 교회를 세울 때,
우리가 그 교회에서 주어지는
죄 사함과 거룩을 얻게 될 때,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통치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의 통치입니다.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매일 매 순간,
우리에게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매일 매 순간,
조명하심과 인도하심을 통해
하시는 일입니다.
그 통치가 있기 때문에
영생이 우리에게 보장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죄와 죽음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죽지만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무덤 속에 들어가지만,
우리는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때때로 크고 작은 죄를 짓기도 하고,
말씀을 떠나 곁길로 빠질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품속에서 우리는
늘 안전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으시고,
부활과 영생의 소망으로
죄의 권세와 싸우고,
죽음의 권세와 싸워 이기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드러내어
왕 같은 제사장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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