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군강산참선수석(四郡江山參僊水石) : 사군 지역의 선계와 같은 아름다운 풍광
醉生至夢死 我心常慽慽 薄遊愜素願 杖履山之谷
취생지몽사 아심상척척 박유협소원 장리산지곡
巋然巖獨立 舍人誰事蹟 玲瓏三疊壁 繩墨千尋直
규연암독입 사인수사적 영롱삼첩벽 승묵천심직
취한 듯 살다가 꿈꾸듯 죽는 인생
나의 마음은 늘 슬프구나!
잠깐의 유람이나 평소 바라던 것
산골짜기를 다녀보았네!
우뚝하여라 바위 홀로 서 있는데
사인암은 누구의 자취인가?
영롱하여라 세 겹의 절벽
먹줄 놓은 듯 천 길이나 곧구나!
澄明七曲水 玉鏡一泓碧 床平復枕高 天借人臥石
징명칠곡수 옥경일홍벽 상평복침고 천차인와석
溪輿勝江舟 安身放幽矚
계여승강주 안신방유촉
일곱 구비 맑디맑은 물
한 웅덩이 푸른 옥거울
반반한 돌은 상, 높은 돌은 베개
하늘이 사람 누울 바위를 빌려주었네!
계곡 길 가마가 강의 배보다 나으니
편안한 자세로 그윽이 경치를 감상하네.
- 조영경(趙榮慶, 1742~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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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1803년(순조3)에 제작된
서화첩 『사군강산참선수석』에 그림과 함께 수록된 작품이다.
그림을 그린 이는 기야(箕埜) 이방운(李邦運, 1761~1815)이고
발문을 쓴 사람은 우어 거사(寓於居士) 김양지(金養之)이다.
이 시를 쓴 사람은 조영경(趙榮慶)인데 자가 안숙(安叔)이다.
조영경은 1802년 청풍 부사(淸風府使)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중양절을 맞이하여 인근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그 흥취와 견문을 시로 기록하고
당시 유명한 화가 이방운에게 그림을 의뢰한 것이다.
사군은 산도 좋고 물도 좋기로 이름난 충청도의 네 고을로
경상도와 강원도의 접경에 위치한 단양, 청풍, 제천, 영춘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제천과 단양에 해당한다.
조영경이 가 본 곳은 차례대로
도화동(桃花洞), 평등석(平等石), 금병산(錦屛山), 도담(島潭), 귀담(龜潭), 의림지(義林池),
그리고 마지막에 사인암(舍人巖)이다.
그러므로 제목의 뜻은
‘사군 지역의 선계와 같은 아름다운 풍광’이라 할 수 있다.
사인암의 명칭은 사인 벼슬을 지낸 역동(易東)
우탁(禹倬)이 노닐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퇴계집고증』 권7과 성해응의 『연경재집』 「단양산수기(丹陽山水記)」에
그 사실을 기록한 걸 보면 당시에도 지명의 유래가 분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인암은 그 모양이 우선 수직으로 높이 솟구쳐 인상적인데
그게 또 가로로 갈라져 있어 마치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
사인암에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살았던 이윤영(李胤永, 1714~1759)의 「사인암」 시에
“책 벼랑 천 척 똑바로 서 있어, 온종일 바라보느라 저물녘 모래톱에 앉아있네
[冊厓千尺不偏斜, 盡日相看坐晩沙]”라는 구절을 보면 옛사람도 책처럼 느꼈던 모양이다.
사인암에 가 보면
높이 솟은 바위 못지않게 넓게 펼쳐진 너럭바위와 깊은 물이
또 눈길을 끈다.
돌에 새긴 바둑판도 있고 장기판도 있다.
이윤영은 「사인암기」에서 이렇게 묘사하였다.
巖下之石又盤陁, 如堂如陛, 如安牀如置几,
암하지석우반타, 여당여폐, 여안상여치궤,
高下平仄, 各得其宜, 可以坐八九十人.
고하평측, 각득기의, 가이좌팔구십인.
바위 아래의 돌은 또 평평하고 비스듬하다.
마루나 계단, 침석이나 안석과 같은 바위들이 높이와 기울기가
모두 저마다 알맞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8,90명 정도는 앉을 수 있다.
尊俎筆硯, 隨意在前, 俯弄溪水, 可漱可濯.
존조필연, 수의재전, 부농계수, 가수가탁.
循巖自北而南, 爲五十餘步, 巖之北根浸于水, 水深可舫.
순암자북이남, 위오십여보, 암지북근침우수, 수심가방.
술 동이와 안주, 필연을 마음대로 앞에 놓을 수 있고
계곡물을 굽어보고 희롱을 하며 양치를 하거나 씻을 수 있다.
바위를 따라 북에서 남으로 가면 50여 보의 거리가 되는데
바위의 북쪽 뿌리가 물에 잠겨 있고 물이 깊어 배를 띄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