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리의 「노라의 집」평설 / 홍일표
노라의 집
장승리
세 밤만 더 자면 죽은 지 사흘째다 자기 생일을 헤아리는 자처럼 불멸이 고백했다 우리는 잠겨 있지 않고 우리는 잠겨 있다 열쇠 구멍에 꽂힌 채 부러진 열쇠는 알고 있다 그것의 불멸은 그것이 알지 못하는 불멸이라는 것을 지키지 말아야 할 약속을 지켰다 지네처럼 다리가 많아졌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한 장의 그림 같았다 코끝이 찡해졌다 빨간 구두 속에 죽어 있는 날파리처럼 방어에 능했다 선량함은, 부산물 같았다 울기 직전의 정적을 그 기나긴 광포함을 어미 새가 꽝 하고 닫아 버렸다 열쇠 구멍에 꽂힌 채 날개가 부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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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연한 감각의 통증
죽은 자가 자기가 죽은 줄을 아는 비극적 아이러니의 돌올한 사례이다. ‘불멸’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부활이지만 그 부활은 현실의 폭압적 질서 앞에서 요원한 듯 싶다. 그러나 화자는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여주인공 노라가 그러했듯 현실에서 비켜서지 않고 존재의 정황을 직시한다. “잠겨 있지 않고 우리는 잠겨 있”는 현실을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적 주체는 곧 “열쇠 구멍에 꽂힌 채 부러진 열쇠”이다. 무엇인가를 열고자 했으나 좌절된 의지의 상징으로 드러난 대상은 선연한 감각으로 아프게 다가온다. 뜻을 이루지 못한 쓸쓸한 삶의 초상이 구체적 실물을 만나 더욱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약속’은 구속의 다른 이름이다. 더군다나 그 약속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약속이어서 비극적이다. 구속의 강도가 높을수록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는 더욱 강렬해진다. 두 개의 다리가 열 개, 백 개, 천 개로 분열한다. 욕망의 가지는 무성해지지만 그것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불구의 욕구일 뿐이다. 그리하여 “구멍에 꽂힌 채” 꼼짝하지 못하고 부동의 상태로 붙박혀 있다. “시간”은 다만 “한 장의 그림”으로 눈앞에 존재할 뿐이고 화자는 “빨간 구두 속에 죽어 있는 날파리”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나름대로 현실의 질서에 부응하기 위해 “선량함”으로 버텨나가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서 문득 신현정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길 위의 우체부」의 마지막 행이 “아, 나는 선량했다” 인데, 여기서 “선량”은 타자의 행위를 전제로 한 반의적 의미를 함유한다. 즉 선량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비판의 내용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장승리 시인의 시도 동일한 의미로 접근할 수 있다. 선량함이 선의의 가치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비하되기 일쑤인 것이 현실인 점을 감안한다면 “부산물”의 의미가 증폭되어 나타나게 된다.
이 시행의 “울기 직전의 정적”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광포함”이 “어미 새”의 전횡으로 좌절되고 시적 주체는 “날개”가 부러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시인은 섣불리 희망을 말하거나 긍정적 전언으로 거짓 돌파의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또 다른 고뇌의 시간으로 진입하게 한다. 고통과 상처의 경험이다.
열쇠의 본래 기능은 닫힌 것을 열고 새로운 공간으로의 진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열쇠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부러진 채 단지 닫힌 문의 일부가 되는 상황을 반어적 수사로 보여준다. 장승리 시인의 시는 “노라의 집”에 갇혀 있는 것이 비단 시적 주체만이 아니라 여타의 존재들 역시 예외가 아님을 조용하고 나직한 어조로 발언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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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詩로 여는 세상》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