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마원 성지 (복자 박상근 마티아 묘)
간략설명: 칼래 신부와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의 우정을 기리며
지번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마원리 600-1
구름도 쉬어 넘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닐 만큼 험한 고갯길인 새재에는 그 옛날 박해를 피해 산으로 깊숙이 숨어들어야 했던 슬픈 탄식이 서려 있다. 충주에서 문경, 괴산에서 제천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올라야 하는 새재는 영남의 관문이다. 그 밑으로 30여 분 거리에 위치한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마원 1리는 병인박해 당시 목숨을 빼앗긴 박상근 마티아 등 40여 명 순교자들이 살았던 신앙의 터이다.
본래 조선 시대 마포원(馬包院)이 있었던 터라 ‘마포원’, ‘마원’ 또는 ‘마판’이라고 불린 이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동면 우어리 일부를 병합해 ‘마원리’(馬院里)라 하고 문경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마원에는 일찍이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도 지역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 들면서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한실, 문경, 여우목, 건학 등과 함께 마원은 교우들이 화전을 일구며 모여 살았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그러던 중 이곳에 박해의 회오리가 불어온 것이 1866년 병인년의 일이다. 서슬 퍼런 탄압은 새재를 넘어 이곳 마원에까지 들이 닥치게 되었고, 이때 마을의 교우 40여 명이 충주, 상주, 대구 등지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과 혹형을 당한 끝에 순교했다.
특히 30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하게 순교한 박상근 마티아(1837-1867년)의 묘가 이곳에 남아 있어 생생한 신앙의 숨결을 되새기게 해준다. 문경 토박이로 아전(하급 관리)이었다고 전해지는 그는 아마도 신유박해 이후 이 지방으로 숨어든 충청도의 신자들과 접촉하게 되면서 지방인으로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입교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칼래(Calais, 姜, 1833-1884년) 신부의 전교 기록에 보면 문경에서 가까운 백화산(白華山, 1063m) 중허리에 자리 잡은 한실에 신자 집이 서너 집씩 무리 지어 산재해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 신자들의 영향으로 그의 집안이 천주교를 믿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 칼래 신부는 그의 출중한 신앙심과 죽음을 무릅쓰고 신부를 자신의 집에 은신시킨 용기에 대해 치하하고 있다.
칼래 신부의 기록(1867년 2월 13일자 서한)에 있듯이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박상근 마티아는 3월 중순경 좁쌀을 사기 위해 매형과 함께 한실(현 문경시 마성면 성내리) 교우촌에 갔다. 그곳에는 칼래 신부가 숨어 있었는데, 교우들은 한실보다는 문경 읍내에 숨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고, 이에 박 마티아와 매형은 죽음을 무릅쓰고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셨다.
그러나 이내 마을 사람에게 발각되어 3일 만에 새벽을 틈타 새로운 은신처를 찾기 위해 다시 한실로 가야 했다. 둘은 허기와 갈증으로 고생하면서 험한 산길을 걸었고, 한실 교우촌이 보이는 산에 오르자 칼래 신부는 박 마티아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여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자 박 마티아는 울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신부님 곁을 떠나다니요. 혹시 한실이 습격을 당했다면 신부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렵니까? 은신하실 곳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신부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기꺼이 따라서 죽겠습니다.”
결국 칼래 신부의 명에 순명하여 미어지는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 박상근 마티아는 병인년 12월 숙모 홍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었다. 박 마티아는 평소 친분을 가졌던 문경 현감의 간곡한 배교 권유를 단호하게 물리치고 상주로 끌려갔다. 그는 상주 옥에 갇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고, 문경 인근에서 잡혀온 교우들을 권면하며 순교의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결국 그는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 관장의 명에 따라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순교 후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가 고향에 안장하였다.
박상근 마티아의 묘는 1983년 초 안동교구 김욱태 레오 신부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마원리 박씨 문중 산에 대대로 내려오는 묘가 있었는데 여러 정황과 증인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이 묘가 “치명 일기”에서 말하던 순교자 박 마티아의 묘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래서 1985년 9월 15일 현재의 위치에 조성한 새 무덤으로 이장하였다.
안동 교구는 마원에 순교 성지를 조성키로 결의하고 유해를 모신 데 이어 다각적인 성지 개발 계획을 활발하게 추진하는 한편 순교자의 뜻을 기리기 위한 현양 대회를 꾸준히 실시하였다. 1995년 초 문경지구 사목협의회는 성지 개발을 위해 주차장 부지를 매입하고 진입로를 새로 개설하였다. 아울러 경상북도의 사도인 칼래 신부와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의 장한 믿음과 숭고한 우정을 상징하는 동상과 대형 십자가(부활하신 예수상), 십자가의 길, 성모상 등을 세우고 1996년 10월 3일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박상근 마티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1월 19일)]
복자 박상근 마티아(1837-1867년)
박상근 마티아는 경상도 문경에서 아전(하급 관리)을 지낸 사람으로, 중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교리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지키면서 생활하였다. 또 관청에 있었으므로 신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박 마티아는 평소에 숙모인 홍 마리아와 친척들은 물론, 이웃 사람들에게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그뿐만 아니라, 비신자 어린이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으면, 언제든지 그곳으로 달려가서 대세를 주곤 하였다. 이후 그는, 칼래(N. Calais, 姜) 신부에게 성사를 받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박 마티아는 그해 3월 중순경에 좁쌀을 사려고 칼래 신부가 숨어 있던 한실(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성내리)에 갔다가 칼래 신부를 문경읍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모셔 와서 숨겨 주었다.
3일 뒤 박 마티아는 칼래 신부와 둘이서 새로운 은신처를 찾으려고 다시 한실로 갔다. 이때 칼래 신부는 한실 교우촌이 보이는 산에 오르면서 박 마티아에게 집으로 되돌아가도록 하였다. 그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박 마티아는 울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신부님 곁을 떠나다니요. 혹시 한실이 습격을 당했다면 신부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렵니까? 은신하실 곳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신부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기꺼이 따라서 죽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칼래 신부의 명에 순종하여, 그와 이별하고 집으로 되돌아와 있던 박 마티아는, 얼마 뒤에 숙모 홍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갔다. 이윽고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그는 “천주교를 봉행한다.”고 명백하게 신앙을 증언하였으며, 어떠한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때 상주 옥에는 문경 인근에서 끌려온 교우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 박 마티아는 형벌을 받고 옥으로 돌아오면 함께 있는 교우들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자.’고 권면하였고, 많은 교우들이 그러한 모습에 용기를 얻어 순교에 이르렀다. 박상근 마티아는 마침내 관장의 명에 따라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순교하기 직전에 박상근 마티아는 성호를 긋고는 예수 마리아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순교한 다음, 가족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가 고향에 안장하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박상근 마티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칼레(Alphonse Calais, 姜, 1833-1884년) 신부
경북의 사도 칼레 강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1860년 7월 5일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4월 7일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 1866년까지 5년 동안 경상도의 서부지역에서 전교활동을 벌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여러 차례 위험을 넘기고 산속에 피신해 있다가 그해 10월 페롱(Feron, 權) 신부와 함께 한국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피신하였고, 이듬해부터 여러 번 한국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병인박해 때 얻은 병이 악화되어 부득이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1869년 4월 시토회 수도자가 되어 모벡(Maubec) 수도원에서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일생을 마쳤다. 그 당시 전교하면서 쓴 선교 체험기 중에서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와의 우정을 아래에 소개한다.
“한실 윗산까지 가려면 이제 20리 정도 남은 것 같소. 나 혼자서도 거기까지 갈 수 있을 것이오. 마티아는 너무 지쳤으니 이 근처 마을로 내려가 먹을 것을 얻도록 하시오.” “아니, 신부님! 어떻게 신부님도 잘 모르시는 이 산속에 신부님만 혼자 가시도록 둘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한실도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 폐허가 되었다면 신부님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신부님이 가시는 곳이면 저도 가겠습니다. 신부님이 이 깊은 산속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같이 죽겠습니다.”라고 마티아는 대답하였다.
이처럼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게 되자, 지쳐 쓰러질 지경에 이른 마티아를 더 이상 고생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강 신부님은 본마음과는 달리 준엄한 명령조로 마티아에게 말했다. “마티아, 나는 당신에게 명령합니다. 당신이 가져온 마른 과일의 반은 당신이 가져가고 나머지 반은 내게 넘겨주시오. 그리고 내 말에 복종하시오!” 이 말을 듣자 마티아는 통곡하면서 강 신부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강 신부님도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서로 굳은 악수를 나눈 뒤 두 사람은 서로 헤어졌다. 강 신부는 산길을 계속 갔지만, 마티아는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강 신부를 울며 바라보고 있었다.” [출처 : 안동교구 홈페이지]