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민극가 스테파노(1787〜1840)
o 수원 갓등이 공소의 회장. 천주가사〈삼세대의〉저술
o 1787년 인천 출생. 천주교에 입교한 뒤 서울과 수원 등지에 거주
o 1840년 포도청 에서 교수형으로 순교
열심으로 통회하면 주모인자(仁慈) 무한하여 차마어찌 버리실가 공(功)있다고 믿지말며 죄 (罪)있다고 실망마소 악과죄는 내가짓고 공과덕은 주덕(主德)이라
민극가(閔克可)〜 스테파노가 체포되기 이전에 저술하여 교우들에게 배포한 천주가사〈삼세대의〉(三世大義)의 일부이다. 이 가사의 내용을 보면 그가 얼마나 교리에 해박했으며,그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 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스테파노는 인천의 양반 출신으로, 온화하고 선하면서도 강직한 성품 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 모친을 여의었으며, 이후 부친과 동생들 과 함께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러나 20여 세에 아내를 잃 고 혼자가 되었다. 이때 교우들이 재혼을 권유하였지만, 그는 이를 거절 하고 서울로 이주하여 모화관(현 서울 서대문구 영천동) 등지에서 생활 하다가 중년에 이르러 수원 갓등이(현 경기도 화성시 봉담음 왕림리)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재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6〜 7년을 거주 하다가 두 번째 부인과 딸을 다시 잃고 말았다.
그러나 스테파노는 모든 것을 주님의 뜻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본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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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다블뤼 주교는 스테파노의 이름을 ‘국가’ (Keuk Ka)로 표기했으나(『순교 사 비망기』, 489쪽) ,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극가’ (克可)가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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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는 데 노력하였다. 경기도 양지, 인천과 부평, 강원도 김성,시홍 등 지로 다니며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널리 전파하였고,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으며,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였다. 또 1834년 중국인 유방제(劉方濟,파치피코)65: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에는 갓등이 회장 에 임명되어 교리학교를 설립하고 아이들을 모아 교리문답을 가르쳤다. 그가 교리를 강론할 때면 그 표양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여기에 감화되 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66>
1837년 말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L. Imbert, 범 라우렌시오) 주교가 조선에 입국한 뒤,스테파노 회장은 주교의 명에 따라 수원 상귀(현 화성시 서신면 • 우정음 지역)에 있는 교회 전답을 관리하게 되었 다.67 68> 또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에는 서울과 지방을 오가면서 냉담자들을 권면하고 마음이 약한 교우들을 격려하는 데 힘썼다. 그러던 중 자신이 맡고 있던 교회 재산을 탐내는 비신자에게 밀고당해 서울 인 근에서 체포되었고,이내 좌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때는 박해가 거 의 끝날 무렵으로, 조정에서 이미 11월 23일(음 10월 18일)자로〈척사 윤음〉(斥邪綸音)을 반포한 뒤 였다.
포도청에서의 문초와 형벌 때 스테파노 회장은 끊임없이 배교의 유혹 을 받았지만,끝까지 이를 거부하고 신앙을 고수하였다. 포도대장의 문 초에도 그는 전혀 흔들림이 없이 "만일 석방된다고 할지라도 교리의 가 르침을 계속 실천할 것이오. 또 다른 이들에게도 교리를 전파하겠소.”라 고 준엄하게 대답하였다. 화가 난 포도대장이 치도곤으로 때리도록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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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유방제 신부의 본명은 여항덕(余E德)이었으나, 조선에 입국하면서 유방 제로 개명하였다.
66)『기해일기』,120〜121쪽 :『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71, 김성서 요아킴 의 증언 : 회차 75,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 : 회차 97, 이 베드로의 증언.
67)『기해 • 병오 재판록』, 이 베드로의 증언.
68)『순교사 비망기』, 490쪽 :『기해일기』, 121쪽 :『기해 • 병오 재판록』, 이 베드로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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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스테파노 회장은 치도곤이 40대에 이를 때까지도 굴복하지 않았다. 옥에 갇혀서도 스테파노 회장은 자신의 상처를 돌보지는 아니하고 마음이 약해지는 교우들을 권면하는 데 힘썼다. 배교하려는 이들이 있으 면,끊임없이 꾸짖거나 달래서 마음을 돌리도록 하였다. 그 결과 그의 권 면에 힘입어 배교를 철회하고 순교를 결심한 이들이 많았으니, 김절벽 도미니코와 이사영 고스마도 여기에 속한다.
스테파노 회장은 그 다음날에도 다시 불려나가 치도곤 30도를 맞았 으나, 순교를 향한 그의 결심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자 포도대 장은 생각을 바꾸어 그에게 교수형을 언도하였다.〈척사윤음〉이 반포된 뒤였으므로 하루 빨리 결말을 지으려 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체포된 지 5〜 6일 만에 좌포도청의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 니, 때는 1840년 1월 30일(음력 1839년 12월 26일)로, 그의 나이 53 세였다.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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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순교사 비망기』, 490〜491쪽 ;『기해일기』, 121쪽.〈페레올 주교의 보고 서〉(901쪽)에는 1839년 12월 31일(음력 11월 26일)에 순교한 것으로 나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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